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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2 - 로마군 켈트족의 브리타니아를 2차례에 걸쳐 침략해 정복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제4권에 보면 갈리아 트란살피나의 로마 총독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을 쳐부수고 북부 갈리아인(켈트족) 들을 BC 57년에 사비스전투에서 제압한후
브리튼인들이 바다를 건너 갈리아인들과 연합할 것에 대비해.... BC 55년 영국에 침략해
인질을 잡아 회군하니... 윈스턴 처칠은 "대영제국의 역사는 이때 시작" 되었다고 말합니다.
갈리아 전쟁 5년째인 BC 54년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났으니 로마군은 800척의 배에
타고는 영국에 무사히 상륙한후 모든 배는 밧줄로 연결하여 모래밭에 끌어올려 두고는
배를 지키도록 10개 대대 6천명 보병과 300명 기병대를 남겨둔 다음 내륙으로 진군합니다.
18킬로미터쯤 들어가서 브리타니아 대군과 마주쳤으니 울창한 숲이 배후를 지켜주는 강가에서 마주한
적에 대해 제7군단은 공격으로 나가 적을 패주시켰는데...... 지형을 모르는지라 숙영한후 다음날
아침 아트리우스가 보낸 전령은 폭풍우로 아군 배가 손상이 심하다는 전갈에 그만 후퇴하기로 합니다.
북해는 지중해와는 달리 여름철에도 자주 폭풍우가 몰려오며 거친데다가 조류가 빠르니 상상
할수 없는 비가 쏟아지는 험한 기후라 40척은 완전히 파손되어버렸으며, 나머지도 수리
를 요하는 상태라..... 수선에 들어가면서 육지에 배들을 모두 보존할 큰 진영을 만들게 합니다.
카이사르는 영국인들의 생활풍습에 대해 기술하니 “브리타니아 내륙에는 원주민이 살고 해안 지방에는
약탈을 위해 벨기에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정착해 농경에 종사하니 고향 이름을 사용하며.... 인구는
많고 가축의 수는 더 많으며 화폐는 동화와 금화, 쇠막대를 사용하며 주석에다가 소량의 철도 생산된다.”
“구리는 수입하며 너도밤나무와 전나무를 제외하면 숲은 갈리아와 같으며 토끼와 닭에 거위를 먹으면
죄가 되니 애완동물로 사육하며, 기후는 갈리아(벨기에) 보다 춥지는 않으며 섬의지형은 세모꼴이고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맨이라고 부르는 섬이 있으며... 물시계로 측정해 보니 밤은 대륙 보다는 짧다“
“ 주민 중에 가장 인간적(문명인)인건 칸티움(켈트) 으로 풍속은 갈리아와 다를바 없으며 내륙에
사는 사람들은 밀은 경작하지 않고 우유와 고기를 먹으며 옷이라고는 모피를 걸칠 뿐인데
푸른색 물감으로 몸을 물들이며 장발이나 머리와 코털을 빼곤 깍으며..... 남자들은 10명의
아내를 공유하니 부자나 형제가 공유하므로 여자가 처녀를 바친 남자를 아이의 아버지로 여긴다.
그런데 브리타니아인들은 영리하게도 로마군의 주특기인 평원에서 진을 치고 대결하는 회전은 피하고
"게릴라전" 으로 돌입했으니..... 높은 산은 없지만 숲과 늪과 강으로 뒤덮인 자연환경에서 최선의
전술인데 진영을 세우다가, 식량을 구하러(약탈) 나갔다가 숲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적에게 시달립니다.
갑옷에 창과 칼, 방패로 중무장한 로마군은 움직임이 둔하니 온몸을 푸른색으로 칠하고 날쌔게 움직이는
반 나체의 브리타니아군에게 시달리는데, 하지만 정보 수집과 판단에 일가견을 가진 카이사르는 적은
여러 부족의 연합체이니 기병대를 앞세우지 않고 기병과 보병이 한덩어리가 되어 대군으로 전진합니다.
적이 습격해 오면 확실히 제압하고 진군하는데 브리타니아군의 전차부대를 보병과 기병이 연합해 격파
한후, 적 부족간의 결속이 약해진 틈을 타서 타메시스(템즈강) 북쪽에 총대장 카시벨라우누스의
영토로 진격해 오늘날 런던 쯤에서 도하하는데 강 건너에는 말뚝이 박히고 대군이 방어하는 중입니다.
목까지 물에 잠기긴 했지만 로마군은 기병을 먼저 건너게 하고는 보병이 뒤따르는데 밀집
형태로 건너게 했으니 적군은 강변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났고..... 카시벨리우누스는 단
4천명으로 진지를 구축한후 나머지 병사들은 숲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에 돌입하게 합니다.
로마군에게 격퇴되었고 켄트의 부족장이 로마군 후방의 선박을 공격했지만 실패하자, 카시벨리우누스
는 패주했고 사기가 떨어지니 브리타니아의 다른 부족장들은 다시 카이사를 찾아오자 인질과
군량을 제공하게 하며 카시벨리우누스의 항복도 받아들여 인질과 연공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를 합니다.
이렇게 관대한 조건으로 강화하고 철수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는 갈리아(프랑스)의 현재 상황을
감시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에서 겨울을 날수는 없다, 둘째 전투에 적합한
계절이 끝나가고 있고 겨울이 다가오므로..... 더 이상 원정을 계속하기는 어렵다고 본것 입니다.
라인강 도하는 도버해협 보다눈 훨씬 쉽지만 게르만인들의 갈리아 침략을 저지하는게
목적이었고 한낮에도 컴컴한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지라 로마화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지만.... 켄트는 갈리아와 교류하고 있으니 장차 브리타니아는
로마화할수 있다고 보고 정찰 정도는 했으니 후세에 정복이 가능하다고 본 것 입니다.
기원전 카이사르가 2차에 걸쳐 브리타니아(영국) 를 침공한 후 백년이 지난 기원후 43년
" 클라우디우스 황제" 가 브리튼을 다시 침공해 카라타쿠스를 굴복시키고 로마로
개선했으며 이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재정복으로 지금의 웨일스 지역까지 정복했습니다.
그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에 이르러서는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한 두 겹의 방벽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후 약 400년가량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두겹 방벽이 침략으로 무너지고 로마 제국의 분열까지 겹쳐 철수하면서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로마의 브리튼 정복은 영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영미권의 많은 성씨와
지명은 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니.... 이 문화를 로마노-브리튼 문화라고
부르며 또한 이 시기 들어온 라틴어 어휘가 웨일스어와 콘월어에 남아 있습니다.
기원전 55년과 54년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으로 로마 제국의 화폐가 통용되었고 로마 제국
과 브리튼 간의 교류도 활발해졌으며..... 또한 브리튼 여성들은 빼어난 외모로 로마 제국의
남자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많은 브리튼 여성들이 로마의 남자들에게 시집을 가기도 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를 계승하겠다고 말했으니 법이라고 했는데, 유대인
들은 법에 인간을 맞추지만..... 롬인들은 인간에게 법을 맞추는 존재이니 좀 융통성이
있고 실용적이라는 말이니 그는 로마의 방위선을 엘베강까지 확대하는 것을 백지화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더 이상의 영토확장을 금지한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을 어기고
브리타니아 정복을 결행하는데...... 전임 황제 칼리굴라는 도버해협에 대군을 집결
시켰다가 브리튼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회군했었는데 그건 아마도 재정파탄 때문으로 보입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제위에 오른지 2년만에 원정을 감행하니 칼리굴라의 재정대책이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
에 여유가 생긴 것으로 추측하는데... 1년 전인 기원후 42년에 브리타니아의 강력한 왕인 카물로두눔
(콜체스터) 의 크노벨리누스가 죽었으니 동생과 아들들 사이에 왕위 쟁탈 내전이 일어났기 때문 입니다.
군대를 모르는 황제가 임명한 원정군 사령관은 판노니아 총독이던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로 4개
군단 2만 4천명에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인 보조병을 합쳐 4만명이었는데..... 카이사르가
갈리아(프랑스) 정복을 위해 동원한 군대는 10개 군단 6만명이었으니 3분지 2정도가 되었습니다.
서기 43년에 브리타니아를 침공하는데 카이사르는 대군을 투입해 병력을 집중했으니 갈리아 정복은
8년만에 끝났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차근 차근 전진했으니 20년이 걸리는데..... 도나우전선
에서 1개 군단을 빼내 오느라 도나우는 불과 6개 군단으로 지켜야 하는 모험을 한 것이기도 합니다.
라인강 전선의 8개 군단중 3개 군단을 빼내 오느라 부족해진 방어력을 위해서는 새로 2개 군단
을 편성해서 메웠으니 여기도 6개군단으로 수비해야 하는지라 역시 모험이었으니, 그렇다고
보면 브리타니아를 침공한 4개군단은 로마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이라고 보겠습니다.
로마 전체로 본다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25개 군단에서 새로 2개 군단을 더 편성했으니 모두
27개 군단을 거느리게 된 셈인데.... 플라우티우스가 이끄는 4만군은 서기 43년에 도버해협
을 건너 브리타니아에 상륙했고 가장 막강한 부족인 카물로두눔(콜체스터) 을 향해 진격합니다.
첫번째 전투는 템즈강 남쪽에서 벌어져 로마군이 승리하고 황제를 기다리는데 클라우디우스
는 로마를 떠나 마르세유에 상륙한 후에 고향 리옹을 거쳐 프랑스 서북부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 템즈강에 도착하자, 크노벨리누스의 두 아들 가운데
하나는 템즈강 전투에서 죽었고..... 다른 아들은 웨일즈로 달아났으니 전투없이 진군합니다.
카물로두눔에 입성해 11명의 부족 왕들로부터 항복을 받은후 속주화 방침을 결정하니 만기제대한 병사들
(군복무 25년간은 원칙적으로 결혼 금지) 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원주민 도시에는 지방
자치권을 주며 이 핵과 로마식 도로망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만드는게 로마식 속주 통치의 기본입니다.
로마로 돌아간 클라우디우스 4대 황제는 원로원의 허락 하에 개선식을 거행하는데
네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몰아야 했으니 원로원은 3살 짜리 황제의 아들
에게는 브리타니아를 제패했다는 뜻인...... “브리타니쿠스” 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플라우티우스는 다시 정복 사업을 계속하는데 휘하에는 훗날 황제가 되는 베스파시아누스도 있었으니
에식스를 떠나 북쪽 노퍽으로 진군했으며,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켄터베리-런던-바스를 잇는 선에서
공격을 개시하니 아콰이 솔리스라는 이름의 바스에서 온천을 발견한 로마군의 사기는 엄청 높아집니다!
4년후인 서기 47년 아울르수 플라우티우스가 총사령관을 후임에게 물려주고 로마로 돌아오자 원로원은
사실상의 정복자에게 약식 개선식을 허락했으며, 영국에서 로마군은 웨일즈지방으로 진격했고......
앵글시섬의 드루이드교 사제들은 큰 타격을 입고 다음황제 네로 시대에는 아일랜드로 도주하게 됩니다.
완전히 정복된것 같았던 브리타니아인들은 로마 제국의 잔인한 통치에 분노해 부디카를 여왕으로 모시고
반란을 일으켜 잉글랜드의 반 이상을 차지한 적도 있었지만 일시적인 반란에 그쳤으니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튼 섬의 남동부(잉글랜드) 를 모두 점령하고는...... 자신의 점령지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습니다.
클라우디우스의 침공으로 도시와 도로등 기반 시설이 갖추어졌으니 황제는 해군 보급 기지를
세운후 로마인이 이주하면서 세워진 도시 중에 가장 번성한 도시가 런던(론디니움)
(Londonium) 인데 윈체스터, 맨체스터, 울체스터 등의 이름에 체스터(chester) 가 들어가는
지명은 라틴어로 요새를 뜻하는 카스트룸 (castrum) 이 어원으로 로마군의 전진 기지 였습니다.
런던과 군사기지를 이어주던 길은 웰링턴 거리가 되었으며 로마 제대군인이 건설한 콜로이, 무니키비움
, 브리튼 부족들을 집결시켜 만든 칸톤과 수도 키비타스가 있었는데.... 이 도시들의 외관은
전형적인 로마 도시들 같은 모습이었으며 정복후 브리튼인들에게도 로마에 납세 의무가 부과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브리튼인들은 로마 도시에 거주하지 않았고 갈리아나 히스파니아와는 다르게
일부 식민 도시들을 둘러싸고 켈트 문화를 유지한 채 자치 독립을 공인받은 부족
들의 부락이나 마을에서 거주하는 농민들이 훨씬 많았는데 로마화가 이루어진
동남부 지방에서는 앞의 두 속주들과 같이 농민들이 로마식 빌라에 귀속 되었습니다.
빌라는 부자들의 단독 주택으로 광활한 부지를 갖고 있었으니 목욕탕, 마사지소, 연회장과 같은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넓은 토지에서 일하는 소작농들과 이집트, 중동,
소아시아, 동유럽, 게르마니아 등지에서 온 노예들이 주변을 둘러싸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49년에는 콜체스터(카물로두눔)에 콜로니아(colonia)를 건설했는데 복무를 마친 군인들을
전략적 요지에 배치한 일종의 예비군 주둔지로 쓰였고 로마의 도시 생활을 브리튼인
들에게 전파하는 역할도 했으며 웨일스 정복은 78년에 완수되었으나 이후에도
칼레도니아 (스코틀랜드) 의 로우랜드 (저지대) 와 하이랜 드(고지대) 를 공략 했습니다.
하이랜드의 픽트족을 제압하기는 했지만 끊임없는 반항으로 인해 상당한 인력 손실을
겪었으니 로마군의 브리튼 섬 북부에 경계선을 마련하려는 몇번에 걸친 시도 끝에
마침내 122년에 솔웨이 만과 타인강 사이의 지협이 경계선으로 선택되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돌로 된 길이 120km의 성벽을 쌓았으니 하드리아누스 성벽입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만들어지고 나서도 칼레도니아를 점령하려는 뜻을 굽히지 않았던
로마는 북진해 142년 포스 만에서 클라이드 만에 이르는 길이 63km 의
안토니우스 성벽을 구축했지만 얼마 안가 다시 하드리아누스 성벽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로마의 정복으로 로마 문명이 서서히 브리튼 섬에 전파되었으니 도시가 세워지고 황제 숭배의식이 행해
졌고 상인들도 진출했는데 1세기 후반 이래 로마인들이 칼레도니아 지방으로 진출함에 따라 남부
지방에서는 군대가 떠나고 토착민들로 구성된 행정 구역인 키비타스가 지방 행정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로마화 현상은 도시의 상층 계급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니 농촌 지역에서는 브리튼어가 계속 사용
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라틴어와 브리튼어를 사용했으니 수공업 장인들까지도 라틴 문자를
썼으나 동남부를 제외하면 독립 부족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으니 3개 군단을 주둔시켜야 했습니다.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브리튼섬 남부가 정복된후 로마 제국에는 300년간의 평화가 이어지고
브리튼인들도 로마가 평화적으로 정복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로만
브리튼의 행정관인 타키투스 황제의 장인 아그리콜라는 브리튼인들의 토착신앙을
탄압하지 않은채 기독교를 전파했고....... 로마 병사와 브리튼 여성 간의 결혼도 장려합니다.
세베루스 황제는 칼레도니아와 아일랜드 지역 까지 정복해 로만 브리튼을 4개의 속주로
개편할 예정이었으나 계획이 실패하니 로만 브리튼의 속주는 중앙부의 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와 남부인 런던, 도버, 바스의 브리타니아 수페리오르 두 개만 설치하게 됩니다.
그 외에 발렌티아 (Valentia) 는 하드리아누스 방벽 너머 스코틀랜드 남부 지역에 위치해 야만족의
침입이 잦았으며 브리타니아 세쿤다 (Britannia Secunda) 는 웨일스 지역의 속주였고
막시마 카이사리엔시스 (Maxima Caesariensis) 는 잉글랜드 북부 요크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칼레도니아 속주 (Caledonia) 는 스코틀랜드 일대로 남부를 넘어 칼레도니아 전역을 정복하기
위해 도미티아누스 황제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까지 여러 황제가 나섰으나
픽트 족의 강한 저항과 산악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로마 군대의 특성 탓에 실패로 돌아갑니다.
히베르니아 속주 (Hibernia)는 아일랜드 일대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칼레도니아
와 같이 정복하려고 했으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실패했는데
로만 브리튼(브리타니아 속주)에는 총 5명의 관리가 각각 5개의 지역을 관할했습니다.
브리튼(영국)에 주둔한 로마군 총사령관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황제일 것입니다. 3세기말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영토가 너무 광대하다 보니
이민족의 침략에 적절히 대항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는 "로마를 4개" 로 나눕니다.
그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것이 갈리아(프랑스 및 벨기에)와 브리타니아(영국) 그리고
히스파니아(스페인) 인데 그 수도는 독일 서부에 "트리어 Trier" 였는데
색슨족, 프랑크족과 알라마니족 등 게르만족들과 라인강을 두고 맞서고 있었습니다.
서기 293년 5월 1일 동로마 정제(아우구스투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이고 부제(카이사르) 는
갈레리우스 서로마 정제는 밀라노의 막시미아누스 였으며 서로마 부제 콘스탄티우스로
게르만족만 방어한게 아니라 바다건너 3개 군단이 배치된 브리타니아로 가서 스코틀랜드
로 부터 남하하는 야만족 침입에도 대비하고 히스파니아(스페인) 까지 관할 하에 두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젊었던 장교시절에 소아시아의 선술집 딸 헬레나와 결혼해 콘스탄티누스
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로마 황제(부제, 카이사르) 가 되면서 출신이 천한 부인을
버리고 황녀 테오도라와 결혼하니 콘스탄티누스 모자는 동방으로 쫃겨나 있었습니다.
305년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하니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정제로 승격하자 터키 니코메디아
에 있던 아들을 데려와 브리타니아 전선을 함께 누비다가 1년 남짓 지난 다음해인 306년 7월
25일에 콘스탄티우스가 병사하니 병사들은 31세에 불과한 "콘스탄티누스를 황제(정제)" 로 추대합니다.
동로마 정제 갈레리우스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서로마 부제 세베루스를 정제로 올리고 콘스탄티누스는
부제로 타협책을 제시했는데, 서로마 정제였던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동반 퇴진
하기는 했으나 나이가 젊었기에 황제 자리를 노리니.... 그 아들 막센티우스도 로마에서 황제를 칭합니다.
졸지에 로마 제국에 황제가 6명이나 난립하게 되었던 것이니.... 서로마 정제 세베루스는 막센티우스
를 진압하기 위해 수도 밀라노에서 로마로 진군하자 전 황제였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는 아들
을 대신해 로마의 병사를 이끌고는 세베루스를 요격해 포로로 잡아 살해하니 307년 2월의 일입니다.
그러자 동로마 정제 갈레리우스가 이 사태를 진압하고자 군대를 몰고 이탈리아로 진격하는데 원거리
라 병참 부족으로 고전하자.... 은퇴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그리고
동로마 정제 갈레리우스는 회담한후 리키니우스를 서로마 정제로 올리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합니다.
이에 황제가 되지 못해 불만을 품은 아들 막센티우스와 다투어 틀어진 막시미아누스는 310년에 딸인
파우스타를 데리고 트리어까지 찾아와 콘스탄티누스 를 만나서는 딸을 콘스탄티누스와 결혼시켜
장인이 되었는데 게르만족이 트리어로 쳐들어오자 막시미아누스는 쿠데타를 시도하다 잡혀죽습니다.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죽으니 서방 정제 리키니우스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지라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정제에 오르고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로마의 막센티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켜 로마를
점령후 동방정제 리키니우스를 격파하고 단독 황제가 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니 대제라 불립니다.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서기 122년 동쪽 뉴카슬에서 서쪽 칼라일 Carlisle 까지 117km 의 장벽
을 쌓았으니 하드리아누스 장벽 Hadriam's Wall 인데, 3세기후 로마 제국은 큰 위기를
맞게 되어 영국 주둔 로마 군단 주력이 철수하자 스코트족과 픽트족이 장벽을 넘어오기 시작합니다.
하드리안 장벽을 소재로 한 영화가 “킹 아더” 와 “센츄리안” 및 The Eagle 등 3편이 있는데
센츄리온 Centurion 은 ”백인대장“ 이라는 뜻으로픽트족의 습격을 받아 장벽의
초소가 무너지자 후방으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여 제9군단 이 출정하는데,
픽트족 여인 기네비어의 계략 에 말려들어 계곡에서 포위되어 전멸하는 참패를 겪게 됩니다.
하드리안 장벽 은 서기 36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남하한 픽트족에게 대거 파괴되고... 로마군도
유럽에서 훈족과 게르만족의 침입에다가 로마주둔군 사령관도 황제를 칭하면서 갈리아로
진군하니 내전이 벌어지고 로마군이 철수한 브리튼은 게르만 앵글로 색슨족에게 점령 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