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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바가바드 기타는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친구로 나타나
깨닫게 하는 경전이다.
아르주나의 중심에는, 모두의 중심에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절대이며,
마음과 감각들로는 닿을 수 없으며,
움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의 바탕이며,
프라크리티 너머에 있는 자신을 알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실재는, 진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있다.
세상은, 물질은, 프라크리티는, 구나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크리슈나는 누구인가?
신은 인간 세상의 움직임 모두를 관장하신다.
새가 날고, 꽃이 피고, 해가 뜨고, 하품을 하고, 눈을 깜박이는 등
세상의 모든 움직임들은
그분의 힘 아래에 있다.
세상의 주인인 신을 만나기는 너무나 어렵다.
사원을 지어 드려도
대를 이어가며 숭배해도 그분의 모습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파파지께서는 아르주나처럼 크리슈나를 만나는 행운을 가졌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위대한 스승 라마나가 계시는 티루반나말라이에서
스승의 가르침으로 왔다갔다하는 신 너머로 마침내 가게 되었다.
그래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렀다.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에게 물었다.
"현현의 당신을 그리고 비현현의 당신을 숭배하는 자들 중 누가 더 낫습니까?"
"비현현의 나를 숭배하는 헌신자들은 어려움들이 너무 많고 느림으로
현현의 나를 숭배하는 헌신자가 최고의 요기이다.“라고 답한다.
그렇다고 현현의 숭배자가 바로 진리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진리는 감각들, 마음 너머에 있습니다.
바로 가기 어렵다는 말이다.
인도 영성에서
신들 너머에 있는 위대한 영혼들을 그대는 접할 것이다.
그분들이 불멸자, 절대자라는 것을 그대는 느낄 것이다.
그대가 영성 전체를 이해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어쩌면 이 바가바드 기타를 통해서...
행운이 있기를.........
차례
샹카라의 삶(788-820 A. D.)
옮긴이의 제6개정판의 글
제1장 아르주나가 슬퍼하다
제2장 지식의 길
제3장 행위의 길
제4장 지식의 길의 계보
제5장 행위의 포기(산야사, 세상의 포기, 수도자)의 길
제6장 명상의 길
제7장 신the Lord에 대한 지식
제8장 신Brahman에게로 가는 길
제9장 최고의 지식과 비밀
제10장 신성한 현현(영광)들
제11장 우주적 모습
제12장 헌신(박티)
제13장 들과 들을 아는 자
제14장 세 구나들의 구분
제15장 지고한 영
제16장 영적 성향과 물질적 성향
제17장 세 유형의 믿음
제18장 포기와 자유
책 속으로
제12장
헌신(박티)
현현의 신(나타난 신, 이슈바라, 사구나의 신)의 숭배자와 비현현의 신(나타나지 않은 신, 니르구나의 신, 악샤라, 브람만, 불멸자, 절대자, 유일자, 광활한 빛의 하늘)의 숭배자들 중 누가 요가에 더 좋은가?
이제 아르주나는 신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된다.
제2장에서 시작하여 제10장까지 신의 현현들에 대해 다루는 가르침들에서, 당신은 어떠한 조건들도 없는 지고의 나, 불멸의 신을 숭배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또한 모든 진화의 과정을 수행하고 모든 것을 아는 힘을 가진 에너지(삿트바)의 조건들과 결합된 우주의 신으로서의 당신 자신을 숭배하라고 여기저기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우주적인 모습을 다룬 제11장에서, 당신은 온 우주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신으로서의 당신의 근원적인 모습을 보여준 뒤 그것을 숭배하라고 하였다.
그 모습을 보여 준 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만 일하라고 간곡히 타일렀다(제11장 55절).
그러므로 아르주나는 이 두 가지 방법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 지 알고 싶어 질문한다.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1. 어떤 이들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현현의 당신(사구나, 신, 쉬바, 크리슈나, 라마 등과 같은 눈에 보이는 인간 모습의 신)을 숭배합니다. 다른 이들은 비현현의 당신(불멸의 신)을 숭배합니다. 당신의 견해로는, 누가 더 낫습니까?
‘한결같은’은 확고한 마음으로 중단 없이 신을 위해 일하고 앞에서 가르친 여러 것들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헌신자들은 다른 누구에게서도 안식처를 찾지 않고, 앞서 나타난 우주적인 모습으로 있는 당신에 대해 명상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욕망들을 버리고 모든 행위들을 포기한 채, 불멸의 신에 대해 명상한다.
그 신은,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조건들도 없으므로 나타남이 없는 즉 감각들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감각들에 보일 수 있는 것을, ‘비약타’ 라는 단어의 어원이 암시하듯이, 나타난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이 불멸은 나타남이 없다.
후자의 사람들은, 다음에 열거되는 여러 특성들에 의해 규정되는, 사라질 수 없는, 나타나지 않는 존재를 명상한다.
두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누가 요가에 더 정통한가?
현현의 신의 숭배자들
신은 말한다.
바르게 보고 욕망들을 포기했으며 불멸(악샤라)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놓아두어라.
그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축복받은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 한결같은 믿음으로 (이 신체적 모습의) 나를 숭배하는 헌신자들은 항상 나에게 잠겨 있으며, 나에게 봉사한다. 나의 견해로는 그가 최고의 요기이다.
그러한 헌신자 즉 박타들은 우주적인 모습으로 있는 지고의 신인 나에게 그들의 마음을 고정시키고, 모든 요가 구루들을 주재하는 신으로서 나를 숭배한다.
주재하는 신인 나는 전지하며, 나의 비전에는 애착과 여러 나쁜 열망들의 침침함이 없다.
앞 장의 마지막 절에서 열거한 방식대로 언제나 나를 확고하게 묵상하며 지고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헌신자들은 내 생각에 최고의 요기들이다.
정말로 그들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나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최고의 요기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
악샤라(비현현의 신, 불멸의 신)의 신의 숭배자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최고의 요기들이 아닙니까?
잠시 멈추고, 그들에 관해 내가 하는 말들을 들어 보라.
3-4. 그러나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파괴될 수 없고, 나타나지 않으며, 생각할 수 없으며, 움직이지 않으며, 변함없으며,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는 불멸의 실재를 숭배하는 이들 또한 나에 이를 것이다.
불멸의 존재인 악샤라는 나타남이 없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정의될 수 없다.
그는 나타남이 없으며, 어떠한 지식의 기관들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항상 불멸의 존재를 명상한다.
명상은 명상의 대상을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명상함으로써 다가가며, 흘러내리는 기름 줄기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일한 생각의 흐름 속에 오랫동안 꾸준히 머무르는 것이다.
명상의 대상인 불멸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로 묘사된다.
그는 어디에나 편재해 있으며, 공간처럼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다.
그는 나타남이 없기 때문에 그를 생각할 수가 없다.
감각들에 보이는 것들은 무엇이나 마음에 의해서도 생각될 수 있지만, 불멸의 존재는 감각들에 보이지 않으므로 생각될 수도 없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쿠타스타).
‘쿠타’는 겉보기에는 다 좋지만 속은 나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여기에서 무지와 여러 것들을 포함한 세상의 씨앗을 가리키며, 그것의 속은 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스베타스바타르 우파니샤드(제4장 10절)와 기타(제7장 14절)에서 보듯이 마야, 분별되지 않은 등 다양한 용어들로 불린다.
‘쿠타스타’는 마야의 목격자로서, 마야의 신으로서 마야 안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혹은, ‘쿠타스타’는 산더미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불변하며 영원하다.
불멸의 존재에 대해 명상하고 모든 감각들을 억제하며, 좋아하는 것을 만나든지 싫어하는 것을 만나든지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나 자신에게 온다.
실은 그들이 나에게 온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현자는 바로 나의 나(아트만)로 여겨진다.”(제7장 18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최고의 요기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신 자신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불멸의 실재에게 마음을 고정시키고자 하는 헌신자들은 어려움들을 더 많이 만나고, 그들의 향상이 느릴 것이다. 왜냐하면 신체를 입은 영혼들이 불멸의 실재를 숭배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일을 하는 데 전념하는 등의 사람들의 어려움은 정말로 크다.
그러나 그들 자신을 불멸과 동일시하며 지고의 실재를 명상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훨씬 더 크다.
그 어려움은 몸에 대한 애착을 포기해야만 하는 필요성 때문에 생긴다.
몸을 가진 사람들, 몸에 애착하는 사람들이 목적지인 불멸에 이르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므로 그들의 어려움은 더 크다.
현현의 신의 숭배에 의한 구원
나중에, 우리는 불멸의 숭배자들의 삶의 행위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6. 모든 행위들을 현현의 나에게 바치고, 흔들림 없는 헌신으로 나만을 그들의 가장 간절한 기쁨으로 숭배하는 자들에게 나는 곧 간다.
7. 왜냐하면 그들은 나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고, 그들은 내가 보증하는 사람들이기에, 오, 프리타의 아들아, 나는 죽음이 있는 삼사라의 모든 파도들로부터 그들을 재빨리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主) 이슈바라를 가리킨다.
‘전적인’이란 우주적인 모습의 신인 나 자신 외에는 다른 어떤 숭배의 대상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헌신’은 사마디 즉 마음의 확고부동함을 말한다.
오로지 신인 나만을 전적으로 명상하는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바다에서 들어 올려질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우주적인 모습의 나에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삼사라)은 바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로질러 건너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 그대의 마음을 현현의 나에게 고정시켜라. 그대의 지성을 나에게 고정시켜라. 그러면 그대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항상 내 안에 살 것이다.
우주적인 모습의 신인 나에게 그대의 마음을, 그대의 목적과 생각들을 고정시켜라.
결심하고 결정하는 그대의 지성 또한 나에게 고정시켜라.
저자 및 옮긴이 소개
저자 : 샹카라(788~820 A.D.)
샹카라는 서기 788년 인도 남부 케랄라에 있는 작은 마을 칼라디에서 아버지 쉬바구루와 어머니 아리얌바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들은 매우 가난하였으며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까이 있는 바닥쿤나탄 사원으로 가서 쉬바에게 아이를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쉬바가 꿈에 나타나 그들에게 말하였다. 쉬바는 그들에게 수명은 짧지만 영리한 철학자가 될 아이를 원하는지 아니면 평범한 아이를 원하는지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부부는 전자를 선택하였으며, 그래서 아름다운 계절인 봄에 샹카라가 태어났다.
쉬바구루는 샹카라가 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경전들을 공부하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특이한 재능을 보였다.
샹카라의 어머니는 아들이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그가 세상을 포기하고 고행자가 되겠다고 확고한 결의를 보이자 매우 당황하였다. 그러나 샹카라는 기이한 사건을 통해 어머니의 굴레를 벗어나 방랑하는 수행자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칼라디를 떠난 젊은 산야신은 남인도를 방랑한 뒤 히말라야에 이르렀다. 그는 바드리 나트에 있는 바드리카 아쉬람에서 자신의 구루가 될 스와미 고빈다파다를 만나 그의 발에 엎드렸다. 고빈다파다는 위대한 가우다파다의 뛰어난 제자였다. 그는 이 소년을 산야신으로 입문시키고 산야신의 옷을 주고는, 자신의 구루인 가우다파다로부터 배운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샹카라는 구루의 명령에 따라 카시로 간 뒤 그곳에서 브람마 수트라, 우파니샤드들과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너무나 유명한 주석서들을 썼다. 그리고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카시의 베단타 철학의 거두가 되었다. 그는 많은 논쟁에서 이겼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곧 인도의 영적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샹카라는 또한 많은 박티의 시들을 지었다.
옮긴이 : 김병채(크리슈나다스) (1948. 2. 23 - )
뭄바이 근처에 있는 알란디에서 바가바드 기타를 처음 접하였다.
게스트 하우스 안내원이
나를 지하실 서고로 안내하더니 갸네쉬바리 기타를 보여주었다.
갸네쉬바라는 그 지방의 시인이자 성자였다.
그 성자가 바가바드 기타 주석서를 썼는데 그 책이 갸네쉬바리 기타다.
녹음이 짙은 오쇼 아쉬람에서 그분은 청중들에게
“그대는 순수한 금입니다. 그대는 순수한 금입니다.
그대는 붓다입니다. 그대는 붓다입니다.”라는 지혜의 말을 전해주셨다.
보통의 인간으로 지내고 있는 나에게 그 말씀은 엄청난 선물이었다.
내가 붓다라니........어쩌면.......
산타크루즈 요가 연구소에서 성자 요겐드라지를 만나 질문을 하였다.
“마음이 무엇입니까?”
“마음은 없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휘청이게 하는 천둥이었다.
비파사나 아카데미에서 명상을 하다가 내면에 있는 빛의 바다로 들어갔다.
마음은 어두운 무엇이다.
그 안에 눈부신 무엇이 있다니....
너무나 놀라 그곳의 성자 고엥카 님에게 달려가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마디입니다. ”
나는 그때 사마디에 대해서 잘 몰랐다.
산타크루즈 요가 연구소에서 한 외국인 연구원에게 물었다.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 어디입니까?”
“티루반나말라이의 라마나스라맘”
아루나찰라 산자락에 있는 라마나스라맘에서 그제야 난 평화를 느꼈다.
인도에서 수행을 요구하지 않는 희귀한 아쉬람이었다.
수행은 마음이다.
힐링을 주는 소울 음식들, 초록색 허브 잎이 담긴 버터밀크, 커피,
아삭아삭하게 부수어지는 크레커 ...
오, 천상의 음식들......
그 무엇으로 보답을 할 수 있을 런 지....
공작새들이 지상과 지붕 위를 다니며 내는 지상을 떠난 소리들,
다가와 한가롭게 가까이 앉는 개들, 늘 움직이는 원숭이들...
지붕과 울타리를 타고 있는 남국의 웃는 꽃들
고요, 침묵이 넘치는 낙원이었다.
하나 아쉬운 것은 라마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1948년생이고 라마나님은 1950년에 돌아가셨으니.....
그 즉시 나의 숙소로 가는 길목의 숙소에 나나가루라는 성자를 보내주셨다.
그 성자 분께서는 헌신자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 기회를 가졌지만
난 그때는 그분의 메시지를 알아챌 수 있는 성숙한 영혼은 아니었다.
인도를 다니다보니 그 거대한 영성의 체계가 어렴풋이 들어왔다.
그것을 알고 나는 놀랐다.
이제까지 너무 안이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음 생애에는 일찍부터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여정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델리로 갔다.
이 영혼의 나라를 그냥 떠난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래서 수첩을 뒤졌다.
하리드와르 아쇼카 로드에 있는 아라야 니야스. 파파지.
붓다가야의 미얀마 사원에 머문 적이 있었다.
룸에 있다가 떠들썩한 대화를 듣고 호기심이 일어나 나가보았다.
검은색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 주위로 외국인들의 무리가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구루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구루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나도 그 구루를 만나볼 수 있습니까?
내가 지금 그곳으로 가는데
구루께서 허락하신다면 답을 드리겠다고 한 나그네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스승님이 머문다는 주소를 네게 보냈었다.
그래서 그 주소지로 나는 가고 있었다.
그 주소는 파파지께서 하리드와르에 오시면 묵는 곳이었다.
그곳의 주인은 마당에서 어망을 손질하시다가
파파지께서 계신다면서 이층을 가리키셨다.
“어디를 다녔습니까?”
“많은 곳들을 다녔지만 라마나스라맘에 좀 오래 머물렀습니다.”
“저는 피곤합니다.”
“아, 그렇다면 저 아래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가서 샤워하고 쉬십시오.”
“저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피곤합니다.”
파파지께서는 놀라운 눈빛으로
“아, 그대는 마음이 아닙니다.....”
난 파파지의 자애로운 은총으로
내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마음이 없으면, 기쁨과 고통이 없으며, 세상이 없으며, 그 아무 것도 없다.
이제야 그 단어의 의미가 살아있는 모습이 되었다.
마음은 일어난 것이니
사라질 수도 있는.....
마음이 정말로 사라지자
하, 앞에 계시든 스승님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방이 사라졌다.
나의 몸이 사라졌다.
이제까지 붙들고 있던 ‘나’라는 괴물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다른 차원으로 가고 있었다.
갔다.......
거기에는 눈부신 희열의 바다, 빛의 바다.....
그것만이 있었다.
찬란한 바다만이....
그것은 생각이 만들어낸 체험이 아니었다.
체험은
별개의 ‘나’가 있고
그 ‘나’가 빛을 바라봄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빛만이 있었다.
‘나’라는 개별적인 존재는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나는 모른다.
시간을 아는 존재가 없었으니.......
시간이 멈춘 상태에서
시간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자
‘나’가 느껴지고
룸이 보이고,
앞에 앉아 계시든 자애로운 스승님이 보이셨다.
이런 모든 과정을 지켜보셨을 스승님은
기쁨에 젖은 채 웃고 계셨다.
난 웃음을 머금은 채 돌아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안에 진리가 있다는 말을
경전들을 통해서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고개를 갸우뚱 했을 내가
그것과 하나인 놀라운 경험을 하고 돌아오고 있었으니.....
웃음을 가득 머금은 사람으로 돌아오자
앞에 계시든 파파지께서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대는 깨달았습니다.
그대는 붓다입니다.
구도를 그만두고 당장 고국으로 돌아가십시오.”
서울의 직장에 다닐 때
물질적 성공의 길이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래서 나의 생각이 맞는지 믿음이 가는 수녀님에게 물었다.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까?
단번에, 손가락을 퉁기면서 “물론입니다.”
난 당황스러웠다.
좀 있다가 답을 주실 것이라고 예상을 했는데
수초 만에 답을 주시다니...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방랑인으로
수덕사 근처의 조용한 곳으로 갔다.
그러다가 2년 정도 제주살이를 하였다.
지금 보니 그것은
명상보다도 더 깊은 수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