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기관에서 휘발유를 태우는 대신 전기모터로 달리는 전기자동차 시대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이미 상용 모델이 나왔고 날로 성능이 좋아지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전기차 선점 여부에 따라 향후 글로벌 시장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세계 각국은 전기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뒤늦게 출발한 한국 자동차 업계도 최근 고속 전기차를 공개하는 등 선진업체를 발 빠르게 추격해 가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2010파리모터쇼’에서는 참가 업체들이 새로운 전기차 모델을 앞 다퉈 선보였고 자사 전기차의 우수성을 알렸다. 자동차 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이번에는 아득한 뒷날을 기약하는 컨셉트 모델만이 아니었다. 2011년과 2012년을 비롯해 가까운 장래에 시장에 나올 차들이 적지 않았다.
아우디의 루페르트 슈타들러 회장은 직접 전기차 ‘이(E)트론’의 오픈카 모델을 타고 등장했고, 메르세데스-벤츠의 디터 체체 회장은 전기차 A클래스 ‘이셀(E-Cell)’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 회장도 직접 전기차 스포츠 컨셉트카 ‘드지르(DeZir)’와 2012년 양산될 전기차 ‘조이(ZOE)’를 소개했다.
재규어는 수퍼카의 성능을 갖춘 2인승 4륜구동 전기 컨셉트카인 ‘C-X75’를 처음으로 공개했으며 BMW는 차세대 전기차 프로젝트인 프로젝트i의 일환으로 ‘미니 E’에 이어 두 번째로 개발한 컨셉트 전기차 ‘액티브 E’를 선보였다. 아우디도 전기모터로 달리는 컨셉트 전기 스포츠카인 ‘R4 e-트론’을 전시했다. 사브 최초의 전기차 ‘9-3 e파워’를 내놓았고 푸조도 국제자동차연맹(FIA)으로부터 전기차 가속 성능에서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은 전기스포츠카 ‘EX1’을 공개했다. 기아차도 3인승 전기 컨셉트카 ‘팝(POP)’을 처음 공개했다. 바야흐로 전기차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전기차는 지금의 내연기관(가솔린) 자동차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 1828년 헝가리의 발명가 아뇨스 예드릭이 전기모터를 발명한 뒤 이를 얹은 구동체를 선보인 것이 그 시초다. 1899년에는 시속 100km가 넘는 기록을 내는 전기차가 나오기도 했다.
전기차는 가솔린에 비해 주행거리는 짧지만 매연과 냄새, 소음이 없고 가솔린차와 같은 수동식 시동과 변속의 어려움도 없다. 이러한 이유로 1895년부터 미국은 전기차에 많은 관심을 보여 1897년 뉴욕 택시를 만들던 전기마차왜건회사(Electric Carriage and Wagon Company)를 시작으로 앤서니 전기, 베이커, 콜롬비아, 에디슨, 스튜드베이커 같은 전기자동차 회사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러나 1921년 미국 텍사스에서 커다란 유전이 발견되어 휘발유 값이 크게 떨어지면서 전기차의 인기는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여기에 헨리포드가 혁신적인 대량 생산라인을 고안해냄에 따라 휘발유를 사용하는 포드 모델 T의 값이 전기차의 1/4 수준으로 내려가자 전기차는 이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상황은 급반전 됐다. 1980년대에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내연기관 자동차에 의한 대기오염문제가 대두됐다. 전 세계 자동차 메이커 역시 차세대 동력원으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전기차의 숙제를 다시 풀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0년대 들어 속속 전기차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제너럴모터스(GM)는 1990년에 ‘임팩트(Impact)’라는 전기차 컨셉트를 선보였다. 당시 이 차가 양산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GM은 6년 뒤 보란 듯이 이를 베이스로 만든 ‘EV1(Electric Vehicle 1)’을 내놓았다. 이 전기차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임대형식으로 보급됐다. 얼마 후 수요가 크지 않아 EV1의 조립라인은 폐쇄됐다. 너무 이른 출발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충전으로 달릴 수 있는 항속거리가 200km가 넘었고 최고시속도 150km에 달했던 EV1은 100년 넘게 풀지 못하는 전기차의 숙제를 풀어낼 수 있는 시작점이었다.
현재 전기차 시장에서는 미국 ‘빅3’와 유럽, 일본 업체의 삼각경쟁 구도이다. 이들은 정부 지원과 기술 제휴 등으로 본격적인 양산 체제를 갖추고 제품 출시를 서두르고 있다. 미국 GM과 포드는 연내 각각 전기차 ‘볼트’와 ‘트랜짓 커넥트’ 출시를 앞두고 있다. 후발 주자인 크라이슬러도 2012년 출시를 목표로 경쟁에 가세했다. GM의 볼트는 1회 충전으로 최대 500km까지 주행이 가능하고 가격대는 4만 달러를 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GM은 2012년까지 연간 6만 대를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연말에는 신흥 시장인 인도에서 첫 4도어 전기차 ‘E-스파크’를 출시할 예정이다.
포드도 연말 북미에서 소형 밴 트랜짓 커넥트의 전기차 모델을 선보이며 2013년까지 전기차 5종을 출시할 계획이다. 크라이슬러는 ‘피아트 500’의 전기차 모델을 2012년 출시하기로 했다. 피아트 500은 플랫폼이 작고 가벼워 전기차 기술 적용이 적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에서는 최근 다임러와 자본 제휴에 성공한 르노-닛산 연합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닛산이 하반기 전기차 ‘리프’를 출시할 예정이고, 르노 역시 내년부터 본격적인 전기차 양산 체제 돌입을 준비하고 있다. ‘플루언스’ 세단과 ‘캉구’ 밴이 2011년 먼저 시장에 나오고, 2012년에는 혁신적인 앞뒤 2인승 ‘시티카’와 ‘수퍼미니’가 뒤따른다.
특히 2011년 유럽과 이스라엘 등에서 선보일 르노 플루언스는 르노삼성의 뉴 SM3와 같은 플랫폼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전기차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일본 미쓰비시와 친환경차 기술을 보완하려는 푸조-시트로앵(PSA)의 사업 제휴도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 폭스바겐도 2013년 ‘골프 블루 e-모션’과 ‘E-UP’, ‘E-제타’ 등의 전기차를 선보인다. BMW는 2010파리모터쇼에서 공개한 ‘액티브E’로 실제 고객들의 시범운행을 통해 품질과 인프라 등 운행 전반에 걸친 데이터를 수집해 완벽한 전기차를 내놓겠다는 구상이다.
하이브리드카로 녹색차 시장을 주도해온 일본은 전기차에서도 한 발 앞서가고 있다. 미쓰비시 ‘아이미브’가 연내 양산에 돌입한다. 혼다는 2012년부터 가정용 전원으로 충전할 수 있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카와 전기차를 미국 시장에 내놓을 예정이다. 혼다의 전기차는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방식보다 기술적으로 한 단계 진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은 가솔린 시대에서는 뒤졌지만 전기차 시대에서는 앞서나가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몰려가고 있는 중국 전기차 시장이 전기차 대량보급 시대 ‘태풍의 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임러는 중국업체 BYD와의 제휴를 통해 중국시장 전용 전기차 모델을 개발 중이며 2013년 출시할 예정이다.
우리나라의 전기차 개발은 자동차 메이커보다는 중소기업에서 주로 카트 등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인 저속 전기차(최고시속 60km 이하, 무게 1,361kg 미만)로 진행되어 왔다. 따라서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고속 전기차 생산은 선진 자동차 업체에 뒤진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뒤늦게 출발한 한국 자동차 업계도 선진업체를 발 빠르게 추격해 가고 있는데 현대자동차가 친환경차 개발에 가장 적극적이다.
현대차는 지난 1991년 쏘나타를 기본으로 납축전지(lead storage battery)를 내장한 전기차를 탄생시켰다. 이듬해에는 엑셀을 기본모델로 한 2호 전기차를 개발했는데 최고시속 100km, 1회 충전 주행거리는 100km였다. 이어 쏘나타와 스쿠프를 활용한 3~4호 전기차를 개발해 최고시속 120km, 1회 충전 주행거리 140km를 달성했다.
최근 전기차 상용화의 중간단계인 하이브리드카에 주력하고 있는 현대차는 지난 9월 중순, 관련 중소기업체 44개와 함께 제작한 블루온(Blue On) 고속 전기차를 내놓았다. 양산형 고속 전기차로는 일본 미쓰비시의 아이미브에 이어 세계 두 번째 모델, 하지만 주행거리·충전시간·모터출력 등 성능에서는 더 앞선다는 평가다. 게다가 양산 모델 자체가 갖는 의미와 국내에서 본격적인 전기자동차에 대한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는데 의미가 크다.
블루온이 공개된 지 열흘 만에 GM대우도 전기차를 선보였다. GM대우가 공개한 전기차는 준중형 모델인 라세티 프리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소형차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현대차 블루온이나 미쓰비시 아이미브와 차별된다. 이 때문인지 라세티 프리미어 전기차는 제원 상 대다수 요소에서 블루온과 아이미브를 압도한다.
GM대우는 향후 라세티 프리미어 전기차의 시험운행을 국내 도로에서 실시하며 협력업체들과 추가 기술 개발에 나설 예정이다. 미쓰비시의 아이미브는 이미 판매되고 있고 현대차 블루온은 내년에 정부에 납품할 예정인 반면 GM대우는 양산 일정을 잡고 있지 않다. 르노삼성도 SM3를 기반으로 하는 고속 전기차를 이르면 2011년쯤 공개할 예정이다. 이로써 지금까지 군소 전기차 업체에 의해 개발된 저속 전기차가 주도하던 국내 시장이 고속 전기차 위주로 급속히 재편될 전망이다.
전기차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과 수준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그동안 정부와 관련업계는 투자와 지원을 주저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부가 전기차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보급을 위해 다양한 지원과 정책을 내놓았다. 현대차가 개발한 전기차 성능에 대한 자신감과 일본·독일·중국 등 주요국 정부가 공격적으로 전기차 산업 육성책을 추진하고 있어 시장은 확대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아울러 충전망 구축과 세금지원 등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전기차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전기차 활성화 방안은 크게 전기차 생산을 늘리기 위한 판매확대 방안, 전기차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충전기 설치 등 인프라 구축 계획, 교체형 전기차와 중대형 전기차 개발계획 등이다.
우선 전기차 보급 확대를 위해 내년 상반기까지 20여 대의 전기차와 16개 충전소를 연계해 전기차 주행성능과 충전효율 등을 평가한다. 동시에 내년부터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대당 2,000만 원 한도로 보조금을 지급하고 의무구매비율을 높여 판매를 촉진한다. 2013년엔 민간 판매를 시작하면서 전기차 구매에 따른 자동차 취득세·등록세 면제 등 세제지원 혜택을 부여하고 혼잡통행료와 공용 주차장 요금감면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계획이다.
아울러 내년 상반기까지 전국 단위의 충전인프라 구축을 위한 로드맵을 수립하고 2012년에는 환승주차장, 간선도로, 공공주차장 등 국가와 지자체가 충전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한다. 2013년부터는 민간이 충전시설을 설치하는 데 다양한 지원을 해 2020년까지 충전기 220만 대를 설치한다는 목표다.
글 : 자동차 컬럼니스트 김병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