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서(柳仁舒) 시인
1960년 경북 영천 출생
200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여우》
주소 ; 대구 수성구 지산동 761 녹원맨션 109동 706호
심부름센터
—비둘기 명함
류인서
삐라 대신 오늘도 나를 뿌린다
광장 육교에 뿌리고 오피스빌딩 복도에 뿌린다
미분양의 우편함 속에 몰래 뿌린다
아내들의 지갑에도 부적 대신 꽂혔을 터, 즐겨 사용하시라 나를
악담과 농담 사이에 끼워 두고 비와 음악 사이에 끼워 둔다
마네킹 양 가터벨트 검은 레이스에 끼워 둔다
방음이 잘된 이 도시 소음 속에 서둘러 끼워 둔다
눈 오는 공중화장실 얼룩 밑에 끼워 둔다 녹아내린 오후의 나무 그늘에 끼워 두고
막간의 그림자극에도 보란 듯 끼워 둔다
집시 노래를 부르는 접시 바닥에 끼워 둔다
쉰 개의 전번과 마흔아홉 개 선글라스로 악천 악후 사이를 흘러 다니는 나의 사업은
자루 가득 지루한 캐릭터의 피규어를 배달하는 일과는 달라서,
희망상영관의 원격조정 리모컨을 훔쳐 내는 일과는 달라서,
책궤마다 빼곡한 방풍방부의 약병을 정돈하는 일과는 달라서,
방문마다 내걸린 수렴청정의 주렴을 바꿔 다는 일과는 달라서,
승승장구 미래 보급형 나의 사업은
침묵 수도원*
- 류인서
침묵은 귀밝은 늙은 동물,
놀랍게도 그 굽은 등을 지반 삼아 집 짓는 사람들을 보았다
선잠 든 침묵의 귓볼을 건들지 않으려 가만가만 시간을 벽돌 쌓으며 걷는 젊은 수도사의 조심성 많은 뒷모습을 보았다
가을겨울가을겨울 더 깊어지는 回廊이 침묵의 방벽이 되어주는 말없음의 시간을 보았다
삼엄한 침묵의 경계를 피해 수도원 담장을 혼자 넘어나가는 벙어리 신이 떠올랐다
황무지 눈밭을 발자국 없이 뛰놀고 있었다
봄잠 든 침묵의 콧등을 밟고 골짜기 숲으로 산책 나선 천진한 밝은 얼굴의 노수도사들도 있었다
소리, 소리들을 보았다
수도원 뒤쪽 산맥 넘어 흰눈이 걸어 내려오는 소리
마당을 지나는 바람의 나무구두 소리
저녁 종을 당겨 새의 길을 봉쇄하는 소리
한 자루 촛불로 천년의 침묵과 어둠을 봉쇄하는…… 그런 소리들을
* 영화<위대한 침묵>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전갈
- 류인서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 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달감옥 - 월식
- 류인서
달 보러 가, 개수대 수납장에 얹혀살던 달
얼어붙은 밤의 현관
달의 면회실로
이런 날 실은 달의 얼굴 더 깊이 닫히고
만년직 교도관이 불침번을 선다는 소식,
몇 닙의 은금화와 쪽편지 대신
까마귀그림 풍선달을 안고 간다
달의 탈옥을 기다린다
조금씩 저를 게워
물처럼 풀어주나 사슬 묶인 달
그가 게운 얼룩풍경이 우리를 통과할 때
이 얼굴 불면이 노숙하던 외창? 파도 발굽을 삼킨
이 얼굴 모래톱, 누렇게
들키는 마늘밭?
반광의 그림자필름 집어 가면을 만든다
내가 쓰던 창문들 모자처럼 해져 벽에 걸렸으니
밤의 식탁 빈 의자 위로
달비듬 떨어져 깔리는 달 냄새,
어둠물감 두껍게 발린 미궁의 수로인 몸
언제 다 빠져나왔니
검은 달
늪구름
- 류인서
옷걸이에 걸린 빈 옷가지조차 등이 가진 표정은 서늘하더군
놈이 등을 보이고 간 그날 이후
너는 빨래는 꼭 앞면으로 널어 말리는 습관을 얻었다
탈수 안된 몸에서 툭 툭 쇠구슬 같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덩이덩이 눅은 바람이 선풍기에 갇혀 시든다
달력그림 속의 미꾸리가 빗줄기를 타고 날아오를 때
새들이 끌고가던 공중의 난파선에서 도시락만한 나무상자가 마당으로 떨어진다 상자에는 새들이 보관해온, 발아하는 구근처럼 뭉근해진 심장 한 뿌리가 담겨있다
네 가슴에다 심어줄까 이걸?
햇빛의 역습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