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님의 돕는 이
2023. 2. 19. 주일오후예배
제가 지난 주간 아는 분에게 말씀을 듣기를 그분이 이번 여름철 휴가 때 가족들과 함께 울릉도를 여행할 계획을 가졌나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배편과 숙박시설을 예약하려고 알아보았더니 100% 예약이 다 차버렸답니다. 그래서 다른 곳을 알아보아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니까 해외로 여행을 많이 다니고 해외 여행객들도 우리나라로 많이 오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주님 모시고 다니는 길도 의미 있겠지만, 또 주님이 없으니까 여행이라도 다녀야 하는 그분들의 심정도 이해가 됩니다. 주님이 없으니까 집에만 있으면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마음을 풀어야겠지요. 저희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과천 의왕 간 고속도로가 있어서 차들이 새벽부터 움직이는 모습을 봅니다. 저분들은 새벽부터 뭐가 그리 바쁘실까? 그리고 밤중에도 차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참 열심히 움직이는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20여전에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 새벽에는 차들이 거의 안다니고요, 알마타에도 아침 7시가 되니까 차들이 움직이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조용한 나라였습니다. 오늘은 우수지요. 24절기 중에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우수입니다. 또 3월 6일은 경칩인데 우수, 경칩이면 대동강 물이 녹는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지난 한 주간 묵상했던 말씀은 오늘 나눌 말씀인데요 ‘새봄과 함께 일어서서 내 주님의 돕는 이로 서가야겠다’ 마음을 먹어보았습니다. 내 주님의 돕는 이! ‘내 주님의 돕는 이가 바로 나다’ 이 말씀은 우리 목사님도 좋아하는 이름이었습니다. 내 주님의 돕는 이로 서보고자 하셨던 강 상사님! 이제 ‘내 주님의 돕는 이’라는 제목으로 여섯 가지 짤막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내 주님께 언약적으로 속함
신명기 15장의 귀 뚫은 종은 육 년 동안 그 주인의 어떠함을 알고 칠 년째 자유의 길을 갈 수 있을 때 그는 스스로 가지 않고 주인과 그 집을 사랑하므로 언약적으로 그 집의 종이 되겠다고 영원토록 언약을 맺고 귀를 뚫어버립니다. 이름 하여 ‘귀뚫은 종’ 빚져서 간 종이 아니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종도 아니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그 주인을 사랑하므로 언약적으로 귀 뚫어버린 종, 언약적으로 속한 종이지요.
이사야 41장 9절에 보면 주님은 우리 각자를 불러서 “너는 나의 종이라” 부르십니다. 이사야 42장 1절에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과 메시지인 동시에 예수님께 속해 있는 저와 여러분께 주시는 새 이름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주님께 사로잡힌 종, 얼마나 아름답고 흠모할 이름이요, 생활인지 모르겠습니다.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을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장 1절)” 불러주시는 예수님! 저는 개인적으로 로마서 1장 1절을 참 좋아합니다.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헬라어로는 ‘파울로스 둘로스 예수 크리스투: 바울은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격으로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종 바울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은 처음이지만 로마서 16장에도 주님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 겐그리아 교회의 집사님인 뵈뵈 자매님,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주기를 원했던 브리스굴라와 아굴라, 많이 수고한 마리아, 계속 나오는 그분들의 이름은 다들 주님의 돕는 이입니다. 로마서 16장에 버금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내 주님의 돕는 이가 가득한 우리 몸 된 교회되길 소원합니다.
둘째로, 임마누엘의 신앙
마태복음 28장에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할게” 약속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빈 말이 아니고 친히 약속하신 것이고 또한 친히 함께 해주고 계십니다.
이사야 41장 9절에는 “너는 내 종이라”하셨는데 임마누엘의 약속을 하시면서 이사야 41장 10절에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세상은 결코 가벼운 전쟁터가 아닙니다. 두려워 할 일이 있으니까 두려워 말라 하셨고 놀랄 일이 있으니까 놀라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5절에도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아멘! 여호수아는 모세가 떠났을 때 참 두려워 떨었습니다. 저희 목사님이 갑자기 떠나셨을 때 우리 온 식구들은 참 두려워 떨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우리 목사님과 함께하셨던 주님이 지금은 우리 각자와 함께하시고 몸 된 교회에 지금도 목자로 서 주고 계십니다.
셋째로, 주님 앞에 잠잠하라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이 불었어요. 미친 바람이지요. 제자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무시는 것을 알고도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요란히 떨고 있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책하시고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다고 했습니다. 주변 환경이 요동칠 때 우리는 환경적인 안정감을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도 해주시는 분이시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는 우리 영혼이 흔들리지 않고 잠잠하기를 더 원하십니다. 이사야 41장 1절에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하셨던 것처럼요.
저는 이사야 30장 15절 말씀도 참 좋아하는데요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잠잠하면, 주님을 믿고 잠잠히 안정감 있게 기다리면 힘을 얻을 것인데 원치 않고 있답니다. 얼마나 답답한 사람들입니까!
시편 131편 2절 말씀도 우리가 참 잘 알고 있지요.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젖 때문에 엄마 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젖은 뗐습니다. 어느 정도 컸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엄마 품에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엄마가 좋기 때문에 다가선 아이처럼 주님께 무엇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께 대해서 믿음과 사랑으로 잠잠히 속해 있는 것, 내 주님의 돕는 이가 갖추어야 할 자세입니다.
넷째로, 주님을 앙망함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새 힘이 필요합니다. 새 힘은 어디서 옵니까? 이사야 40장 마지막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사귐을 우리는 매일 하지만 먼저는 저도 잠잠히 주님 앞에 시간을 보냅니다. 주님! 주님! 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믿음과 사랑에 가득 찬 마음으로 주님을 앙망합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시지만 보좌에 계실 나의 주님을 온 마음으로 집중해서 앙망합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주님! 오늘도 내 주님 기쁘시게 하고 싶습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새 힘을 주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제 경험도 아니고 곁에 있는 형제들도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이 중심을 생각할 때 저는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생각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길 원하는 식구들과 저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기쁘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 이름이 좀 멸시를 당하면 어떻습니까? 또 무시를 당하면 어떻습니까? 주님께만 영광이 된다면 족하지요.
다섯째로, 오늘 내 주님과의 상담
저는 지난 주 우리 소청년들의 수련회 기간이었던 목요일부터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목요일날 오후에 제가 집안에서 운동을 하고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왼손에 힘이 하나도 없어져서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왼손을 올릴 수도 없고, 내릴 수도 없고, 꼬부라진 손가락을 펼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평안이 왔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새벽 한 시에 일어나보니 왼손이 다시 힘이 생기면서 회복되었습니다. 신경외과를 가볼까, 정형외과를 가볼까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라 뿌리치고 주님이 다 아시는데 아프면 좀 어때, 축도를 서서 못하면 앉아서 해도 식구들이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하면서 밝은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이사야 41장 1절에는 그런 말씀이 있지요.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쉬운 것은 우리 자신인데 주님께서 상담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 그 말씀을 우리 목사님도 참 좋아하셨지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이 심판이라는 ‘judgment’는 심판도 되지만 판단도 된다고요, ‘주님 나는 내 삶을 내 스스로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생각하신 판단을 제가 받아들이겠습니다. 주님이 평안히 생각하시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시니까 나도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러니까 토요일 날 새벽에 손이 움직였습니다. 작은 체험이지만 주님이 회복해주셔서 감사가 됩니다. 이 땅은 광야 길이니까 여러 가지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겠지만 주님이 아시고, 주님이 함께하시고, 주님과 상담하면 주님 안에 해답이 있고,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사랑과 명령
요한복음 14장 14절에는 요한복음에 거듭 나오는 말씀인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가 나옵니다. 여기서의 계명은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명령을 기다렸다가 즉각적으로 순종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에도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이 친히 아버지의 명령을 지키시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신 것을 보이셨습니다. 역시도 우리가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면 주님께 오늘 내가 해야 될 지시사항과 명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돕는 이로 서가는 자에게 그냥 맷돌만을 돌리게 하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맷돌에 갈 수 있는 곡식을 주시고 그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서 섬기라고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의 명령과 지시사항과 그 원함이 세미하게 임하더라도 크게 듣고 순종하는 사람, 주님의 사랑과 명령 속에 살아가는 사람 내 주님의 돕는 이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위대한 사역자는 아니더라도 로마서 16장의 그 아름다운 형제들처럼 내 주님의 돕는 이로 오늘 우리 각자의 삶에서 신실하게 서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