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Joannes Baptistae)는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 즈카르야(Zacharias, 11월 5일)와 아론(Aaron)의 자손이며 성모 마리아(Maria)의 친척인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5일)의 아들로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아인 카림(Ein Karem)에서 태어났다.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없었던 성 즈카르야가 사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성소에 분향하러 들어갔다가 가브리엘(Gabriel) 대천사 발현을 목격하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아이를 못 낳는 여자일 뿐 아니라 이미 나이가 많았던 성녀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아기가 태어난 뒤에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였다(루카 1,5-25).
성 요한 세례자는 서기 27년경까지 유다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은수자로 살았고,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15년, 그의 나이 서른 즈음에 하느님의 말씀을 받고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다. 그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고 외치며 요르단 강에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오실 때 그분이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구세주이심을 알아보고는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말렸다(마태 3,14). 그러나 그리스도의 뜻대로 주님께 세례를 드리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을 목격한 그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떠나신 뒤에도 요르단 계곡에서 회개의 설교를 계속하였다.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의 언행과 군중들에 대한 그의 예언자적 권위를 두려워하던 중,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들어 그를 감옥에 가둔 적이 있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은 옳지 않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헤로디아는 간계를 꾸며 헤로데의 생일잔치 때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한 딸 살로메에게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청하게 했고, 헤로데는 손님들 앞에서 한 맹세를 들어 요한을 결국 참수하였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사해 동쪽 7km 지점, 오늘날 요르단에 속한 마케루스 요새(Machaerus fortress)로 압송되어 처형됐다고 한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서는 요한의 죽음을 갈릴래아의 연회장에서 헤로디아의 계략으로 인해 참수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마르 6,17-29).
성 요한 세례자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처럼 그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신약의 첫 예언자로서 겸손하게 선구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하셨다(마태 11,11). 역사가들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쿰란 공동체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세례자 요한의 축일을 탄생과 수난 기념일로 구분해 두 번 지내왔다. 즉, 보편 전례력 안에서 6월 24일을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로 그리고 8월 29일을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로 지내왔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수난을 따로 기록하였다.♧
굿뉴스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