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송미술관 가헌 최완수 선생의 40년 ‘겸재 정선 연구’의 총결산!
“문화(文化)를 식물에 비유할 때 이념(理念)이 뿌리라면 예술(藝術)은 꽃에 해당하므로 예술은 그 시대문화를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그러므로 예술사(藝術史) 연구가 문화사(文化史) 연구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가헌 최완수
◎ 최완수 선생의 겸재 정선 연구 과정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고민하다...
일제(日帝)는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이후 근대사학(近代史學)의 방법론을 표방하며 서구사학의 실증론에 입각해 수많은 조선왕조의 공사(公私) 기록들을 비판 없이 구미에 맞게 나열하며 조선왕조는 마치 오백 년 동안 정체해 있던 침체기였던 것처럼 기술해 왔다. 이에 그 교육으로 세뇌당한 우리 국사학계도 1970년대까지 조선왕조 오백년 정체설(停滯說)을 정설로 삼아 그 이반(離叛)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최완수 선생은 이의 부당성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조선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만이 우리 전통 문화의 맥락을 제대로 이어 놓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사상, 정치, 경제사 등 문화사 제반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눈으로 확인시키는 것은 미술사뿐이라는 결론 아래 이의 연구에 전념하게 됐다.
조선문화사의 절정기를 이룬 진경문화(겸재 정선) 연구에서 답을 찾다...
그 결과 조선왕조 오백 년 문화사 중 그 절정기를 이루는 진경시대를 미술사로 조명하여 그 영광의 현장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드러내 보여야만 한다는 당위성(當爲性)에 도달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하여 진경문화를 주도해 간 이 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화가인 겸재(謙齋) 정선(鄭敾)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71년 가을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제1회 전시회로 ‘겸재전(謙齋展)’을 개최한 것을 계기로 이후 꾸준히 겸재 연구에 필요한 기초 자료들을 수집해 왔는데 1977년부터 3년간 조선 왕릉(王陵) 조사를 감행해 가면서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실체를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겸재 연구에 박차를 가하여 1981년 가을 간송미술관 정기전시회를 ‘진경산수화전(眞景山水畵展)’으로 기획하며 간송문화(澗松文華) 제21호에 「겸재진경산수화고(謙齋眞景山水畵考)」를 싣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2년 6월에는 간송미술관에 수장된 겸재 그림의 일부를 가려내어 겸재명품첩(謙齋名品帖) 상․하 2권의 화집(畵集)으로 출간해 내면서 그 그림 해설집으로 겸재명품첩별집(謙齋名品帖別集)을 따로 집필하여 겸재 그림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했다. 이후 1985년 가을 전시회인 ‘진경시대전(眞景時代展)’과 1988년 가을 전시회인 ‘진경풍속전(眞景風俗展)’을 마련하면서 간송문화 제29호‧제35호를 통해 계속 「겸재진경산수화고」를 연재해 갔다.
저술, 강연 등 다양한 겸재 연구 활동을 하다...
이후에도 겸재 연구는 계속되어 『겸재(謙齋) 정선(鄭敾)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1993, 범우사), 『진경시대』(1998년, 돌베개),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1999년, 대원사)을 출간했다. 또한 1999년, 2000~3년에는 EBS TV 특강에 출연하며 겸재 진경산수화를 언급하여 겸재 연구 결과를 세상에 널리 전파했다. 2004년 『겸재의 한양진경』(동아일보사) 출간에 맞춰 개최한 제66회 ‘대겸재전(大謙齋展)’에서는 겸재의 진경산수화 이외의 그림에 대한 연구 성과도 더 추가했다.
40년 겸재 정선 연구를 총결산하다-겸재 정선(전3권) 출간
겸재 서거 250주년(2009년)에 맞춰 겸재 연구를 일단 매듭짓기 위해서 각종 문집을 세세히 점검하여 겸재와 관련 있는 내용을 뽑아내고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겸재 관련 기사도 가려내어 겸재의 이력을 보충하고 누락된 그림들을 추가하면서 5년 동안 겸재 연구에 몰입한 결과물로서 이번에 겸재 정선(전3권)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그 동안의 겸재 연구 성과를 총망라한 것으로 본문만 200자 원고지 3,673매, 겸재 그림 도판 206매와 삽도 147매에 이른다. 겸재 정선이 살던 시대적 배경과, 그와 교유하던 당시 문인들에 대한 일화와 작품까지 함께 볼 수 있어, 가히 그림과 문학과 역사가 한데 어우러진 조선왕조 회화사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겸재와 간송의 만남이 숙명이듯이 내가 겸재를 만나게 된 것도 숙명이죠. 겸재를 연구한 40년은 한 마디로 ’영광스러웠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40년의 겸재 연구를 일단락짓는 책 ’겸재 정선’(전 3권.현암사 펴냄)을 펴낸 최완수(67)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겸재 연구에 바친 평생을 ’영광스럽고 행복했다’라고 표현했다.
겸재 연구의 권위자로 그동안 꾸준히 발표해 온 겸재 관련 연구 내용을 총망라해 펴낸 책은 연구에 바친 세월과 노력을 반영하듯 본문만 200자 원고자 3천673장 분량에 도판 206장, 참고그림(삽도) 147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겸재 그림 자체에 대한 연구 외에도 겸재의 가계도와 가정형편, 교우관계, 학맥 등 겸재의 개인적인 측면과 당시의 정치ㆍ경제ㆍ사회 상황까지 연구해 겸재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세상에 알려진 겸재 관련 문집은 가능한 한 거의 독파했다”는 최 실장은 40년간의 연구 성과가 집대성된 책에 대해 큰 자신감과 자부심을 나타냈다.
“(내용을) 더 보태고 싶었지만 마침 겸재 서거 250주년을 맞아 작심하고 일단 마무리를 지은 겁니다. 하지만, 겸재 그림을 이해하려면 이 책 한 권이면 될 겁니다. 남은 것은 이제 낙수(落穗. 뒷이야기) 정도죠. 과거에 냈던 겸재 관련 책은 작품 성격에 따라 그림을 나눠서 한 화첩에 있던 작품이라도 흩어져 있었지만, 이 책은 편년체로 서술돼 일목요연하게 겸재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던 그가 미술사학자 고(故) 최순우 선생의 제의로 간송미술관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겸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왜 겸재였나’라는 질문에 그는 “조선문화가 형편없었다는 주장에 반박하려면 ’진경산수화’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조선왕조의 멸망 이후 일본 강점기 근대사학의 영향으로 우리 사학계에는 조선왕조 500년이 정체돼 있었다는 시각이 만연해 있었고 이를 바로잡으려면 조선시대를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왕조 500년의 문화사 중 절정을 이루는 ’진경시대’를 조명할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진경시대의 핵심 인물인 겸재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겸재 그림들을 바탕으로 겸재 연구를 시작한 최 실장은 자신의 연구는 간송 전형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간송이 겸재의 가치를 알아보고 집중적으로 겸재의 대표작들을 수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겸재와 간송의 만남은 숙명이었어요”
오랜 세월 동안 도망치고 싶던 적은 없었을까.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 실장은 “도망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평생을 걸고 연구하지 않았다면 겸재가 이렇게 밝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미치지 않으면 못할 짓이기도 했죠. 하지만 행복했습니다”
“이 책을 바탕으로 앞으로 겸재 연구자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말하는 최 실장은 후학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겸재 연구에만 그쳐서는 안 되고 진경시대 전체를 연구해야 합니다. 제가 일단 (이 책으로)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죠. 또 조선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언젠가는 이 책도 외국어로 번역해야겠죠”
1976년 추사집을 번역한 책을 펴내기도 했던 최 실장은 앞으로 추사를 연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추사 연구도 이제 해야죠. 그리고 왕릉 연구도 마무리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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