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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강화 103코스 역방향 제1부
강화평화전망대-별악봉-성덕산-덕음-
양덕공원-양사파출소-강화교산교회
20241023
1.코스 소개(두루누비)
1)코스개요
- 갈 수 없는 땅과 건너지 못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분단의 아픔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코스
- 길이 12.6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어려움
2)관광포인트
- 비무장지대인 강화 최북단의 작은 포구 '창후항'
-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강화평화전망대'
3)여행정보(주의사항)
- 시점 :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창후항
교통편)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 정류장에서 간선 32번 버스 승차 '창후리입구'정류장 하차
-종점 : 강화통일전망대-서해랑길 종점&DMZ 평화의길 시점
교통편)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 정류장에서 27, 28번 버스 이용 '평화전망대' 하차
- 민통선 지역으로 신분증 확인 및 출입신고서 작성 후 이용 가능함
- 시점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산152-16 (해양경찰서 창후리출장소 옆)
대중교통)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서 32번 버스 이용, 창후리종점 하차
- 종점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11-40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
대중교통)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 정류장에서 27, 28번 버스 이용 '평화전망대' 하차
- 주요 경로 : 창후항 3.4Km 송산삼거리 3.8Km 양사파출소 1.8Km 별악봉 3.6Km 강화평화전망대
2.평화와 통일의 물길 흐르는 강화평화전망대
제1부 : 드디어 서해랑길 탐방 전 코스 종주를 마치게 된다. 이번에 서해랑길 102코스와 103코스 탐방을 마침으로써, 서해랑길 1코스 해남 땅끝에서 시작한 서해랑길 탐방을, 서해랑길 103코스 종점인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서해랑길 탐방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감격스럽다. 그런데 안내측에서 서해랑길 103코스 종점인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역방향으로 출발하여 102코스의 시작 지점 강화 내가면 외포리 강화파출소에서 끝마치는 것으로 진행한다. 서해랑길 전 코스 탐방의 대미를 103코스 종점인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감격스럽게 맞이하고 싶었는데, 이 감격을 누리지 못하게 되어 아쉽고 안타깝다. 그러나, 어찌하랴.
강화 평화전망대 매표소 아래 주차장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탐방을 떠나기 앞서 강화 평화전망대 무궁화공원과 야외전시장으로 올라갔다. 전망대 건물에 적힌 '강화 제적봉(制赤峰) 평화전망대' 문자가 슬픔과 아픔으로 가슴을 친다. 제적봉(制赤峰)과 평화(平和), 두 단어의 자가당착적 모순에 평화는 산산조각이 되어 날아가는 듯한 혼란에 빠진다. 두 단어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싸움 같은 느낌이 든다. 오직 적대적인 제적봉 용어가 평화를 불러올 수 있을까?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가슴에 새기지만 현실의 이념벽은 굳건해 보인다. 까마득한 절망감이 몰려들었다.
이곳에 꼭 2년 7개월만에 다시 왔다. 그때는 야외전시장을 살핀 뒤 강화 평화전망대 1층부터 3층까지 내부 전시관을 관람하고 북한 땅 조망실에서 조망하였지만, 이번에는 전망대의 개방 시각이 되지 않아, 야외전시장만을 돌아보았다. 강화 제적봉(制赤峰) 평화전망대 건물 앞 무궁화공원과 야외전시장을 쏜살같이 지났다. 청파 김흔중의 '채명신 장군은 묘비가 말한다' 시비와 '彼恨' 시비, 애사 편강열의사 추모비, 연성대첩비, 제적봉碑, 해병대 상륙돌격장갑차를 보고 북녘 땅을 조망하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북녘 땅을 향한 망배단과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겨레의 비원처럼 서 있다.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담은 노래비의 날갯짓 조각상이 아침햇살에 눈물처럼 반짝이는 것 같다. 그 아래로는 조강(祖江)이 흐르고, 그 가운데를 군사분계선이 남북을 가른다. 분단의 물길이 흐르는 조강이 어느 때 평화의 물길로 흐를 수 있을까? 흙빛 강물 같은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조강 너머에 북녘 땅 황해도 개풍군 지역이 자리하고 있다. 북녘 땅 중앙 뒤쪽에 송악산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송악산 아래에 고려의 왕궁 만월대(滿月臺)가 있었다. 고려의 유신(遺臣)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1330∼?)은 고려 말 만월대를 찾아가 시조 '회고가(懷古歌)'를 읊었다. "興亡이 有數하니 滿月臺도 秋草로다./ 五百年 王業이 牧笛에 부쳐시니/ 夕陽에 지나는 客이 눈물계워 하노라."(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운수가 있으니, (화려했던 고려의 궁터인) 만월대도, 이제는 시든 가을풀만이 우거져 있을 뿐이로구나. 오백 년 고려의 왕업이 이젠 목동의 피리 소리에나 담겨 불려지고 있으니 석양에 이 곳을 지나는 나그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망국의 비통함이 느껴진다. 원천석은 이방원의 스승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운곡(耘谷)은 원주의 치악산에 은거하는데, 이방원이 왕이 되어 운곡(耘谷)을 찾아오지만 운곡(耘谷)은 이방원을 만나주지 않아, 이방원은 끝내 운곡(耘谷) 선생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 원주 치악산에 있는 태종대(太宗臺)는 이방원이 운곡(耘谷)을 찾아와 사흘 동안 머물렀던 곳이어서 이런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송악산과 치악산은 남과 북으로 갈려 있고, 만월대는 현재 갈 수 없는 곳이다. 2007년부터 2018년까지 8차에 걸쳐 남북이 공동으로 만월대를 발굴조사하다가 현재 중단되었다. 평화의 길, 통일의 길이 역경이지만 언젠가는 이루어내야 할 민족의 과제이다. 그 고난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민족의 역량과 관련된다. 남과 북의 공존공생, 평화와 통일을 향한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길손은 애상에 잠겼다가도 강물의 통일을 보며 큰 희망을 품는다. 임진강과 만난 한강이 예성강과 만나는 서해 바다처럼, 우리 민족이 화합하고 통일하는 길이 분명히 열리기를 기원한다.
강화 평화전망대 야외전시장을 휙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서해랑길 103코스 역방향 탐방을 출발한다. 주차장 북쪽 끝에 남북 1.8 평화센터가 자리하지만 바라보기만 하고 탐방길을 따라간다. 서해랑길 103코스 역방향 탐방은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교산리, 인화리 지역을 거쳐 내가면 창후리로 넘어가 창후항에서 마치게 된다. 양사면 철산리 별악봉-성덕산 능선 구간에서는 북쪽의 양사면 북성리, 남쪽의 양사면 덕하리 지역의 경계을 지나며 두 지역을 살피기에 서해랑길 103코스는 양사면 전체 지역을 지나간다고 볼 수 있다.
1982년에 군사 전술도로인 제적대로(制赤大路)라 명명되었던 도로는, 2008년에 강화 평화전망대가 개관하여 일반 민간인들이 드나들게 되면서 도로명이 '전망대로'라고 개명되었다. 양사면 철산리 해안에는 철책선이 철곶(鐵串) 초소로 이어지고 북쪽에 조강이 흐르고 그 너머에 북한 땅 황해도 개풍군 지역이 자리한다. 서해랑길 역방향은 전망대로를 잠시 따라가다가 철산감리교회 방향으로 진입하여 별악산 능선으로 올라간다. 꽃향유 홍자색 고운 빛깔이 들길을 물들이고, 퇴색한 푸른 들빛을 구절초 하얀 꽃들이 정화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오갈 수 없다는 생각이 평화전망대를 통해 더 아프게 다가온다.
별악봉 능선으로 올라섰다. 별악봉 능선은 북쪽 끝에 제적봉이라 명명된 낮은 야산에 평화전망대가 자리한다. 별악봉 능선의 종주는 북쪽 끝에 제적봉이라 명명된 낮은 산을 넘어 조강(祖江)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현재는 군사 지역이라 북쪽 끝으로는 내려갈 수 없으며 별악봉 능선은 남쪽 성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산행만을 즐길 수 있다. 쓸쓸한 마음으로 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간다. 경주 김씨 묘를 지나 낮은 구릉지를 넘어, 북쪽 북성리와 남쪽 철산리 철곶으로 내려가는 갈림목 안부 지역을 지나면 북쪽 북성리 지역으로 잠시 나뭇가지 사이로 조망이 열리지만 북성리 서쪽 해안은 눈꼽만치 보일 뿐이다. 그곳에서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동쪽 방향에 쉼터정자가 조성되어 있는 별악봉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동쪽과 북쪽으로 전망이 열린다.
별악봉 전망대는 암릉 지대로 쉼터정자가 암릉 입구에 조성되어 있고, 암릉에서 조망하는 풍경이 좋다. 북쪽으로 중앙에 제적봉과 강화평화전망대가 가늠되며 조강(祖江) 너머 북쪽에 황해도 개풍군 지역이 펼쳐지고, 맨 뒤쪽에 송악산과 개성특별시 지역이 흐릿하다. 서쪽으로는 예성강 하구 벽란도(碧瀾渡)가 가늠된다. 동남쪽에는 강화지맥이 조강(祖江)으로 떨어지고, 산줄기 뒤에는 양사면 철산리 덕하천 하구와 산이포(山伊浦)가 있다. 포촌동(浦村洞)이라고도 불렸던 산이포(山伊浦)는 서울과 개성, 해창포 등을 오가는 배들이 머물던 포구였다. 산이포 맞은편은 황해도 개풍군 해창포이며, 두 포구 사이는 남북한 지역의 거리가 가장 짧은 곳으로, 직선거리가 1.8㎞라고 한다. 남북분단 전에는 해창포와 산이포 간 왕래가 빈번했고, 산이포에는 상점과 주막들이 빼곡했는데, 70년대 들어서 해안을 따라 철조망이 설치되고, 산이포의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되어 지금은 산이포에 집 한 채 없다고 한다.
"북사면(北寺面) 산이포동(山里浦洞)은 강화부의 서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기잡이의 배로 생업을 잇고 있다." 1906년 봄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산이포 마을을 지나며 이곳을 이렇게 소개하며 칠언절구 한 수를 남겼다. "山里浦前水色連 (산리포전수색련) 산이포 앞쪽은 바닷물에 닿아 있어, 漁歌一曲去來船 (어가일곡거래선) 오고가는 배에서 고기잡이 노래곡조. 家家揭網家家酒 (가가게망가가주) 집집마다 그물 걸고 집집마다 술 담그니, 笑道延坪是貨泉 (소도연평시화천) ʻ연평길은 재화의 샘ʼ이라고 웃으며 말하네." - 고재형의 '산이포동(山里浦洞)'. 산이포 앞쪽 조강(祖江)이 역사의 흔적을 물결에 새기며 산이포(山伊浦)와 해창포(海倉浦) 사이를 유유히 흐르고, 군사분계선이 조강의 중앙을 남북으로 가른다. 감격에 격해 하다가 무엇인가 울컥 목울대에 막힌다. 컥~ 커억~ 왜 뚫지 못하느냐.
별악봉 전망대에서 나와 성덕산 방향으로 조금 이어가면, 남서북쪽으로 전망이 열린다. 북쪽 방향을 살피면 양사면(兩寺面) 북성리(北省里) 들녘이 펼쳐지는데, 해안의 작은 구릉 두 곳에 구등곶돈대(龜登串墩臺)와 작성돈대(鵲城墩臺)가 자리한 것이 가늠되고, 바다 건너는 황해도 연백군 지역일 것이라 어림한다. 남쪽으로는 고려산, 서쪽에는 봉천산이 보이고, 강화지맥이 북쪽으로 내닫는다. 능선 북쪽에는 덕하천이 양사면 덕하리(德下里) 들녘을 가르며 흐르는데, 덕하천은 봉천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덕하리를 지나 양사면 철산리 산이포에서 조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서쪽 방향에는 가야할 성덕산 줄기와 그 뒤에 별립산, 맨 뒤에는 석모도의 상봉산 산줄기가 가늠된다. 흐릿한 두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활짝 열린다. 별악봉 능선 최고의 풍경 조망지 두 곳에서 탄식과 환희의 풍경 조망을 누렸다. 탄식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희망으로 나아가는 마음은 아직은 무겁지만 무거움을 떨치고 날아올라야 한다.
서사면(西寺面)과 북사면(北寺面)을 합친 양사면(兩寺面) 북쪽 지역의 풍경을 조망하고 별악봉 능선을 이어가면, 성덕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철계단이 나온다. 철계단을 내려가면 시멘트 바닥에 '산이포'라고 적혀 있다. 이 아래 성덕산 안부에서 덕하리 지역으로 내려가면 산이포 해안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예상대로 성덕산 안부에서, 왼쪽은 덕하2리 방향이고, 오른쪽은 북성2리 방향이다. 그렇다면 별악봉~성덕산 능선은 강화도 북쪽 지역을 최북단 지역과 남단 지역으로 가르며, 최북단에 양사면 북성리 지역, 그 남쪽에 양사면 덕하리와 교산리 지역이 자리한다. 그리고 북쪽의 양사면과 남쪽의 송해면을 경계하는 산줄기가 강화지맥이다. 양사면 지역을 확인하며 강화도 북쪽 지역이 그림으로 분명히 그려진다.
성덕산 안부에서 성덕산 쉼터로 이어지는 길은 창고, 묘지, 북성리 갈림길을 지나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는데 두꺼비바위라고 명명된 바위가 있다. 북성리 해안에 사는 금슬 좋은 부부가 별악봉에 오르다가 아내가 죽고 뒤이어 남편까지 죽어 한 쌍의 바위가 되었는데 두꺼비 모양을 닮아 두꺼비바위라고 명명되었다. 금슬바위 또는 부부바위라 명명하는 것이 스토리텔링으로 보아서 나을 것 같다. 두꺼비바위라고 명명하기 위해서는 두꺼비 이야기가 스토리텔링에 첨가되어야 한다.
육각정자와 운동기구가 설치된 체력단련장이 조성되어 있고,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성덕산 쉼터와 약수터 갈림목을 지나면, 해발 215m 성덕산 정상을 알리는 성덕산 표지목이 서 있다. 성덕산 정상의 전망은 소나무에 에워싸여 막혀 있고, 그 바로 아래 남쪽에 장군바위라고 명명된 바위에 서면 서남쪽으로 풍경이 열린다. 남쪽에 별립산, 서해 바다 건너 중앙의 교동도에 화개산이 솟아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교산리 덕음마을까지는 내리막길이며, 내리막 기슭에 선녀바위라 명명된 바위가 있다. 전설은 언제나 슬프다.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의 비극이 서려 있다.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 인간과 결혼하여 만삭의 몸이 되었다. 옥황상제가 이를 알고, 선녀와 태아, 남편을 세 토막의 바위로 변하게 했다. 옥황상제는 악마가 되었다. 스토리텔링을 좀더 정교하게 할 필요가 있다. 두꺼비바위, 장군바위, 선녀바위의 전설이 서린 성덕산을 내려가면 교산리 덕음마을이다.
양사면(兩寺面) 교산리(橋山里)는 교항동(橋項洞)이라 하였는데 증산동(甑山洞)을 합하여 교산리(橋山里)가 되었다고 한다. 교산리 덕음마을을 지나가는데 탱자울타리에 굵고 노란 탱자들이 가시줄기에 달려 있다. 주로 남쪽 지역에서 탱자나무가 자라는데 강화도에서도 탱자나무가 자란다. 탱자나무의 지리적 분포 북한계는 강화도이며, 강화군 사기리 탱자나무는 수령 약 400년으로 추정되며 천연기념물 제79호로 1962년 12월에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강화도에는 2024년 현재 약 460년 이상 자라는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교산리 덕음마을 마을길을 따라 '전망대로'로 나가면, 덕고개 방향 전망대로 남쪽에 양덕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왜 양덕공원이지? 양사면 덕음마을 공원이라는 뜻의 '양덕공원(兩德公園)'일 것이라 추측한다. 덕음마을부터 서해랑길은 교산리 들녘의 평지를 따라간다. 북서쪽으로는 북성리 해안 지역으로 드넓은 들녘이 이어지는데, 아마도 간척농지인 것 같다. 남서쪽에 나즈막한 시루 모양의 증산(甑山)이 교산리를 두 지역으로 나누는 듯. 증산을 경계로 북쪽은 양사면 교산1리, 그 남쪽은 교산2리 지역 같다. 양사면(兩寺面)이 서사면(西寺面)과 북사면(北寺面)을 합하여 양사면이 되었다면 교산1리는 북사면 교항동(橋項洞), 교산2리는 서사면 증산동(甑山洞)이었을 것이다. 증산 북쪽이고, 성덕산 남쪽에 자리한 교산1리 마을은 양사파출소가 있는 곳이 덕음마을, 그곳에서 서쪽 방향으로 덕음마을, 응곡마을이 차례로 자리한다.
증산 북쪽 기슭의 전망대로1366번길을 따라 드넓은 교산1리 들녘을 지난다. 증산을 오른쪽으로 돌아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린 탐스런 감나무를 지나 솔숲 언덕을 넘으면 서사(西寺)길이다. 서사길은 이 지역이 예전에 서사면(西寺面)이었음을 알리는 도로명일 것이다. 그러니까 옛 서사면 지역, 현 양사면 교산2리 지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들깨밭에는 들깨를 털기 위해, 베어낸 들깨줄기를 늘어놓고 꼬투리들을 바싹 말리고 있다. 줄기를 베어낼 때의 짙은 들깨 향은 사라지고 은은한 들깨 향이 풍겨온다. 들깨 향은 어머니의 향기 같다. 향기는 덧없이 사라진다. 여인들은 그 향기를 저장한 향수(香水)를 몸에 묻혀 향기를 날리며 거리를 활보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香水)'와 영화가 생각난다. 이 작품에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한 인물의 악마적 삶이 그려져 있다. 향수의 중독은 마약과 같을까? 내게는 몹시 싫은 향수를 날리는 여인들이 악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들깨 밭의 은은한 들깨 향이 어머니의 향수(鄕愁)를 불러온다.
북쪽 북성리 간척농지 해안에 구릉이 보이는데, 그 언저리에 구등곶돈대와 작성돈대가 있을 것이며, 바다 건너는 황해도 연백군 지역일 것이라 추정한다. 2년 7개월 전 북성리 들녘과 해안의 철책을 따라 교동대교 입구까지 걸어간 추억이 떠오른다. 서해랑길은 저곳으로 개통되었어야 하는데, 군사 지역이어서 이렇게 개통했을 것이다. 북성리 간척농지 남쪽 교산천 너머의 다리목마을을 가늠하며 서사(西寺)길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이어가면, 강화도 첫 개신교회인 교산교회가 있다. 교산교회는 교산리 시리메마을 입구에 자리하며 교산교회 앞 서사길 삼거리에는 강화복음전래기념비와 선상세례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교산교회와 주변을 좀더 살피고 싶은데, 길동무들이 교산천 다리목마을 쪽으로 앞서간다. 교산교회는 못 들어가더라도 조형물은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교산교회(橋山敎會)는 1893년 강화도에 첫 번째로 설립된 개신교 교회이다. 1893년 보름달이 환히 빛나는 밤에 존스 선교사는 달빛에 예문을 비추어 읽으면서 배 위에서 시루메마을에 살던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이렇게 하여 강화의 첫 개신교회인 교산교회가 시루메마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강화 교산교회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2009년에 ‘강화복음전래기념비’를 제막하고, 선상세례(船上洗禮) 조형물을 조성하였다. 교산교회 입구에서 왼쪽 배우개길을 따라가면 교산리 증산(甑山) 아래 시리메마을로 이어진다. 강화복음전래기념비 앞에서 남쪽 교산리 들녘을 바라본다. 교산저수지가 있고, 교산천이 흐르며, 뒤에는 별립산이 우뚝하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4.5km
전체 소요 시간 : 3시간 42분
강화평화전망대 가는 길 입구 주차장에 서해랑길 103코스&DMZ 평화의 길 1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 103코스 안내도가 DMZ 평화의 길 1코스 안내도와 함께 그려져 있다.
서해랑길 강화 103코스는 거리 13.1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어려움이다.
서해랑길 강화 103코스 역방향 탐방을 출발하며 서해랑길 103코스&DMZ 평화의 길 1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
서해랑길을 탐방하기 전 강화평화전망대 야외전시장으로 올라가서 시설물과 전시물을 살폈다.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가 해안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그 앞에는 무궁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강화평화전망대는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민족 동질성 회복과 평화적 통일의 기반구축을 위한 문화관광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민통선북방지역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전방 약2.3㎞ 해안을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황해도 연안군 및 백천군으로 넓게 펼쳐진 연백평야가 있고 우측은 개풍군으로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송수신탑, 송악산 등을 조망할 수 있어 타 지역에선 보기 힘든 북한의 문화생태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7(구 철산리 산 6-1)/ 문의전화 : (032)930-7062, 7063/ 층별안내 - 1층 : 관리실, 통일염원소, 휴게실, 기념품매장, 화장실/ 2층 : 전시관, 북한땅 조망실(시청각교실)/ 3층 : 북한땅 조망실(시청각교실), 옥외 전망대/ 지하1층,4층 : 군부대 전용시설 - 강화군시설관리공단
무궁화공원 언덕에 여러 설치물과 전시물이 조성되어 있다. 왼쪽에 김흔중 시비, 애사(愛史) 편강열(片康烈) 의사(義士) 추모비,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그 오른쪽에 제적봉비가 세워져 있고, 맨 오른쪽에 해병대 상륙돌격장갑차가 전시되어 있다.
시비 '채명신 장군은 묘비가 말한다'와 시비 '피한'은 모두 김흔중의 시비이다.
밤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모여/ 속삭이며, 미소가 넘쳐 나지만/ 나라 사랑의 별 이름은 없더라.// 1926년 애국 애족의 삼태성이/ 황해도 곡산 요람에서 떠 올라/ 원수의 오성보다 더욱 빛났다.// 오늘 새벽에 소망의 삼태성이/ 현충원 동쪽 하늘에서 빛나며/ 아침 기다려 여명의 문을 연다.// 월남 전사자들의 단잠을 깨워/ 빗돌에 새겨진 이름을 부르며/ 젊은 청춘의 원혼을 위로한다.// 불멸의 장군은 묘비가 말할 뿐/ 손수건을 적신 진실한 사랑은/ 가슴 아픈 눈물로 얼룩져 있다.//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의/ 삼태성의 별이 작은 빗돌 위에/ 유독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더욱 혼탁한 정치를 멀리 하고/ 올곧은 귀감의 전쟁 영웅으로/ 오늘도 의로운 별로 떠오른다.// 한반도에 전쟁, 공포 사라지고/ 민족통합의 새 역사 이룰 때에/ 모든 선열들 기뻐 환호하리라.// 삼태성은 지구종말 올 때까지/ 영원히 새벽별과 함께 떠올라/ 새벽을 깨우는 별빛이 되리라.// 언젠가 진혼 나팔이 그치겠고/ 천사의 나팔 소리가 진동하면/ 모두 잠깨어 홀연 비상하리라.// 대한민국 만세, 남북통일 만세/ 온 백의민족이 참빛 세상에서/ 자유, 민주, 평화를 누릴 것이다. 2014. 1. 13. 청파 김흔중 목사
나의 조국 금수강산/ 두 동강이로 허리를 잘라/ 강화도를 휘감아/ 한강수는 유유히 흐르고// 하루에도 두 차례 거슬러 오르고 다시 내려가는/ 피눈물 고인 짙은 물줄기// 뚝건너/ 한 많은 사연이 있어/ 애절한 신음소리 끊이지 않고// 한 핏줄 내 형제를 바라보며/ 손짓해도 못 본체 외면하면/ 목놓아 다시 불러 보아도/ 메아리조차 허공으로 빗겨가니// 좁은 가슴에 스미는 설음일랑/ 이곳에 묻어두고/ 찬란한 미래의 꿈으로/ 비둘기 나래를 펴리니// 가까우면서도 멀고 먼/ 강 건너에/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 놓아/ 단숨에 가고 오며/ 통일의 찬가를 부르리라. '피한(彼恨)' 1974년 11월 3일 강화도 최북단 758OP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며 해병 소령 김흔중 씀
애사(愛史) 편강열(片康烈, 1892~1929)은 황해도 연백(延白) 출생, 14세 때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한학(漢學)을 하다 말고 16세 때 영남 의병장 이강년(李康佾)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1907년 전국의 의병이 양주(楊州)에 집결, 서울로 진격할 때 부상을 입고 귀향하였다가 1910년 평양 숭실(崇實)학교에 입학, 학우들과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암살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월산 주비대(籌備隊)를 조직, 황해도 일대의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다시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서 조정으로부터 초토사(招討使)로 임명된 이정암(李廷馣)이 1,000여 명의 일본군을 맞아 승리한 연안대첩(延安大捷)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를 기려 1608년 현재 북한 지역인 황해도 연백군 모정리에 세웠는데, 실향민이 양사면 인화리(망향단)에 재건했고, 이를 2009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임진년(1592년)에 왜군이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하여 북상했습니다. 우리의 방비(防備)는 미약했으나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서 해전으로 왜군의 기세를 꺾었고 절도사 김시민(金時敏,1554년~1592년)은 진주성(晋州城)에서 분투(奮鬪)하여 충절을 다했으며,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은 의병(義兵)과 함께 연안성(延安城)을 지켜냈습니다. 또한 원수 권율(元帥 權慄)은 행주산선(幸州山城)에서 승리하였고 명(明)의 제독 이여송(李如松,1549~1598)은 평양성(平壤城)의 왜군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개성(開城)을 탈환함으로써 3경(평양. 개성. 한양)과 8도를 수복했습니다.
살펴보건대 고(故)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이정암(知中樞府使 李廷馣,1541~1600)은 지난 날 주상(主上)께서 몽진할 때 호종(扈從)했는데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던 공의 아우 정형(廷馨)이 형과 함께 개성(開城)을 지키겠다고 주청(奏請)하였고, 임진강 방어전에서 실패하자 공은 그해 8월 22일 연안부(延安府)로 넘어갔습니다.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이 의병 1백여 명을 모아 반겨 맞으며 말하기를 공께서 부사(府使)로 있을 때 은혜를 베풀었던 이곳을 지켜달라고 하여, 공이 싸워 죽을 곳을 얻었노라 하고 의병 5백여 명을 모아 각자에게 임무를 분담시키고 가마솥을 걸어 노약자들도 구휼(救恤)했습니다. 28일 적장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재령(載寧), 신천(信川), 해주(海州)를 함락시킨데 이어 3천여의 병력을 몰고 연안성으로 쳐 들어오니 사람들이 놀라 성밖으로 도주하려 했습니다.
공은 사수(死守)를 결심하고 겁을 먹은 사람은 출성(出城)해도 막지 않겠다 하니 다들 감격하여 힘껏 싸울 것을 다짐했습니다. 저녁 무렵 연안성의 방어태세를 살피던 적의 신봉을 중문장 장응기(中門將 張應祺)가 화살로 사살하자 왜군은 성 서쪽에서 대포와 불화살을 쏘아 성내의 초가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했지만 때마침 풍향이 바뀌어 불길이 성 밖으로 건너뛰자 적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적은 막사를 헐어 해자를 메우며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자, 공은 섶 위에 앉아 아들 준(濬)에게 성이 함락되면 섶에다 불을 질러 아비가 자진할 수 있게 하라 명하자 모두가 감읍(感泣)하며 죽을 각오로 나흘간 맞서 싸우니 적의 과반수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적은 전사자의 시체를 모아 불사르고 다음날 아침 포위를 풀고 패퇴하였고, 아군은 적이 남긴 시체 18구를 구덩이에 묻고 우마 90여 필과 군량미 130여 석을 노획했습니다. 이 대첩으로 연안(延安) 이하 13주(州)가 회복되었으며, 아산(牙山), 강화(江華), 용강(龍岡)으로 이어지는 서해의 물길이 열린 것은 공의 힘이었습니다.
공의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며 21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했고, 문장은 세상을 울렸으며 국란에 무훈(武勳)을 떨쳤으니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장부(丈夫)입니다. 이 비석(碑石)은 좌의정 이항복이 짓고, 대사헌 정사호(鄭賜湖)가 썼으며 상호군 김상용(上護軍 金尙容)이 전자(篆字)하여 선조(宣祖) 41년(1608) 5월에 세웠습니다. 연백군 모정리에 있던 이 비는 실향민이 망향단(양사면 인화리)에 의사 편강열 추모비와 함께 건립했던 것으로 2009년 8월 19일 이곳 평화전망대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의 자유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공산 침략자들을 무찔러야 한다. 그래서 이곳을 제적봉이라 이름하고 불굴의 의기를 기르는 것이다. 서기 1966년 6월 27일 민주공화당 의장 김종필 명명. 해병 제1여단 건립. - 제적봉碑
공정식 제6대 해병대사령관은 최초 김포 애기봉을 제적봉으로 명명하려 하였으나, 1966년 故 박정희 대통령께서 현 애기봉 방문시 애기의 전설을 듣고 제적봉 명칭 대신 애기봉으로 명함에 따라 강화도의 현 고지를 새로이 제적봉으로 정하고, 1966년 당시 민주공화당 김종필 의장 참석하에 그가 친필로 쓴 제적봉 비(碑) 건립과 명명식을 거행했다. 제적봉은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민족의 자유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공산 침략자들을 무찔러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현재까지도 해병대는 이 봉우리에서 불굴의 투지와 매서운 눈초리로 적을 제압하고 있다. - 설명안내판
해병대 상륙돌격장갑차 2대가 전시되어 있고, 그 앞에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서부전선 최전방 사수를 위하여 민·관·군 결의를 굳게 다짐하고, 평화통일의 염원이 이루어지도록 기원하면서 귀신잡는 해병대와 애환을 같이한 상륙돌격장갑차를 이곳 평화전망대에 설치하였다. 해병대는 전시에 적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병참선을 차단함으로써 전승보장에 앞장서는 국가전략기동부대이다. 이 장비는 상륙작전시 해병대(상륙군)를 해상의 함정으로부터 적진으로 투입할 수 있도록 제작된 수륙양용 장비로써 정식 명칭은 상륙돌격장갑차(LVT-P7)이며, 1975년부터 대한민국 해병대에서 상륙작전 핵심 전력으로 운용하다 2004년에 국산장비와 대체되었다. ■최초 제작년도 : 1971년 ■제작국가 : 미국 ■길이 : 7.94m ■높이 : 3.3m ■폭 : 3.2m ■중량 : 25.6톤 ■무장병력 : 28명(승무원 3명) ■속도 : 최대 72Km(육상), 13.4Km(해상) - 설명안내판
북녘 땅을 바라보는 해안 언덕에 망배단(望拜壇)과 가곡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조성되어 있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는 2010년 5월에 준공되었다. 노래비는 높이 3.5m 석조 조형물로, 하단 중앙에 금강산 부조물, 왼쪽에 '그리운 금강산' 노랫말, 오른쪽에 작사가 한상억과 작곡가 최영섭 약력이 적혀 있으며, 상단에는 망향의 그리움과 통일의 염원을 담아 비상하는 날갯짓 모양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노래비 앞에는 높이 90㎝의 쇠기둥 3개를 설치, 기둥에 장착된 버튼을 누르면 바닥의 야외용 스피커를 통해 조수미, 박인수, 플라시도 도밍고 등 국내외 유명 성악가가 부른 다양한 '그리운 금강산' 가곡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강화 평화전망대가 평화의 물길 흐르는 전망대가 되기를 염원하는 설명안내판이 노래비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강화 평화전망대가 위치한 양사면 철산리 일대는 민통선 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었으나, 전망대를 개관한 2008년부터는 출입을 허용하여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전망대에서 북한까지의 거리는 불과 2.3Km밖에 되지 않아 날씨가 맑을 때에는 육안으로 조망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바다 건너편으로 마주한 마을은 황해북도 개풍군으로 학교, 마을회관, 주택 등을 볼 수 있으며 망원경을 이용하면 농사일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주민의 움직임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전망대 정면으로는 멀리 송악산이 보이며 그 아래에 개성시와 개성공단이 위치한다. 전망대에서 개성시까지의 직선거리는 불과 18Km로 강화도 남단 마니산보다도 가까운 거리다. 전망대 좌측으로는 황해남도 배천군과 연안군이 자리하며 북한 최대의 곡창지대인 연백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개풍군과 배천군 사이로는 예성강이 흐르고, 고려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벽란도'가 바로 이 예성강 하구에 있었다. 전망대 앞 바다는 남북의 한강, 임진강, 예성강 세 강물이 바닷물과 함께 평화롭게 흐르는 공간이다. 그러나 남북의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으로 단지 새들만이 자유롭게 통행할 뿐, 실향민 저마다의 안타까운 사연이 말없이 흐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 이 물길을 따라 벽란도 여행은 물론 개성까지도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뒤에는 북녘 땅의 위치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위치안내도를 통해 북녘 땅의 위치를 살펴본다.
조강 너머 북녘 땅을 바라보며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과 송악산을 가늠한다. 중앙 뒤에 개경과 송악산이 흐릿하다.
강화 평화전망대 야외전시장을 살피고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서해랑길 103코스 탐방을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서해랑길 안내도가 주차장 나무계단 입구에 세워져 있고, 주차장 북쪽 끝에 남북 1.8 평화센터가 자리한다. 이 건물에는 1층에 양사면 농·특산물 직거래판매장과 그리울 카페, 2층에 식당, 3층에 옥상쉼터가 있다고 한다.
강화 평화전망대 아래 전망대로에서 왼쪽 나무계단길을 따라 내려간다. 철곶(鐵串) 초소가 보이고, 조강(祖江)이 드넓다.
왼쪽 나무계단길을 따라 강화 평화전망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내려가 '전망대로'로 나간다.
철산리 해안에 철책이 이어지며, 철곶 초소가 있으며, 조강(祖江)이 흐른다. 조강 중앙에는 군사분계선이 지난다.
철산리는 조선시대 철곶보(鐵串堡)가 있던 지역으로 철곶(鐵串)이라 부르고 있다. 포구(浦口) 마을인 산이포(山伊浦)와 합하여 철산리라 칭하게 되었다. 산이포(山伊浦)는 철산리 동남쪽 해변에 있는 포구마을이라 예전에 포촌동이라 불러왔으며, 예전에는 면사무소, 시장, 학교, 경찰지서 등이 있었다. - 인천광역시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전망대로를 따라간다.
평화전망대 버스정류소 위쪽에 '제적대로(制赤大路)'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제 도로명은 '전망대로'로 바뀌었다. "전투 지휘와 전장 감시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전술도로를 개척, 이를 제적대로라 명명함. 1982. 6. 6. 해군 해병 제9927부대장"
평화누리길 이정목에 평화전망대에서 강화대교까지 13.85km 거리라고 적혀 있다. 'DMZ평화의길' 1코스이다.
철산리 들녘 북쪽에 조강(祖江)이 흐르고 그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며 그 북쪽 중앙은 황해도 개풍군 해창포이다.
서해랑길은 전망대로에서 오른쪽 철산교회&기도원 방향으로 이어간다.
전망대로에 세워져 있는 이정목에서 서해랑길은 별악봉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 뒤에 철산교회가 보인다.
철산교회 입구를 지나 들길을 따라 별악봉 능선으로 이어간다.
전망대로에서 철산교회 입구로 꺾어 들어왔다. 맨 왼쪽에 철산교회, 중앙에 조강, 그 너머 오른쪽은 개풍군 해창포이다.
위쪽에 해주 최씨 종산(宗山, 한 문중의 조상을 모신 산)이 있는 듯. 해주 최씨 종산을 관리하는 컨테이너 건물 앞을 지나간다.
능선에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뒤쪽은 군부대 뱡향, 오른쪽은 제적봉 방향, 서해랑길은 왼쪽 별악봉 방향으로 이어간다.
능선을 따라 경주 김씨 묘를 지나와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왼쪽은 양사면 철산리 철곶 방향, 오른쪽은 양사면 북성2리 방향, 서해랑길은 위쪽 별악봉으로 올라간다.
서해랑길은 성덕산 방향으로 이어가는데, 잠시 해발 167.3m 별악봉 쉼터정자로 가서 풍경을 조망한다.
강화지맥이 조강으로 떨어지며 그 서쪽에 철산리 마을이 있고, 산줄기 뒤에는 양사면 철산리 덕하천 하구와 산이포(山伊浦)가 있을 것이다. 중앙 맨 뒤에 보이는 산은 오두산이 아닐까?
양사면 철산리 철곶이 앞에 있고, 조강 너머 중앙에 황해도 개풍군 해창포가 있으며, 조강 중앙에 군사분계선이 지난다.
조강 너머 황해도 개풍군 지역이 펼쳐지고, 왼쪽 맨 뒤에 송악산과 개성특별시 지역이 흐릿하다.
바로 앞 중앙에 제적봉이 가늠되며, 조강 너머 북쪽 맨 오른쪽 뒤에 송악산, 맨 왼쪽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碧瀾渡)일 것이다.
별악봉 쉼터정자에서 풍경을 조망한 뒤 성덕산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쪽으로는 양사면(兩寺面) 북성리 들녘이 펼쳐진다. 중앙 해안의 작은 구릉에 양사면 북성리(北省里) 구등곶돈대(龜登串墩臺)와 작성돈대(鵲城墩臺)가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바다 건너는 황해도 연백군 지역일 것이다.
북성리(北省里)는 서해에 있는 작은 섬마을로, 북한 땅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자연마을은 몰미, 생설미, 오댓골 마을이 있다. 몰미 마을은 마장이 있었다 해서 말미라 불리다 몰미 마을이라 개칭되었다. 생설미 마을은 삼성미 밑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오댓골 마을은 처음에 다섯집이 있어 이름 붙여졌다. - 두산백과
남쪽으로는 중앙 맨 뒤에 고려산, 오른쪽 뒤에 봉천산이 보이며, 덕하천이 양사면 덕하리(德下里) 들녘을 가르며 흐른다. 덕하천은 봉천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덕하리를 지나 양사면 철산리 산이포에서 조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오른쪽 앞에 성덕산, 그 왼쪽 뒤에 별립산이 살짝 머리를 보이며, 왼쪽 뒤에 봉천산, 양사면 덕하리 들녘에는 덕하천이 흐른다. 중앙 맨 뒤에 석모도의 상봉산 산줄기가 가늠된다.
양사면(兩寺面)은 강화군 최북단에 위치한 면으로 조선 태종13년(1413년) 이래 서사면(西寺面)과 북사면(北寺面)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914년(순종 8년) 서사·북사 두 면을 병합, 양사면으로 개칭하였다. 1950년 6·25 사변으로 면사무소를 철산리에서 덕하리로 이전하였으며 4년 뒤 현위치인 교산리로 옮겼다. 1992년 12월 30일 현청사를 신축,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강화군
철계단을 내려와서 별악봉-성덕산 능선의 안부로 내려간다. 철계단을 내려와서 별악봉 방향의 철계단을 올려본다.
별악봉~성덕산 능선을 걸으며 빛깔 고운 꽃향유 군락지들을 여러 곳에서 만났다.
왼쪽은 덕하2리 방향, 오른쪽은 북성2리 방향, 서해랑길은 직진하여 성덕산 쉼터 방향으로 올라간다.
성덕산 쉼터로 가는 산길 언덕에 양철로 지은 창고 건물이 서 있다.
성덕산 쉼터로 오르는 길에 두꺼비바위라고 명명된 바위가 있다.
옛날에 물과 공기가 좋아 먹잇감이 풍부한 생설미 쪽 태미산 자락에 두꺼비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는데 아내는 늘 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벼락봉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을 보고 싶어했다. 남편은 아내의 간청에 따라 경사가 급하고 오르막이 험한 벼락봉으로 올라가던 중 해가 저물어갔고 허덕이며 힘에 지친 아내가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내를 살리려고 백방으로 애를 써 보았으나 허사였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아내와 함께 바위로 변했다는 슬프고 깊은 부부애를 담은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설명안내판
성덕산 쉼터에는 육각정자와 운동기구가 설치된 체력단련장이 조성되어 있고,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성덕산 쉼터에서 약수터 갈림목을 지나 올라오면, 해발 215m 성덕산 정상을 알리는 성덕산 표지목이 서 있다.
성덕산 정상 바로 아래 남쪽에 장군바위라고 명명된 바위가 있다.
옛날 성덕산 기슭에 힘이 센 9척 장사가 살고 있었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앉았다 일어나기만 해도 그 자리에 흔적이 생기고, 바위를 두드리거나 주먹으로 칠 때마다 바위가 파여 지금도 바위 표면에 다양한 모양의 파인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장군바위 또는 장사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 설명안내판
장군바위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남쪽에 별립산, 서해 바다 건너 중앙의 교동도에 화개산이 솟아 있다.
성덕산 남쪽 기슭에 선녀바위라 명명된 바위가 있다.
이 마을에는 외모가 출중하고 힘이 센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선녀가 지상을 내려보다가 우연히 이 총각을 발견하고 흠모하게 되었다. 선녀는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고 잠시 내려와 총각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며 총각의 아이를 임신하여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는 만삭에 이르자 이 바위에서 고독한 출산을 해야만 했다. 뒤늦게 옥황상제가 이 내용을 알고 노여움이 생겨 선녀와 아이, 총각까지 세 토막의 바위로 변하게 만들었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으며 아직도 해산의 고통을 참기위해 옷자락을 끌고 다녔던 흔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 설명안내판
양사면(兩寺面) 주민자치센터와 양사면사무소가 왼쪽 언덕에 자리한다. 양사면 교산리(橋山里)는 교항동(橋項洞)이라 하였는데 증산동(甑山洞)을 합하여 교산리(橋山里)가 되었다고 한다.
교산리 덕음마을로 내려가며 남서쪽을 바라보면 별립산이 우뚝하다. 별립산에는 공군 레이다 기지가 있다고 한다.
양사면 교산리 언덕에 양사면주민자치센터와 그 오른쪽에 양사면사무소가 있다.
교산리 덕음마을 마을길을 따라 '전망대로'로 나간다. 왼쪽의 울타리는 탱자나무로 조성되어 있다.
양사면 덕음마을 공원이라는 뜻의 '양덕공원(兩德公園)'이 전망대로 덕고개 방향에 조성되어 있다. 서해랑길은 전망대로 오른쪽 양사파출소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전망대로를 따라 양사파출소 방향으로 이어간다.
양사면 교산리 '전망대로' 북쪽에 강화경찰서 양사파출소가 있다.
전망대로에서 교산리 들녘 너머 남서쪽으로 별립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른쪽에 시루를 닮은 증산(甑山)이 있다.
덕음 버스정류소 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전망대로와 작별하고 왼쪽 전망대로1366번길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전망대로1366번길을 따라 앞의 증산(甑山)을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산줄기 오른쪽 너머에 교산교회가 있다.
오른쪽에 양사면 교산1리 덕응마을과 중앙에 응곡마을이 있고, 수로가 서쪽 북성리 방향으로 흐른다. 교산리 동쪽에서 덕하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덕고개부터 응곡마을까지 이르는 마을을 덕응이라 부른다고 한다.
오른쪽 전망대로1366번길을 따라 증산 북쪽을 돌아간다.
왼쪽 뒤 성덕산 산줄기에서 덕음마을을 거쳐 전망대로로 나와, 삼거리에서 전망대로1366번길을 따라왔다.
전망대로1366번길을 따라 중앙 뒤 언덕을 왼쪽으로 넘어 '서사(西寺)길'로 이어간다.
노란 감들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가 서 있는 전망대로1366번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간다.
감나무에 대봉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풍경을 감상하며 전망대로1366번길을 따라 언덕을 넘으면 서사길로 이어진다.
전망대로1366번길 언덕을 넘어 서사(西寺)길로 들어왔다.
농가의 도로명 주소가 서사길임을 알려준다. 서사길은 이 지역이 예전에 서사면(西寺面)이었음을 알리는 도로명이다.
서사길 들깨밭에, 들깨를 털기 위해 베어낸 들깨줄기의 꼬투리들을 바싹 말리고 있다. 뒤쪽 해안 왼쪽에 구등곶돈대가 보이며, 그 오른쪽 구릉지 뒤에 작성돈대가 있을 것이다. 바다 건너는 황해도 연백군 지역일 것이라 추정한다.
서사길304번길에서 간선도로 서사(西寺)길로 나간다. 맞은편 마을은 교산리 다리목마을인 듯.
서사길을 따라 교산교회 버스정류소를 지난다.
교산(橋山)은 교항동(橋項洞)이라 하였는데 증산동(甑山洞)을 합하여 교산리(橋山里)라 하였다. 시리메는 교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데, 산 모양이 시루를 엎어 놓은 형상이어서 마을 이름을 증산(甑山)이라고도 부른다. - 인천광역시사
교산교회 버스정류소 뒤 언덕에 강화의 첫 개신교회 교산교회가 자리한다.
오른쪽 앞에 강화복음전래기념비와 선상세례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고, 왼쪽 교산리들 너머에 별립산이 우뚝하다.
교산교회 삼거리 광장&주차장에 교산교회 표지목이 세워져 있고, 삼거리 남쪽 길가에 선상세례 조형물과 강화복음전래기념비가 조성되어 있다.
이 조형물은 존스 선교사가 강화에서 최초로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선상세례를 주는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1892년 제물포교회에 부임한 존스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강화를 찾아왔으나 입성을 거부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제물포에서 주막을 하던 이승환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주막을 그만두고 고향인 강화 서사로 돌아왔다. 그가 농사를 지으면서 늙으신 어머니를 전도하여 세례를 요청하자 존스 선교사는 조선사람의 복장을 하고 은밀히 강화를 찾아왔지만 다리목 마을의 김초시 양반가문에서 "서양 오랑캐가 우리 땅을 밟으면 쫓아가서 그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반발하자 어머니를 배로 모셔오도록 하였다. 이에 이승환은 어머니를 업고 들판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고 산을 넘고 갯벌을 지나 배로 갔다. 보름달이 환히 빛나는 밤에 존스 선교사는 달빛에 예문을 비추어 읽으면서 배 위에서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것이 강화에 최초로 복음의 겨자씨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선상세례 조형물 앞에서 강회의 첫 개신교회인 교산교회를 바라본다.
교산교회(橋山敎會)는 1893년 강화에 첫 번째로 설립된 개신교 교회. 1893년 존스 목사는 인천에 있던 전도인 이명숙을 시루미 마을로 보냈고, 이승환의 집에서 교인 4∼5명이 모여 예배를 시작하였다. 한편 서민층이었던 이승환과는 달리 양반 출신인 김상임의 입교는 강화지역 복음 전파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기독교를 믿게 된 김상임은 가신(家神)과 사당을 불사르고 자기 집 앞마당에 열두 칸짜리 예배당을 지어 시루미 이승환의 집에 모였던 교인들을 옮겨오게 했다. 이로써 김상임이 살던 다리목[橋項] 양반들과 이승환이 살던 시루미 서민들 50여 명이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어 교산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 이름은 교항(橋項)과 증산(甑山)을 합친 것이다. 1893년 말 존스와 스크랜턴 선교사가 교산교회에서 유숙하기도 했고, 내리교회 전도부인 백헬렌도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썼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강화 교산교회 입구에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교산교회 입구에서 왼쪽 배우개길을 따라가면 교산리에서 가장 큰 시리메마을로 이어지는데, 마을 뒤의 산 모양이 시루를 엎어 놓은 형상이어서 시리메마을이라 불리며 한자로 증산(甑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중앙 뒤에 별립산이 우뚝하다.
강화 복음전래기념비와 선상세례 조형물을 뒤쪽에서 살폈다.
‘강화복음전래기념비’ 뒷면에 강화 지역의 개신교 전래와 전파 상황을 새긴 석판을 붙여 놓았다.
1893년 강화 북부 서사면 시루미마을 이승환 모자가 선상세례를 받음으로 강화에 떨어진 '복음의 겨자씨'는 존스 선교사가 파송한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부인 백헬렌의 헌신과 교항마을의 유력한 양반인 김상임의 개종과 그의 지도력으로 강화 지역사회에 확고한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강화 기독교의 모교회인 강화 교산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복음의 물줄기는 홍의를 거쳐 고부와 강화읍으로, 망월과 교동으로, 남쪽 길상과 화도, 그리고 바다 건너 삼산과 주문까지 흘러 넘쳐 강화 전 지역이 하나님 축복의 땅이 되게 하셨다.
강화 교산교회에서 2009년에 ‘강화복음전래기념비’를 제막하고, 선상세례 조형물을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