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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자신에게
설교함 | 1-5 1 ①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②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③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④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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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기도
찬송하리라 | 6-11 6 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8 ⑥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⑦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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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편, 상한 마음의 치유
요절 : 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2편에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가 있습니다. “고라”는 레위 지파 고핫의 자손들로 성막의 문지기(대상 9:19)와, 찬양을 담당했습니다. 다윗은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는데”(대상 25:1), “헤만”이 바로 고라 자손입니다. 42편의 내용으로 볼 때에 다윗이 사울에게 좇기여 성막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북쪽 헤르몬 산(6)을 유리하면서,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2) 하고, 갈망하면서 지은 시를, 고라 자손이 교훈(마스길)하기 위하여 노래로 부른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42편의 기자는 “마음이 상하고(4), 낙망하며 불안”(5, 11)해 하고, 주야로 눈물을 흘리고(3) 있습니다. 이럴 경우 치유책이 무엇인가? 도표에 표시된 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5) 하고 자신이 자신에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딤전 4:7), 즉 훈련이 필요한데, 설교 내용은 하나님의 행사를, “기억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낙망하는 일이 어찌 시편 기자뿐이겠는가? 그러므로 42-43편은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적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 단원(1-5) 자신이 자신에게 설교함
둘째 단원(6-11) 기억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라
첫째 단원(1-5) 자신이 자신에게 설교함
①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1) 합니다.
㉠ 42편에는 “영혼”이라는 말이 5번(1, 2, 5, 6, 11)이나 등장합니다. 이는 본문의 갈급함이 육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하신, 영혼의 갈망임을 나타냅니다. 이점이 어째서 중요하냐 하면 오늘의 염려와 낙망이 육의 문제일 뿐 영혼의 갈망에 대해서는 너무나 모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②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2) 합니다.
㉠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하는데, 이점을 구속사라는 맥락에서 보면 해결하여야 할 가장 큰 난제(難題)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어찌하여 나아갈 수가 없는지 그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이것이 하나님 존전(尊前)에서 추방을 당한 아담의 후예들의 본질적인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합니다.
㉡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3상)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가장 뼈아픈 말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합니다. 이는 대적이 조롱하는 말인데 마치, “뼈를 찌르는 칼”과 같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죄 값으로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모독을 받으시게 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15:1-2절에서는,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합니다.
저들은 자신들을 바벨론에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는 뜻입니다. 자신들로 인하여 모독을 받으시게 한 “주의 이름”을 위하여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79:10절에서도,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합니다. 요엘 선지자도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게 하겠나이까”(욜 2:17)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3) 하는 것입니다.
③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4상) 합니다.
㉠ 도표에 표시된 대로 4절 안에는 “전(前)에와, 이제”가 대조(對照)되어 있는데 전에는, “성일(聖日)을 지키고,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던”, 즉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한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4하) 즉,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처지로 인하여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런 조롱을 당하게 되었는가? 성도가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는 데는 첫째는, 대적의 박해를 인해서이고, 둘째는 자신의 범죄로 인한 징계 때문입니다.
④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落望)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不安)하여 하는고”(5상) 합니다.
㉠ 시편 기자는 “낙망하고, 불안”해 하고 있고, 3절에 의하면 울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시편 기자만의 일이겠는가? 그러면 “낙망과 불안”을 몰아내는 비결이 무엇인가? 당면한 문제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5중)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험한 파도 위를 걸을 수가 있었으나, 파도를 바라보자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仰望)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 40:31) 하십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라” 하는 구체적인 방도가 무엇인가? 도표에 표시된 대로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행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료법은,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107:20) 한,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은 유혹자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하신 “양약”(良藥)도 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본문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落望)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不安)하여 하는고” 하고, 자기(自己)가 자신(自身)에게 설교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경우가 5절과, 11절과, 43:5절, 이렇게 3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는 중요하고도 그만치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고 권면하고 있는데 이것이 자동적(自動的)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1:2) 한, 묵상(黙想)을 통해서만이 가능하여지는 것입니다. 77편의 기자도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고 번민을 합니다.
그러했던 그가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77:7-12) 하고,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들일을 “기억하여, 묵상하며, 깊이 생각”함으로 상한 마음을 치유 받게 됩니다.
㉣ 본문에서도,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5하), 즉 낙망과 불안은 물러가고,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자신이 자신에게 설교하는 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마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은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렘 31:33, 히 8:10) 하신 것입니다. 치료책은 “자신이 자신에게 설교”하는 법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원(6-11) 기억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라
둘째 단원의 중심 단어는 “기억하나이다(6), 기도하리로다(8), 찬송하리로다”(11) 한, “기억, 기도, 찬송”에 있습니다.
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6) 합니다.
㉠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북쪽 헤르몬 산 지경을 유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째 단원(1-5)을 통해서 상한 마음이 치유를 받은 줄 알았는데 또다시,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된다” 하고 말합니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고 있기(갈 5:17)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본문을 주목해보면 “낙망과 불안”해하는 육신의 자아와, 하나님을 바라는 성령의 “나”가 대결하듯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 3-4절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 그런 나를 향해서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오히려 내가 찬송하리로다”(5) 합니다.
㉰ 그런데 6절에서는 또다시,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된다” 하고 말하고,
㉱ 그런가 하면 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인자(仁慈)를 생각하며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합니다.
㉲ 그런데 9절에서는 또다시,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합니다.
㉳ 11절에서는 그런 나를 향해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합니다. 이런 갈등이 반복되는 것이 인간의 심령인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 전쟁이란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한 두 세력간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류의 시조는 부족함이 없는 에덴 낙원에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 한, “마음을 지키는 일”이란 생각보다 훨씬 치열한 싸움입니다.
㉢ 7절에서는 “주의 폭포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7) 하고 말씀합니다. “폭포소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기자는 헬르몬 산의 어떤 폭포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폭포소리, 깊은 바다, 파도 물결” 등의 표현을,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하는 말씀과 결부시켜 볼 때, 심령의 평강을 흔들어 놓기 위해서 “폭포같이, 성난 파도 같이” 몰아치고 있는 심적인 갈등을 나타내는 비유임을 알게 됩니다.
⑥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 합니다.
㉠ 8절 안에는 “인자(仁慈)와, 찬송과, 기도”가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와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인자를 생각하노라면 “찬양하고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했습니다. 그런데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3, 25) 합니다.
㉡ 그런데 육신의 자아는,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9) 하면서,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10) 하고 조롱하나이다 하고 항변하듯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⑦ 그리하여 42편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11) 하고, 또다시 자신이 자신에게 설교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 왜냐하면 상한 마음을 치료하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5절의 반복만은 아닙니다. 5절에서는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하고, 하나님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11절에서는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고,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 5절의 얼굴은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얼굴이요,
㉯ 11절의 얼굴은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얼굴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 “폭포소리”와 같은 파상적인 시련 중에서도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노라면 자비(慈悲)히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할 수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아멘. 이것이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비결입니다.
적용 : 이제 자신이 자신에게 설교하는 법을 훈련하시기를 바랍니다. 명심할 점은 그렇게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심비에 기록이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을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요, 심령을 살찌게 하는 보약이요,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양약입니다. 다른 비법이란 없습니다.
묵상
㉠ 42편의 사람은 어떤 처지에 있는가?
㉡ 그가 겪고 있는 심적인 갈등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 그에 대한 치료책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