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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프랑스, 루이 14세 초기의 부르봉 왕조(1)
임광자 추천 0 조회 157 08.05.14 09: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 ~ 1638. 9. 5 ~ 1715.9. 1) 초기의 부르봉 왕조(1)

 

가. 프랑스 왕권의 위기

 

(1) 섭정(攝政)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와 재상마자랭(Jules Mazarin)

 

1642년 10월, 영국에서는 에지힐에서 국왕파와 의회파가 정면으로 무력을 행사,

 

청교도 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후,

 

프랑스에서는 루이13세의 총신 생 마르가 그 해 9월 처형되었고,

 

그를 처형했던 리슐리외가 12월에 병사하였으며,

 

루이 13세도 이듬해 5월에 사망하였다.

 

국내에서는 귀족들의 입김이 드세고, 대외적으로는 30년 전쟁의 중요 고비에 국왕과 재상이 동시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1643년 5월, 루이 13세의 뒤를 이어 다섯 살의 루이 14세(1643∼1715)가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정치는 스페인 출신의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었고, 이탈리아 출신의 재상 마자랭이 안 도트리슈를 도와 정치를 맡게 되었다.

 

스페인의 왕녀로서 14살에 정략 결혼으로 부르봉왕가에 출가, 남편 루이 13세의 버림 속에 과부처럼 지내다가 37세에 처음으로 얻은 자식이 루이 14세 였고, 이 어린 아들이 왕이 되면서, 42세 중년의 나이로 섭정이 될 때까지 안 도트리슈의 이야기는 앞서 하였기 때문에(칼럼 제 58호 참조) 여기서는 생략하고, 재상 마자랭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자.

 

안 도트리슈는 그녀 보다 한 살 아래 인 마자랭(Mazarin,Jules / 1602. 7. 14 ~ 1661. 3. 9)을  섭정 정부의 재상으로 임명했다. 이래서 루이 13세 때 부르봉왕가의 정치가 리슐리외에 의해서 주도 되었다면, 루이 14세의 초기 18년간(1643 ~ 61)은 마자랭의 시대라 할만큼 모든 것은 그에 의해서 계획되고, 연출되고,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뒤마(AlexandreDumas)가 쓴 소설 삼총사에서는 쾌남 호걸 달타냥과 삼총사가 리슐리외의 학정(虐政)에 대항, 총사(銃士)들의 정의감 넘치는 장면들을 숨막힐 듯 그의 장려한 필치로 묘사(描寫)하였으며, 제 3부 브라쥐롱 자작(子爵) 편에서는 얼굴에 철가면(鐵假面 : masquede fer, L'homme au / ? ~ 1703. 11. 19)을 강제 착용 당한 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죽어 나간 수수께끼의 인물을 루이 14세의 쌍둥이 형(兄)으로 등장시켜 세상에 주목을 끌기도 했다.

 

뒤마의 소설이 허구가 아니고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정치범이 누구며 왜 얼굴을 가린 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는지는 지금으로서도 추측만 무성할 뿐 그 진실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소설에서 리슐리외와 마자랭 모두가 질 나쁜 정치인들로 묘사되고 있으나, 당시의 불안하고 혼탁한 프랑스의 정정(政情)에서 왕실을 지키고 왕권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소설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리슐리외와 마자랭은 성직자 출신이라는 것과, 귀족세력을 억압하고 왕권 강화에 몰두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리슐리외가 프랑스 출신인데 반하여 마자랭은 이탈리아 페스치나 태생으로 로마의 예수회 학원을 거쳐, 스페인의 마드리드대학을 나온 성직자로서 프랑스 쪽에서 보면 틀림없는 이탈리아인이었다.

 

1634년부터 교황의 특사로 파리에 머물게 되었을 때,루이 13세와 리슐리외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1639년에는 프랑스에 귀화하여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642년 12월 리슐리외가 사망한 후로는 왕비 안 도트리슈의 신임을 받았고, 루이 13세가 죽고,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면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출세(?)를 가능케 했던 것은 진실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능숙(能熟)한 그의 화술(話術)과, 연기(演技) 자를 뺨칠 정도로 뛰어난 표정 관리, 그러면서도 교활하고, 매수하고, 농락하는 수단과 두뇌회전 또한 보통이 아니어서 누구든 그 앞에 서기만 하면 매료(魅了) 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특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섭정 안 도트리슈가 그에게 반하여 애정행각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많은 여성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반면 이국출신의 재상으로서 그의 앞 길은 말 그대로 험로(險路)의 연속이었다.

 

(2) 왕권(王權)과 고등법원(Parlement)의 대립

 

재상 마자랭1643년 5월,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되었을 때, 후일 콩데家(Les princes de Conde)의 大콩데라고 불렸던 당시 22세의 앙기엥 公(Duc d'Enghien  / Conde Louis Ⅱ de Bourbon /1621 ~ 86)은 북쪽 국경지대 로크루아(Rocroi)에서 스페인 군을 크게 무찔러 섭정 안 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모두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30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위치를 더욱 굳건히 굳히기도했다.

 

그러나 이 앙기엥공, 즉 대콩데(후일 콩데 친왕, Conde,Louis II de Bourbon)는  같은 부르봉왕조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친외가 구분없이 따지는 그들의 족보(?)와 촌수를 우리들의 방식으로 계산하기란 매우어렵다.

 

다만 이 콩데가 프롱드의 난이 일어 났을 때, 처음에는 국왕을 도왔으나, 다음에는 반란군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누이 롱빌 공비와 함께 섭정 정부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마자랭에게 최대의 약점은 비록 프랑스로 귀화는 했지만 역시 그는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과 오만과 권위로 가득찬 프랑스의 귀족사회에서는 치명적이었다. 귀족들은 이 외국인 재상 마자랭을 암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마자랭은 우선 회유책으로 귀족들을 매수하기도 하고, 리슐리외에 의해 투옥된 국사범(國事犯)들을 풀어주는 은전(恩典)을 베풀어 환심을 사기도 하고, 귀족간의 경쟁을 부추겨 반목하도록 교묘히 조정하는 등의 술책으로 간신히 위기를 헤쳐 나갔다.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전쟁으로 인한 비용의 증가로 재정문제가 한계에 다다르자 마자랭으로서도 별도리가 없었다. 세금 청부업자들로부터 미리 돈을 받기도 하고, 각가지 명목을 붙여서 새로운 세금을 만들기도 하고, 관직을 만들거나 늘려서 이를 팔아 보충하는 등 모든 비상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런데 이미 농촌은 피폐되어 더 이상 담세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그보다는 조금 나은 파리 시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이 안겨졌다. 파리 시민들이 불평 불만은 당연하였고, 이런 것이 외국인 재상의 탓이라고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마자랭에 대한 파리시민들의 불신은 걷잡을 수 없는 위기로 몰고 갔다.

 

그 가운데 가장 불만이 많았던 것은 파리고등법원의 법관들이었다. 법관들의 불만은 이미 리슐리외 때부터 표면화 되고 있었는데, 당시의 법관이란 봉건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동시에 왕실 재정을 충당하는 수단으로 일반 인들에게 법관자리를 팔았고, 돈 있는 사람들이 이를 사서 재판관 및  하급귀족으로 행세하면서 귀족들에 대항했던 매관매직(賣官賣職)의 제도였다.

 

이런 고등 법원이 파리 이외에도 전국적으로 12개가 있었는데, 리슐리외는 앵탕당(intendantes)이라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이들의 권력을 박탈코자 했고, 더욱 이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반기 근무제라는 것을 만들어 이들의 임기를 반으로 줄여버렸다. 이런 것이 리슐리외가 죽기 1년 전인 1641년에 이루어 졌다.

 

이를 바꿔 말하면 앵탱당(총감 혹은 지사라고도 번역함)이라는 관직을 만들어 법관의 권한을 축소하고, 한편으로는 법관의 수를 배로 늘려서 그만큼 법관 자리를 팔았다는 것으로서, 법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우선 권위와 명예가 실추된 것은 고사하고,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현상이 일어나자 그 값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임기가 짧아 재임중 본전을 건지기도 어렵게 되었고, 물러나면서 팔아 한 몫 챙기는 것도 허사가 되고말았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교섭, 토의, 회담의 뜻을가진 Parley가, 프랑스에서는 고등법원(Parlement)으로, 영국에서는 의회(Parliament)로 되었다는 것은 역시 흥미 있는 일이다. 영국의 의회가 청원의 형식으로 혹은 무력으로 왕권에 도전했다면, 프랑스의 고등법원인 팔르망에서는 거부권으로 왕권에 도전하고 있었다.

 

고등법원의 권한 가운데는 재판권 외에도 국왕이 제정한 법(勅令)에 대해서 동의(同意) 절차를 거쳐, 고등법원에 등기된 후에 법률로서 그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법원에서 등기를 거부하면 그 법률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것이 당시의 제도였다.

 

파리고등법원은 마자랭의 중세(重稅) 정책에 수 차례 거부권으로 맞섰고, 왕실과 법원의 대립은 공공연한 사실로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마자랭은 1645년에 칙령의 등기를 거부한 파리 고등법원의 법관 한 사람을 투옥시켜 버렸다.

 

만약 이때 영국처럼 의회가 단합해서 왕권에 도전했다면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의외로 일찍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고, 후일 프랑스 혁명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어도 되었을지 모른다.

 

이런 기회는 그 후에도 여러 번 나타났지만 왕권에 밀리다가 결국 대혁명으로 마무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전국 삼부회는 마리 메디시스가 그의 어린 아들 루이 13세와 스페인 왕녀 안 도트리슈의 결혼 동의를 얻기 위해 열었다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해산 한 후(1614), 소집 권이 국왕에게 있었던 이 골치 아픈 전국 삼부회를 다시 열 생각이 왕실로서는 조금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1648년 1월, 재상 마자랭은 관직의 증설과 귀족의 세습 영지에 대한 과세 등을 포함한 7개의 재정 칙령을 만들어 고등법원에 강제 등기 시켰다. 여기에서 다시 법관들이 반발, 이를 수정함과 동시에 일종의 왕실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건의서(建議書)를 만들어 왕실에 제시했다.

 

한 발도 물러 설 수 없었던 왕실에서는 다시 법관의 매매를 계속 허용하는 대신 그들에게 재임 중 지불하던 봉급을 앞으로는 한 푼도줄 수 없다는 칙령을 다시 고등법원에 보냈다. 고등법원은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듯 들뜨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당할 수만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래서 프롱드의 난은 시작되었다.

 

나. 프롱드(La Fronde)의 난(亂 : 1648 ~ 53)

 

(1) 파리고등법원의 반기

 

센강과 시테 섬, 그리고 노트르담 사원1648년부터 53년 사이, 영국에서는 청교도 혁명으로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잔부의회를 중심으로공화정이 성립되었을 때

 

프랑스에서는 두 차례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다.

 

프롱드란 인명도 지명도 아니고 어린이들의 투석용 장난감 이름이라고 한다. 어린이들이 돌멩이를 멀리 던지기 위해 만들어진 장난감 이름을 여기에 붙인 이유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화가 난 시민들이 관리들에게 돌 팔매질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마자랭의 집에 돌멩이를 많이 던졌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반란 자체가 어린아이들의 돌 팔매 놀이처럼 장난기가 다분히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등 여러가지 해석을 붙이고 있다.

 

1648년 6월 30일, 파리 고등법원은 다른 관청과 연합해서 공동 투쟁하기로 결의하고, 연합회의를 개최하여 "왕국(王國) 개조(改造) 계획(計劃)"이라는개혁안을 의결했다. 이는 법관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하고 대상인과 금융업자 등 왕권과 결탁한 신흥 세력을 견제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기에서 마자랭은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여유를 보였다. 대부분의 지방 총감(앵탕당)을 폐지하고 직접세를 줄이는 방향으로 사태의 악화를 막았다. 그러다가 8월 30일, 30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했다는 낭보가 날아들자 마자랭의 섭정 정부는 태도를 돌변, 가장 반정부적이었던 법관 2명을 체포하는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리슐리외 시대부터 반란의 경험도 축적했고, 그럴 때 마다 나름대로 재미도 보았던 파리 시민들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주변의 농민들을 부추겨 시내 곳곳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반란을 일으키자, 파리고등법원 측에서도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며 여기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이를 당장 막을 만한 군대가 마자랭에게는 없었다.

 

다급해진 마자랭은 이들의 요구(왕국개조 계획)를 들어주는 척 하면서 일단 시간을 끌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파리 외각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30년 전쟁의 영웅 콩데 공(公)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1649년 1월,마자랭은 밤중에 국왕 모자와 함께 파리를 빠져 나와 근교의 생 제르맹 궁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외각에서 파리를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해서 외부와 단절된 파리에서는 당장 기아(饑餓)를 걱정할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었고, 반란군은 분열되었다. 반란을 주도했던 고등법원에서는 그들의 요구가 수용되는 전제조건으로 마자랭과 타협을 서둘렀고, 결국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마자랭은 1649년 3월 이들과 타협함으로서, 첫 번째 프롱드의 난은 끝났다.

 

1차 프롱드 난에서 가장 공이 컸던 것은 젊은 귀족이면서 전쟁 영웅인 콩데공(公)이 였다. 그는 프롱드의 난이 없었더라도 30년 전쟁에서 거둔 그의 전과는 프랑스의 국민적인 영웅이 되기에 충분했다. 앞서 일어난 프롱드의 난 때는 그의 누이 롱빌 공비(公妃)와 아우 콩티공(公)은 프롱드에 가담하고 있었다. 결국 형제 자매가 서로 다른 편에서 적으로 싸웠다는 것이다.

 

콩데공(公)의 명성이 높아지고, 위광이 커지자 그는교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다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왕실에 요구하였다. 왕실에서그의 요구를 들어 주었거나 어느 정도의 비위만 맞추어 주었더라도 제 2의 프롱드의난, 즉 대귀족 중심의 반란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시기 유럽에서는 왕권이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위기감은 프랑스 왕실에도 감돌고 있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도트리슈의 섭정 정부는 콩데공(公)을 비롯한 세 명의 공작(公爵)을 체포해 버렸다.

 

이에 겁을 먹은 일부 귀족들은 파리를 빠져나가 남쪽의 보르드로 가서 그곳의 프롱드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고, 콩데공(公)의 누이 롱빌 공비(Longueville,Anne Genevieve de Bourbon Conde, Duchesse de : 1619 ~ 79)가 그의 오라버니를 감옥에서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열에 가담하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동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여기에 대귀족 폴 드 공디(Jean Francois, Paul deGondi Cardinal de Retz : 1613 ~ 79)는 파리 시민과 고등법원을 선동, 반란에 가담하게 하여 그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1650년 1월에 있었던 일이다. 이렇게 해서 1650년말에는 전세(戰勢)와 여론(與論)이 정부에 매우 불리하였다. 부르봉 왕가로서는 최대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1651년 2월, 왕족과 그 측근들은 콩데공(公)을 감옥에서 석방시키고 다시 파리를 탈출했다. 이번에도 밖에서 군대를 모아 파리를 공격할 계산이었다. 반란을 일으켰던 프롱드당(?)은 파리에 집결했다. 만약 이때 콩데공(公)을 중심으로 반란 세력이 일치단결하여 왕권에 대항했다면 영국의 청교도 혁명처럼 왕정은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란에 가담한 세력은 천차만별이 였고, 글자 그대로 오합지중(烏合之衆)에 불과했다.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역사가들은 구귀족파(고등법원,콩대공 등)와, 소시민파(랭스 대주교 중심)로 분류하고 있으나, 귀족 중에는 롱빌공비의 연정에 사로 잡혀서, 혹은 콩데와의 우정을 위해서, 혹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참가했다는 사람도 있고, 소시민 중에는 아무 이해관계 없이 대세에 밀려서, 아니면 싸움이 좋아서 따라 다닌다는 사람도 많았다.

 

이런 와중에서도 상류계급에서는 살롱(Salon)이라는데 모여 귀부인들과 화려한 사교(社交) 행사에 몰두,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귀족들의 반란은 구심점 자체가 애매모호(曖昧模糊) 하였고, 공통된 투쟁목표도 없었다.

 

이렇게 반란군 진영이 지리멸렬(支離滅裂)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자, 콩데공(公)에 버금 가는 장군 튀렌(Vicomte de Turenne / Henri deLa Tour d'Auvergne / 1611 ~ 1675)은 보따리를 싸들고 섭정 안 도트리슈를 찾아가 국왕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는데, 그 역시 무슨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반란에 가담한것이 아니고, 롱빌 공비(公 妃)를 사모한 나머지 그를 따라 반란군에 가담하였다고한다.

 

튀렌을 맞이한 국왕 진영에서는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의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652년 7월 파리 교외(郊外) 생 탕트완(Saint-Antoine)에서 반란군과 싸움이 벌어졌을 때, 국왕측의 분전으로 콩데공(公)은 부상을 당했고, 반란군의 또 다른 유력자, 라 로슈푸코 公(La Rochefoucanld, Francois, Prince de Massilac,Duc de, /1613 ~ 80)은 두 눈을 잃었다.

 

모랄리스트로서 잠언집(箴言集 / Maximes)을 남긴 라 로슈푸코 공작(公爵)이 반란군에 가담한 것도 롱빌 公妃에 대한 연정(戀情) 때문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스스로 "생명을 다 바쳐서 사랑하고 싶은 정열" 때문에 반란에 가담했다고 밝혔고, 두 눈을 잃은 후에는 이런 시를 썼다고 한다. "사랑하는사람을 위해서는 국왕과도 싸우고, 두 눈을 버린 나, 사랑을 위해서는 다시 신(神)과도싸우리라......"

 

남편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그녀는 살롱 사교계(社交界)의 여왕으로 부상하면서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그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 곳이면 전쟁터든 어디든 그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고 한다.

 

생 탕트완 싸움에서 승리한 국왕 군은 파리를 압박하였으나, 생 탕트완의 요새(要塞) 바스티유의 대포는 국왕 군을 겨냥하고 반란군의 도주(逃走)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바스티유 대포를 국왕 군에게 겨누고 반란군의 도주를 도운 것은 뜻밖에도 국왕의 4촌 누이 몽팡세(Montpensier) 였다고 한다.

 

대영양(大令孃 / Grande Mademoiselle)으로도 알려진 당시 26세의 이 처녀 여걸은 단지 마자랭이 싫었고, 모험심을 즐기는 취미 때문에 반란군에 가담, 요새로서 보다는 국사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더 유명한 바스티유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무장하고 말을 타고 진두 지휘하고 있다가 반란군이 밀리는 것을 보고 대포를 국왕 군에게 겨냥, 반란군의 도주를 도왔다고 한다.

 

그 덕(?)에 그의 부친 오를레앙공 가스통(루이 14세의 숙부)은 권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녀 자신도 루이 14세의 왕비가 될 행운을 놓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이렇게 프롱드의 난에는 우아한 귀부인도 남성적인 모험심을 즐기는 명문가의 처녀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루블 궁, 현재는 박물관생 탕트완 싸움에서 패배한 콩데公파는 국내의 반국왕파를 모을 생각을 버리고 적국 스페인과 손잡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념도 목표도 분명치 못한 오합지중으로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판단이섰기 때문이다. 이래서 콩데공 진영에서는 스페인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파리의 고등법원과 시민들이 갑자기 콩데공에게 등을 돌리고 국왕파로 급 회전  했는데, 그 이유는 콩데공이 적국 스페인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한 반발과 뜨거운 애국심의 열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콩데공이 계속 밀리자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1652년 10월, 열 다섯 살의 루이 14세 일행은 파리고등법원의 법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파리로 돌아왔다. 국왕의 환궁을보기 위해서 연도에는 인파로 가득 매워졌고, 말을 탄 루이 14세는 겨우 사람들의 틈새를 비집고 루블궁에 들어갔다.

 

얼마 후 마자랭 역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파리로 돌아왔고, 프릉드의 난은 1653년 여름을 고비로 막을 내리고 프랑스는 다시 부르봉왕가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난의 주인공 콩데공은 네덜란드로 망명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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