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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동교회 개척의 길 개척이야기1
1990.12.10일 32살에 용현동교회를 개척하여 35년째 사역하고 있다.
개척은 두가지 경우로 하게 되는 것같다.
한가지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하고 또한가지는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경우이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개척한 교회는 대형교회에서 사역하다가 교회에서 개척을 해주고 물질과 인력을 몇년간 보장해주는 경우이거나 개인적으로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준비하여 개척한 경우이다.
또하나의 개척은 어쩔 수 없이 개척하는 경우이다. 이경우는 부교역자로 청빙을 받지 못하거나 더이상 사역지에서 사역의 기회를 얻지 못하여 어려운 상황일때 어쩔 수 없이 개척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개척하던 저렇게 개척하던 개척교회는 일반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개척한 목회자는 교회세움율이 60%라면, 어쩔 수 없이 개척한 목회자는 교회세움이 약10%도 안되는 것 같다.
요즈음에 직장생활 하다가 나이가 되어 은퇴하고 신학공부하여 은퇴자금으로 남은 생애 전적으로 몸을 받쳐 보겠다고 수 없이 주변에 개척을 하지만 1-2년안에 사라지는 것을 많이 보게되어 안타까움을 느낀다.
우리교회도 개척할 당시 조그마한 동네인데 주변에 7개 교회 개척하여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세대 30년이 지난 지금은 다 없어지고 또 다른교회가 수없이 들어왔지만 얼마나 견딜지 미지수이며 아직까지 쭉 한자리에 34년동안 생존한 교회는 우리교회 하나만 남아 있다
생존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거부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믿는 우리는 모두 교회의 지체로서 유기체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생존이란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생각되어 사용한다.
장년목회경험도 없고 아무것도 준비 되지 못한 나로서는 개척의 종류 중 첫번째가 아니고 두번째 경우로 개척하여 아직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생각한다.
어떻게 34년간 생존하였으며 앞으로 계속해서 생존 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나의 개척을 두 번째 경우라고 말한 것은 서울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교회가 크지않은 작은교회에서 중고등부사역을 맡아서 사역하고 있었다. 신대원 2학년때 결혼하고 3학년 초에 교육전도사로 부임받아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를 보고 강도사 인허를 앞두고 있는데 교회에서 계속 사역하라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사역지를 옮겨야 되는 상황이 되었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다른 교회에 부임 해 갈수 없고 개척을 해야 되는데 막막 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다른교회는 알아보지도 못하고 강도사 인허 받는 날 형님이 1,600만원에 20만원 월세로 의정부 용현동(34평)에 개척장소를 탐방하여 교회장소를 보고 2주간 청계산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하고 교회사역을 사임하고 의정부로 와서 개척하게 되었다
적어도 개척은 계획도 세우고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되는데 갈데도 없고 어쩔수 없이 개척하게 된 경우라서 부목사도 해본적이 없이 파트타임으로 중고등부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다가 개척을 하니 교회운영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이 전무상태에서 개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파트타임 사역때는 교회에서 사례비로 매월 15만원을 주어서 건축헌금 5만원과 함께 십일조, 감사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주일헌금을 꼬박꼬박 드렸는데 개척을 하고 나니 사례비는 0원이고 교회운영을 해야 하는데 월세 전기세등 공공요금과 두아이를 키우는데 우유값도 없는 당장 생활비가 문제가 되었다.
다행히 형님께서 월세 20만원을 매달마다 헌금하여 주셔서 월세는 걱정이 안되지만 나머지 운영비와 생활비는 해결의 답이 없었다.
그래서 상가 34평 교회안에 사택을 1/3정도 막아 있어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작은 공간이지만 놀이방을 개원했다.
왜냐하면 아내가 돐지난 큰아이와 돐도 안된 둘째를 데리고 활동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난소염으로 심한 통증으로 힘들어 하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활동 할 수 없어서 놀이방을 개원해서 몇명 안되지만 들어오는 아이들을 봐주고 우유등 간식을 가져오면 우리 아이들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먹이며 자녀를 키우고 월세외에 교회운영비는 놀이방 아이들이 내는 원비로 전기세등 공공요금을 내니 그런대로 교회가 운영되었다.
그렇지만 개척교회의 즐거움은 새로운 성도가 생기는 것인데 주변에 교회가 많이 있고 이미 자리를 잡은 교회들 많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교회는 한사람도 교회에 구경도 오지 않아 2년이 되어가도 가족외에 몇명 모이지 않는 상태로 계속 예배드리고 있었다. 교회를 어떻게 해야될찌 답답해 미칠지경이 되어 사생결단을 하고 40일 금식을 하기로 작정하게 되었다
1992년 5월 중순부터 6월말까지 40일금식기도를 하였는데 더 이상 이대로는 목회를 못하겠다고 하나님께 하소연 기도하며 저를 금식기간동안 데려 가시던지 특별한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세워 부흥을 시켜 주시던지 해달라고 40일동안 매일 계속 예배하며 성경 읽으며 기도를 하였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생명가져가지 않으시고 연장시켜주어 40일 금식끝나는 시기에 요한일서4장8절 를 읽는 중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말씀과 함께 이사야 40: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말씀을 가지고 목회를 “하나님사랑과 여호와 앙망”으로 할 것을 마음에 심어 주시었다
사랑으로 목회하면 된다는 목회 자신감을 가지고 금식후 보식기간인데 몸은 돌보지 않고 성경공부를 가르킨다고 몇명안되는 성도에게 교회 나오라고 하여 성경공부 준비하다가 피아노의자를 옮겨 앉으려 하는데 허리가 이상이 생겨 걷지도 기지도 못하고 꼬박 일주일동안 누워만 있어야 했다.
심지어 화장실도 가지못해 소변통으로 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자신감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하라고 40일금식을 맞친 나에게 허리를 쓰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모든일은 오직 하나님만의지 하라는 뜻 같았다
이후 목회는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교회상가 옆에 새로운 상가를 짓고 있었는데 현재 상가보다는 큰 상가였다. 하나님께 기도하길 아무것도 가진것은 없지만 새로운 상가로 이사가도록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상가로 3층 4층 전세 6,500만원으로 계약하고 허리가 아픈상태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사 자금은 형님께서 일산신도시 되면서 보상 받은 것으로 부천에다 27평 아파트 하나 사주신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팔아주셔서 교회안에서 보광아파트로 이사가서 살고 있었는데 살고있던 보광아파트 전세금빼고 현재상가 보증금하고 해서 나머지는 빌려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바로 옆이라 이사짐센타를 부르지 않고 성도들이 이사짐을 옮기었다 당시는 남성 성도가 없는 상태라서 몇명 안되는 여성도들이 긴 의자를 2층에서 내려 새로 이사하는 상가 3층 예배당으로 옮기었다.
나는 허리가 아파서 물건하나 들지 못하고 지켜 보고만 있게 되어 도와주지 못해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사한 곳은 총74평으로 3층은 예배당 4층은 전에 상가 놀이방에서 선교원으로 변경하여 개원하여 사용하면서 살림집도 안에다 꾸며서 사용했다.
이후 상가들이 모두 입주하여 2층은 한진가스 엔지니어가 들어오고 1층은 가구판매가게 들어오고 지하실은 공실 이었다.
이전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전도도 하니 감사하게도 월세 교회보다는 전세교회가 약간 부흥이되어 20여명이 모여 목회가 재미가 있어 비전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사하고 3년째인 1995년 가을 9월 16일 주일낮예배중에 뒷좌석에서 수근수근 거리며 사모님이 밖으로 나가고 한 두사람도 같이 나가며 예배분위가 흩어졌다.
그래서 예배를 조금 일찍 마무리하고 알아보니 건물주차장에서 초등학생 1학년이었던 아들과 유치원아이들 6-7명이 모여 한진가스 엔지어들이 공사하고 버린 부탄가스통과 라카통을 몇개세워놓고 쓰레기를 모아 폭죽놀이를 한다고 하다가 불이 퍼진 것이다.
다른아들은 불이 퍼지는것보고 무서워서 다 도망갔는데 큰아들 영광이는 건물옆에 세워지 LPG가스통에 불이 옮겨 상가교회가 폭발 될까바 퍼지고 있는 불을 손으로 끄다가 그만 옷에 불이 붙어 버린 것이다. 불붙은 옷은 나이롱 노랑체육복이라 온몸에 달라붙어 오그라진 것을 보고 동내사람들이 예배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아이를 데리고 성모병원에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마치고 성모병원에 가보니 얼굴부터 온몸이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성모병원에서는 우리는 할 수 없으니 화상전문 병원으로 가라고하여 서울에 있는 한강성심병원을 소개하여 주어 화상입은 아들과 사모님과 집사님을 구급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나는 저녁예배가 남아 있어서 저녁예배를 맞치고 한강성심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서 의사를 만나보니 3도 화상이 약25-30%정도가 되어 어린아이로서는 현재 95%살아 날 가능이 없다고 하며 5%는 직업이 무엇이냐 묻길래 목사라고하니 당신이 목사이니 목사이기에 5% 살 가능이 있고 지금 허파에 천공이 생겨 매우 위험하다 하면서 어떻게 할꺼냐고 싸인이 있어야 치료한다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살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속히 치료해달라고 서류에 싸인을 하고 기도하며 의사에게 부탁을 드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간 중간 계산하라고하여 계산할때마다 화상센터에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줄 몰랐다.
20여명 모이는 개척교회목사인데 하루에서 보통 50-70만원 치료비가 들어가는데 한번도 돈걱정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 오직 아들 살려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예배시간에 불장난 놀다가 다른 아이들은 다치지 않았는데 왜 목회자 자녀가 화상당하여 죽어야 하냐면서 기도하고, 앞으로 더이상 전도도 안될것이고 하나님 영광을 가리게 되어 목회를 할수 없으니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였다. 아들이 중환자실에 45일 있는 동안 매일저녁에 교회에서 특별기도회를 하고 맞치면 서울에 있는 한강성심병원으로 달려가서 같이 있다가 새벽에 새벽기도하러 다시 교회와서 기도회를 하고 이렇게 45일동안 왔다 갔다 하였는데 놀랍게 아들이 생명에 지장이 없이 치료가 되어 일반실로 옮겨졌다. 할렐루야!
수많은 분들이 기도하며 치료비를 마르지 않게 보내주었다. 신대원동문교회에서, 노회교회에서, 동네 교회및 동네 가게들까지도 동네 아파트 부녀회 심지어 학교에서 조차 모금하여 보내 주어서 수많은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고 병원비를 내고 오히려 남아서 나중에 4번이나 전신마취하여 얼굴 성형수술을 하였고 앞으로 더 수술해야 하지만 너무 마취를 많이 하고 수술하면 뇌세포가 망가져 미래의 삶이 어려워질 수 있을 것같아 장성해서 수술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수술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아들을 살려주심에 감사하여 교회잔치도하고 나머지는 자녀의 일생을 주님께 맡긴다고 기도하며 모든금액을 헌금으로 받쳤다.
그당시 물질적으로 기도하여 주신 동역자들과 동네분들 모든지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은 무덤에 들어갈때까지 잊지못 할 것이다
큰아들의 사고후에 좋은 일이 생겼다면 첫째는 사택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들이 화상으로 머리부터 발까지 온몸 전체가 화상입어서 햇빛에 약하므로 화상옷을 입고 다녔기에 매우 힘들어 했고, 오래동안 병원침대에서 지냈기에 아이를 보호하려면 아이의 방이 필요했다. 그동안은 상가4층 선교원안에서 살림을 같이 하였기에 아이들 방도 없고, 그냥 살았기에 신협에서 500만원 대출하여 반지하방 2개 짜리를 전세로 얻게 되었다. 할렐루야!
특별히 감사한 것은 1학년 2학기는 사고로 학교다니지 못하고 2학년 1학기에 화상옷을 입고 들어갔는데 김부겸담임선생님이 아들에게 부반장을 시켜주어 당당하게 학교를 다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나 몇 년 지난후 한여름에 의정부지역에 집중폭우가 솟아져 화장실에서 똥물이 역수되어 거실에 있던 책장한칸까지 침수되어 책을 다 버려야 했고 그후부터 방에는 물이 세어 나와 매일 물을 퍼내야 했다. 장판을 주어다가 3겹을 깔아도 방바닦의 축축한물기는 여전했다.
당시 감사한것은 작고하신 변재란장로님의 장모님 최점례권사님께서 매일 같이 오셔서 한시간씩 방에서 흐러나오는 물을 퍼주시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얼마지난 후에 형님께서 나의 형편을 들으시고 은퇴후에 쓰라고 분양받아 전세주었던 현대2차 아파트 34평에 들어가서 살도록 준비해 주셨다.
두번째 좋은 일은 상가를 분양받게 된것이다
영광 사고 다음해인 1996년 교회바로 옆에 두동의 세아2차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상가가 가운데 3층으로 세워졌는데 3층 42평을 분양한다고 하여 어떻게 해서든 분양받자 기도하며 상가교회 3층전세금을 빼고 나머지는 빌려서 분양받아 들어 가게 되었다
이 두가지는 큰아이 사고이후 하나님이 주신 위로와 축복이었다.
1996년에는 재정이 없어서 빌려서 일단 상가분양을 받았기에 내부에 인테리어도 못하고 유아실 칸만 막아 사용하였다.
분양받은 상가교회내부를 인테리어를 못한상태라 물나는 반지하에서 아파트로 이사 갔어도 벽지하나 창문 창호지 하나 새롭게 하지 않고 신문을 붙여 있는 그대로 살았다
그래도 아이들이 물나는 반지하에서 아파트로 이사한것이 얼마나 좋은지 데리고 오지 않던 친구들도 집으로 초대를 하였다.
그리고 새천년 2000년에는 개척 10주년에 임야 4,080평을 매입하였다
어려운 가운데 임야를 매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7년동안을 열심히 다니며 교회를 섬겨 오던 온가족이 아쉽게도 떠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사오기전 서울에서 대형교회다닐때 부친이 돌아가셔서 교회산에 매장을 하였는데 하루는 교회에서 전화가 와서 교회를 다시 나오던지 그 대형교회에서 동네 가까운 곳에 개척한 교회를 나가던지 해야지 아니면 교적카드를 빼겠다고 연락왔다는 것이다. 교적카드를 빼면 모친께서 돌아가실 때 교회동산에 합장 매장되지 못하게 되니 옮긴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여전도회장도 하고 주일학교교사도 하는 여러가지 충실하게 일하던 일꾼이 자녀까지 식구 5명이 하루 아침에 빠져나가니 마음 너무너무 아프고 속이 상했다.
그래서 재정이 없지만 큰 아들 화상사고로 모아졌던 치료비 나머지 전부받치면서 산을 매입하였는데 그 종자돈이 되어 더 이상 산소 걱정이 없는 포천에 산을 매입하게 되었다.
산을 계약하자마자 교회집사님 부친이 돌아가시어 등기도 나기전에 매장을 하여 자녀중 한명이 교회를 나오게 되는 보람을 가졌다.
이리저리 교회가 조금부흥하기 시작하여 3,500만원 들여서 상가분양교회 에어컨 설치및 내부인테리어도 예쁘게 하게 되었다. 아주깔금하고 보기좋았다.
드디어 교회개척 10년만에 교회 빗도 없고, 재정도 교회도 안정적이 되었다.
그때이후 바로 성전건축을 위한 1,000일 작정 매일 3번기도를 들어갔다.
기도회 기간에 다른 지역에 있던 우리노회 중형교회가 우리가 매입하려고 계획하던 분할한 3구지 땅을 통째로 매입하여 건축을 하고 들어왔다.
이때 절망적 이었다. 다른 교단이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같은 노회 같은 시찰이 바로 코앞에 교회건축하여 들어오니 상가교회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천일작정을 하루 3번씩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마침 우리나라에 부동산및 경제 경기가 좋지 않아 땅값이 뚝뚝 떨어지는 시기에 부동산인터넷에 찾아보니 동네에 작은 190평 땅이 나왔다.
바로 긴급 제직회를 열고 매입하기로 결정하고 2003년 1월 2일 신정 다음날 형님께 4,000만원 계약금을 빌려달라고 해서 땅을 계약 했다. 그리고 중도금과 잔금을 한달씩 길게 잡았다. 왜냐하면 교회 재정이 없는 상태로 계약을 해서 중도금 낼돈도 없어서 길게 잡았다.
길게 잡았지만 중도금을 낼 한달은 금방 날짜가 다가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라에서 경기부양정책인지 몰라도 대출이 90%까지 하는 정책이 발표 되어 중도금 잔금을 모두 대출로 해결하게 되었다. 이때 감격은 무엇으로 표현하기 어려울정도로 감사한 마음이 생겨 잠을 몇일동안 설친것같다
종교부지는 땅을 살 때 면세이지만 2년안에 건축하지 않으면 20%세금이 부여 된다고 하여 형님께서 물이 나서 이사해서 살라고한 아파트를 대출하여 설계를 들어가서 건축을 신청하고 건축업자를 공개입찰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입찰 업체중에 제일 가격이 저렴한 업체를 선정하고 조건은 계약금을 4회 분활하여 내고 잔금은 건축후에 대출해서 가져가는 조건이었다.
다행히 업체에서 건축후에 대금을 받는 것으로 계약을 해주겠다는 업체가 나왔지만 우리교회는 계약금조차 준비도 하지 않은 어려운 상태이라 계약을 바로 하지 못했다.
대지구입도 계약금을 빌려서 계약했고 나머지도 80% 대출하여 매입한 상태라 어디서 계약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수동기도원에 들어가 40일금식 기도로 저를 대려가던지 건축을 해주시던지 하나님께 부르짖기로 결단을 했다.
그런데 기도원에 들어가는 날 마침 형님께서 일산에 오라고하여 기도원에 들어가기전에 형님께 가니 동생과 함께 각각 1억을 1만원짜리로 쇼핑백에 넣어 주시었다.
기도들어가기전에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보니 무엇인가 이루어질것같았다. 그 1억원은 건축의 종자돈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 1차 계약금은 1억 5천만원이기에 5,000만원이 모자라서 계약을 못하고 기도원에 들어갔다.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하며 매일기도가 ‘저를 데려가시던지 건축을 해주시던지’하며 40일작정 기도하는 가운데 5,000만원이 준비되었다고하여 20일째 되는 날에 건축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어 기도원에서 건축업자를 오라고하여 계약을 하고 먼저 공사를 하고 착공식은 금식끝나고 8월 15일에 하기도 하였다.
2004년 5월말에 기도원 들어갔다가 8월 중순되어 교회에 돌아와 보니 벌써 지하실을 다파고 바닦 콩크리트 공사를 하고 있었다.
착공예배를 8월 15일에 교회에서 드리고 성도들과 공사현장을 둘러 보았다.
이루 말할수 없는 기쁨이 솟아 올랐다.
그것도 잠시뿐 시간이 금방지나 한달이 지났다.
한달마다 계약금을 분활하여 내기로 했는데 벌써 한달 지난 것이다. 지하실이 다되고 공사가 중지 되었다. 2차계약금을 내야 공사시작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일산형님께 달려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였더니 농협에서 대출로해서 1억5천만원을 해주시어 2차대금을 지불했다.
그리고 3차대금 1억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매매하여 지불하였다. 아파트를 매매하고 주공으로 임시로 이사가서 살다가 교회가 완공하면 교회로 들어가려 계획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반지하에서 이사와서 각자 방이 있어 좋아 했는데 아파트를 팔았다고 심통이 많이 났다. 특히 막내아들이 사춘기 때라 정신적으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건축을 맞치고 교회로 이사와서 우리 부부는 에레베터 옆에 지하실에서 살고, 아이들은 4층 게스트룸에서 각각 잠을자고, 밥은 2층식당에서 모여서 먹었다. 그러다가 큰아이는 의고학교가숙사에 들어가고, 둘째가 의고에 입학하였지만 스트레스가 해결이 안되어 1학년 1학기때 자퇴를 하여 1년 내내 게스트룸에서 나오지도 않고 컴퓨터께임만하였다.
아마도 이때에 제일 힘들었던 것은 자녀교육의 위기가 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부모로서 많은 고민을 하였을 때이다.
기도하며 거의 1년을 마음고생하다가 사모가 결단하여 어느날인가 둘째아들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너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부모가 결정한것에 미안하다고 사죄를 하고 나니 그이후로 변화되어 검정고시학원을 서울로 다니다가 영어를 100점을 맞으며 검정고시를 합격을 하였다. 이때에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4차 마지막 건축 계약금 1억은 상가분양교회매매와 어린이집 2층 보증금을 받아 지불하였더니 벌써 교회뼈대인 H빔으로 거의 다 완성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2005년 드디어 4월 20일에 1,000일작정 끝나는 날에 준공허가 나와서 4월 30일에 입당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도응답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은 교회건축으로 놀랍게 이루워졌다
1990년 12월에 개척하고 1996년에 상가분양을 받고, 재정이 없어서 바로 내부 인테리어를 못하고 그냥사용하다가 4년후 2000년에 교회설립 10주년 기념때에야 내부 인테리어를 어렵게 평당 75만원씩해서 35,000만원을 들여 아름답고 감격스럽게 맞쳤다
그리고 바로 미래 교회건축위해 1,000일작정을 하고 매일 3번기도를 시작했는데 끝나는 마지막날에 대지구입하여 건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는 날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건축하게 하시어 입당하게 된 것이다.
성도들에게 무리하게 건축헌금 작정한적도 없었고, 성도들의 집담보한 한가정도 없이 지하1층 지상4층 건평419평이 완공되어 입당한 것이다. 물론 건축대금 모두 대출로 했지만 그래도 감사한일이다.
아쉬움은 교회를 건축하면서 형님이 우리에게 살라고한 현대A는 건축관계로 매매하여 주공A전세로 이사가고 주공A에서 교회건축이후에 교회로 이전하여 우리부부는 로비 바로밑에 지하 1층에서 방을 꾸며 살면서 성도들이 교회로 들어오고 나가는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하나님 우리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깊이 알게하소서’ 기도하며 지냈다. 한겨울에는 얼마나 추운지 옛날 사모님께서 시집올때 해온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잠을 자도 추울 지경이었다.
여름에는 지하실이라서 쾨쾨한 곰팡이 냄새가 너무지독하게 나서 숨이 막힐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때로는 교회 본당에서 기도하며 잠을 잤다.
두자녀들은 다행히 큰아이는 의정부고등학교 학교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었고 작은아이는 4층 게스트룸에서 지냈다. 식사는 지하실에서 올라오고 4층에서 내려와 2층 식당에서 먹었다.
불편한 것은 식사때마다 2층까지 매일 내려왔다 올라갔다하며 식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기도하길 옥상에다 가건물이라도 지어 옮겨지를 바랬다.
다행히 거의 2년정도 그렇게 살다가 드디어 옥상에 가건물을 지었는데 사용 용도를 서재실로 나무로 1,700만원들여서 예쁘게 옥탑방을 만들게 되었다. 책장을 벽면에 설치하고 작은 화장실과 전기온수보일러를 놓아 사워도 할 수 있게하고 부엌도 만들어 요리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 부부는 이제 지하실에서 옥탑방인 서재실로 이사하고 온식구가 아늑한 서재실에서 앉아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며 도란 도란 지내게 되었다.
우리식구는 비록 잠은 각기 다른 곳에서 자지만 온 식구가 식사를 같이하며 성도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라면이라도 삶아 먹게되어 매우 좋았다.
그런데 행복한 순간도 잠시이고 2년 정도 지났을까 시청과 소방서에서 직원이 나와 옥탑방은 무허가 건물이라고 자진 철거하라고 하였다. 자진철거 안하면 계속 벌금이 나오고, 그래도 철거를 안하면 강제철거를 할것이며 철거비까지 청구하겠다고 엄포를 주었다.
옥탑설치비가 아깝지만 그동안 계산해보니 만약 집을 얻어 월세로 살았다면 시설비1,700만원 이 월세로 나간 액수와 같아 미련없이 철거하였다.
그리고 우리부부방은 교회 2층 식당옆에 있는 부식실및 창고실로 쓰는 곳으로 이사준비하고 식사는 다시 2층식당에서 하기로 하고 벽지를 사서 준비하고 도배를 했다.
그런데 김00권사님께서 이 사실을 알고 나와 의논도 없이 아들 이름으로 보광아파트에다 1,000만원에 40-45만원 월세로 계약해 놓으시고 월세는 임직자들이 내겠다고 하고 일주일 세미나 다녀오니 이사를 다 해 놓았다
김00권사님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감사한 마음이 더 들었다.
왜냐하면 이제 보광아파트에 온 가족이 다같이 다시 살게 되어 감사했다.
이사하고 나니 오랜만에 온가족 남북 상봉이 된 것 같아 기뻤다.
물론 큰아이는 학교기숙사에 있다가 일주일에 한번 오고 가고 하지만 작은아이는 고등학교 자퇴하고 거의 1년을 방콕생활하다가 마음에 안정감을 가지게 되어 검정고시를 보고 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형님이 이사장으로 있던 캄보디아에 은혜국제학교로 떠나 있었던 때이다 이렇게 건축으로 인한 집문제는 잘 해결되었다.
건축하기전 상가교회 있을 때 기도응답이 또 하나 있었는데 김호순집사님이라고 보광A에 사셨는데 위암말기로 병원에서 수술을 하려고 했지만 암이 배안전체에 퍼져 두달정도살면 오래살 것이라고 집에 모시고 가라해서 집에서 요양을 하시며 계시었다. 그래서 교회도 나올 수 없어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가 기도하여 드렸다.
당시 김호순집사님의 소원은 교회에 가서 예배한번 드리고 싶은것이 죽어도 소원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몸은 점점 더 나빠져 얼굴이 황달에다가 배는 복수가 꽉차서 배가 남산만해 졌다.
얼마후에는 얼굴이 흑달이 되었고, 물 한 목음도 들어가지 않아 차마 얼굴을 뵐 수 없을 상태까지 되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장례준비를 미리 하였다. 장지는 교회산에 매장하기로 하고 수의를 준비하며 집사님의 소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거의 6개월을 침대에 누워 계셨던 분이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억지로 기어 화장실 변기에 앉았는데 무엇인가 배안에 있는 것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포도송이같은 알맹이들이 한 바케스 정도 나왔다는 것이다.
그후 남산만한 배가 속 들어가고 목구멍에 물이 조금들어가기 시작하였고, 조금씩 미음을 드시다가 죽을 드시기 시작하여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원기가 회복되어 그렇게 그리워하던 교회에 걸어서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 교회가 3층 상가라 걸어 올라기가기 너무힘들다고 늘 말씀하시며 예배를 드리셨다
제가 집사님에게 ‘교회건축하면 에레베터 꼭 설치할께요 건강하게 오래사세요’ 했더니 교회건축하고 10년을 더 사시고 20주년 기념예배때 명예권사로 취임받고 몇년후에 소천하셨다.
의사가 포기한 위암환자가 죽음직전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뜻이 있으면 살려 주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후 교회 나오지 않던 아들과 며느리가 교회를 나오게 되었고 학습받고 세례받아 서리집사까지 되었다.
2004년 교회는 건축당시 70여명 출석하고 있는 상태라 교회본당 300석 자리가 너무 허전할것 같아 둥근 타원형 식탁을 제작하여 만들고 테이블 주변에 의자를 둘러 놓아 호텔 컨프런스 환경처럼 앉아 예배를 드렸다.
몇년 안되어 교회가 부흥되어 둥근 식탁을 치우고 개인의자 250개를 구입하여 배치하였다 중층은 장의자를 놓아 50명이 앉게 하였다.
300석의 빈자리를 채워야하는 부담감과 교회부흥을 고민하던 중 부산에 가서 두날개인 대그룹과 소그룹의 세미나를 듣고 교회접목하여 교회가 5년정도 되니 건축당시보다 출석 성도가 3배정도 부흥하게 되어 선교지도 확장하여 보내는 선교사의 역활을 감당하게 되었다.
임직자도 새로뽑아 장로도 세우고 안수집사도 권사도 세워 교회의 기둥들이 튼튼하니 교회는 계속 성장하게 되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교인끼리 돈의 문제가 생기게 되고, 관계의 문제가 생기면서 목사에게 화살이 날아 왔다.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니 외형적인 교회성장 보다는 내적인 가정교육이 중요함을 적실히 느끼게 되었다.
교회성장의 꿈을 가지고 거의 교회에서 지내다보니 가정에서 자녀들하고 같이 밥을 먹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둘째아들이 군대 가고 큰아이는 회계사 시험준비한다고 서울에서 방을 얻어 시험공부중이라 주일에는 예배를 위하여 교회에 잠깐 왔다가 예배 끝나면 바로 공부하러 가버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러다가 자녀를 키우는 보람이 없는 것 같았다. 저렇게 공부해서 회계사합격하여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일 바쁘다고 얼굴 보기도 어려울것이고, 그러다가 때가 되어 결혼하여 분가해 나가면 부모로서 과연 자녀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까 고민이 생겼다.
그러던중에 신문에서 ‘자녀를 제자로 삼으라’라는 광고문구를 보게 되었다. 바로 현용수교수님이 운영하는 쉐마교육세미나이었다.
1차에서 3차까지 교육이 있는데 1차교육에 참여하여 감동받고, 그 주 토요일에 큰아들에게 문자로 연락하여 오랜만에 집에서 같이 저녁밥을 먹자고 문자를 보냈더니 아들도 집밥을 먹은지 오래되서 그런지 약속된 시간 토요일에 집에 들어온 것이다.
정성것 준비한 밥을 맛있게 같이 먹은 다음에 일주일동안 세미나에 다녀온 이야기하며 토요일마다 토요일마다 식사하면서 쉐마가정예배를 드리자고 했더니 자기는 큰아들이라 순종 하겠지만 군에 간 해동이는 안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것이냐하여 그것은 나중일이니 하나님께 맡기고 너만 잘하면 되다고 하니 그후부터 매주마다 쉐마가정예배를 토요일 저녁에 드리게 되었다.
쉐마가정예배는 여러 순서가 있지만 일주일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고, 기도제목을 나누고, 같이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주게 되어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이 살아나게 되어 가정예배는 일주일 중에 제일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둘째아들도 군에 있는동안 휴가나와서 간간히 함께 예배드리고 제대하고는 본격저으로 우리가정은 쉐마 가정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응답을 많이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큰아들이 회계사합격을 바로 하게 되었고 둘째도 외국에서 공부하던 수업을 편입하여 국내에서 공부하다가 졸업하여 다시 전문공부를 위해 호주로 공부도 하게 되어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목회자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가정이 회복되고 행복하여 졌다고 생각하였기에 교회에도 적용하여 성도들의 온가정이 함께 우리와 같은 행복을 맛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한달에 한번은 온 부서예배를 정지하고 다같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하며 부모가 자녀에게 축복기도를 행하였다.
이렇게 하길 1년 반정도 지나면서 가정회복이 얼마나 되었나 점검을 해보았다
그런데 한달에 한번 모이는 날에 한두가정씩 교회를 안오고 야외로 가족나들이를 간다거나 혼자 나오는 가정은 소외감을 느낀다고 예배에 안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인 온전한 가정을 세워보려고 꿈을 가지고 온 성도들에게 행한것인데 무엇이 잘못인지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해 성도들에게 상처만 주는 것같아 마음아팠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며 온 성도의 가정이 회복할 수 있도록 주님의 지혜를 달라고 하였다
이때 쉐마교육을 받아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양주성목사님이 신앙명가 세미나를 동신기도원에서 연다고하여 첨석했다.
동신기도원에서 만남의 복을 주셨다. 부산에서 두날개도 해보시고, 쉐마예배도하시고, 가정교회를 하시는는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교세는 성도가 약 3,000명정도 모이는 장로교고려측교단의 은항교회 이한의 목사님을 만나서 가정교회를 소개 받게 되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두날개의 문제점과 쉐마교육의 문제점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성경적교회관을 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신약교회 운동이었다.
그래서 소개받고 2016년 그해에 제일 먼저 세미나를 하는 인천 등대교회 목회자 세미나를 기다리다가 신청하고 참석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성경대로 사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감동이 되었다.
목회자세미나를 다녀온후 당회를 열어 가정교회를 소개하고 원형가정교회를 시작하겠다고 하고 금요일마다 사택에 모여 6개월간 저녁식사를 하며 모였다
매주마다 모여 식사하는 것이 처음에는 많이 부담스러워하다가 차츰 익숙해져 가고 부부가 같이 모이기로 했다.
원래는 처음부터 부부가 모여 시작했어야 되었는데 한참 지난뒤에 부부가 함께 모였던것이 아쉬었다.
그래도 모두들 잘 따라주어 12월 연말에 교회설립기념부흥회로 한국교회의 가정교회 원조인 이재철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고 다음 새해 2017년 첫달 부터 전교인을 가정교회로 전환한다고 발표하고 장년 12개 싱글 3개 청소년6개로 시작했다. 그리고 5년후에는 우리교회도 평신도세미나를 개최하는 모델교회로 만들어야겠다고 선포하고 다짐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생명의 삶도 안하고, 성도들을 평신도 세미나도 한사람도 보내지 않고 전교인을 일방적 조직짜서 실시한 가정교회는 절대로 안되는 모델 케이스가 된 것이다.
그래도 약 8개월 정도는 그런대로 잘 되어가는 듯 보였다. 그런데 역시 가정교회는 정신이 중요한데 가정교회 정신이 없이 시작하니 시간이 갈수록 하나 둘 목장들이 이런일 저런일로 모이지 않게 되자 더 이상 가정교회는 진전이 없는 무기력한 가정교회가 되었다.
이제 이런상황에서 성경적인 가정교회를 안한다고 할 수 없고, 다른 특별한 묘안도 없어 어떻게 손을 써야 될지 시간만 보내며 매우 낭감해졌다.
이것도 저것도 몸부림쳐 보았지만 되는 것이 없어 목회를 잘해보겠다는 생각이 낙심이 되어 목회를 내려 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되었다.
이때 다시 묘안을 찾기위해 가정교회를 소개하여 주신 은항교회 이한의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설립기념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 은혜도 잠시뿐 가정교회를 해야겠다는 성도들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가 않았다.
계속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미래연구소에서 미국으로 세계관을 간다고하였다.
그동안 한번도 쉼이 없이 목회를 달려왔기에 하나님이 잠시만 쉬라고 하시나 하고 교회에 안식월을 내서 세계관을 맞치고 가정교회 원조인 휴스턴 서울교회에 연수 3주를 받게 되었다.
휴스턴서울교회에서의 연수는 감동 감동이었다. 사역자나 목자/목녀 성도들 하나같이 이민사회속에 바쁜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헌신하며 섬기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3주 있으면서 여러 목장모임에 참관하며 목자/목녀와 면담을 하고 느낀것은 어떻게 이렇게 목장을 목자목녀가 섬기고 있을까 부러움이 었다.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 조건없이 헌신적으로 섬길까 의문을 가지고 돌아 왔다
목회가 힘들게 느꼈던 것은 첫째는 지도자의 신뢰성을 잃어 버린 것이다.
사실 두날개 할때만해도 목숨건다고 강조하며 따라오라해서 많은분들이 헌신을 했는데 다시 가정살리자고 쉐마교육을 한다고 하니 좋은 말이고 다 맞는 말이지만 교회위해 헌신하던 분들이 맨봉이 오게 되었고, 또 얼마 있다가 다시 이시대 유일한 교회와 가정대안이 가정교회라고 하며 하자고 하니 처음에는 따라 오는 듯 했지만 철저한 헌신없이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목자/목녀가 가정교회정신으로 무장하고 목회자와 목원들과 소통이 잘 되어야하는데 안되고, 목장에서 여러 가지 일이 생기기 시작하니 섬기는 손을 놓게 되어 가정교회가 발전 없이 퇴보가 된것이었다
둘째는 충분한 이해와 설득하는 교육이 부족했다.
적어도 가정교회의 가장기본적인 생명의 삶은 생명걸고 한 다음에 했어야 되는데 두날개를 통해 충분한 리더 교육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두날개정신과 가정교회정신이 다르기에 진전이 없어진 것이다
셋째는 만남의 교제가 적었다는 것이다
가정교회는 교제가 제일 우선으로 여기는데 목자/목녀들과 교제가 이루어 지지 않는 상태에서 일방적 선포와 밀어 붙임이 결국 진전이 없게 되었다.
이민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국사람끼리 교제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에 목장이 잘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정교회를 휴스턴서울교회와 같이 잘하는 교회가 있다고하여 아산제자교회 연수를 신청해서 다녀왔다. 역시 휴스턴서울교회처럼은 아니겠지만 가정교회 정신 한국형 가정교회 원형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아산제자교회 담임목사이신 심영춘목사님을 모시고 교회설립기념감사 가정교회 부흥회를 하였다.
많이 참석은 안했지만 참석한 목자 목녀들이 많은 도전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국교회의 가정교회 원조인 열린문교회에 가정교회 연수에 참석해 보았다
역시 기존교회와 전혀 다른 성도들의 모습속에서 가정교회의 강력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가정교회를 무엇인가 따라 갈수 없다는 이질감이 생길뿐 문제는 계속 쌓아져갔다.
나의 고민을 아시고 지역목자이신 임군학뮥사님께서 휴스턴 서울교회 곽인순목자를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해보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본인의 교회가 가장 힘들때 많이 도움이 되었다고 간증집회를 추천해 주셨다.
그래서 미국휴스톤서울교회 곽인순목자를 메일로 신청하여 기도하시고 오신다고 하시면서 얼마후에 연락주시어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열었다.
매시간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듣게되었다
특별한일은 개인 면담을 통해 개인문제를 꺼집어내 주시고 앞으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예언자적 메세지를 주었다.
몇사람은 마치 예수무당같다면서 부정적인 반응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거의 맞는 것이라 수긍을 하여 마음의 상처를 많이 치유받았다.
이제 힘들었던 목자/목녀들이 다시 힘을 얻어 할것 같았는데 갑자기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여 교회와 목장을 쓰나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코로나 사태로 교회도 목장도 전무상태가 되었다. 이제 무에서 유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기간에는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숨이 막힌 것 같았다.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야할지 답이 나오지 않아 코로나 비상 재정 7단계로 계획을 세웠다.
1단계로는 부서의 모든 부교역자 사임하고 담임목사가 유초등 중고등 청년부를 담당한다.
2단계 담임목사 상여비와 활동비를 미지급한다.
3단계 운전자보험 신문구독 취소하고 사례비는 100만원만 지급한다.
4단계 퇴직적금 700만원 찾아 운영자금으로 사용한다.
5단계 사택1억5천을 대출하여 대출금값고 나머지 이자로사용한다.
6단계 사택을 매매하고 어린이집으로 이사한다.
7단계 이자감당하지 못하여 경매넘어가면 축소하거나 다른교회와 합병한다.
이렇게 뼈아픈 계확을 세우며 하루 하루 기도하며 지내며 4단계까지 갔고 5단계를 실시하려하니 대출이 막혀서 안되어 5단계에서 주츰하고 있을 때 코로나가 해제되고 조금씩 교회가 힘을 찾아가게되어 감사하였다.
이제부터 교회세움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가진분들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일꾼을 세웠고 교회를 키워왔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교회건축할 때 대출이 남아 있지만 몇년전부터 사택을 마련해야 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차 있었다.
왜냐하면 계속 월세로 이사를 하게 되어 항상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과 월세를 올려달라든가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할때 교회가 목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처하기가 어렵게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교회들을 보면 교회가 사택이 있어 목회자를 모실때 하나님만 바라보는 좋은 목회자를 모시게 되고 사택걱정 안하고 목회를 하게된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현재 보증금 1,000만원에 보증금대출얻어 대출금과 월세를 53만원씩 내고 있는 상황이라 안정된 전세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보광아파트로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서 몇년을 월세로 살았는데 주인이 아파트를 팔게 되었다고 하여 나올 수 밖에 없었고 그렇치 않아도 수도관이 너무 오래 되어서 수도물에 녹물이 나와 빨래를 하면 붉은색으로 변하고 그릇도 붉은색으로 변해 이사가길 기도했는데 보광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건영아파트를 이번에는 다른 김00권사님이 알아봐주어 이사를 하게되었다
2년을 살고나니 거기도 계약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주인이 아파트를 매매한다고 내놓았다고 하였다
건영아파트로 이사 와서는 아프시고 연로하신 장인, 장모님을 시골에서 모시고와서 가까운 병원에도 모시고 다니며 기쁘게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방이 없어 장인/장모님께서 거실에서 주무시는 것이 늘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마침 2년살고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이사를 해야할 상황이 오게되어 김권사님께서 이번기회에 사택을 준비하면 좋겠다하며 현재 건영캐스빌로 사택으로 구입하도록 많이 힘을 쓰셨다
교회재정이 없어 대출을 최대한 많이 얻어야 해서 교회이름은 대출이 적고 이율도 높다고하여 다행히 개인이름으로 신용대출과 담보대출로 구입하게 되었다
이때 캐스빌 아파트 계약금을 일부를 마련하느라 성도들이 배추를 절여서 팔았고 학교졸업식장에 꽃을 만들어 팔아서 약 3,000만원 기금을 마련하여 헌금을 해주어서 부족한 부분만 대출하여 교회의 종탑이 잘 보이는 아파트를 사게 되어 매일 교회를 보면서 기도하게 매우 기뻤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교회내부 속사정도 모르고 목사님 개인이름으로 등기를 냈다고 소문이 퍼져 아직 은퇴하려면 많은 햇수가 남았는데 벌써 자기것만 챙기려고 은퇴준비를 하는 변질된목사로 누군가 나쁜 소문을 퍼트렸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사택을 대출해서 구입하였다고 사택헌금을 하자고 해도 헌금하는 성도가 별로 없었고, 계약금준비하려고 힘들게 배추절임과 밤을 새워가며 꽃을 만들어 졸업식장에 가서 판매한 것을 오히려 장사하는 교회라는 이미지로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부정적인 말이 떠돌아 다녔고 교회를 떠난 성도까지 있어 매우 가슴아팠다
사택을 구입하고 우리는 목회자 세미나를 일주일 다녀왔더니 김권사님께서 이사짐센터로 통해 건영아파트에서 구입한 캐스빌로 이사를 다 해 놓으셨다
어려운 가운데 사택을 구입한 결과 제일 기쁜것은 장인 장모님께서 편하게 모실 수 있는 방을 한 개 드리게 되어 감사했다.
두아이들은 한 개 방에서 같이 사용하고 우리도 방하개 쓰게 되었고 거실에는 책장으로 진열하여 연구실이 되었다
예상치 않은 혼란스런 소문이 퍼졌지만 모두가 헛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는 알게 될것이라 고 주님께 맞기고 우리교회도 사택을 마련한 것에 매우 기뻐하였고 감사하며 자녀로서 장인 장모님 잘 모실 수 있어 감사했다
장인어르신께서 이사한 아파트에서 잘 지내시나가 집에서 93세로 하늘나라에 가셨다.
그리고 장모님도 이사한 아파트에서 잘지내시다가 치매로 2-3년 고생하시었지만 장녀인 사모가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차려드리고 치매로 실례를 자주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목욕해드리며 잘 모시다가 집에서 93세에 돌아가셨다.
사택을 구입하여 이사를 자주 안가도 되었고 성경말씀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장모장인을 잘 모시며 살았다는 것이 매우 기뻤다.
요즈음에는 아파트 값이 올라서 만약에 그 당시에 사택을 구입하지 않았다면 어디로 매번마다 이사가서 살고 있을지 생각만해도 캄캄하다.
이 모든것이 지나고 나니 하나님의 정확한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확실해졌다.
지금은 사택을 개인이름에서 교회이름으로 증여등기를 하여 용현동교회 사택으로 온전히 드려지게 되어 감사하다.
코로나 기간동안에 비전헌금으로 매월 100만원씩 사택대출을 값아 나갔지만 아직도 값아야할 사택대출금은 많이 남아 있어 10년상환으로 매월 이자와 원금이 나가게 만들어 놓았으니 능히 잘 감당하게 될것이라 믿는다.
다시 교회세움을 위하여 코로나이후에 용기를 내서 2024년부터 목장을 4개로 재개편하여 4분의 장로님들을 목자로 세우고, 부인들을 목녀로 하여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을쯤에 2025년 8월경에 새로 입주하는 640여세대가 있어서 우리교회로서는 부흥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겨져 입주하기전 동사목사 필요성을 느끼어 당회에 건의해서 동사목사청빙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독신문에 공고하여 서류받았다.
우리같은 작은교회인데도 31명이 지원하여 주어서 많은 인제들이 있다는 것을 깊은 감동을 받게되었고 동사목사청빙워원회가 그중에 3분을 서류심사하고 투표로 뽑아서 수요설교와 면담을 통회 최종 현재 사역하고 있는 김재환 동사목사를 투표로 뽑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가시다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것은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했던 것이다
헌신과 충성보다 말만 앞세우고 교회에 발을 깊이 뿌리 내리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며 지내는 사람은 일꾼으로 믿을 사람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적으로 가진것이 없지만 가장 확실한 예수믿음을 가졌으니 변함없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날마다 천성을 향해 달려가자.
2025년 2월 27일 목요일
담임목사 박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