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대명사'격인 이미자씨가
'노래 55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입니다.
아울러 지난 4월, 세종문화회관에서의 55주년 기념공연을 가졌고
이를 시작으로 전국 투어를 진행하던 중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이미자 노래 55주년'은 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우리 대중음악계의 또 하나의 역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침 이 공연 리플렛에 '이미자씨의 삶과 노래'에 관한 글을
제가 쓰게 되었습니다.
대중음악을 연구, 정리하고 있는 입장에서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미자 노래 55주년' 공연 팜플렛에 게재된 글,
함께 보고자 이곳에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박성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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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5주년 맞는 이미자의 삶과 노래]
‘이미자 노래 한 가닥’은 한국인을 하나로 묶는 소중한 ‘끈’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절세가인(歌人),
‘이미자’라는 이름은 우리 대중음악사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과 노래를 취입한 가수로 이미 1990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그 때까지 발표한 음반은 총 560장, 발표곡수 2,069곡.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씨는 그 많은 노래를 ‘악보 그대로’ 부르는 ‘원곡주의자’이기도 하다.
데뷔 이래 오늘날까지 그의 노래는 근 55년 간 한국인들과 함께 했다.
2002년 남북한 동시에 생중계로 방영된 평양공연에 이어 올해 55주년 기념 콘서트까지,
이미자씨는 한국인이 자부심을 느낄만한 많은 무대에서 국민들과 함께 했다.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1998년 조선일보)’
그리고 ‘한국을 움직이는 100인의 여성’,
‘한국인이 좋아하는 인물 베스트 10’에도 이미 선정된
한국 근대사의 주요인물, 이미자씨.
언젠가 KBS TV에서 ‘대한민국 가치의 대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적이 있다.
이를테면 2002 월드컵 전사들의 몸값,
양평 용문산 은행나무 등 유무형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해
그 가격을 매겨보는 프로그램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인물로 가수 이미자씨가 선정되었다.
평가와 더불어 인터뷰 요청이 왔을 때 처음엔 물론 사양했다.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무형의 가치’를 평가해야 하기에 더욱 중요한 작업이라고 집요하게 설득해와
결국 이 프로그램에 참여, 함께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프로그램 측은 이미자씨가 데뷔 이후
기네스북에 오르는 시점인 90년도까지의 음반 총 판매량을 추산해
음반수익을 1천662억1천898만원으로 추정해놓았고
그동안 공연 횟수를 전속악단장과 함께 추정,
총 3,320회 공연에 현 출연료를 대입해 그간 공연 총 수익이 498억원이라고 1차 산출해놓고 있었다.
갈수록 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난감했던 나는 수치가 늘어날수록 그 실체가 더더욱 가늠되지 않았다.
더구나 대중문화에 끼친 ‘무형의 가치’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나는 우리가 잘 아는 영국속담 중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인도 전체와 바꿀 수 없다’는 말을 예로 들었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듯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이미자씨에 대한 자부심 또한 그 못지않으니
그냥 우리 식으로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기쁠 때 부르면 기쁜 노래가 되고 슬플 때 부르면 슬픈 노래가 되는 ‘이미자 가락’,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절절하게 들렸던 이 노래들은
우리네 ‘삶의 동반자’이자 '지쳐있는 삶의 응원가'였다.
64년 ‘동백아가씨’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트로트를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이미자씨.
‘해적판’까지 기승을 부리게 만든 ‘동백아가씨 신드롬’은 우리 가요계에 또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미8군 출신가수들이 주축을 이루던 번안곡 열풍이 트로트 붐으로 급선회했고
또한 한국 최고의 메이저 음반사로 꼽히던 지구레코드사가 미도파레코드사로부터 독립,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피난 시절 이북 출신들인 임정수, 김능억 공동사장으로 설립된 미도파는
‘동백아가씨’가 대박을 터뜨리자 이듬해인 65년 1월부로 결별, 각각 독립한다.
두 사장이 분가할 때 그동안 미도파 라벨로 출시된 음원들도 똑같이 분배했는데
‘동백아가씨’는 임정수 사장의 지구 몫이었다.
지구는 출발부터 돈방석에서 시작한 셈이다.
지구의 출발과 함께 ‘이미자 시대’는 본격적으로 막을 연다.
특히 천재 작곡가 박춘석씨가 자신의 곡을 이미자씨에게 취입키 위해 자청해서 지구에 전속된다.
작풍도 ‘이미자 풍(風)’에 맞춰 트로트로 선회, 스스로 ‘제2의 전환기’를 맞는다.
이렇게 해서 60년대 빅 히트 3대요소인 ‘지구+박춘석+이미자’라는 진용을 갖추고
‘섬마을 선생님’ ‘그리움은 가슴마다’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
‘황혼의 블루스’ ‘한번 준 마음인데’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동시에 이미자씨는 백영호 곡인 ‘여자의 일생’ ‘아씨’ ‘서울이여 안녕’ ‘여로’
그리고 손석우 곡인 ‘사랑했는데’ 등을 연달아 발표, 거침없는 질주를 계속했다.
쉴 새 없는 공연과 취입으로 그의 목은 늘 잠겨 있었다.
따로 연습할 시간조차 없어 ‘녹음이 곧 연습’이었다.
그럼에도 ‘타고난 목소리’에 대한 찬사는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성대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의 한 연구기관이 그의 성대를 사들였다는 소문까지
전국에 파다하게 나돌기도 했다.
물론 낭설이었지만 이미자씨 역시 이 소문을 접했을 때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데뷔 55주년 기념무대에 앞두고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일화가 있다.
25년 전인 1989년, 이미자씨는 30주년 기념공연을 기해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다.
처음 이 공연은 ‘공연장의 품위’ 등의 이유로
세종문화회관 운영자문위원회의 논란을 야기시킨 일화로도 유명하다.
클래식에 비해 ‘격이 낮다’는 눈총을 받으며 막이 오른 이 공연은,
그러나 첫날부터 세종문화회관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당시 민정당 박태준 대표,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
즉 당시 4당 총재부부가 나란히 관객석에 자리한 것이다.
한국인만의 정서를 대변하고 달래주었던 이미자 노래,
그 실타래 같은 노래 한 가닥 한 가닥은
서민의 밑바닥 정서부터 한국을 움직이는 최고 수뇌부까지
모두 하나로 묶는 소중한 ‘끈’이었던 것이다.
-2014년 4월.
첫댓글 큰 일을 해 내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내일 뵈어요.
늘 여러모로 감사...^^
위대한 그이름
☆이 미자 ☆
한국인을 하나로 묶는 끈 이라는 그의노래
그분만이 할수 있겠지요 ~
박선생님도 뜻깊은 큰수고 하셨습니다
멋지고 근사 합니다 ~~!!!
비록 그 끈이 너무 가늘어서 눈에 쉽게 띄진 않지만 엄청 질긴 듯합니다. 마치 바람새의 인연들처럼...
대중음악의 대명사 ‥
이미자님의 뜻깊은 55주년
귀한 자료들
한눈에 볼수있도록
연구 정리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바람새 댓글의 대명사는 유화님인 듯요. 늘 감사...^^
이미자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자랑입니다.
무조건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