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참여불교운동을 통해본 불교와 정치
/ 일진스님 -현대불교바라밀회
전통적인 불교국가들은 대체로 아시아에 국한되어있다. 즉, 인도, 스리랑카,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월남, 티벳,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에서 불교는 일반대중 생활문화의 원천이며, 사회통합을 이끌어 가는 정신적 기둥이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모두 20세기를 들면서, 전쟁, 식민지 시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민족분쟁, 자본주의 경제, 서구화, 현대화, 등의 혼란하고 복잡한 한 세기의 변화를 겪으면서 밀레니움을 맞이했다. 이 급속한 사회변화는 불교인들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또 실질적으로 사회전반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불교의 새로운 변화를 -나라에 따라서- 사회개혁불교, 참여불교, 실천불교, 현실참여불교, 민중불교, 혹은 인간불교 같은 이름으로 개념을 잡아가고 있다.
지난 2월 26일 2003년 “불교와 정치”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세계종교회의 주최로 있었다. 이 날의 주제는 21세기에 불교국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참여불교운동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발제자로는 뉴욕 불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스리랑카의 피아티사 스님과 세인트 피터즈 대학장인 로버트 케네디, 그리고 미스터 교이치 슈기노씨가 나왔다. 발표 중 많은 부분이 중복되는 것이 있어서, 여기서는 그 내용들을 스리랑카, 인도, 태국, 월남, 일본의 사례를 정리 요약하여 싣는다.
1. 스리랑카의 불교실천운동
이곳에서의 참여불교는 1958년, 재가자 아리야라트네 박사가 창설한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Sarvodaya Shramadana Movement)을 불교계의 사회개혁운동으로 들 수 있다. 일찍이 스리랑카는 13세기에 인도의 힌두교로부터 침공을 받았으며, 14세기에는 회교도의 침공을, 16세기에는 포르투갈로부터 카톨릭을 강요받았고, 17세기는 네덜란드, 18세기는 영국으로부터 개신교를 강요받는 순탄한 적이 없던 나라이다. 그러므로 19세기에 이르러서 불교의 흔적은 점차적으로 사라져가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때 담마팔라는 1873년에 콜롬보에 “부다가야 대보리회”를 창설하여 불교부흥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나란다 대학에 교수로 있는 사르보다야에 의해서 나란다 대학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련의 봉사캠프로 이어졌는데, 이 캠프를 “수라마다나(노동력보시)”라고 불렀다. 이 운동의 주된 목적은 스리랑카에 만연하고 있는 빈곤을 해결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혹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잠재되어있는 무능하다는 생각에서 깨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사르보다야는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붓다담마(Buddhadharma)라는 용어는 곧 “모두 깨어나는 것”이며,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깨어난 것과 같이 모두 깨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깨어남은 정신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사회, 경제, 정치, 도덕, 문화 전반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간디의 박애사상과 불교의 사상이 연결되어 시작된 것으로 촌락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목적은 개인의 각성을 바탕으로 한,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부유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깨끗한 자연환경, 마시기에 적당한 물과 음식, 기본적인 건강보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설비, 정신적, 문화적 욕구 충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처음에 이 운동은 가난한 마을의 개발을 위해서, 건물 증축, 화장실 만들기, 나무 심기, 건강관리 강연 등의 일을 했다. 나중에 활동이 확대되어서, 1985년까지 전 촌락의 1/3에 해당하는 8,000에 달할 정도로 널리 펴져 나갔다. 또한 학생위주의 봉사캠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정부기구로 발전되었으며, 국제적인 후원단체의 도움으로 교육센타, 도서관, 미디어센타, 회의장, 행정 부서를 갖춘 대규모 개발교육 종합시설을 모라투와에 건립했다. 1983년 6월에 발생한 참담한 내전 사태 이후 사르보다야는 다양한 민족단체를 참가시켜 평화회의와 평화행진을 추진하기 시작했으나, 정부의 반대로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이 단체는 현재까지 스리랑카에서 가장 활동적인 불교단체로 주목받고 있다.
2. 인도에서의 인권운동
인도는 잘 알려진 사성계급이 존재하는 나라이다. 즉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지 않음을 사회적으로 받아들였다. 20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사회적 제도에 저항한 사람으로는 암베드카(Ambedkar)를 들 수 있다. 암베드카드는 가장 하급인 불가촉 천민 계급에 태어났다. 그의 신분이 말해주듯이 어려서부터 신체적, 정신적, 계급적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도를 망치는 것은 영국이 아니라, 인도의 카스트 제도라고 주장했으며, 불가촉 천민의 인권 회복을 위한 운동을 했다. 불가촉 천민은 공동우물을 다른 사람과 함께 마실 수 없게 되어 있는 관습에 대한 저항운동을 1927년에 주도했으며, 1930년에는 사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외쳤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은 힌두교에 근원이 있다고 생각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존심을 얻고 싶다면 개종하시오, 힘과 평등과 독립을 원한다면 개종하시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개종하시오.”라고 하면서 종교는 운명적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고타마 싯달타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가르치는 가장 고귀한 가르침이며, 그 가르침의 목적은 내세보다는 현 세상을 정화시키는 현시점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암베드카드는 본래 자신의 종교 힌두교를 버리고, 1956년 10월 자신을 따르는 약 50만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불교로 개종했다. 자신이 평생에 지킬 22가지의 서약을 했다. 그중 많은 조항은 힌두교의 어떠한 신에 대해서도 경배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 남녀 평등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것을 맹세하고 있다. 그는 타계하기 전까지 불교에 대한 강연과 글을 쓰는 등 쉬지 않고 노력했으며, 또한 평생을 인간의 기본권, 평등권 그리고, 불가촉 천민의 인권, 정치적, 경제적 평등과 자유를 얻기 위해 공헌을 했다.
그 후 암베드카드의 불가촉 천민 인권운동은 상가락시타 스님에 의해서 이어졌다. 현재 이들은 법을 설하기 위한 대중센터, 수행을 위한 수련원, 그리고 구성원들과 동료들이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주거 공동체 등을 설립하는데 주력을 하고 있다.
3. 태국불교의 사회개혁운동
태국은 동남아 국가 중 유일하게 외국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이다. 그들은 외국인을 서양 오랑캐라고 규정하고 문을 닫기보다 그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배웠다.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마는 예외였던 것 같다. 허버트 케인이 쓴 “기독교 세계 선교사(박광철 역, 생명의 말씀사)”라는 책을 보면 선교활동이 ‘태국’에서 상당히 어려웠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미국 선교사가 그곳에 들어온 것은 1831년이었는데 단 한 사람의 세례 교인도 없이 18년을 지냈다. 그 일에 너무 지쳤기 때문에 1849년에 철수하고 말았다. 미국 침례교회도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하였다. 그들은 소수의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나 단 한 명의 태국인도 없었다. 17년간의 어려운 수고 끝에 모두 철수하였다가 세계 2차대전 이후에야 돌아왔다. 미국 장로교회는 1840년에 들어왔는데 끝까지 출국을 거부하여 19년이 지나서야 첫 태국인이 개종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국에서 불교의 위치가 대단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태국에서도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교리와 종단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출가자로서는 붓다다사 비구, 재가인으로서는 술락 시바락사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붓다다사스님의 생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동남아시아의 불교 전통 중에 하나는 공부하고 의식을 거행하는 도시 승려들과 오로지 명상에 전념하며 숲에서 수행하는 승려들 사이에 엄격한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붓다다사 스님은 이 사원 생활의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20세가 되었을 때, 불법 실천을 위해 폐사(廢寺)가 된 트리팡 지크사에 자리잡고, 하루에 한끼만을 먹으며, 홀로 생활하는 전통적인 두타행을 통한 수행을 했다. 그 곳에 '수안 모크(자유의 뜰)'를 설립했으며, <불교(Buddha-Sadana)〉라는 잡지를 계간으로 간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직접적인 정치 활동이나, 단체에 참가하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많은 글과 강연, 설법 등을 통해서 현대 사회 구조의 부도덕성과 이기주의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을 하였다. 개인의 이익만을 중요시하는 자본적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갈수록 심화되어 가는 빈곤, 범죄, 환경파괴, 마약 남용, 전쟁과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개인보다는 사회가 더 근본적인 것이며 전체로서의 사회관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담마적 사회주의 사상은 불교의 진보 단체와 그리고 사회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태국의 사회참여 불교운동을 주도한 사람으로 재가 신자 술락 시바락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사회비평가, 행동주의자이고, 작가, 강연자로서 세계에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태국의 지역 사회개발운동, 비정부단체 활동 등 광범위한 활동으로 두 번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는 국제 사회참여불교를 조직했다.
그는 불교인의 목적은 더 많은 학교, 병원, 문화회관을 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인 -사회적, 도덕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사회의식을 깨울 수 있는, 인간의 충분한 내적인 힘과 도덕적인 용기를 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 종교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물질세계를 따라 갈 수 있는 정신 세계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정신운동으로 그가 주장하는 것은 소문자 ‘b’ 불교 운동이다. 만약 불교가 깨달음과 보편적 자비를 베푸는데 길잡이가 되기를 원한다면, 소문자 ‘b’의 불교를 해야 한다. 소문자 ‘b’의 불교란 미신, 제한적이고, 자기 중심주의적인 전통과, 번잡한 의식에서 벗어나서, 관용과 진실한 지혜를 증진하는 부처님의 본래 말씀에 충실하는 것이다.
4. 월남의 참여불교
베트남 불교사회개혁운동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는 틱낫한 스님이다. 그는 불교사회개혁운동에 중요한 실천원리를 제공했으며, 또한 제도적 폭력에 맞서 저항했다. 월남에서의 불교 사회개혁운동은 1963년, 남 베트남 디엠 정권의 종교적 탄압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디엠정권은 같은 해 석가탄신일에 게양된 불교기를 훼손함으로써 전 국민의 80%가 되는 불자들을 자극했으며, 군중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6월 11일, 틱광둑 스님이 정부에 항의하여 사이공 거리에서 분신을 한 것이다. 불길 속에서 좌선을 한 채 죽어 가는 이 사진에 전 세계가 경악을 했으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승려들의 분신이 잇달았다. 이 사건은 정치적인 상황과 연결되어서 반정부 투쟁과 평화를 위한 반미 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틱낫한 스님은 디엠정권의 인권침해 사실을 유엔에 알렸다.
디엠정권이 무너지면서 불교계는 베트남 통일 불교회(Unified Buddhist Church of Vietnam)를 조직했다. 그들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미군도, 압제자도 아니며, 더욱 근원적인 것은 병폐적인 사회구조, 즉 제도적 폭력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개혁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 단체가 대중적인 정치력을 형성한다고 생각해서 이 단체를 불법종교단체로 규정했으며, 국내에서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때 전개된 사회개혁운동의 포괄적인 행동 원칙은 틱낫한 스님의 사상을 통해서 이해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현재 전쟁을 겪는 많은 나라들의 정신적 원천이 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제창했던 현실 참여 불교에 14가지 기본 원칙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첫째는 독트린, 이론, 이상주의, 혹은 불교적인 것까지라도 맹목적인 우상주의를 버려야 한다. 불교의 생각 체계는 이상적인 것에 도달하는 안내서이지, 그것 자체가 절대진리가 아니다.
둘째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편협한 마음과 좁은 안목을 피하라. 열린 마음으로 집착되지 않음을 배우고, 실행하도록 한다. 진리라는 것은 생활하는 가운데 발견되는 것이지,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준비하라,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셋째는 당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어린이 일지라도- 강요하지 말라. 권위를 가지고, 혹은 위협으로, 돈으로, 세뇌공작으로, 그것이 교육을 통해서라도 하지 말라. 자비스런 마음으로 광신과 편협을 고칠 수 있는 대화를 하라.
넷째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거나, 못 본 척하지 말라. 이 세상은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방문 혹은 이미지를 통해서 그들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야 하며, 그것을 통해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이 깨어난다는 사실을 인지하라.
다섯째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고 있는데 돈이나 재산을 축적하려고 하지 말라. 그리고 당신의 존재를 명성이나, 재산, 부, 감각적 즐거움에 두지 말라. 간단하게 살라. 시간, 에너지, 그리고 물질적 풍요를 함께 하라.
여섯째는 성냄과 화를 오래 간직하려 하지 말라. 당신의 마음에 있는 성냄의 씨앗을 잘 살펴서, 씨앗을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 혹 당신이 성이 난다면, 나는 순간에 너의 관심을 자신의 숨에 돌리도록 하라. 그리 한다면, 그 성냄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일곱째는 당신 자신을 잃지 말라. 만약 정신이 산만하고 움츠려든다면, 곧 당신의 호흡으로 돌아 오라.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깨닫는 현재로 돌아올 수 있다. 안과 밖으로 무엇이 당신을 방황하게 하며, 신선하게 하는지를 알라. 즐겁고 평화를 가져오는 인연을 만들어라.
여덟째는 당신이 몸담고 있는 단체의 화합을 깰 수 있는 말을 하지 말라. 충돌과 대립을 해결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여라.
아홉째는 사람들의 감명을 주기 위해서, 혹은 개인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허황된 말을 하지 말라. 갈라지고 미움을 낳을 수 있는 말을 하지 말라. 정확히 모르는 소식을 전하지 말라. 정확히 모르는 것을 비판하거나, 냉소하지 말라. 그러나, 안전을 위협 당할지라도 정의가 아닌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열째는 불교단체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라. 불교의 교단을 정치적인 파당에 치우치게 하지 말라. 그러나 종교단체는 압박과 정의롭지 않음에 대하여 정확한 주장을 해야한다.
열 한 번째는 사람과 자연에게 해가 되는 직업을 가지려고 하지 말라. 생명의 기회를 뺏는 일을 하는 회사에 투자하지 말아라.
열두째는 죽이지 말라. 다른 사람을 시켜 죽이게 하지 말라. 생명을 더 잘 살도록 하는 방법을 찾으며, 전쟁을 막아라.
열 셋째는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은 가지려 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재산을 존중하라. 그러나 다른 중생의 고통으로부터 얻어지는 부를 막아야 한다.
열 넷째는 당신의 몸을 함부로 하지 말라.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몸을 어떻게 간직할 것인지를 배우라. 몸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지 말라. 삶의 중요한 에너지를 잘 간직하라. 그리고 타인의 행복도 당신의 책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라.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당신이 새로운 어떤 곳을 만들어 내는 곳이라고 명상하라.
5. 일본의 실천불교운동
일본에서의 사회참여 불교운동은 창가학회를 들 수 있다. 불교에 관련된 많은 종파가 일본에 있지만 이 단체만큼 불교사상을 기초로 사회, 정치 운동을 폭넓게 전개하는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창가학회는 1930년 11월 18일, 마키구치쓰네사부로 초대회장과 도다 죠세이 제 2대 회장(당시 이사장)에 의해 창립되었다. 그 명칭인 ‘창가’는 ‘가치를 창조한다’는 뜻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인생의 가치를 창조하여 자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왕성한 독창성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 사상의 근본은 니치렌이 강설한 ‘색심불이(色心不二)’의 생명철학인데,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존엄이라는 입장에서 민중의 구제와 행복, 그리고 그것을 위한 웅대한 문화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
창가학회는 일련정종의 교리는 따르는 단체이며, 법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 단체는 신도를 우대하는 군부 정부의 탄압으로 마키구치 회장, 도다 이사장을 비롯한 21명의 간부가 잡혀 당시 3,000세대 있던 조직이 궤멸 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고, 회장은 1944년 11월 18일, 옥중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학회는 제 2대 회장에 의해 재출발했으며, 1958년까지 회원수 75만세대가 되는 커다란 발전을 했다. 1960년, 3대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에 이르러서는 종교정당인 공명당(公明黨)을 만들어 의회에 진출하였다. 독자적인 정교일체주의(政敎一體主義)에 입각한 종교·정치 활동을 통하여 행동적인 강력한 조직을 발전시켜, 60년대 초에는 일본 최대의 종교단체가 되었다. 현재는 일본 및 해외 각국에서 회원수가 증가해 전세계적으로 185개국에 2,000여 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일본에 두 개의 고등학교와 한 개의 큰 대학을 포함하고 있는 교육계, 두 개의 미술박물관과 여러 문화단체 그리고 여러 출판회사들과 거대한 발행 부수를 가진 신문사 이외에도 일본의 다양한 국가적, 국제적인 문화단체들을 후원하고 있다. 국제적 활동에 있어서는 유엔을 지원하고 있으며, 국제 지부라 할 수 있는 국제 창가학회(SGI--Soka Gakkai International)는 비정부단체로서, 평화, 교육, 문화 교육을 국제교류에 힘쓰고 있다.
창가학회는 일본 국민들에게 현대적인 불교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단체가 지향한 것은 사회제도를 급진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개선 또는 정화시킴으로써 인류의 탐·진·치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도덕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기초로서 역할을 해야한다는 믿음 아래 종교적 이상주의와 현실적인 사회활동 프로그램을 근본적으로 혼합시키는 데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결어
불교는 오랜 세월을 아시아에 머물면서 그 나름대로 전통을 가꾸고 이어왔다. 그러나 서양의 세력은 전통에 머물러만 있게 하지 않았다. 아시아 불교국가에 있어서 적극적인 사회개혁운동을 촉발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제 2차 세계대전이 폐막하고 서구의 식민지주의가 종식되면서, 아시아에서는 자국 내에 존재하는 비 민주화, 빈곤, 인권탄압, 불평등과 같은 문제에 봉착했으며,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의식에서 불교의 사회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특징을 한 마디로 규명하기는 어려우나, 다음과 같은 특징을 제시하여 볼 수가 있다.
첫째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 사회를 혁신하는 데 관심이 많았고, 둘째는 이들이 추구한 것은 균형 잡힌 삶이며, 셋째는 이러한 불교사회 참여 운동은 출가자, 재가자가 모두 동참하는 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2003년 5월 155호]
첫댓글 일진스님은 현재 운문사 강원에서 영어를 지도하고 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