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939년, 여산 혜원 좇아 극락 간 진공(眞空) 대사
있는 곳 : 경상북도 연주시 풍기읍 삼가로 661-29 비로사
참고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高麗篇1 (1994)
(깨짐) 상주국上柱國 신臣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깨짐) 병부대감兵部大監 상주국上柱國 사단금어대賜丹金魚袋 신臣 이환추李桓樞는 교서에 따라 비문을 쓰다.
(깨짐) 그러나 (사꺄무니 붇다) 니르바나는 너무 빠르고, (미륵불) 용화龍華가 널리 사람과 하늘을 맡겠지만, 너무 늦게 나오는 것을 못내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천축까지 거리는 너무나 멀고, 설산은 더욱 멀고 험한 길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인도에서 일어나 이미 오래되었으나, 붇다의 말씀(伽譚)이 동녘 나라에 전해 오지 못하였다. 옛날 (주나라) 성왕이 불교 전래에 대한 비결을 적어 남교사南郊祀 곁에 묻어 두었는데, (후한) 명제(AD 60년) 때 비로소 임금의 꿈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고승의 자취가 이어져 (깨짐) 동쪽 나라(震旦: 인도 동쪽은 한나라)로 와서 불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기존 세력인 도교의 반발이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영평 10년(AD 67) 도교 지도자와 불교 고승이 법력을 판가름하였는데, 마침내 도교가 지자 도교인들은 변경으로 도망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점차 천성이 밝아져, 눈을 돌려 법안을 엿보게 되었다.
이때 아라한 · 보살인 원각대사(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양나라에 들어와 국경을 넘어 위나라로 갔다. 처음으로 혜가가 팔을 바치는 정성 때문에 능가경과 마음의 고갱이를 전했다. (깨짐) 그 뒤 모두 그 도를 우러러보게 되었고, 6대에 가서 종宗을 세우니 거듭 빛이 나고 적통의 줄기가 이어져 꽃부리와 빛깔이 함께 피어나 더욱 향기로웠다. 남악에 이르러 그 빛을 이어 강서에 퍼지면서 그의 법손도 낱낱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깨짐) 대사의 이름은 □운□運이요, 속성은 김씨이니, 계림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성한聖韓에서 강등하여 내물왕 때 다시 일어났고, 뿌리에서 가지까지 약 100세 동안 아름다운 길을 걸었다. 할아버지 산극(珊<玉+厼>)은 관직이 본국의 집사시랑執事侍郞에 이르렀으며, 아버지 확종確宗은 여러 번 벼슬하여 본국의 사병원외司兵員外에 이르러 함께 조상의 덕을 선양하면서 가문의 명예를 빛냈다. 어머니 설씨薛氏는 일찍이 (깨짐)을 꾸고는 훌륭한 아들을 낳기를 발원하여 사슴 왕을 보는 특별한 상서를 얻어, 드디어 대중 9년(855) 4월 18일에 태어났다. 스님은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성스러운 모습을 지녔고, 어렸을 적에도 전혀 장난하지 않았다.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하면서 누구를 의지하여 살 것인가 하고 피눈물을 흘렸으며,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늘 짠 것(醬)을 안 먹었다. 공부할 때가 되어 책을 끼고 가서 가르침을 받을 때는 (깨짐) 천재로서 다섯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았다. 감라甘羅가 벼슬할 나이에 이미 그 명성이 고향에 널리 퍼졌고, 왕자 진晉이 신선의 도리를 찾아 떠나려던 나이에 서울까지 명성을 떨쳤으니, 어찌 불법에 대한 깊은 전생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깊이 세속을 싫어하여 어머니에게 입산 출가할 것을 허락해 주십사 하고 간절히 요구하였으나, 어머니는 아들의 간절한 정성을 끝내 막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더욱 그 뜻을 굳혔으며, 어머니는 어릴 때 학업을 중단하는 것은 마치 베틀의 베를 끊는 것과 같다고 설득하였으나 처음 마음먹었던 뜻을 바꾸지 않았다. 마침내 출가하여 명아줏대 지팡이 짚고 산 넘고 물 건너 구도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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