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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문화]
일본의 독서열, 간다진보초 헌책방 거리를 거닐다
박경수(전남대 일본문화연구센터 학술연구 교수)
지금은 일본도 스마트폰이 대세이지만, 일본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바로 일본인의 습관으로 자리 잡은 독서 패턴에 감동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철이나 기차 안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 사이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조용히 신문을 보거나 책을 꺼내 들고 독서를 하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카페나 공원 등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도 독서 삼매경에 빠진 주부나 어르신도 흔하게 보인다.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상당수가 독서를 한다. 이들의 독서열이 일본의 저력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일본인의 이 같은 꾸준한 독서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배경을 알려면 도쿄 중심부에 있는 전통적인 서점가로 가보면 된다.
세계 최대의 서점가 간다진보초
일본에서 독서를 좋아하거나 책에 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서점가인 진보초에서 하루 종일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낸 추억이 있을 것이다.
도쿄 중심부 지요다구에는 세계 최대의 서점가 간다진보초가 있다. 에도막부의 무사 진보 나가하루의 저택이 있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도쿄에는 진보초 외에도 분쿄쿠(文京区)나 와세다대학 주변에 크고 작은 고서점가가 있지만, 야스쿠니 신사와 메이지대학 사이 가로세로 약 2km에 걸쳐 늘어서 있는 이곳 진보초의 서점가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철 진보초역에 내리면 네거리 곳곳에 문학이나 인문학은 물론 아동도서, 영화, 미술, 외국도서 등등 분야별로 전문성을 지닌 서점들이 즐비하다. 서점가에는 특히 고서점이 160여 개소나 밀집되어 있어 고서점가로는 세계 최대급이다. 이 때문에 '헌책방거리'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신간서적을 출판하거나 이를 판매하는 서점도 함께 있어 신구의 조화가 어우러진 곳이기도 하다.
도쿄는 어디를 가더라도 중소 규모의 서점을 발견할 수 있지만,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소규모의 서점들이 특성별로 대를 이어 가업을 지켜가고 있는 것을 보면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광화문이나 강남에 소재한 대형 서점 외엔 몇 킬로 반경 내에서 동네 서점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현실에 비하면 실로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출판문화의 메카 간다진보초
원래 진보초는 에도시대 때 에도성을 지키는 무사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었는데, 메이지유신 이후 숙소와 부속건물이 국가 재산으로 환수됨에 따라 근대 국민 교육을 위한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따라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이 세워지면서 주변에 자연스럽게 출판사와 더불어 책을 판매하는 서점도 생겨 났다. 진보초에 가장 먼저 자리 잡은 서점은 1877년 고서점으로 개업한 '유히카쿠'이다. 지금까지 6대손이 대대로 운영하는 주식회사 형태의 유히카쿠는 진보초 서점가의 시작인 셈이다.
진보초가 유명 서점가로 부상한 데는 이와나미 서점의 창업자 이와나미 시게오와 근대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영향이 크다. '유히카쿠가 생기고 36년 후인 1913년, 당시 간다여자고등학교 교원이던 이와나미 시게오는 진보초의 화재가 있었던 자리에 자신의 이름으로 고서점을 개업했는데, 이때 도쿄제국대학 교수이자 문학자인 나쓰메 소세키와의 만남은 일본 최고의 출판사로 급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를 전후로 잇세이도, 도쿄도를 비롯한 다수의 점포가 신설되고 1920년에는 드디어 ‘도쿄고서적조합’까지 설립되면서 진보초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서점의 활기는 출판업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 때문인지 진보초에는 이와나미 서점을 비롯해서 다수의 출판사가 있다. 현재 진보초의 랜드마크로 부르는 산세이도 본점 외에도 잇세이도, 쇼가쿠칸, 슈에이샤 등 이름난 대형 출판사가 포진되어 있어 일본 출판문화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 준다.
한국에 비해 번역의 역사가 길고 인문학이 번성한 일본의 출판문화에 대해서는 전부터 익히 들은 바가 있지만, 진보초 서점가의 규모와 전문성은 실로 놀랍기만 하다.
일본 지성계의 견인차
도쿄 토박이들의 자부심이 깃든 진보초 주변에는 예부터 유수한 대학이 위치하고 있어 일본 지성계를 이끌어 왔다. 1880년대에 메이지 법률학교(현 메이지대학), 영국지리법률학교(현 주오대학), 일본법률학교(현 니혼대학’), 센슈학교(현 센슈대학) 등 법률 계통의 학교가 잇따라 설립되자 학생과 연구자를 상대로 법률 서적 전문 서점이 속속 생겨났고, 이후 이들 대학의 학부가 다양화됨에 따라 각 분야별로 전문화된 서점도 늘어났다. 몇몇 대학이 도시 외곽으로 이전했지만 지금도 진보초 주변에는 대학이 많다.
지도에서 보듯이 메이지대학, 호세이대학, 니혼대학, 센슈대학, 도쿄의과대학, 도쿄치과대학, 준텐도대학, 공립여자대학, 순다이학원, TAC, LEC 등이 이곳에 포진되어 있어 전공 서적은 물론 일반 서적의 수요층도 상당하다.
간다진보초의 명물 고서점 ·헌책방
진보초에는 대규모 출판사나 전문성 있는 유명한 서점도 있지만 소규모 서점과 고서점도 상당히 많다. 그중에서도 진보초가 책방 거리로 유명해진 것은 단연 고서점 덕분이다. 고서점은 야스쿠니 대로와 스즈란거리(야스쿠니대로 개통 이전의 메인스트리트)를 따라서 160여 개 점포가 쭉 늘어서 있다. 사진집, 고지도, 의학서 등 전문 서적을 취급하는 곳도 많지만 소설, 만화, 잡지 등 대중 서적을 판매하는 점포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헌책방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필요한 책을 정가보다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점과 이미 절판되었거나 구하기 힘든 희귀 도서를 만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일반 서점에서는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중고 서적이나 고서를 헌책방에서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은 헌책 가격과 새 책 가격이 별로 차이가 없다. 필요한 책 몇 권을 부담 없이 사려고 했다가 계산할 무렵엔 비싼 책값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그나마 축제 기간에는 할인 행사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살 수 있으니 다행이다.
헌책방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는 학창 시절의 감성을 자아낸다. 천장까지 빼곡히 쌓아 놓고도 공간이 부족해 이곳저곳 쌓여있는 책 더미, 어두운 실내 조명에 적당히 쌓인 먼지, 책에 취해 헌책방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는 손님, 무심한 듯하면서도 손님이 필요한 책을 이야기하면 곧바로 책을 찾아주는 친절한 주인까지... 진보초는 헌책이나 중고 서적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갖가지 사연을 품고 있는 곳이기에 지방에서 상경해서 향학열을 불태우던 가난한 학생들을 떠올리며 젊은 날의 감성에 젖어본다. 그 친구들도 책 살 돈이 없어서 지난 학기 책을 팔아 신학기에 필요한 전공서적을 조금이라도 싼값에 구하려고 어지간히 발품을 팔고 다니지 않았을까? 진보초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한국에도 이런 향수를 떠올릴 만한 고서점이 부산 보수동에 남아있다. 250m쯤 되는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50여 곳의 고서점이 늘어서 있는 보수동의 책방거리는 한국전쟁 피난민의 갖가지 애환과 전쟁중에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부단한 발자취를 느낄 수있는 곳이다.
헌책이나 중고 서적은 한 시대의 소중한 기록물이자 그 시대의 지적산물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 이런 점에서 진보초의 고서점은 귀중본과 희귀본 등을 수집해서 잘 보관했다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미덕이 있는 곳이다. 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고서에 대한 책방 주인의 정성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헌책이 들어오면 우선 먼지를 털어낸 다음 한 장씩 넘겨 가며 오염된 부분을 정성껏 닦아 낸다. 그러고는 손수 붓으로 책 제목과 가격을 써 넣은 띠를 두른다. 심지어는 붓으로 책 내용에 관한 설명을 써서 책갈피에 끼워 두기도 한다. 물론 진보초 헌책방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책방 주인의 정성 덕분인지 대충 진열된 듯한 헌책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간다진보초, 복합 문화 공간을 창출하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진보초 고서점가에 대한 일본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런 만큼 진보초의 책방 주인들은 일찍부터 이곳을 테마가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특화시켜 나갔다.
1960년 가을부터 매년야스쿠니대로를 따라 약500m 거리에서 열리는 '간후루혼 마쓰리’는 책을 매개로 문화와 축제를 성공적으로 엮어 낸 사례다. 고서점과 헌책방주인들이 주도하는 이 축제는 2019년에 60회째를 맞아 명실상부한 전통 있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이 축제가 포문을 열면 행사장 인근의 출판사와 신간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까지 합류해서 헌책과 새 책을 아우르는 그야말로 '책의 축제'가 펼쳐진다. 바로 '진보초 북 페스티벌'이다. 2019년에 29회째를 맞은 이 행사는 매장 면적만 5,000평이나 되는공간에 약 1000만 권의 재고 책과 엄청난 양의 신간 책까지 싼 가격에 판매한다. 이때 저자 사인이 들어간 책을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기도 한다.
진보초의 북 페스티벌은 고서나 헌책 또는 신간 서적 판매에 그치지 않는다. 곳곳에서 축제에 활기를 더해 주는 미니 콘서트, 인근 학교 학생들의 취주악, 작가와의 만남, 문학상 수상식, 사인회, 전시회, 문화강좌 등을 열고 있어 그야말로 '책의 축제'다운 면모를 보여 준다.
우리는 책을 매개로 문화와 축제를 엮어 대성공한 사례로 영국 웨일스의 '헤이온와이(Hay-on-Wye)’를 언급하곤 한다. 인구 2,000여 명의 작은 시골 마을을 테마가 있는 관광 마을로 변신시켜 명실공히 '세계 최초의 책 마을'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책 마을'이라는 명성을 얻은 ‘헤이페스티벌(Hey Festival)’이 그것인데, 헤이페스티벌의 시작이1988년인 데다 고서점 수도 30개소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진보초는 전통 면에서나 규모 면에서도 월등하다.
책의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지친 다리를 쉬어 가게 하는 찻집, 갖가지 음식의 향연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음식점, 고서와 잘 어울리는 중고 음반이나 우키요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 고서점 거리에 걸맞게 옛 일본 영화를 상영하는 작지만 조금은 특별한 '진보초시어터', 그리고 곳곳에 책 관련 소품을 취급하는 좌판까지 모두 함께 어우러져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낸 진보초야말로 책을 테마로 한 최상의 복합문화공간이다.
진보초의 북카페 '책거리'
진보초에는 쿠온출판사(2011년 창업, 사장 김승복)가 운영하는 한국 서적 전문 북카페 ‘책거리(CHEKCCORI)’가 있다. 2015년 여름에 오픈한 책거리는 한국문학서, 아동서, 만화, 실용서 3,000여 권에 한국어 학습서, 한국 관련 일본어 책 약 500여 권을 갖춰 놓고 판매하는 서점일 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과 한국어,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이다. 김승복 사장은 책거리의 오픈 기념으로 '새로운 한국 문학 시리즈'를 기획했는데,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필두로 한국 문학서 14권을 일본어로 번역 출간한 데 이어 최근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20권 분량으로 일본어 번역 출판을 진행 중이다.
북카페 책거리는 책으로 한국을 알린다는 취지로 국적에 상관없이 한국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거기서 작은 커뮤니티를 만들어 낸다. 한국 서적 주문대행 서비스는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의 작가나 아티스트를 초대해서 토크쇼나 공연 등을 여는 ‘책거리 라이브' 외에도 '독서회', '저자 사인회' 등이 연간 100회도 넘게 열린다. 게다가 외부인에게 이벤트 등을 위한 공간 대여 서비스까지 하는 등 책 덕분에 다양한 인연을 만들어 가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아직도 살아 있는 일본의 독서열
간다진보초의 이모저모를 둘러보니, 인터넷의 보급으로 독서 패턴이 다양해진 현재 일본의 독서문화가 새삼 궁금해졌다. 진보초의 출판문화가 상징하듯 15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책 출판량과 종류는 실로 엄청났다. 총 4,300여 출판사에서 연간 발행한 단행본이 14억 3062만권에 달했다. 그중 신간이 3만 8,000여 종이니 하루에 100여 종이나 되는 신간이 독자를 만나기 위해 서점에 쏟아진 셈이다. 특히 단행본보다 값이 싸고 휴대하기 좋은 포켓 사이즈의 문고본은 장소에 상관없이 독서를 가능하게 했고,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독자까지 흡수해서 일본인의 독서열 상승에 큰 몫을 했다.
이렇듯 다양한 서적 간행과 효과적인 유통망에 따른 높은 독서열로 한때 '독서왕국'이란 명성을 얻었던 일본이지만,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자 일본인의 독서 패턴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문학서보다는 흥미 위주의 오락 잡지나 만화 등을 선호하는가 하면, 인터넷과 휴대 전화에 익숙한 젊은 층에서는 종이책보다는 전자책을 즐겨 보는 경향이 많아졌다. 특히 주로 10대나 20대 젊은이들이 창작하고 읽는 게이타이소설(携帶小說)의 경우 100만 뷰를 넘는 베스트셀러도 있어 젊은 층의 독서 패턴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이런 추세는 종이책 출판 시장의 판매 감소로 이어져 《마이니치신문》(2018. 11)에 따르면, 2017년 일본의 종이 출판물 판매액은 1조 3701억 엔(한화로 약 13조 7000억 원)으로 전년대비 13년 연속 감소 추세를 보였다. 매년 상승일로에 있던 전자책도2017년 시장 규모가 2215억 엔으로 전년보다 350억 엔 정도 증가하는데 그쳤다. 그러니까 종이책과 전자책 판매액을 합하면 1조 5916억 엔으로 전년에 비하면 4.2%가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평론가 쓰노 가이타로가 "일본인은 화력과 무관하게 평생하루에 1권씩 책을 읽는 사람이 무수히 많으며, 매일 꼬박꼬박 3권씩읽는 독서광도 적지 않다"라고 했듯이 일본인은 생활 속에서 기존의 독서 패턴을 고수하고 있다. 1억 2000만 명의 일본인이 2014년 한 해동안 서점에서 6억 4000만 권의 책을 사서 보았고, 도서관에서 7억 권을 빌려 보았다는 '일본출판자협의회'의 조사와 진보초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책과 독자를 연결해 주려는 출판사와 서점의 지속적인 노력과 실천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본인의 책에 대한 애착과 독서열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보초의 북 페스티벌에서 만난 '당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한 권의 책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라는 문구가 울림이 되어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