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리비아 반군 진영을 리비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유엔의 대(對) 리비아 비행금지구역 선포를 주도한 데 이어, 지난 3월 19일엔 공군기를 출격시켜 서방국가 중 처음으로 무력개입을 했다. 독재자 카다피에 대한 단죄에 프랑스가 가장 앞장선 이유는 뭘까?
국내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져 내년 대통령 재선가도에 적신호가 켜진 사르코지가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도박을 했다거나, 리비아의 경질유(유황 성분이 적은 고품질 원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자국 석유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속셈이라는 등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는 유엔 결의안처럼, 프랑스의 행동엔 인간 존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인류애적 결단이란 칭송도 뒤따른다. 외양상 결단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내렸지만, 뒤에서 그를 조종한 이는 ‘행동하는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62)였다.
행동하는 철학자 군대를 움직이다
늘 하얀색 와이셔츠를 풀어헤쳐 가슴팍을 드러내는 차림새를 즐기는 이 철학자는 지난 3월 초 그런 차림새로 리비아 반군의 거점인 벵가지를 찾아갔다.
그는 며칠 동안 벵가지에 머물면서, 민주화 시위 현장을 방문하고 반군 지도자들을 만나본 후 ‘역사적 대의는 반군 쪽에 있다’고 확신하고,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리비아 상황을 설명하고 반군 지도자들과 만날 것을 제안했다.
사르코지는 정치적으론 좌파 인사지만 오랫동안 친분이 있던 저명 철학자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파리로 돌아온 앙리 레비는 반군 지도자들을 파리로 초청, 엘리제궁에서 사르코지 대통령과 독대하는 자리를 주선했다. 사르코지는 반군 지도자들과의 만남 후 3월 10일 반군진영의 과도 정부를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 본격적으로 리비아 사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앙리 레비는 신문 기고, 방송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리비아 반군 세력의 역사적 정당성을 강조했다. 또 다니엘 콩방디(프랑스 68혁명 주역) 등 좌우파를 아우르는 지식인들과 광범위하게 접촉, 리비아 사태에 프랑스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설득했다. 프랑스 언론은 앙리 레비가 리비아 반군과 프랑스 정부 간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평가하고 ‘비공식 외무장관’이란 별칭을 붙여주었다.
알제리 태생 유대인 앙리 레비는 20대부터 천재 철학자로 인정받았던 인물. 프랑스 최고 명문대학 에콜 수페리어 노르말(고등사범학교)에서 자크 데리다, 루이 알튀세르에게 철학을 배우고, 24세의 나이에 철학교수 자격증을 땄다. 정치, 사회, 예술, 국제분쟁 등 온갖 분야를 다 넘나드는 그의 오지랖은 일찌감치 발현돼 장래가 보장된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알튀세르가 운영하는 일간지 ‘콩바’의 기자로 활동하며, 독립전쟁 중이던 방글라데시에서 종군 취재하는 괴짜 행각을 보였다. 이후 스트라스부르대학, 모교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잠시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조직에 몸이 매이면 사고가 굳어진다면서 사표를 내고 나와 평생을 프리랜서 철학자로 살아왔다. 종횡무진 안 끼는 분야가 없다보니 프랑스 지성계, 언론계에선 그를 본명 대신 ‘BHL’이란 짧은 애칭으로 부른다.
30대 초반, 그는 “나는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이다”라는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란 저서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해 자아비판하면서, 스탈린의 독재와 반인권행위가 만연한 소련 집단수용소의 존재를 애써 외면한 서구 좌파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담아 서구 지성계에 파문을 던진 역작이었다. 이후 그는 현실참여형 철학자였던 장 폴 샤르트르를 역할모델로 삼고, 보스니아 사태 등 각종 국제 분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해 왔다.
다큐멘터리도 제작
1994년엔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는 ‘보스나’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 보스니아 인권유린 사태를 국제사회에 고발했다. 그해 칸 영화제에도 출품된 이 다큐멘터리에는 보스니아 여인 7명을 강간하고 2명을 살해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드는 병사의 인터뷰 내용이 담겨 충격을 던졌다. 당시에도 그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을 설득, 프랑스가 보스니아 내전에 참여토록 종용했다.
이런 그이기에 리비아 사태 개입도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뛰어든 데는 다른 배경도 작용했다. 2001년 9월 아프가니스탄의 마수드 장군 암살사건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한다는 인식이 그를 움직인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마수드 장군은 반 탈레반 진영의 선두주자였지만, 서방의 무관심 속에 영향력을 키우지 못하다, 방송 취재팀을 가장한 알 카에다 요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아프가니스탄 내 탈레반 세력을 키우는 배경으로 작용했고, 그 결과는 미국 9·11 테러사건으로 이어졌다.
벵가지에서 프랑스 엘리제궁으로 전화를 건 앙리 레비는 사르코지 대통령과 연결되자마자 “리비아의 마수드를 받아주겠는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또 카다피 정부군에 벵가지시가 포위돼 반군 세력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땐 “지금 빨리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벵가지 자유광장에서 나부끼고 있는 프랑스의 삼색기가 벵가지 시민들의 피로 얼룩질 것”이라고 설득했다. 철학자의 감성적인 설득에 감명을 받은 사르코지는 서방국가 최초로 공군기를 보내, 카다피 정부군의 벵가지 진입을 막았다.
원수의 남편과 합작?
리비아 내전 사태 개입 땐 사르코지와 환상적인 콤비플레이를 펼친 그이지만, 사르코지와는 개인적으로 미묘한 히스토리가 얽혀있다.
앙리 레비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을 친구의 아들이자 유망한 젊은 철학자인 라파엘 앙토방(36)에게 시집보냈지만, 사위는 이탈리아 수퍼모델과 바람이 나 딸을 배신했다. 그 이탈리아 수퍼모델은 훗날 사르코지 대통령과 결혼, 프랑스의 영부인(카를라 브루니)이 된다. 딸에게 불행을 안겨준 여성의 남편(사르코지)과 합작해, 프랑스의 리비아 개입을 이끌어낸 셈이다.
앙리 레비의 딸 주스틴(37)은 2009년 자전소설 ‘심각하지 않아’를 출판, 자신을 버린 남편과 브루니에게 복수했다. 주스틴은 이 책에서 시아버지 애인이었던 브루니를 남편까지 꼬셔 가정을 파탄낸 팜므 파탈로 묘사했다. 주스틴은 이 소설이 잘 팔린 덕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새 인생을 살고 있다. 가수 겸 배우인 앙리 레비의 현재 부인 아이엘 동발(57)은 4년 전 파리의 유명 나이트클럽 크레이지 호스에서 반나체 쇼걸로 출연해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었다. 앙리 레비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도 언제나 시끌벅적한 화제를 몰고 다니는 스타 패밀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