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번째 이야기> http://cafe.daum.net/kccma/Fkh0/187
<두번째 이야기> http://cafe.daum.net/kccma/Fkh0/188
<3장 세번째 이야기>
첫 키스의 향기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합격하기는 아예 틀려버렸다. 모든 투지를 일으켜야 할 판이었지만 밤낮없이 생각나던 가슴의 촉감에 수밀도 두 개가 덧대어 아른거리니 도무지 통제할 재간이 없었다. 서울에서 합격하면 연락하라는 그녀의 목소리는 귓속을 핥으며 속절없이 간질거렸고, 떨어진 성적을 만회할 기회도 없이 시험은 성큼성큼 조여 왔다.
결국 곤두박질쳐 추락한 성적은 치밀고 오르지 못했고,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정라의 성적을 의식한 무모한 고집으로 끝까지 높은 커트라인의 학교를 선택한 대가였다. 석우처럼 충주의 상업학교에 주저앉는다는 것은 그녀와의 단절로 귀결되는 일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터널의 끝은 요원했다. 캄캄한 굴속을 탈출할 묘안을 짜내야만 했다. 일단 서울에 머물면서 정라를 만나는 명분이 필요했다. 2차 시험을 보기 위해 밤새도록 진학 잡지를 뒤졌다. 그리고 찾아냈다. 야간고등학교였다. 다시 열심히 해서 대학 진학을 도모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당장은 전화위복의 기회를 삼고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어떤 창피함도 견뎌야 한다고 스스로를 자위하면서.
내가 선택한 학교는 최하위 성적만으로도 가능한 학교였으므로 물론 쉽게 합격했다. 시험지에 이름만 써 넣어도 되었다. 집에서는 단지 서울에 있는 학교에 합격했다고 축하해주었다. 어떤 학교이며, 대학진학비율은 얼마나 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는 그저 서울에 있는 학교에 합격한 사실만으로 마을 사람들 앞에서 고개가 곧추세워졌다. 나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처박히고 싶은 속내를 은폐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정라는 나와는 다르게 비교적 우수한 여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더없이 창피했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곧 그녀와 만날 수 있다는 흥분이 앞서기 시작했다. 신입생 입학식이 있기 전에 정라의 연락처를 습득해야만 했다. 그것은 고향에서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정라와 제일 친하게 지내던 이발소 집 여자동창 주홍이에게 집주소를 낚는 데 성공하였다. 나는 포획한 주소를 품속 깊숙이 숨기며 회심의 쾌재를 날렸다.
입학식이 있기 이틀 전 이문동 이모네 집에 위탁되어졌다. 강원도 탄광촌에서부터 연탄을 실어 나르는 철길과 중랑천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단층주택 밀집 지역이었다. 연탄공장에서 날아오는 시커먼 분진 때문에 밖에다 빨래를 널 수가 없었고, 중랑천의 썩은 퇴적물 냄새로 창문을 열 수도 없을 만큼 동네는 빈한했다.
나는 냄새를 무릅쓰고 중랑천 둑을 배회하였다. 정라를 만나던 충주천을 연상하고 싶은 단순한 향수에서였다. 하지만 십 리가 넘어 보이는 판자촌의 둑은 내내 비참했다. 농촌을 버렸거나 혹은 떠밀려 추방당한 빈민들은 중랑천 언저리라도 다행이다 싶은 몰골들이었다. 대다수 지붕은 검은 거적으로 덮었고, 창피함도 잊고 세탁한 브래지어를 땅콩방울처럼 매달아 널었다. 정라가 이런 곳까지 밀려오지 않고 우이동에 정착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안도했다.
토요일 야간수업을 제치기로 마음먹고 무작정 우이동으로 향한 것은 개학하고 보름째였다. 타고난 지리감각은 없었지만 집을 알아내는 데는 별반 어렵지 않았다. 골목을 두 바퀴 헤맨 끝에 위치를 알아내었다. 이제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착한 눈썹을 실룩거릴 계략만 구상하면 될 일이었다. 무턱대고 집 안으로 밀치고 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하는 것이 무엇보다 극적일 터였다.
책가방을 든 교복 차림 그대로 골목에 잠복했다. 예측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정라가 하교할 시간을 측정하여 잠복한 얼마 만에 목적은 달성되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감색 조끼의 교복을 정갈하게 겹쳐 입은 단발머리 여학생이 골목 어귀에 등장했다. 때마침 산들바람을 타고 하얀 벚꽃이 춘설처럼 나부꼈다. 흩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나풀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천사와도 같이 사뿐했다.
정라는 내가 숨어서 훔쳐보리라고는 감히 꿈에라도 상상하지 못할 터, 마음은 이미 내처 달려 나갔지만 애써 참으며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그녀가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놀라게 할 속셈으로 메뚜기처럼 폴짝 뛰어나갔다. 뛰어나가서는, 숨이 막혀 겨우 이름 석 자에 그리움을 쏟아내었다.
“조, 정, 라!”
“어머, 깜짝이야!”
정라가 주저앉을 듯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나의 출현에 화들짝 놀란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란 구슬처럼 팽창되고 착한 눈썹꼬리가 위아래로 실룩거렸다. 하지만 일부러 작심한 나는 오히려 목적 달성에 내심 환호성을 쳤다. 내가 나타났을 때의 반응은 어떨까 늘 궁금했으므로 그녀의 표정을 염탐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전양우, 니, 니가 여긴 어떻게!”
나는 여유 있는 척 능청까지 떨었다.
“니 만나려구, 미리 숨어 있었어. 놀라게 하려구 그랬는데 너무 놀라니까 줌 그렇다!”
내 변명에 그녀의 놀란 목소리는 진정되어 단박에 평정을 되찾았다.
“사람 싱겁긴! 그러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구 그려!”
“설마…….”
“서울에서 핵교 다닌다는 얘긴 들었어. 그냥 전화하지 그랬어?”
“전화번호는 안 가르쳐주던데.”
“기집애, 알려주려면 지대루 알려주기나 하지!”
정라는 이미 충주의 주홍이와 내통했음이 감 잡혔다. 그것은 언젠가는 내가 찾아오리라 짐작하고 있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그녀도 혹시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남자의 본능이 증폭되어 제법 우쭐해졌다.
“주소만 알아내는데두 꽤 망설였어. 혹시 소문이 나면 놀림감이 될까 해서!”
“어쨌든 반가워. 서울에서 이렇게 만났으니 약속대루 우리 악수나 한번 하자!”
기특하게도 그녀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손을 마주 잡았다. 전처럼 짜릿한 전기가 통하지는 않았지만 포동포동한 촉감이 다시 도래하였다. 나는 손을 만작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근처에 어디 빵집 없을까?”
“저기 아래쪽 중핵교 옆에 하나 있어! 그리루 갈려?”
“그려, 니가 먼저 앞장서.”
정라의 손이 손아귀를 스르르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미온한 체온이 빠르게 허공으로 증발했다. 그녀의 체온을 좀 더 유지시키기 위하여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앞서서 걷는 그녀의 뒤를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졸졸 따랐다. 문득 스판 추리닝에 감추어졌던 뒤태보다 한결 성숙하고 토실해 보이는 치마에 가려진 뒤태에 시선이 멈추어졌다. 툭하면 그녀를 훔쳐서 살펴보게 되고 마냥 뒤태에 눈길이 가는 내가 미웠다. 혹여 음흉한 마음이 들켜버리기라도 한다면 난처할 것 같아 걸음을 빨리하여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옆으로 다가선 내 얼굴을 돌아보며 그녀가 물었다.
“니는, 이모네 집에 있다며?”
“그 얘긴 누구한테 들었어?”
“누구기는, 니에게 주소만 알려준 주홍이한테 들었지.”
“우리 만나는 거, 니가 비밀루 하자구 안 혔어. 비밀 탄로 낸 겨?”
“내가 바보니! 아무한테나 함부루 말하게!”
“그래두 눈치 빠른 주홍이가 감 잡을지두 모르잖어!”
“니가 내 주소 알려달랬다고 해서 벌써 눈치챘어. 그래두 다른 애들은 몰라두 갸는 괜찮어. 니나 조심혀! 남자들은 영웅담처럼 말들 한다던데!”
그녀의 은근한 핀잔에 움찔했다. 사실 누구에게든 정라를 좋아한다고 소문을 내서 그녀가 꼼짝 못하도록 기정사실화시키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속마음이 어디까지인지 가늠되지 않았었다. 그것이 조바심으로 바뀌고, 어느 순간 그리움으로 변하면 늘 그 방법을 떠올렸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 걸음은 어느새 빵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빵집은 작고 옹색한, 그러나 깨끗한 분위기여서 다행이었다. 구석진 자리를 선택하여 등으로 가려주며 마주앉았다. 정라가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은폐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주문은 그녀가 했다.
“여기 찐빵하구 만두 줌 주세유. 그런데 참, 양우 니 야간고등핵교라구 들었는데 핵교는 어떻게 한 겨? 오늘이 개교기념일이라두 돼?”
“그건 누구한테 들었어?”
“자꾸 누군 누구여. 내가 고향 소식 들을 애가 주홍이밖에 없는 줄 알면서. 그렇다구 기죽지 마. 학교 이름만 듣구 그 학교는 1차도 있는데 2차에 합격했다구 해서 눈치챘지.”
실쭉했다. 그녀는 나의 모두를 알고 있는 눈치인데 나는 그녀에 대하여 궁금한 게 너무도 많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참 주책이다. 벌써 동네에 소문까지 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학교 이름 같은 창피한 말을 쉽게 얘기해버렸을까, 꼬치꼬치 묻기에 겨우 실토했을 만큼 숨기고 싶었던 학교 이름이었는데. 더구나 그녀는 수업까지 포기하고 만나러 온 것까지는 차마 상상도 못할 것이었다. 민망함을 감출 수 없어 단지 침묵했다.
찐빵이 나왔다. 찜통에서 금방 꺼냈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먹음직하니 향기로웠다. 하지만 찐빵이든 만두든 식욕이 일시에 날아가 버렸다. 그녀 앞에 뭉개진 자존심이 자꾸만 나를 초라하고 작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표정을 금방 읽어낸 정라가 위로하듯 덧붙였다.
“신경 끄구 어서 찐빵이나 먹어. 괜히 얘기했네. 그냥 물어본 것뿐인데…….”
정라가 먼저 찐빵을 집어서 탐스럽게 한입 물었다. 입안 가득한 찐빵을 좌우로 돌릴 때마다 볼이 올록볼록 춤추었다. 그녀의 볼은 마치 어린아이가 사탕을 오물거리는 볼처럼 무구했다. 나는 오물오물한 그녀의 입술을 물끄러미 탐미할 뿐 여전히 망설였다.
“양우야, 니는 왜 안 먹어?”
혼자 먹는 것이 머쓱했던지 그녀가 채근했다. 말없이 만두 하나를 집어 한입 덥석 깨물었다. 순간 호흡이 뒤엉키며 맵고 칼칼한 김치 맛이 목구멍에 걸렸다. 컥, 컥, 사레까지 튀어 올라왔다. 눈물까지 치미는 헛기침을 몇 차례 하고서야 사레는 겨우 멎었다.
“천천히 먹어 얘. 목구멍에 걸리겠다!”
창피해 죽겠는데 정라는 마치 동생 나무라듯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싫지가 않았다. 먹이를 물고 온 어미 새를 반기는 눈도 뜨지 않은 새끼의 앙증맞음이랄까, 뭐 그런 게 가슴속에 숨어서 동정을 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정라를 만나면 뭔가 멋있게 기선제압하며 사내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오늘 또 무너졌다. 애당초 고슴도치처럼 털을 세우고 경계를 해도 그녀 앞에서는 금방 허물어지고 마는 나는 누구인지, 정작 나도 나를 모를 일이었다.
결국 그녀의 가족 근황을 물으면서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할머니와 부모님의 안부, 정호의 근황. 정호는 어수선한 장마와 두 번의 연속적인 가족의 죽음을 겪는 와중에도 서울대를 들어가 내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차이점으로 다가왔다. 나는 작은아버지가 청주로 이사할 거라는 고향 소식을 전했다.
“수해 나구부터 동네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네!”
“분위기두 옛날 같지가 않어. 집들이 새것으루 되니까 시골 냄새두 없어졌어. 줌 삭막혀!”
“그래두 난 벌써 고향 생각이 나는데! 개울에서 멱 감던 생각이며, 달천 강에서 고기 잡구, 땅콩이삭 캐구, 논두렁에서 콩서리두 하구, 탄금대루 소풍 가던 일들…….”
정라는 벌써 고향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유년기의 행복했던 추억이 갑자기 아련해지며 멍울지는 눈동자를 통하여 다가왔다. 아마도 불가피하게 고향을 떠나온 것이 몹시 안타까웠던 듯하다. 친구도 낯설고 환경도 낯선 곳에서 나름대로 감내하는 일들이 벅찼던 모양이었다.
“얼마나 됐다구 하마 그려. 그리구 고향 가구 싶으면 언제든지 내려가면 되잖어. 큰어무니두 있구, 친구들두 있으니까 가구 싶을 때 나하구 같이 내려가자.”
그녀를 위로했다. 정라는 잠깐 사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명랑해졌다. 자신이 벌써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조금은 멋쩍은 듯 민망한 미소까지 연신 생글거리며.
모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를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내 행복했고, 내내 들떴다. 그녀 또한 나와 마주하는 것을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첫 단추를 낀 서울에서의 데이트, 그리움의 허기도 갈증도 단박에 해갈된 만남,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넓디넓은 서울에서 정라를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정라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사촌오빠의 자전거 뒤에서처럼 손을 흔들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내 마음은 아예 그녀에게 남겨두고 골목을 내려왔다. 그녀의 마음이 따라오고 있다는 착각에 걸음걸이가 저절로 당당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미 어두워진 중랑천을 택했다. 굴절된 중랑천의 야경이 이렇게 황홀한 줄은 미처 몰랐다. 바둑판처럼 작은 판잣집 창문을 밝힌 희미한 불빛은 오염된 강물에도 데칼코마니를 만들며 아름답게 비추었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겨웠는지는 알 길이 없는 일, 힘겨웠을 하루의 고달픔마저 검은 밤이슬에 농익은 듯 반짝였다.
계절은 바람처럼 물처럼 여름으로 흘렀다.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와 함께 경작하던 논 일부를 팔아 기어이 청주로 이사를 가고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포기한 석우는 별로 하는 일 없이 시내 동년배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그는 청년단체에 가입하여 회원들끼리 몰려다니는 등 농사에는 취미도 없어 보였고 아예 계획도 없는 듯 보였다. 이름은 농촌의 부흥을 위한다는 청년집단이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모임의 취지와는 멀어 보이는 패거리들이었다.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되어 2학년이 되고 여름이 왔다. 공부는 목표했던 의지만큼 순탄하지가 않았다. 주야가 바뀐 학교수업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반적인 학습 분위기가 문제였고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모질어지지가 않았다. 나 자신을 독하게 채찍질해야만 가능한 목표임을 알면서도 정작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틈을 내어 정라와 만나는 유일한 즐거움은 고무적이었다. 주된 데이트 장소는 근처 우이동계곡이었다. 그녀와의 추억은 아무런 장애됨이 없이 차곡차곡 모여 탑처럼 층을 높여갔다.
미팅을 주선한 녀석이 한 시간이 지나도 출발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미팅 경험도 없어 극구 싫다고 뿌리쳤는데도 다른 녀석이 약속을 어겼다며 체면 좀 살려달라고 난리치는 통에 마지못해 대신 나왔을 뿐인데 정작 주선한 놈이 펑크를 냈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같은 반에 다녔지만 그다지 절친한 편도 아니었으므로 참으로 짜증나게 돼 버렸다. 진즉부터 정라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던 터였다.
여학생들은 교회도 빠지면서 나왔는데 일요일을 망쳤다고 통박을 부리며 투덜대었다.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의지도 없어 보이는 남학생 둘은 초면이었다. 녀석들은 밉살맞게 미온적이기까지 했다. 멀뚱멀뚱 눈알만 굴리고 있는 행동이 꼭 두꺼비 짝이었다.
“아니, 뭐가 이래. 우리끼리 계곡으로 가든가 해야지, 언제까지 여기 길바닥에서 이렇게 기다리기만 할 거야?”
참다못한 일행 중 조금은 칼칼해 보이는, 그나마 예쁜 여학생이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발끈했다. 눈알만 굴리던 녀석들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별반 감흥을 못 느꼈고 어색한 관계였지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맞대었다. 별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애당초 가기로 약속되었던 안양유원지를 버리고 우이동계곡으로 무턱대고 가기로 의견통일이 되었다. 왜 하필 우이동계곡인가 싶었지만 여학생들이 낯익은 장소라고 건의해 결국 대열에 끼고 말았다.
출발부터 어긋난 만남이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계곡의 나무 밑에 자리를 펴고 밥을 지으려는데 이번에는 쌀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펑크 낸 녀석이 쌀을 준비하기로 했는데 그만 까맣게 잊고들 있었다. 꼬여도 된통 꼬여 점심마저 굶어야 할 판이었다. 여학생들은 어이없다는 듯 연신 콧방귀를 뀌며 실소를 날렸다. 궁여지책으로 내가 꾀를 내었다. 정라에게 찾아가 쌀을 얻어오면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다른 여학생들하고 놀러온 것은 죄스러운 일이었지만 쌀을 빌미로 그녀를 만나고자 하는 욕심이 더 작용했다고 보아야 옳았다.
계곡을 내려와 정라의 집까지 가는 길이 만만치는 않았다. 태양이 쏟아내는 한여름 열기는 목구멍을 턱턱 막았다. 잠깐 사이에 이마에서는 벌써 땀방울이 맺혔다. 등줄기에 맺힌 땀방울은 금세 허리춤까지 진득거렸다. 그렇지만 마음으로는 단박이었다. 어느 틈엔가 쌀이 필요한 생각은 아예 잃어버리고 정라를 볼 수 있는 구실이 생겼다는 것에 더 흥분되었다.
노란 공중전화부스가 보였다. 먼저 전화를 해야 마땅했다. 혹여 정라가 없다거나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낭패였다. 아니, 느닷없이 들이닥치면 정라가 놀랄 것은 물론 가족 중 누군가의 눈에 띄면 더 난처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전화는 정라가 직접 받았다.
“잘 있었어. 지금 집에 누구 있어?”
“아니, 아무두 없어.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왜 숨을 헐떡이구 그려?”
내 가쁜 숨소리를 들었는지 놀란 목소리가 전화기 선을 타고 달려왔다.
“어, 그럴 일이 줌 있어. 나 지금 집 근처에 와 있거든!”
“무슨 소리여? 지금 우리 집 근처라구?”
“어, 쌀이 필요혀. 얻으러 왔어!”
“쌀은 또 뭐여? 도대체 뭔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집 앞으루 와. 내가 문 열어줄게.”
숨을 헉헉 몰아쉬며 마지막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발은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지만 눈은 이미 그녀의 대문 방향에 앞서 달려가 있었다. 마침내 정라가 멀찌감치 보이기 시작했다. 앞가슴에 팔짱을 끼고 내가 올라오는 모습을 기다리는 모습이 마치 퇴근하는 신랑을 마중 나온 여인네 같아 보였다. 그 느낌이 왠지 어색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행복한 일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이렇게 어수선혀?”
“계곡에 친구들하구 놀러왔어. 쌀을 갖구 온다는 눔이 안 왔는데, 여기가 생각나잖어!”
일행 중 여학생이 섞여 있다는 얘기는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어디서 그런 교활함이 작동했는지 정작 나 자신도 놀라버린 해명이었다.
“엉뚱하기는. 우선 집으루 들어가. 부모님은 산에 가셨어.”
“아부지 다리는 괜찮은 겨? 산엘 다 나가시구.”
“멀리는 안 가셔. 근처에 낮은 평지가 있거든. 어서 안으루 들어와.”
정라의 안내를 받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인근까지는 왔지만 집 안까지는 처음이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자 그녀가 선풍기를 틀어 땀을 식혀주었다. 시원한 바람에 등줄기에 달라붙은 진득한 땀이 증발되어 도망쳤다. 게다가 냉수까지 대접에 가득 따라주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시원함이 짜릿한 쾌감을 유발시켰다.
“놀러온 사람이 몇 명이여?”
“나까지 일곱 명!”
“잠깐 기다려. 쌀 퍼올게.”
정라가 쌀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집 안에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갑자기 머쓱한 생각이 들었다. 공연히 사방을 둘러보며 주위를 살폈다. 허름했지만 중랑천 판자촌처럼 결코 초라하지는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담장 아래의 손바닥만 한 텃밭에는 상추와 고추가 제법 시골스럽게 자라 있고, 담장을 타고 올라가는 호박잎이 산들바람에도 흔들거렸다. 노란 호박꽃이 정겹듯 조금의 자투리땅이라도 헛되이 놀리지 않으려는 정성이 오히려 소박하게 여겨졌다.
눈을 돌려 정라가 사라진 부엌 턱을 바라보았다.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잠시 후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바가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데 이걸 어디다 담아가지?”
“무슨 봉투 같은 거 있으면 되겠는데. 종이봉투두 괜찮구.”
정라는 내 말을 듣고 생각났다는 듯 바가지를 툇마루에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또 등을 돌려 사라지는 그녀의 뒤태를 보게 되는 못된 버릇, 가슴의 모양새를 훔쳐보게 되는 치사한 습관, 제발 그녀가 음흉한 심보를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을 일이었다.
방으로 들어갔던 그녀가 누런 재생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
“할무니하구 아부지가 만드는 봉투여. 왜 가내수공업 같은 거 있잖어. 봉투 하나 풀 붙이는 데 일 원씩이여. 자, 이 봉투 줌 벌리구 있어!”
그녀의 자연스러운 설명에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다. 연로한 할머니와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가 방에 쪼그리고 앉아 하나에 일 원씩 하는 봉투를 가공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런 답변도 못하고 봉투 입구를 벌렸다. 그녀가 바가지를 기울여 봉투에 쌀을 옮기려 시도했다.
그런데, 그런데 봉투로 쌀이 옮기지는 순간 그만 선풍기 바람에 뽀얗게 쌀 먼지가 날아갔다. 공교롭게 바람의 방향을 의식하지 못한 대가는 너무도 컸다. 안개처럼 날아간 쌀 먼지가 그녀의 얼굴에 분칠을 한 듯 달라붙었다. 정라는 눈으로 들어간 쌀 먼지 때문에 금방 눈물을 쏟아내었다. 눈에 들어간 이물질로 인하여 쉴 새 없이 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마침내 얼굴을 턱밑까지 들이밀고 구원을 요청했다.
“여기 눈 줌 후우, 불어봐.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깔깔해 미치겠어!”
그녀의 동그란 얼굴이 코앞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뽀얀 얼굴이 보름달 같은 달덩이 같았다. 눈 꼬리가 내려간 여덟 팔자의 착한 눈썹, 오뚝하지는 않지만 귀엽고 몽실한 코, 보스스한 코밑 솜털과 적당히 매력적인 순한 입술, 손가락으로 눈을 열고 입김을 기다리는 눈동자에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입김을 후욱, 세게 불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위아래로 깜박이며 손가락과 함께 움직거렸다. 입술과 볼 살은 눈동자를 깜박일 때마다 가늘게 춤을 추었다. 오물오물 찐빵을 먹던 때와는 또 다른 무구함이 입술에서 발산되었다.
“한 번 더 불어봐. 조금 나은 거 같어!”
그녀의 얼굴이 더욱더 가까이 다가와 닿을 듯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입김을 불지 못하고 눈은 이미 그녀의 입술에 멈추어 있었다.
“뭐 혀. 빨리 불지 않구!”
참을 수 없었다. 기습이었다. 입김을 불려다가 그녀의 입술에 냉큼 키스해버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라의 입술은 향긋한, 그러나 짭짤한 맛이었던 것 같았다. 언젠가 간장도 찍지 않고 먹었던 미역 향기 그대로의 맛 같기도 하고, 포도 알이 터지며 입안에 번지던 단맛 같기도 했다. 살구 맛일까, 오디 맛일까, 딸기 맛일까, 복숭아 맛일까? 아니, 소금기 섞인 내 입술 맛일까? 벌써 잊어버려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맛이 천방지축으로 맴돌았다.
“어머머, 니 지금 나한테 뭐 한 겨?”
정라가 주먹으로 내 가슴팍을 암팡지게 망치질하듯 때리며 금방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어떤 물감으로도 표현되지 않는 빨간 색채가 돋아나 있었다. 내 얼굴도 열기가 가득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미 그녀의 얼굴색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나도 모르게 능청을 떨기 시작했다.
“키스!”
평상시의 의지와는 다른 엉뚱한 돌출발언이었다. 오늘따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행동과 말투에 적잖이 놀라며 새로운 저돌성에 스스로 감동해버렸다.
“누구 맘대루 키스하구 그려!”
“키스하라구 입술을 코밑에 바짝 들이대놓구선!”
“니, 딴 사람한테두 그랬어. 기습적으루?”
“아니, 처음이여. 니가!”
“니, 오늘 일, 비밀루 혀!”
“이것두 비밀, 저것두 비밀, 비밀이 너무 많어!”
“능청 떨지 말구, 내 말대루 안 하면 정말 혼내줄 겨.”
계집애, 나 너 안 무서워, 사랑스럽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숨길 수 없어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그녀가 먼저 얼굴을 외면했다. 선풍기를 끄고는 봉지에 쌀을 옮겨 담으며 눈을 내리깐 연유는 아마도 부끄러움을 모면하려 함이었으리라. 나는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오래도록 내려다보며 마음에 담아 넣었다.
“나, 여름방학에 충주에 내려가 있을 겨. 혹시 방장골 큰집에 내려올 거면 미리 연락혀.”
“으응, 알았어! 자아, 이제 쌀 다 담았으니까 얼른 가!”
정라는 서둘러 나를 내쫓으려 안달이었다. 그녀의 낯빛은 아직도 홍조가 가시지 않은 채 붉었다. 나는 그녀가 봉지에 담아준 쌀을 주섬주섬 챙기고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녀는 두 손을 곱게 맞잡아 엉덩이춤에 대고 애교스럽게 뒤따라 나섰다. 낭군을 배웅하는 여인네의 배배 비트는 몸짓이 그럴까, 대문을 나설 때는 물론 골목을 다 내려올 때까지도 정라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