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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만난 미륵의 미소 … 600년 전 삼존불은 어디로 갔을까? |
김대환의 文響_ 사라진 금강산 출토 아미타삼존불상 (銀製鍍金阿彌陀三尊佛坐像) |
▲ 사진1-2. 발원문이 나온 관음보살상
‘김대환의 文響’은 문화재 평론가인 김대환 두양문화재단 이사가 격주로 집필하는 칼럼입니다. ‘文響’은 문화재와 관련한 다양한 울림을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명명했습니다. 문화재 발굴현장에서부터, 유물의 보존과 보관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민족문화 유산의 의미를 새롭게 읽어내고자 합니다. 문화재를 둘러싼 시각들은 때로는 첨예한 이론적 대립과 긴장도 있게 마련입니다. 분석과 고증을 통해 발굴 유물의 가치와 의미를 평가하는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는 한편, 올바른 문화재 향유를 위해 학계와 정부, 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짚어내고자 합니다.
나라가 어지러워져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지면 그 민족의 영혼인 文化財는 중심을 잃고 떠돌게 된다. 문화재는 그 나라 그 민족 최후의 자존심인데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존권 앞에 최후의 자존심과 영혼마저도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것이다.
이틀간의 짧은 일정으로 도착한 십여년 전의 베이징은 그날도 黃砂로 가득했다. 지인의 소개로 문화재를 조사할 때는 소풍 전날 밤의 아이처럼 잠을 설치고 마음이 설렌다. 유물은 금강산에서 출토된 불상이라고 귀띔을 받았다. 금강산은 수많은 사찰을 거느린 민족의 靈山이다. 고려 말엽에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혼돈의 시기여서 피폐해진 백성들이 자신을 구제해줄 神의 도래를 기원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된다.
이러한 갈망으로 고려말기에는 미륵신앙이 번성하게 된다. 그 결과, 신라 말 혼란기에 자칭 미륵불로 등장한 궁예처럼 고려 말에도 또 하나의 자칭 미륵불이 등장하는데 고려 우왕 때의 승려인 伊金(?~1382년. 우왕 8년)이다. 이금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면 해와 달이 빛을 잃는다고 했고, 나무에 곡식이 열리게 할 수 있는 神力을 지녔다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재산을 바침에 따라 폐해가 커지자 1382년 왕명을 받은 청주목사 권화가 잡아들여 처형했다.
1309년 高城三日浦埋香碑나 1387년 泗川埋香碑를 여러 사람들이 함께 건립한 것도 미륵정토세계의 도래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으며, 그러한 희망을 갈망해 금강산의 여러 곳에 작은 부처님을 봉안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이런 까닭에 곧 보게 될 유물도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미륵신앙의 결과로 조성된 佛像이려니 짐작하고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잠시 기다리니 이윽고 나의 무릎 앞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여러 겹으로 곱게 싼 보자기를 풀고 또 푸는 순간, 연화대좌 위에 앉은 세 軀의 부처님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잠시 후에 낮은 난간의 기다란 불상받침과 여러 번 접힌 누런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대면하는 순간, 금강산에서 출토된 삼존불상이라는 직감이 왔다.
▲ 사진2. 불상 뒷면의 광배
가운데 아미타불의 主尊佛을 중심으로 오른쪽(불상 기준)에는 地藏菩薩이고 왼쪽에는 觀音菩薩로 높이 20㎝ 정도의 三尊佛이다(사진1). 고려후기부터는 大勢至菩薩 대신 지장보살이 나타나는데 특히, 두건을 쓴 지장보살은 일본이나 중국에는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중생구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 삼존불의 法衣는 通絹으로 어깨선에서 발아래로 비스듬히 얌전하게 흘러내린다.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으로 복잡하고 화려했던 영락장식이나 가느다란 보살의 허리는 완전히 배제해 오랜만에 되찾은 고려인의 모습이다. 불상의 얼굴(相互)은 모두 비슷한데 이마에는 작은 水晶의 백호가 있고 지그시 감은 듯한 눈 아래로 또렷한 이목구비와 턱 선이 유려하다. 불상대좌는 별도로 주조했으며, 仰蓮과 復蓮의 이중대좌로 가지런하다. 삼존불을 모시는 監室 대신에 삼존불을 올려놓는 난간이 둘러진 긴 불상받침이 있어서 삼존불을 올려놓게 돼 있다. 특히, 불상의 기운을 나타내는 삼존불의 光背는 金銅으로 화염문은 사라지고 연속된 넝쿨무늬로 透刻했는데 그 화려함이 대단하다(사진2). 불상과 불상대좌는 금만큼이나 귀한 은으로 만들고 역시 금도금했다. 관음보살의 寶冠은 녹아서 없어 졌으나 모든 부분이 온전해 지정문화재의 여건을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았다.
특히, 여러 번 접힌 누런 종이는 이 불상의 비밀을 풀어줄 가장 중요한 發願文임에 틀림없다(사진3). 관음보살상 몸속에서 나온 발원문은 역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발원한 것으로, 洪武 16年(1383년)의 造成年代와 발원자의 이름 중에는 조선 태조 李成桂와 이복형인 李元桂이 포함돼 있어 주목된다. 이원계는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를 격퇴시킨 무장으로 1388년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은 지 5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성계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이성계 밑에서 정치·군사적인 협력자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이 불상의 조성 시기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기 전이므로 여러 발원자들 중의 하나로 형제가 나란히 적혀있을 뿐이다. 또 한 명 주목을 끄는 이름은 승려 伊文으로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앞에서 밝힌 자칭 미륵보살 伊金과의 관계도 생각해 볼만하다.
이성계는 이 불상의 발원문에 이름을 남긴 해로부터 8년 후인 1391년에 부인인 康氏와 주체가 돼 建國의 염원을 담은 銀鍍金舍利塔 등의 舍利具를 금강산 월출봉의 어느 돌함 속에 넣어 봉안하게 된다(사진4).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은 주체세력이 됐기 때문이다. 이듬해 고려왕조는 몰락하고 그의 뜻대로 조선의 건국이 이뤄진다. 그 후, ‘이성계 발원 사리구’는 500여 년 동안 잊혔다가 일제강점기인 1932년 금강산 화재 예방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된다. 500년 전의 建國意志는 사라지고 나라 없는 식민지국가로 전락한 상황에서 초라하게 발견된 것이다. 새삼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이성계 발원 사리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잘 전시돼 있다).
이번에 實見한 삼존불 역시 역사속의 조선왕조를 훌쩍 건너 뛰어 622년이 지나서야 타임캡슐처럼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주존불과 지장보살의 복장품은 봉해져 있어서 아쉽게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조성 년대가 확실한 불상의 확인으로 삼존불의 예술적 가치는 물론이고 그동안 麗末鮮初로 비정했던 많은 불상들의 편년을 정해줄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를 확인한 것이다. 또한, 관음보살의 몸속에서 나온 발원문은 고려 말의 사회상과 종교관, 이성계의 역할 등 수많은 1차 자료를 품고 있어 관련된 전공자의 심층적인 연구가 기대된다.
國外에서 우리 문화재를 조사할 때면, 중요한 문화재를 처음으로 조사했다는 기쁨보다도 한없이 밀려오는 아쉬움과 쓸쓸함이 더 컸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같은 민족의 문화재가 제3국에서 떠돌 때 우리는 과연 남의 일처럼 방관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개인의 능력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부처님들은 어느 곳에 자리 잡고 계신지, 계신 곳은 편안하신지, 600년 전에 고려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미륵의 세계는 삼존불을 통해 도래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