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새겨진 아픈 상처
증언자: 장재춘(남)
생년월일: 1936. 3. 27(당시 나이 44세)
직 업: 운전기사(현재 운전기사)
조사일시: 1988.12
개 요
그는 22일 시외로 나가기 위해 광원운수 동료 두 사람(해정구, 왕태경)과 차를 탔다. 가다가 효천 연탄공장 부근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을 받았다. 거기서 동료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는 어깨와 손, 머리에 파편을 맞았다.
운수계에서
나는 영암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만해도 우리 집은 논 20마지기 정도 짓고 있어서 그런대로 살만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환에 시달리게 되자 점점 형편이 기울었다.
영암 금정은 산간지역으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아오는 곳이었는데 나는 그곳을 떠나 외가집이 있는 나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형편 때문에 다 마치지 못하고 독학으로 영산포중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는 다니다가 그만두고 운수업계에 뛰어들었다. 그 이후 반평생을 운전기사로 생활해 왔다. 처음에는 장흥여객에서 13년간 근무를 했다. 그 뒤로는 중앙여객, 광동교통, 광원여객 등을 전전하였고, 1979년에는 광원운수 기술과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운수업계에서 일하면서 가정을 돌보며 그럭저럭 살만했다. 1980년 4월 경에 차량의 매연단수를 검사하던 중에 회사 차 1대가 적발되어 1개월간 구속된 적이 있다. 그 후에 바로 5·18을 맞게 되었다.
5월 18일 이후부터는 회사에 출근한 사람도 있었고 출근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강제성은 없었다. 월산동 로터리에 당시 내가 다니던 광원운수의 주차공장이 있었다. 20일 공수부대가 젊은이들을 닭 잡듯이 때려서 머리에 피가 질질 흐르고 있는데도 차에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5월 21일 밤 광원운수 회사에서는 간부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에서는 무엇보다도 차량의 손실을 막기 위해 지방에 나가 있는 차량을 확인하여 안전하게 하는 문제가 크게 거론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직접 지방에 내려가야만 했다. 그 일을 위해서 나와 몇 사람이 뽑혔다.
당시 우리 회사는 지방에 나가 있는 차를 제외하고는 항상 20여 대 정도의 차를 차고에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우리는 그중에서 5, 6대 정도만 불가피하게 시위대에게 제공했는데 웬만한 차는 운전수를 동승시켜 시위에 협조하도록 하였고, 아주 낡은 차는 시위대가 직접 사용케 하였다(나중에 자동차 피해에 대해서는 전라남도로부터 60퍼센트 정도 보상받았고, 승용차 포니에 대해서도 그만큼 받았다).
20일 이전까지는 시외로 나가는 여객수송에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20일 오후 6시 30분에 광주에서 출발한 강진 마량행 버스가 시외로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을 시발로 그 뒤로 시외노선이 끊기게 된 것 같다.
운명의 그날
22일 지방으로 내려가기 위해 오전 8시 20분경에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백운동을 출발했다. 전남 1가 5383 포니 승용차에 타고 있었는데 뒷좌석에는 당시에 광원운수 이사였던 해정구씨가 타고 있었고 앞에는 나와 왕태경이라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어쩐지 위험할 것 같아 다른 코스를 밟는 게 어떠냐고 하니까 왕태경이 그럴 필요없다고 말했다. 전날인 21일에 그는 영산포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쪽에 군인이 한 명도 없었으므로 굳이 길이 나쁜 곳으로 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했다. 왕태경은 우리 회사의 직원이 아니었지만 그 사람 부친이 차 두 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
전날 별일 없었다는 왕태경씨의 말에 따라 고속도로를 타고 가던중 송암동 대단위 연탄공장 앞 노상(효천 부근)에서 갑자기 계엄군으로부터 무차별 사격을 받았다. 계엄군 1개 중대 정도가 도로를 차단해 왔다. 계엄군들은 우측 철로변 산등성이에 숨어 있다가 5분 정도 사격을 가했다. 정신을 차린 뒤에야 옆자리에 앉아 있던 왕태경씨는 이미 사망했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해정구씨는 관통상을 입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깨와 손, 머리에 파편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렸다. 어느새 다가온 계엄군이 소리쳤다.
"안 죽고 살려면 빨리 나와라!"
손을 들고 차에서 나왔다.
"나는 시위대가 아니라 운전기사인데 광원운수의 차량환수차 가는 것이다." 라고 얼른 말했다. 계엄군이 물었다.
"어떻게 해주면 되겠느냐?"
"나는 다시 광주로 가겠다."
고 말했다. 그들은 안 된다고 했다.
"남평으로라도 가겠다."
"차도 없이 이 상태로 어떻게 가겠느냐?"
계엄군의 지휘관인 중대장이 말했다.
하는 수 없이 걸어서 인성고 뒤편에서 마침 출근하는 사람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남평으로 가던 중 남평 구 삼거리에서 잠복중이던 계엄군과 또 부딪쳤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중대본부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지휘관인 듯한 육군대위가, "어디서 총을 맞았느냐?" 고 물었다. 계엄군들에게 맞았다고 하니까 그들은 사정없이 나에게 욕을 하였다.
"이 개새끼 거짓말 마."
"보시다시피 나이 먹은 사람이 거짓말을 하겠소?"
하며 상처를 내보였다. 빨리 병원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30여 분 후에 그들이 빨리 가라고 해서 남평 재중병원에 입원했다.
집에 간신히 연락하다
내가 남평에 도착한 한 시간 후 해정구씨도 출혈이 심한 상태로 짐발자전거를 타고 남평에 왔다. 남평으로 가는 길에 계엄군이 잠복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촌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남평 재중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통신이 두절된 상태였기 때문에 광주에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집에서는 죽어버린 줄만 알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연락을 하게 되었다. 재중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원의 친구가 병원에 놀러 왔었는데 그 아가씨는 남평 우체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연락사항이 있으면 광주로 연락해 주겠노라고 하여 나는 회사로 연락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통신이 두절되었지만 무등산에 있는 송신소를 통해서 연락이 가능하다고 그 아가씨는 말했다. 그러나 연락을 하는 과정에서 상대방과 너무 감이 멀어서 그날 광주를 출발했던 우리 모두가 사망한 것으로 회사에 전달되었다. 회사에서는 현장을 확인하러 갔다가 길 가운데 파손된 채 버려져 있는 우리 차를 보고는 모두 사망한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당시 지방에 있던 차는 남평까지 운행이 가능했기에 지방에 내려가 있던 우리 회사의 운전기사들도 재중병원에 위문차 오게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26일경 오토바이를 타고 인성고등학교 뒤로 돌아가 회사직원과 연락을 하게 되었다. 27일 동생이 남평으로 내려왔다. 광주가 진압되고 난 28일 회사측에서 보낸 안정남외과 앰뷸런스에 의해 광주로 후송될 수 있었다.
안정남외과에서 1개월간 치료를 한 후 퇴원을 하여 집에서 치료했다. 우측 어깨는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왕태경씨 아버지가 와서 시체를 찾을 길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이미 계엄군이 왕태경을 폭도로 취급하여 계엄분소인 상무대에 보고를 해버린 뒤라 시체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에 전남북계엄분소장이었던 소준열씨와는 고향이 같다는 인연으로 연락을 취해 잠복했던 부대를 알아내어 나왔다. 시체를 찾아서 매장했다고 한다.
그 뒤 사회과에서 장례비 20만 원과 위자료 4백만 원이 나왔다. 나와 해정구씨 그리고 왕태경 씨의 부친이 상무대에 가서 사실을 이야기하고 신원증명서를 떼어 계엄분소에 제출함으로써 420만 원을 수령할 수 있었다.
무고를 당하다
나는 1980년 6월에 통원치료를 다니던 중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무고를 당했다. 고발자는 처음에는 익명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회사의 주주 앞으로 타이핑되어 있었다. '현재 그 사람 집에는 M16 소총이 보관되어 있다. 당시 그 사람은 시위 군중을 선동했다'는 실로 어이없는 내용이었다. 고발서는 계엄분소를 경유해서 도경찰국으로 넘어갔다. 나는 그곳에 가서 직장에서 간부직에 근무를 하고 있던 사람이 시위에 가담을 했겠느냐? 총상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선동을 했겠느냐? 회사 대표에게 가면 알게 아니냐, 부장, 전무, 대표이사 등이 다 증인이 된다, 고발한 내용은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항의하여 대표이사를 대동하고 자술서를 작성하였다. 18일부터 28일까지의 상황을 자필로 기재했다. 도경찰국에서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나의 평소의 성격이나 행동 등을 확인한 후에야 일을 마무리지었다.
고발서가 접수되었을 때 미행을 많이 당했다. 나는 당시에 통원치료를 받으면서 팔걸이를 한 채 직장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총상을 입은 뒤로 해만 지면 귓전에서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기 때문에 집으로 곧장 들어갔다. 함부로 밖에도 나다니지 못했고, 창문에다 담요를 쳐야만 잠을 자곤 했다. 그렇게 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고발까지 당하자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너무나 심적 고통이 컸다. 지금도 5·18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조금 낫기는 하지만 역시 기분이 언짢다.
도경찰국에서의 일이 마무리가 된 다음에도 광주경찰서에서 그와 비슷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도경찰국에서 썼던 자술서를 그대로 제출했다. 그 뒤로는 조사를 받지 않았다.
직장을 전전하다
몸이 불편하고 마음에도 별로 맞지 않아 1981년도 3월경에 광원운수를 사퇴했다. 직장생활을 하려면 우선 활동에 지장이 없어야 하는데 몸도 불편했을 뿐더러 정신까지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1년간 쉬다가 가족의 생계문제 때문에 지방 '순천관광'에서 3년간 관리부장으로 일했다. 당시엔 교통량도 적었고 차량정비도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종사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종사를 했지만 운수업계는 항상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자금난으로 인하여 전남에 있는 20개 운수회사 중 몇 개만 겨우 현상유지할 정도였다. 결국 나는 1985년 12월 16일 사퇴했다.
지금은 친구의 도움으로 15인승 자가용을 구입하여 영업허가를 얻어 아는 사람을 통해 주로 행락객을 수송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이것도 몸이 안 좋아 계속 하지는 못하고 남에게 대신 운전하게 하기도 한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딸은 1981년도에 출가를 하였고 큰아들은 조대 4학년에, 작은아들은 전대 4학년에 다니고 있고 딸도 전대에 다니고 있다. 그 당시에는 어렸기 때문에 자식들에게는 별 피해가 없었지만 경제적인 타격은 컸다.
지금은 백운동에서 사글세방(40만 원)을 얻어 생활하고 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애들 대학까지는 마쳐야 하지 않을까 해서 행상을 해볼 생각도 했다.
1985년도 이후 생활보호대상자 1호로 책정되어 가계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사주등을 많이 먹어 지금은 몸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파편을 맞은 등 뒤와 우측 어깨는 활동하는 데 불편이 많다. 온몸이 온통 흉터뿐이다. 5·18이 지난 3년 뒤에도 어깨가 가려워서 긁었더니 손톱만한 크기의 파편이 나오기도 했다. 우리가 타고 가다가 사격을 받았던 포니 승용차를 보면 가끔씩 살아남았다는 것이 어쩌면 기적같게도 생각된다. 벌집처럼 구멍이 난 그 차를 사진으로 찍어놨는데 그것을 보관하다가 대학생들이 증거물로 필요하다고 해서 주었다.
1987년도까지는 함구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별 관심이 없었고 5·18에 대해 나 자신도 기억하기 싫었을 뿐더러 또 피해의식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의 858(폭도로 규정된 5·18 부상자로 보상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명단에 들어 있다. 시청에 추가신고기간이 설정되었을 때 퇴거를 확인해 보기도 했다. 개인병원에서는 진료차트를 5년이 넘으면 폐기를 하기 때문에 남평 재중병원에 가서 확인서를 요청했지만 병원장은 소각해 버려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다시 해정구씨와 직접 가서 치료비 명단이 남아 있는지 알아봤으나 그것도 없었다. 당시에 남평 재중병원에 있을 때 해정구씨와 나의 치료비 명목으로 회사에서 80만 원을 부담했었다. 나중에 재중병원 사무장이 부상자에 한해서는 정부가 부담한다고 해서 회사에서는 다시 그 돈을 수령했다.
1987년도에 금품수수설이 있어서 동사무소에 가서 따졌다. 그리고 의료보험카드만이라도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부에서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1988년 4월 12일자로 의료보험카드를 발급해 줬다. 어려운 형편에 치료비 때문에 힘들었는데 의료보험카드라도 있으니 조금 나았다.
둘로 나눠져 있는 부상자회는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저녁이면 TV를 통해 흘러나오는 5·18 문제에 대해 듣고 있노라면 울화통이 치민다. 이제 사망자수도 정확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내가 계엄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던 효천 부근에서 차 20여 대가 처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차들도 내가 타고 있었던 차와 같이 계엄군들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에 빈 차가 그처럼 흉칙하게 전복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직감적으로 사망자가 많았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의 수에 대해서 의문시된다.
5·18에 대해서 다른 지역 사람들은 너무나 모르는 것 같다. 지역감정도 있어서 인지 다른 지역 사람들은 광주문제를 나쁘게 표현하기도 한다. 어서 진상이 밝혀져서 5·18이 전국민에게 올바르게 인식될 수 있었으면 한다. 진상이 밝혀지고 나면 보상이 되겠지만, 또 진상규명을 위해서 밀고 나가는 것도 좋지만 어서 생계가 곤란한 사람을 위한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