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고소해
정진철
요즘은 휴대폰이 생활 편의시설이 되어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모두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도 이젠 낯설지 않다. 문득 연락해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호출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마침 옆 좌석에 앉은 부인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온 것 같다. 곁눈질로 부인의 휴대폰 화면을 보니 ‘동반자’라고 뜬다. 남편의 호칭인 것 같은데 점잖은 부부사이로 보였다.
휴대폰의 호칭을 보면 남자들은 보통 자기 부인을 아내. 마누라 아니면 마님, 개똥 엄마 등으로 하고 아내들은 반려자, 낭군님, 개똥 아빠 등으로 쓴다. 물론 젊었을 때는 내 사랑, 내꺼 , 내 영혼 등으로 사랑스러운 표현을 한다. 그러다가 기분에 따라 자주 바뀌는데 청주 댁, 동맹관계 등으로 점점 건조해지고 사무적인 호칭으로 바뀌다가 심지어는 아줌마, 사차원, 웬수 등으로 비하 또는 저주 성 표현으로 바뀐다.
언젠가 남편이 부인을 폭행하여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 있었는데 휴대폰에 저장된 호칭이 원인이었다. 남편은 부인이 평소 자신을 멸시한다고 하면서 부인의 휴대폰에 자기를 ㅅㅂㄴ 이라고 저장해 놓은 것 때문에 싸웠다고 했다. 남편은 그 글자가 시발 x 의 약자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인간이하로 쌍스럽게 여기는 증거라고 했다. 이에 대해 부인은 그것은 욕이 아니고 서방님의 초성으로 쓴 약자인데 공연히 트집을 잡는 억지 주장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특별한 상처도 없었고 가족들의 만류로 화해하고 종결되었으나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그런데 휴대폰 호칭은 부모 자식 간에도 문제가 많다. 대체로 부모들은 자식의 호칭으로 첫째, 둘째 하거나 금쪽이, 내 새끼 등 애정 넘친 표현을 많이 쓰는데 자식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아버지 ,어머니라고 공경하는 호칭을 쓰는 것이 대다수이겠지만 간혹 잔소리꾼, 꼰대라고 하는가 하면 받을까 말까라는 호칭도 있다고 한다.
인간관계는 사랑의 척도로 가늠하게 된다. 그 눈금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기준이다. 그런데 사랑도 요즘 세상은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왜곡되어 애증을 낳고 심한 경우에는 편집증을 일으켜 스토킹으로 변질되는 추세다. 그리고 스토킹이라는 것은 주로 남녀 사이의 애정관계에서 비롯되어 한사람이 싫증을 내어 상대방을 회피하게 되면 집요하게 쫒아 다니다가 일을 저지르는 범죄행위이다. 2022. 9. 14 밤 9시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 화장실에서 전모라는 남자가 전에 교제하던 여직원을 찾아내어 만나주지 않는다고 살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스토킹 범죄도 진화되어 남녀사이 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간에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2023. 9. 13 대전지방법원에서는 50대 친엄마가 딸의 고소로 스토킹 범죄 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죄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독립해서 나가 사는 과년한 딸이 엄마에게 전화도 자주하지 않고 엄마가 하는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고 한다. 궁금한 친 엄마는 엄마 옷이 작아져서 못 입으니까 네가 한번 입어봐라, 하는 메시지 등을 보내다가 별다른 반응이 없으면 네 집에서 자게 해줘 하고 전화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딸이 답장을 하지 않으면 남자 있니? 성관계 했냐, 임신했으면 낙태해라는 등 병적으로 집착하는 간섭을 하여 법원으로부터 접근금지명령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친엄마는 6 차례나 딸이 사는 곳으로 찾아가서 벨을 누르거나 모퉁이에 숨어서 딸이 출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행동을 반복하여 불안감과 공포심을 일으키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306회에 걸쳐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111 차례 전화를 했다고 하여 위와 같이 유죄선고를 받아서 화제가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아무리 엄마가 귀찮게 한다고 해도 친엄마인데 고소를 하고 유죄선고를 받게 만드는 것은 패륜이라는 비난도 적지 않다. 반면에 오죽하면 접근금지명령까지 받았음에도 불안감과 공포심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만든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의 간섭이라기보다는 병적인 집착행위이므로 강제적으로 격리시켜야한다는 의견도 다수다.
옛날 어머니들은 자식을 10 명 가까이 낳았다. 먹고 살기도 팍팍한 시절에 형제자매들은 항상 배고팠지만 그래도 아버지 먼저 드시게 하고 콩 하나도 나눠 먹는 밥상머리 교육을 받고 자랐다. 자기가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다산의 명분은 합리화 했지만 부모가 자식들에게 효도하라는 강요는 하지 않았다. 각자 도생해야 했는데 자식들이 알아서 효도하는 것이지 무슨 염치로 강요하겠는가.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가면서 키운 어머니의 은혜는 가이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은혜는 가이 없을지는 몰라도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과는 다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을 구휼하기 위해 한없이 베풀기 만 하는 사랑인데 어머니는 은혜는 가이 없지만 보상심리가 따르는 사랑이다. 특히 요즘과 같이 자녀를 한두 명 낳고 키우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위에서 소개한 친엄마의 스토킹범죄 유죄사건도 결국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그동안 키운 값 내놔라 고 했다는 걸 보면 비뚤어진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관계나 가족 공동체의 윤리는 어디까지가 사회 규범의 잣대와 경계인가 생각할 때마다 왠지 삭막하고 씁쓸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