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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자 의사 김점동
최초 여성 과학자 교육자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결혼 전에 남녀 함께는 어떤 이유건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병이 나도 여성은 남자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없다. 여성들이 병이 나고 아파도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일 수 없다. 병이 심각하게 깊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시대에 여자 의사가 질병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치료하고 여성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야무진 소녀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김점동 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이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인물이다. 그녀가 태어난 1876년 시기는 일본이 힘으로 우리나라를 침략의 계략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총칼을 위협하며 강제로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용하던 조선은 갑자기 나라 밖에 관심으로 가지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항을 강요했던 일본은 서서히 조선을 식민지화 과정을 밟아가다가 1910년에 한일합방 조약으로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녀가 태어난 해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새로운 서양문화의 영향은 김점동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물결은 한국 역사에서 여성 박 에스터를 만들어 냈다.
1886년 11월 점동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0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의 학생이 되었다. 최초의 여성 선교사인 스크랜든 에게 기독교 와 서양 교육을 받았다. 한국에서 교육과 의료를 통한 선교를 하던 서양 선교사들과 만나하면서 기독교 세례를 받고 스크랜든 선생은 점동에게 에스터라는 세례명을 지어주었다.
이후 보구여관(현 이화여자대학병원)에서 일하던 박유산과 결혼을 하고 에스터는 의료 선교를 펴던 셔우드 선생을 돕다가 여성 의사가 되기를 결심하게 된다(청남 카페).
1895년 12월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로제타 홀 박사와 함께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 공부를 한다. 1900년 5월 34세에 미국의 볼티모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사망 직전까지 무료진료 및 맹아학교 와 간호학교 설립으로 고종이 은장(銀章)을 주었다. 또한 국내 첫 여성 대학졸업자이며 여성 과학자이다.
귀국한 에스터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의료 봉사와 계몽 활동에 온 힘을 쏟는다. 과로로 인한 폐결핵을 얻어 34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여성 최초의 의사로서 그녀가 보여준 삶은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남존여비의 전통적인 문화가 팽배한 사회에서도 자신의 꿈과 신념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배우고 노력하는 자세는 우리들에게 훌륭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희생과 봉사의 인물이 되었다(청남 카페).
2003년부터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사업에 여성 과학자 김점동(1877-1910)을 추천하였다. 전국 여성과학기술인 센터(NIS-WIST)는 여자 의사이며 과학자인 김점동(박 에스더)을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후보자로 추천했다. 추천서에 그녀 공적 사항과 자료 제시는 다음과 같이 하였다.
첫 번째 여성 의사로서 과학기술분야 여성 참여의 초석이 됐으며, 폐결핵으로 사망한 김점동의 영향이 폐결핵 퇴치를 결심한 홀 여사의 아들, 셔우드 홀에 의해 국내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만들었다. 병에 대한 과학적 치료를 알지 못했던 일반 서민들에게 질병예방과 의학치료를 널리 알려 신 의학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하였다.
국내 첫 여성 대학졸업자이자 첫 여성 의사, 여성 과학자로서 여성에 제약과 편견을 극복했다.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무료진료 하면서 의사로서 폐결핵으로 사망 전까지 사회에 헌신하고, 맹아학교와 간호학교 설립으로 교육과 사회에 기여한 공적을 남겼다.
“김점동의 짧은 생애는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개화기 서양 의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변화시키고, 과학기술 전문가의 길을 열었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과학기술자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manicorn95).
박 에스더(Mrs Esther Kim Park, 본명 김점동)는 1876년 3월 16일, 정동 부근에서 가난한 김 씨네 딸 4형제 가운데 세 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10년쯤 되었을 때, 아펜젤러가 정동땅과 집을 사서 교회와 학교를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펜젤러에게 고용이 되어 일하였다. 에스더의 집안은 개화의 물결이 스며들고, 그리고 에스더에게는 새로운 학문에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아펜젤러의 소개로 이화학당(이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의 이화학당은 스크랜톤 부인이 창설하여 막 문을 열었다. 입학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한 두 명이 들어왔다가 도중에 나가 학교 자리가 잡히지 아니한 때였다.
이화여고 80년사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엉터리로 모이는 학생들이었지만 1888년 10월에는 학생이 4명, 연말에는 7명이 되었다. 이들이 졸업할 수 있었던 학생은 1명뿐이다. 1887년 에스더는 입학을 하고 이미 들어온 3명과 공부를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신학문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으로 회심의 경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사용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에스더로 변명하였다.
홀의 특별한 조수
189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에스더는 영어를 잘하여 그해 10월에 보구여관에서 일하던 로제타 셔우드의 통역을 맡는다. 그녀는 일생동안 헌신할 방향이 의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칼 수술이 끔찍하여 의사는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언청이를 감쪽같이 수술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달라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의사가 되는 결심을 하였다.
1892년 보구여관이 동대문 분원을 설치하고 볼드윈 시약소(Boldwin Dispensary)이름으로 하였을 때, 에스더는 로제타 셔우드를 따라 특별히 뽑힌 학생이 약을 짓고 환자를 간호했다.
6월에는 로제타 셔우드가 1891년에 내한한 제임스 홀(Hall, William James, M.D)과 결혼을 하고, 그해 7월 평양선교 개척자로 임명되자, 로제타 셔우드는 그의 동생을 불러서 에스더를 물어 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길을 어느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에 내 목숨을 내 놓겠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은 홀 부인(로제타 셔우드가 홀 과 결혼)은 결혼을 시켜 데리고 갈 생각을 하였다.
에스터는 닥터 홀이 데리고 있던 24세 된 청년 박유산과 1893년 5월 24일 결혼하였다. 그리고 1894년 5월 4일 홀의 가족과 평양으로 가서 "홀 부인의 특별 조수"가 되었다.
최초의 여의사 닥터 홀의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에스더 가족은 단순한 조력자 이상이었다. 김창식의 평양 핍박사건 때 박유산은 매를 맞았고, 에스더는 홀 부인과 가마를 타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진료소로 출근해서 병자들을 돌봤다.
1894년 청 ․ 일 전쟁 후 각종 전염병이 창궐한 평양에서, 혼자 남아 치료하다, 발진 티푸스에 걸려, 한국선교 3년 평양선교 2년 4개월 만에 홀이 생을 마쳤다. 홀의 가족은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 때 에스더 가족도 함께 미국에 따라갔다.
1895년 2월 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셔우드 가(家)의 농장 일을 도우면서, 에스더의 학업을 도와주었다. 그해 9월에 에스더는 뉴욕시의 유아병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1년 이상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한편 개인 교수를 찾아 라틴어 물리학, 수학을 공부하였다.
1896년 10월 1일에는 볼티모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하였다. 1900년에는 의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나이는 24세이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그러나 그때 그의 남편을 잃었다. 남편 박유산은 에스더의 졸업을 20여일 앞두고 뇌일혈로 사망했다. 학위 받았지만 기쁜 줄 몰랐다. 그녀는 곧 귀국하였다. 귀국은 환영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슬퍼하였다.
에스더는 또 다시 평양에서 홀(Hall)부인과 만났다. 과거는 미숙한 조수였으나 통역자로 그와 함께 의료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를 도와 광혜원 여자 전용 건물을 신축하며,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개설하였다. 그의 이러한 수교가 인정이 되어, 1908년 4월 28일에는 신사숙녀 7,8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고종황제로부터 치하를 받았다.
1888년 소녀로써 일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약속했던 그녀는, 수없는 난관을 극복하면서 일했다. 의사의 경험이나, 또는 한 신앙인의 인격이 한 참 성숙에, 그의 생애에 일대 불행하게 폐병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다. 그녀는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910년 4월 13일 34세에 세상을 떠났다. 에스더의 죽음은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슬프게 했지만, 그 가운데 가장 가깝게 지냈던 홀 부인의 가족이 더 슬퍼하였다.
닥터 홀의 아들 셔우드는 장차 결핵 전문의가 되어 한국에 다시 와서 꼭 결핵 요양소를 설립할 결심을 하였다. 결심대로 1928년에 최초의 요양소 및 결핵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32년에는 최초로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도입하였다.
1912년까지 감리교회 의료기관에서 일한 이들은 모두 12명이다. 그 가운데 선교사가 11명 이었으나 유일한 여자 박사 에스더뿐이었다. 그 가운데 생명을 바친 이는 12명 가운데 5명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순교자의 숭고한 대열에 영광을 차지하였다(아펜젤러 전기 작가 William E. Criffis).
첫댓글 의학발전사이에 관련한 제생원을 상영한바 있다. SBS TV 에서 반영한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 의학의 발전과 치료 개념이 한학에서 서양 의학 사이에 문화 차이에서 일어나는치료 개념들이 재미 있다. 그러나 구한말 문화와 외세의 사이에 아픔과 갈등이 크게 개입되어 나타났다. 다른 학문도 그와 비슷한 큰 줄기를 드라마로 엮어질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 의학은 기록이 그래도 그 만큼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기록 역사 이상으로 중요한 책임이다. 구본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