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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송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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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상식 및 쉬어가는곳 스크랩 현대차 코피냈던 112만원 코티나
박채순 추천 0 조회 91 09.04.20 20: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현대차 코티나를 아시나요? 한 때 현대차의 코피를 터지게 했다는 말에서 '코피나'로도 통하는 차이죠. 하지만 지금의 현대차를 있게 한 차종이 바로 코티나이기도 합니다. 코티나는 어떤 차였을까요? 아래 얘기는 오래 전 어디엔가(기억이 가물가물) 기고한 내용인데, 자료로 남아 있어서 올려 봅니다.

 

 1968년 11월1일. 5개 라인을 거치며 각 라인당 80분의 시간이 소요된 끝에 현대자동차의 첫차 코티나가 태어났다. 시운전자가 운전석에 앉아 조심스럽게 시동을 걸자 요란한 시동음과 열렬한 박수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어 차가 서서히 움직였고 이 순간은 현대자동차의 시작을 알린 역사적 장면으로 기록돼 있다.

 


 

현대자동차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차가 있다. 각고의 노력 끝에 현대가 세상에 처음 내놓은 코티나가 바로 그것. 현대그룹의 총수였던 故 정주영 전명예회장의 신화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차이자 지금의 현대자동차가 세계에 우뚝 설 수 있었던 현대자동차그룹의 시작차(Prototype)인 셈이다.


 포드와 합작한 현대의 첫차

 

 코티나는 현대가 자동차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손을 잡았던 미국 포드사의 차였다. 당시는 100% 국산차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때라 포드와의 제휴하에 자동차 제조공장 시설기준을 갖추고 본격적인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던 것.

 

 1968년 1월4일 현대자동차주식회사가 설립된 후 회사가 당장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산할 차종과 모델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모델의 선정에 관한 건은 포드와의 계약체결 이전에 결정, 계약서에 명기해야 하는 시급한 사안이기도 했다. 또 자동차회사의 성패는 차종과 모델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무엇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1968년 초 당시 미국 포드는 펠컨, 무스탕, 머큐리 쿠거, 페어레인, 몬데오, 토리노 등을 생산하고 있었고, 영국 포드는 에스코트, 코티나, 콜세아, 조디악, 이그제큐티브, 카프리, 제파 등을, 독일 포드는 에스코트를 비롯해 포드 12M, 15M, 17M, 20M, 26M 시리즈와 카프리 등의 모델을 각각 생산하고 있었다.

 

 포드는 1967년 6월 유럽포드를 설립해 유럽지역의 15개 자회사를 통할하도록 했는데, 그  중심이 되는 영국 포드와 독일 포드는 상호 기술교류를 통해 생산설비와 부품 공용화, 표준화를 적극적으로 실시하되 설계안은 각자 실정과 이미지에 맞게 고쳐 쓰고 있었다. 이렇게 만든 영국이나 독일의 포드차들은 호화로운 대형차와 날씬한 스포츠형이 전부인 미국차와 달리 대부분 견고하고 실용적이어서 우리 실정에 잘 맞았다.

 

 

 

 이 같은 장단점을 분석하던 현대의 경영진은 몇 개월에 걸쳐 모든 자료를 취합, 숙의를 거듭한 끝에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국내 여건에 적합한 차로 영국 포드의 ‘코티나’를 선정했다. 당시 코티나는 영국에서 개발된 후 1967년초 영국 내 판매대수 2위를 기록한 인기 차종이기도 했다. 현대는 코티나가 국내 경쟁사였던 신진의 코로나보다 시트가 넓고 배기량이  큰 데다 안전장치와 최대속도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고 판단했다.

 

 첫차의 감동과 아픔

 

 코티나가 생산되기 직전인 1968년 10월 현대는 코티나의 가격을 111만2,000원으로 책정해 당시 상공부에 승인을 신청했다. 그러나 상공부의 원가분석과 가격 사정이 늦어 현대는 가격이 확정되는 대로 추후 과부족액을 정산키로 하고, 10만원의 물품세를 포함해 110만원의 잠정가격으로 시판에 들어갔다. 상공부는 또 코티나 출고를 계기로 그간 논란이 됐던 자동차 승차정원에 대한 방침을 확정해 영업용 택시는 차체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5인 이하로 규제키로 했고, 자가용인 경우에는 각 메이커의 결정에 따라 6인승을 허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현대는 코티나의 승차정원을 영업용은 5명, 자가용은 6명으로 정했다.

 

 

 

 포드에서 주요 부품을 들여와 조립한 후 1968년 11월1일 마침내 코티나 1호차가 생산됐다. 1호차가 나오던 날 자동차 제작 경험이 전혀 없던 회사가 6개월만에 자동차를 생산했다는 사실에 포드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정주영식의 경영기법을 그대로 보여준 좋은 예였다.

 

 현대는 68년 첫해 556대의 코티나 생산을 시작으로 69년에는 5,547대를 생산했다. 당시 국내 승용차 보유대수가 3만3,000대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코티나는 그야말로 화려한 데뷔를 한 셈이었다. 주요 제원은 전장 4,267mm, 전고 1,389mm, 전폭 1,648mm, 총배기량 1,598cc로 78마력을 발휘했다. 특히 전장과 전폭이 크고 측면 창유리가 곡면으로 돼 있어 6명이 탑승해도 될 정도의 크기였다.

 

 그러나 제 아무리 현대라도 불황을 피할 수는 없었다. 70년대 들어 급습한 불황에 이어 정부가 물품세 인상?승용차 등록억제?긴축재정 등의 각종 수요억제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코티나 판매는 1970년 1,853대로 떨어지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7월 당시 부산시내를 운행하던 218대의 코티나 택시 가운데 100대의 기사들이 부산사업소로 몰려들어 “차를 반납하겠다”는 소동을 벌였다. 코티나 제너레이터에 결함이 있는 데다 부품 값이 턱없이 비싸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코티나는 열악한 국내 도로 및 기후에는 그다지 적합치 않았던 게 원인이었다. 여기에 정비의 미숙함까지 겹쳐 코티나는 화려한 데뷔를 무색하게 할 만큼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이 같은 문제로 코티나가 자주 고장을 일으키자 시중에는 ‘섰다하면 코티나’,  ‘코티나는 미는 차’라는 조롱 섞인 말들이 나돌았고, 코티나라는 이름이 ‘고치나, 코피나, 골치나’ 등으로 불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를 경험 삼아 이후 현대차는 코티나를 개량해 만든 영국산 뉴코티나부터 사전 주행테스트를 거치는 등 우리 실정에 맞는 차로 변화시키는 노력을 계속했다. 뉴코티나를 생산하기 전에 특별히 제품설계 담당자와 개발 담당자를 영국에 보내 한국실정에 맞는 사양 보완작업과 지역환경 특성을 사전협의토록 하는 한편, 1971년 5월 샘플카 3대를 미리 들여와 이중 1대로 주행테스트를 실시한 것이다.

 

 

 시험주행로는 울산에서 방어진까지의 비포장도로와 공장주변 매립지 등이었고, 주행거리는 6개월 간에 걸쳐 3만2,000km에 달했다. 이를 통한 내구력 시험에서 크랙이 생기는 등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발견되면 즉시 보강작업에 착수했다. 뿐만 아니라 기존차에 대해서도 전국적으로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곳을 운행하는 각종 차량과 계약을 체결,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상태를 점검하고 이를 토대로 제품을 보완?개선해 나갔다. 그 결과 코티나는 다시 인기를 얻으며 역사의 한 획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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