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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전쟁까지 산행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선 산행자체가 있기 어려운 이른바 '해방공간'이었다.
그리고 설령 등산을 했다고 해도 그 감동을 기록할 동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일제 때부터 등산애호가라고 한다면 여느 '뻔한' 기록을 남기길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시절 산행기를 발견하려면 '시대의 요구'와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10대 엘리트 고등학생들의 기록부터 우선 접근해야 할 것이다.
지리산이라면 어떨까? 경상남도에서 지리산권의 중심도시라 할 진주시의 진주고등학교(당시 진주중학교) 학생들이 이 조건을 만족시킬 것이다.
진주고등학교는 교가에 지리산이 등장할 정도로 일제 때부터 친연성이 있었다. 다행히 그때 그시절 그들의 기록에서 한편을 발견했다.
『그때 그시절』은 진주고등학교 제 17, 8회 졸업생이 졸업 5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문집이다.
(*17회와 18회는 입학동기인데, 이렇게 나뉘게 된 건 해방당시 복잡다단했던 교육제도와 관련이 있다)
이 책에는 동성 장재훈이 「나의 지리산 산행기」를 싣고 있다.
이 산행기에 대한 어줍잖은 여러 이야기는 한국산서회가 펴내는 연보 『산서』(2022년 4월 발간예정)에 투고를 했다.
책이 발간되면 그때 그 내용을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전문을 전재해볼까 합니다.
그때 그시절에만 만날 수 있는 지리산의 여러 풍정들을 만날 수 있다.
이를테면 1940년 전후 지리산 천왕봉에는 산장이 있었다는 것, 1948년 여순사건때 불타기 전 처승이 주지였던 대원사 이야기 등등이 그렇다.
법계사나 대원사루트로 평범하게 오르는 여느 산행기와 다르다. 한편의 드라마틱한 탐험기와 같다. '의외'이 많아 흥미진진하다.
준비물이 부족하여 출발 때부터 배고픔과 비박의 고통에 시달린다. 하산은 함양 서상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함양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등산 초보였던데다 등산정보가 부족하여 백무동 코스를 알지 못했다.
그 시절 백무동 코스는 지금과 똑같이 4,5시간이면 등산이나 하산이 가능했다.
그들은 초보였던 터라 등산지도를 펴놓고 '도상학적'으로 제일 빠르다고 판단한 '칠선계곡'을 선택한다. 이게 필사의 탈출로 이어진다.
이 글은 등산사적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다.
기록상 해방후 최초의 지리산 등산이고, 놀랍게도 기록상 최초의 칠선계곡 등산(그것도 등산보다 열배 힘들 하산)이다.
글이 길어질까봐 잡설은 여기서 멈추고 이제 전문을 보자.
글은 한글자 한글자 타이핑을 한 게 아니라 '구글'의 '텍스트 전환기능'을 사용한 것이다.
나름 교정을 보았지만 곳곳에 오기나 비문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맨 하단에 사진파일로 전문을 올린다
나의 智異山 山行記
東星 張在薰
1946年 8月下旬, 連日 비가 내리는 異常한 날씨였다. 金炳台君, 徐丙一君과 나 셋은 그 앞서부터 智異山 山行을 계획해 오다가 비가 와도 行하기로 合議했다. 徐君은 父親이 알피니스트로 山에 관한 조예가 깊고 書籍이 많아 父親의 영향이었는지 山에 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예컨대 “깊은 山中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溪谷의 물소리를 따라 下山하라”, “젖은 나무로 불을 피우려면 젖은 나무껍질을 깎은 다음에 불을 집혀라”, “셋이서 등산을 할 때는 제일 强한 사람이 제일 뒤에 서고 제일 한 사람이 가운데 서고 나머지 사람이 앞장을 서라”, “맹수를 피하기 위해서 밤이면 불을 피우고, 뱀을 쫓기 위해 호각을 불어라”, “물이 없고 목이 마를 때는 솔잎을 씹어라”, “雨期에 高山의 溪谷은 범람하기 쉬우니 溪谷을 건널 때는 로프로 서로를 묶어라" 등등.
서군은 일제하에서 일반인에게는 統制되어 있었던 五萬分의 一 智異山地圖를 父親의 書齋에서 찾아내어 지리산 山行의 準備를 해 왔었다.
각자가 먹을 것,필요한 장비, 부식, 非常藥 등을 準備하였다. 하지만 그 準備는 너무나 빈약하였다. 코펠 하나도 없 고 버너 하나도 없었다. 칼이라고 부엌칼, 집에서 쓰던 묵직 한 손도끼, 톱, 徐君도 말로는 모르는 것이 없는데 實際 등산경험은 自己집 뒷산, 飛鳳山 程度였다. 나머지 둘도 마찬 가지다. 이 해 여름에는 비가 잦았다. 이래서 山에 경험이 많은 徐才의 父親은 徐君 母親에게 山行을 만류할 것을 일러 놓고 출타하셨으니 母親은 우리 一行의 山行을 말려야 했고, 그래서 爺君은 아무 準備도 할 수가 없었다. 이같은 事情을 알 수 없었던 나와 金이 徐君의 집에 와 서 보니 그런 상태였다.
서君 母親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金君이 우겨 나와 徐 君은 金君을 따랐다. 둘이서 준비한 먹거리와 비상금으로 셋이서 나누어 먹고 나누어 쓰기로 하고, 떨어지면 무전여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집에서부터 간간히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가며 山淸郡 三壯면 石南行 버스에 올랐다. 石南에서 大源寺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대원사에서 하루밤을 잤다. 대원사는 徐君의 母親이 시주를 해 온 절이다. 住持스님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는 듯 하였다.
뒷날 아침 住持스님이 우리가 있는 房을 찾아와 智異山 山行을 斷念하라고 간곡히 타일렀다. 말씀인즉, 智異山이 普通山이 아니라 解放前 數年까지는 登山路가 管理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登山路를 분간할 수 없도록 풀과 나무가 무성해서 길을 찾을 수가 없다. 山을 노상 다니는 포수, 藥草캐는 사람들도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는 事例가 흔히 있는 山이 이 智異山이다. 그리고 지금은 雨期 이다. 비가 오면 잘 데도 없다. 해방 前에는 頂上에 山莊이 있었지만 지금은 허물어졌다. 이런 狀況下에서의 山行은 지 극히 위험하니 부디 斷念하라는 것이다.
셋이 住持스님의 말씀은 熱心히 들었으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본 住持스님은 自己의 상자를 案內役으로 딸려 보낼테니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셋은 이것마저 拒絶했다. 이유는 먹을 것이 모자랐고, 달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있을 수 없는 謝禮金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住持스님의 말씀으로 氣가 若干 죽은 채 대원사를 뒤로 하고 비가 내리는 智異山 中峰을 向하여, 雨衣를 둘러쓰고 나섰다. 점심때쯤 三壯面 柚坪里에 到着했지만 점심은 걸렀다. 밥을 해먹을 時間도 없었지만 食糧이 모자랄 것 같아서였다. 더워서 더 이상 雨衣는 둘러 쓸 수 없어 오다 말다 하는 비를 맞아가며 산을 올랐다. 五萬分圖에 表示되어 있는 登山路 는 온데간데 없고 磁石으로 方向을 잡고 六感으로 발로 밟아 길을 만들며 갔다.
地圖上에 表示된 中峰쯤이라 생각하고 어둡기 前에 널찍한 반석위에 旅裝을 풀었다. 배가 몹시 고파 기운도 떨어졌지만 해가 지면 금방 어두워진다. 高山에서의 저녁 準備는 서둘어야 한다”는 徐君의 山에 대한 知識 때문이었다. 숙소가 있을 리 없고 天幕도 없는데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徐君이 일러준 대로 젖은 나무를 줏어다가 부엌칼로 젖 은 껍질을 벗기고 준비한 石油를 뿌려 불을 짚혀 쌀 2인분으로 밥 3그릇을 만들어 밥을 해먹었다.
다음에는 猛獸를 피하기 위해 불을 계속 피워야 했고 비는 계속 내리는데,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한다. 方法은 하나가 자고 둘이서 불을 지펴야 했다. 자는 사람이 雨衣 두 장을 깔고 덮고, 두 사람은 불을 지키기 위해 남은 한 장의 雨衣를 兩쪽에서 맞잡고 비를 가리고 선다. 그러니 한 사람이 세 시간이나 잘 수 있었는지. .
날이 새니 비도 멎었다. 아침 일찍 頂上을 向하여 出發한다는 것이 어제의 피로, 수면 不足으로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아침밥을 끝내고 나니 해는 벌써 中天에 떠 있었다. 天王峰을 向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地圖上에는 山莊이 表示되어 있어 住持스님이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어제 밤과 같지는 않으리라는 漢然한 기대와 中間地點에서는 잘 수 없는 절박한 事情,食糧 때문이었다.
부슬비가 내리는 天王峰이 目前에 다다랐고,高度 50m를 남겨놓은 地點이다.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금 더 못가겠가고 주저앉는다. 모두가 다 지쳐있다. 점심을 안 먹었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緊急處方으로 배낭에서 쌀을 한주먹 꺼내서 徐君에게 주어 씹게 하였다. 나와 金君은 같이 먹고 싶었지만 쌀이 모자랄 것 같아 참았다. 그때 金君 얼굴을 보니 金君도 顏色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徐君이 쌀을 씹어 精神을 차릴 때까지 둘이는 앉아서 기다렸다. 徐君이 쌀을 씹는 입을 쳐다보며.... ,
頂上에 到着하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가랑비를 담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山莊을 찾았더니 나무판자를 기와모양으로 이어놓은 山莊지붕은 허물어져 비가 들쳐있고 그 곳에서는 잘 수가 없다. 山莊바닥에 흩어진 나무조각을 줏어 모아 불을 피우고 저녁 밥을 마치고 山莊 반대편에 조그마한 建物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 돌부처 2분을 모셔놓고 그 앞에 는 동전푼들이 흩어져 있었다.
오늘밤에는 여기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처님 두분을 밖에다 모시고 준비해간 어제밤에 덮던 담요로 이부자리를 깔고 셋이서 꼬부리고 앉은 채로 잘도 잤다. 그래도 뒷날 아 침 山頂에서의 東海바다 해돋이를 볼 것이라고 일찍 일어났건만 强風이 구름을 불어 올려 눈아래는 안개로 가득차 해돋 이 구경을 허탕치고 말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天王峰에 온 記念으로 먹고 남은 간장 병 하나를 돌무덤 속에 묻었다. 돌부처님을 原狀대로 모셔놓고 下山길에 들어섰다. 上峰에서 地圖를 펴놓고 자로 재었더니 馬川面 七仙洞으로 가는데 上峰에서 西北方面으로 가다가 150m 地點에 左로 下山길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길로 내려가면 馬川을 거쳐 引月,咸陽西上으로 간다고 했다. 서상에는 서군의 애인이 있어 그 집에 가면 푹 쉬어갈 수 있다고 했다. 목표는 함양서상이다.
가다가 보니 西南方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것 같았다. 金君이 그 길이 150m 地點이라 우겼다. 徐君과 나는 아직 멀었다고 했다. 그러나 金君이 한 번 내려가 보고 오겠다고 하고서 그 길을 따라 내려가더니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不吉한 豫感이 들어 金君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가 길이 있으니 내려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둘이서 구르다시피 하 여 金君이 있는 곳까지 왔다. 金君은 나와 徐君을 쳐다보고 길이 더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길이 있다고 했느냐니까 다시 올라갈 수가 없어 거짓말을 했다고 하며 너희는 다시 올라갈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다. 智異山 頂上 附近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지금 다시 올라갈 기운도 없다. 原點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原則인데도 말이다. 住持스님 말씀이 適中한 것이다. 가만히 앉아 궁리를 하다보니 까마득히 멀리서 溪谷의 물소리가 들 려 온다. “길을 잃었으면 물소리를 따라라” 가 생각났다. 멋적어하는 金君을 위로하며 徐君의 同意를 끌어내어 물소리를 따르기로 하였다.
下山길은 完全한 정글 속이다. 인적未踏의 8月의 智異山숲은 茂盛하다 못해 앞길을 가로막았다. 세사람이 쓴 美軍需品으로 흘러나온 헬멧은 정글을 뚫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물이 폭포로 되어 내려갈 때는 그를 따를 수가 없어 등을 넘고넘어 둘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륙색의 偉力을 알았다. 미끄러져 뒤로 넘어질 때 全然 걱정되지 않았다. 륙색이 잘 받쳐 주었다. 그렇게 해서 미끄러져 내려가니 한결 재미도 있었다.
점심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이 길 나오기만 학수고대, 미끄러지면서 길을 재촉했다. 午後 3時경이나 되었을까. 낫으로 나뭇가지를 자른 흔적을 발견했다. 셋은 歡聲을 올렸다. 아, 살았다. 산에 온 나무꾼이 돌아갈 길을 표시하기 위 한 표식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이 近處에 사람이 있 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安心이 됐다. 셋이서 힘을 모아 큰소리로 사람을 찾았다. 산울림으로 되돌아 올 뿐 사람의 응답 은 없었다. 낫으로 잘라놓은 표식을 따라 한참 걸었다.
5時項이나 되었을까. 幕舍하나를 發見하고 그곳에 當到하니 4~ 5名의 사람들이 木器를 만들기 위해 잘라다 놓은 나무를 토막을 내고 속을 깎고 있었다. 어떻게 반가운지 염치 불구하고 그곳에서 좀 쉬고 가자고 간청을 했으나 여기는 쉴 곳이 못되어 自己들도 곧 마을로 내려갈 것이니 먼저 마을로 내려 가라고 하면서, 요 모퉁이를 돌면 마을이 나타난다고 일러 주었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그 幕舍를 떠났다. 아무리 걸어도 마을은 안 나타났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 다. 高山은 해만 지면 갑자기 깜깜해진다. 길이 보이지 않는 다. 셋이서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六感으로만 발을 떼어 놓는다. 뱀을 피하기 위해 호각을 셋이서 교대교대로 불어가며...
모랭이 하나를 돌아서니 멀리 불빛이 비쳤다. 아, 이제 살았구나. 그 순간 힘이 다 빠져 움직일 수도 없고 앞은 캄캄 해져 발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사람 살리라 고 외쳤더니 횃불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사정 애기를 하고 그의 山幕에 들어 旅裝을 풀었다. 그이는 火田民으로 혼자 와서 이곳에 감자 농사를 지었는데 멧돼지가 다 파 먹고 설농을 했다고 하면서 밤알 만한 감자를 삶아 저녁식사 라고 먹으라고 한다.
깨진 된장단지를 끌어내어 감자를 찍어 먹었다. 우리는 이미 食糧이 다 떨어진 다음이라 이 감자를 정말 고맙게 잘먹고 남은 된장을 그이에게 건네 주었더니 그이는 또 그럴 수 없이 고마워한다. 거기에 살면서 간(鹽)이 떨어진지 이미 오래라고 한다.
아, 이런 삶도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나무는 풍부하여 따끈따끈 방을 데워 한증하는 것처럼 몸을 푸니 이 튿날 아침이 거뜬하였다. 그 아침에 그집 主人장이 통사정하기를 끼니꺼리가 없으니 未安하지만 마을로 내려가 달라는 것이다.
잘 쉬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七仙洞 里長댁 을 찾았다. 里長의 姓名은 지금 잊어버렸지만 그곳에서 세사 람이 문전걸식을 하고 人事를 땡겼는데 알고 보니 晋州 七岩동 金剛農園에 智異山의 나무를 캐어 園藝木으로 供給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晋州에 오시는 걸음이 있어 찾아주시면 은혜를 갚겠다고 人事하고 그 집을 나왔다. 모처럼 뜬 햇볕아래 七仙洞의 溪谷에서 목욕하고 빨래하고 뜨거운 바위에 빨래를 말려 입고 咸陽西上으로 向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큰길에 들어서 500m나 왔을까. 길을 가던 健壯한 壯年 두 사람이 단장을 짚고 가다가 短杖을 치켜들며 손들라고 한다. 그 모양이 하도 우스워 웃으면서 손을 들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自己들은 警察인데 調査할 것이 있으니 支署까지 가잔다. 지금 우리는 西上까지 가야 하는데 점심도 안먹었으니 배도 고프고 해서 支署까지 가서 조사받을 氣力도 없고 時間도 없으니 조사할 것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하고 얼른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은 안된다고 하고 기어이 支署로 가잔다. 理由는 그 當時에 智異山에 左翼分子가 出沒한다는 情報가 있는데 當身들의 행색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支署로 갔다. 륙색을 끌러 짐을 다 내놓으니 의심받기 좋게 되어 있었다. 도끼, 톱, 냄비, 덜마른 빨래, 신발하며 땀에 젖고 때묻은 헬멧 등 어디로 나 山사람 그대로였을 것이다. 집을 떠난 지 벌써 50째 못 먹고 거지 行脚까지 하고 왔으니 그렇게 보였을 수밖에....
徐君 호주머니에서 붉은 軍票가 나왔다. 그 사람들은 興奮을 하면서 다그쳤다. 어디서 났느냐고.... 北에서 온 晋州地檢 朴檢事의 아들이 친군데 記念으로 주었다고 하니 晋州에 照會하고서는 그때부터 待遇가 달라졌다. 金君이 배고프다고 했더니 울면 곱빼기를 세그릇 시켜다가 먹으라고 한다. 西上까지 갈텐데 引月까지 걸어가려니 여기서 時間을 다 뺏겨 늦어질 것 같다고 하면서, 引月 정거장까지만 車를 좀 태워달라고 하자 지나가는 버스로 引月까지 공짜로 태워줬다. 引月서 咸陽까지의 버스는 인월支署에서 주선해 주어 거기까지도 내를 공짜로 탔다. 먼저 支署에서 連絡이 된 것 같았다. 알뜰한 無錢旅行을 한 셈이다. 民主警察은 民衆의 公僕이라더 니, 지금도 感謝하고 있다. 身世갚을 길 없어 안타까울뿐....
고집을 피우다 當한 고생, 當然하지만 山을 우습게 본 방자함이 根因이었으니 그 以後부터 셋은 산에 대한 畏敬心이 잘 심어졌으리라 생각되고 固執도 많이 사그러 들었으리라 생각된다. 5日間의 智異山 山行은 세 사람의 人生行路에 크게 敎訓을 주었을 것이며 세 사람의 友情을 뜨겁게 깊게 두텁게 해, 오늘날까지 나의 기둥이 되었으니 젊어서는 苦生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다시는 못해볼 情다왔던 智異山行을 아련한 追憶속에서 다시 그려보며 친구의 健在를 빈다.
4학년때 (1946. 2) 왼쪽에서 김병태 장재훈 서병일해방이후 전쟁까지 산행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선 산행자체가 있기 어려운 이른바 '해방공간'이었다.
그리고 설령 등산을 했다고 해도 그 감동을 기록할 동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일제 때부터 등산애호가라고 한다면 여느 '뻔한' 기록을 남기길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시절 산행기를 발견하려면 '시대의 요구'와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10대 엘리트 고등학생들의 기록부터 우선 접근해야 할 것이다.
지리산이라면 어떨까? 경상남도에서 지리산권의 중심도시라 할 진주시의 진주고등학교(당시 진주중학교) 학생들이 이 조건을 만족시킬 것이다.
진주고등학교는 교가에 지리산이 등장할 정도로 일제 때부터 친연성이 있었다. 다행히 그때 그시절 그들의 기록에서 한편을 발견했다.
『그때 그시절』은 진주고등학교 제 17, 8회 졸업생이 졸업 5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문집이다.
(*17회와 18회는 입학동기인데, 이렇게 나뉘게 된 건 해방당시 복잡다단했던 교육제도와 관련이 있다)
이 책에는 동성 장재훈이 「나의 지리산 산행기」를 싣고 있다.
이 산행기에 대한 어줍잖은 여러 이야기는 한국산서회가 펴내는 연보 『산서』(2022년 4월 발간예정)에 투고를 했다.
책이 발간되면 그때 그 내용을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전문을 전재해볼까 합니다.
그때 그시절에만 만날 수 있는 지리산의 여러 풍정들을 만날 수 있다.
이를테면 1940년 전후 지리산 천왕봉에는 산장이 있었다는 것, 1948년 여순사건때 불타기 전 처승이 주지였던 대원사 이야기 등등이 그렇다.
법계사나 대원사루트로 평범하게 오르는 여느 산행기와 다르다. 한편의 드라마틱한 탐험기와 같다. '의외'이 많아 흥미진진하다.
준비물이 부족하여 출발 때부터 배고픔과 비박의 고통에 시달린다. 하산은 함양 서상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함양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등산 초보였던데다 등산정보가 부족하여 백무동 코스를 알지 못했다.
그 시절 백무동 코스는 지금과 똑같이 4,5시간이면 등산이나 하산이 가능했다.
그들은 초보였던 터라 등산지도를 펴놓고 '도상학적'으로 제일 빠르다고 판단한 '칠선계곡'을 선택한다. 이게 필사의 탈출로 이어진다.
이 글은 등산사적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다.
기록상 해방후 최초의 지리산 등산이고, 놀랍게도 기록상 최초의 칠선계곡 등산(그것도 등산보다 열배 힘들 하산)이다.
글이 길어질까봐 잡설은 여기서 멈추고 이제 전문을 보자.
글은 한글자 한글자 타이핑을 한 게 아니라 '구글'의 '텍스트 전환기능'을 사용한 것이다.
나름 교정을 보았지만 곳곳에 오기나 비문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맨 하단에 사진파일로 전문을 올린다
나의 智異山 山行記
東星 張在薰
1946年 8月下旬, 連日 비가 내리는 異常한 날씨였다. 金炳台君, 徐丙一君과 나 셋은 그 앞서부터 智異山 山行을 계획해 오다가 비가 와도 行하기로 合議했다. 徐君은 父親이 알피니스트로 山에 관한 조예가 깊고 書籍이 많아 父親의 영향이었는지 山에 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예컨대 “깊은 山中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溪谷의 물소리를 따라 下山하라”, “젖은 나무로 불을 피우려면 젖은 나무껍질을 깎은 다음에 불을 집혀라”, “셋이서 등산을 할 때는 제일 强한 사람이 제일 뒤에 서고 제일 한 사람이 가운데 서고 나머지 사람이 앞장을 서라”, “맹수를 피하기 위해서 밤이면 불을 피우고, 뱀을 쫓기 위해 호각을 불어라”, “물이 없고 목이 마를 때는 솔잎을 씹어라”, “雨期에 高山의 溪谷은 범람하기 쉬우니 溪谷을 건널 때는 로프로 서로를 묶어라" 등등.
서군은 일제하에서 일반인에게는 統制되어 있었던 五萬分의 一 智異山地圖를 父親의 書齋에서 찾아내어 지리산 山行의 準備를 해 왔었다.
각자가 먹을 것,필요한 장비, 부식, 非常藥 등을 準備하였다. 하지만 그 準備는 너무나 빈약하였다. 코펠 하나도 없 고 버너 하나도 없었다. 칼이라고 부엌칼, 집에서 쓰던 묵직 한 손도끼, 톱, 徐君도 말로는 모르는 것이 없는데 實際 등산경험은 自己집 뒷산, 飛鳳山 程度였다. 나머지 둘도 마찬 가지다. 이 해 여름에는 비가 잦았다. 이래서 山에 경험이 많은 徐才의 父親은 徐君 母親에게 山行을 만류할 것을 일러 놓고 출타하셨으니 母親은 우리 一行의 山行을 말려야 했고, 그래서 爺君은 아무 準備도 할 수가 없었다. 이같은 事情을 알 수 없었던 나와 金이 徐君의 집에 와 서 보니 그런 상태였다.
서君 母親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金君이 우겨 나와 徐 君은 金君을 따랐다. 둘이서 준비한 먹거리와 비상금으로 셋이서 나누어 먹고 나누어 쓰기로 하고, 떨어지면 무전여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집에서부터 간간히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가며 山淸郡 三壯면 石南行 버스에 올랐다. 石南에서 大源寺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대원사에서 하루밤을 잤다. 대원사는 徐君의 母親이 시주를 해 온 절이다. 住持스님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는 듯 하였다.
뒷날 아침 住持스님이 우리가 있는 房을 찾아와 智異山 山行을 斷念하라고 간곡히 타일렀다. 말씀인즉, 智異山이 普通山이 아니라 解放前 數年까지는 登山路가 管理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登山路를 분간할 수 없도록 풀과 나무가 무성해서 길을 찾을 수가 없다. 山을 노상 다니는 포수, 藥草캐는 사람들도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는 事例가 흔히 있는 山이 이 智異山이다. 그리고 지금은 雨期 이다. 비가 오면 잘 데도 없다. 해방 前에는 頂上에 山莊이 있었지만 지금은 허물어졌다. 이런 狀況下에서의 山行은 지 극히 위험하니 부디 斷念하라는 것이다.
셋이 住持스님의 말씀은 熱心히 들었으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본 住持스님은 自己의 상자를 案內役으로 딸려 보낼테니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셋은 이것마저 拒絶했다. 이유는 먹을 것이 모자랐고, 달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있을 수 없는 謝禮金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住持스님의 말씀으로 氣가 若干 죽은 채 대원사를 뒤로 하고 비가 내리는 智異山 中峰을 向하여, 雨衣를 둘러쓰고 나섰다. 점심때쯤 三壯面 柚坪里에 到着했지만 점심은 걸렀다. 밥을 해먹을 時間도 없었지만 食糧이 모자랄 것 같아서였다. 더워서 더 이상 雨衣는 둘러 쓸 수 없어 오다 말다 하는 비를 맞아가며 산을 올랐다. 五萬分圖에 表示되어 있는 登山路 는 온데간데 없고 磁石으로 方向을 잡고 六感으로 발로 밟아 길을 만들며 갔다.
地圖上에 表示된 中峰쯤이라 생각하고 어둡기 前에 널찍한 반석위에 旅裝을 풀었다. 배가 몹시 고파 기운도 떨어졌지만 해가 지면 금방 어두워진다. 高山에서의 저녁 準備는 서둘어야 한다”는 徐君의 山에 대한 知識 때문이었다. 숙소가 있을 리 없고 天幕도 없는데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徐君이 일러준 대로 젖은 나무를 줏어다가 부엌칼로 젖 은 껍질을 벗기고 준비한 石油를 뿌려 불을 짚혀 쌀 2인분으로 밥 3그릇을 만들어 밥을 해먹었다.
다음에는 猛獸를 피하기 위해 불을 계속 피워야 했고 비는 계속 내리는데,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한다. 方法은 하나가 자고 둘이서 불을 지펴야 했다. 자는 사람이 雨衣 두 장을 깔고 덮고, 두 사람은 불을 지키기 위해 남은 한 장의 雨衣를 兩쪽에서 맞잡고 비를 가리고 선다. 그러니 한 사람이 세 시간이나 잘 수 있었는지. .
날이 새니 비도 멎었다. 아침 일찍 頂上을 向하여 出發한다는 것이 어제의 피로, 수면 不足으로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아침밥을 끝내고 나니 해는 벌써 中天에 떠 있었다. 天王峰을 向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地圖上에는 山莊이 表示되어 있어 住持스님이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어제 밤과 같지는 않으리라는 漢然한 기대와 中間地點에서는 잘 수 없는 절박한 事情,食糧 때문이었다.
부슬비가 내리는 天王峰이 目前에 다다랐고,高度 50m를 남겨놓은 地點이다.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금 더 못가겠가고 주저앉는다. 모두가 다 지쳐있다. 점심을 안 먹었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緊急處方으로 배낭에서 쌀을 한주먹 꺼내서 徐君에게 주어 씹게 하였다. 나와 金君은 같이 먹고 싶었지만 쌀이 모자랄 것 같아 참았다. 그때 金君 얼굴을 보니 金君도 顏色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徐君이 쌀을 씹어 精神을 차릴 때까지 둘이는 앉아서 기다렸다. 徐君이 쌀을 씹는 입을 쳐다보며.... ,
頂上에 到着하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가랑비를 담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山莊을 찾았더니 나무판자를 기와모양으로 이어놓은 山莊지붕은 허물어져 비가 들쳐있고 그 곳에서는 잘 수가 없다. 山莊바닥에 흩어진 나무조각을 줏어 모아 불을 피우고 저녁 밥을 마치고 山莊 반대편에 조그마한 建物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 돌부처 2분을 모셔놓고 그 앞에 는 동전푼들이 흩어져 있었다.
오늘밤에는 여기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처님 두분을 밖에다 모시고 준비해간 어제밤에 덮던 담요로 이부자리를 깔고 셋이서 꼬부리고 앉은 채로 잘도 잤다. 그래도 뒷날 아 침 山頂에서의 東海바다 해돋이를 볼 것이라고 일찍 일어났건만 强風이 구름을 불어 올려 눈아래는 안개로 가득차 해돋 이 구경을 허탕치고 말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天王峰에 온 記念으로 먹고 남은 간장 병 하나를 돌무덤 속에 묻었다. 돌부처님을 原狀대로 모셔놓고 下山길에 들어섰다. 上峰에서 地圖를 펴놓고 자로 재었더니 馬川面 七仙洞으로 가는데 上峰에서 西北方面으로 가다가 150m 地點에 左로 下山길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길로 내려가면 馬川을 거쳐 引月,咸陽西上으로 간다고 했다. 서상에는 서군의 애인이 있어 그 집에 가면 푹 쉬어갈 수 있다고 했다. 목표는 함양서상이다.
가다가 보니 西南方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것 같았다. 金君이 그 길이 150m 地點이라 우겼다. 徐君과 나는 아직 멀었다고 했다. 그러나 金君이 한 번 내려가 보고 오겠다고 하고서 그 길을 따라 내려가더니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不吉한 豫感이 들어 金君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가 길이 있으니 내려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둘이서 구르다시피 하 여 金君이 있는 곳까지 왔다. 金君은 나와 徐君을 쳐다보고 길이 더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길이 있다고 했느냐니까 다시 올라갈 수가 없어 거짓말을 했다고 하며 너희는 다시 올라갈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다. 智異山 頂上 附近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지금 다시 올라갈 기운도 없다. 原點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原則인데도 말이다. 住持스님 말씀이 適中한 것이다. 가만히 앉아 궁리를 하다보니 까마득히 멀리서 溪谷의 물소리가 들 려 온다. “길을 잃었으면 물소리를 따라라” 가 생각났다. 멋적어하는 金君을 위로하며 徐君의 同意를 끌어내어 물소리를 따르기로 하였다.
下山길은 完全한 정글 속이다. 인적未踏의 8月의 智異山숲은 茂盛하다 못해 앞길을 가로막았다. 세사람이 쓴 美軍需品으로 흘러나온 헬멧은 정글을 뚫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물이 폭포로 되어 내려갈 때는 그를 따를 수가 없어 등을 넘고넘어 둘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륙색의 偉力을 알았다. 미끄러져 뒤로 넘어질 때 全然 걱정되지 않았다. 륙색이 잘 받쳐 주었다. 그렇게 해서 미끄러져 내려가니 한결 재미도 있었다.
점심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이 길 나오기만 학수고대, 미끄러지면서 길을 재촉했다. 午後 3時경이나 되었을까. 낫으로 나뭇가지를 자른 흔적을 발견했다. 셋은 歡聲을 올렸다. 아, 살았다. 산에 온 나무꾼이 돌아갈 길을 표시하기 위 한 표식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이 近處에 사람이 있 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安心이 됐다. 셋이서 힘을 모아 큰소리로 사람을 찾았다. 산울림으로 되돌아 올 뿐 사람의 응답 은 없었다. 낫으로 잘라놓은 표식을 따라 한참 걸었다.
5時項이나 되었을까. 幕舍하나를 發見하고 그곳에 當到하니 4~ 5名의 사람들이 木器를 만들기 위해 잘라다 놓은 나무를 토막을 내고 속을 깎고 있었다. 어떻게 반가운지 염치 불구하고 그곳에서 좀 쉬고 가자고 간청을 했으나 여기는 쉴 곳이 못되어 自己들도 곧 마을로 내려갈 것이니 먼저 마을로 내려 가라고 하면서, 요 모퉁이를 돌면 마을이 나타난다고 일러 주었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그 幕舍를 떠났다. 아무리 걸어도 마을은 안 나타났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 다. 高山은 해만 지면 갑자기 깜깜해진다. 길이 보이지 않는 다. 셋이서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六感으로만 발을 떼어 놓는다. 뱀을 피하기 위해 호각을 셋이서 교대교대로 불어가며...
모랭이 하나를 돌아서니 멀리 불빛이 비쳤다. 아, 이제 살았구나. 그 순간 힘이 다 빠져 움직일 수도 없고 앞은 캄캄 해져 발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사람 살리라 고 외쳤더니 횃불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사정 애기를 하고 그의 山幕에 들어 旅裝을 풀었다. 그이는 火田民으로 혼자 와서 이곳에 감자 농사를 지었는데 멧돼지가 다 파 먹고 설농을 했다고 하면서 밤알 만한 감자를 삶아 저녁식사 라고 먹으라고 한다.
깨진 된장단지를 끌어내어 감자를 찍어 먹었다. 우리는 이미 食糧이 다 떨어진 다음이라 이 감자를 정말 고맙게 잘먹고 남은 된장을 그이에게 건네 주었더니 그이는 또 그럴 수 없이 고마워한다. 거기에 살면서 간(鹽)이 떨어진지 이미 오래라고 한다.
아, 이런 삶도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나무는 풍부하여 따끈따끈 방을 데워 한증하는 것처럼 몸을 푸니 이 튿날 아침이 거뜬하였다. 그 아침에 그집 主人장이 통사정하기를 끼니꺼리가 없으니 未安하지만 마을로 내려가 달라는 것이다.
잘 쉬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七仙洞 里長댁 을 찾았다. 里長의 姓名은 지금 잊어버렸지만 그곳에서 세사 람이 문전걸식을 하고 人事를 땡겼는데 알고 보니 晋州 七岩동 金剛農園에 智異山의 나무를 캐어 園藝木으로 供給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晋州에 오시는 걸음이 있어 찾아주시면 은혜를 갚겠다고 人事하고 그 집을 나왔다. 모처럼 뜬 햇볕아래 七仙洞의 溪谷에서 목욕하고 빨래하고 뜨거운 바위에 빨래를 말려 입고 咸陽西上으로 向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큰길에 들어서 500m나 왔을까. 길을 가던 健壯한 壯年 두 사람이 단장을 짚고 가다가 短杖을 치켜들며 손들라고 한다. 그 모양이 하도 우스워 웃으면서 손을 들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自己들은 警察인데 調査할 것이 있으니 支署까지 가잔다. 지금 우리는 西上까지 가야 하는데 점심도 안먹었으니 배도 고프고 해서 支署까지 가서 조사받을 氣力도 없고 時間도 없으니 조사할 것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하고 얼른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은 안된다고 하고 기어이 支署로 가잔다. 理由는 그 當時에 智異山에 左翼分子가 出沒한다는 情報가 있는데 當身들의 행색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支署로 갔다. 륙색을 끌러 짐을 다 내놓으니 의심받기 좋게 되어 있었다. 도끼, 톱, 냄비, 덜마른 빨래, 신발하며 땀에 젖고 때묻은 헬멧 등 어디로 나 山사람 그대로였을 것이다. 집을 떠난 지 벌써 50째 못 먹고 거지 行脚까지 하고 왔으니 그렇게 보였을 수밖에....
徐君 호주머니에서 붉은 軍票가 나왔다. 그 사람들은 興奮을 하면서 다그쳤다. 어디서 났느냐고.... 北에서 온 晋州地檢 朴檢事의 아들이 친군데 記念으로 주었다고 하니 晋州에 照會하고서는 그때부터 待遇가 달라졌다. 金君이 배고프다고 했더니 울면 곱빼기를 세그릇 시켜다가 먹으라고 한다. 西上까지 갈텐데 引月까지 걸어가려니 여기서 時間을 다 뺏겨 늦어질 것 같다고 하면서, 引月 정거장까지만 車를 좀 태워달라고 하자 지나가는 버스로 引月까지 공짜로 태워줬다. 引月서 咸陽까지의 버스는 인월支署에서 주선해 주어 거기까지도 내를 공짜로 탔다. 먼저 支署에서 連絡이 된 것 같았다. 알뜰한 無錢旅行을 한 셈이다. 民主警察은 民衆의 公僕이라더 니, 지금도 感謝하고 있다. 身世갚을 길 없어 안타까울뿐....
고집을 피우다 當한 고생, 當然하지만 山을 우습게 본 방자함이 根因이었으니 그 以後부터 셋은 산에 대한 畏敬心이 잘 심어졌으리라 생각되고 固執도 많이 사그러 들었으리라 생각된다. 5日間의 智異山 山行은 세 사람의 人生行路에 크게 敎訓을 주었을 것이며 세 사람의 友情을 뜨겁게 깊게 두텁게 해, 오늘날까지 나의 기둥이 되었으니 젊어서는 苦生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다시는 못해볼 情다왔던 智異山行을 아련한 追憶속에서 다시 그려보며 친구의 健在를 빈다.
4학년때 (1946. 2) 왼쪽에서 김병태 장재훈 서병일그리고 설령 등산을 했다고 해도 그 감동을 기록할 동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일제 때부터 등산애호가라고 한다면 여느 '뻔한' 기록을 남기길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시절 산행기를 발견하려면 '시대의 요구'와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10대 엘리트 고등학생들의 기록부터 우선 접근해야 할 것이다.
지리산이라면 어떨까? 경상남도에서 지리산권의 중심도시라 할 진주시의 진주고등학교(당시 진주중학교) 학생들이 이 조건을 만족시킬 것이다.
진주고등학교는 교가에 지리산이 등장할 정도로 일제 때부터 친연성이 있었다. 다행히 그때 그시절 그들의 기록에서 한편을 발견했다.
『그때 그시절』은 진주고등학교 제 17, 8회 졸업생이 졸업 5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문집이다.
(*17회와 18회는 입학동기인데, 이렇게 나뉘게 된 건 해방당시 복잡다단했던 교육제도와 관련이 있다)
이 책에는 동성 장재훈이 「나의 지리산 산행기」를 싣고 있다.
이 산행기에 대한 어줍잖은 여러 이야기는 한국산서회가 펴내는 연보 『산서』(2022년 4월 발간예정)에 투고를 했다.
책이 발간되면 그때 그 내용을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전문을 전재해볼까 합니다.
그때 그시절에만 만날 수 있는 지리산의 여러 풍정들을 만날 수 있다.
이를테면 1940년 전후 지리산 천왕봉에는 산장이 있었다는 것, 1948년 여순사건때 불타기 전 처승이 주지였던 대원사 이야기 등등이 그렇다.
법계사나 대원사루트로 평범하게 오르는 여느 산행기와 다르다. 한편의 드라마틱한 탐험기와 같다. '의외'이 많아 흥미진진하다.
준비물이 부족하여 출발 때부터 배고픔과 비박의 고통에 시달린다. 하산은 함양 서상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함양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등산 초보였던데다 등산정보가 부족하여 백무동 코스를 알지 못했다.
그 시절 백무동 코스는 지금과 똑같이 4,5시간이면 등산이나 하산이 가능했다.
그들은 초보였던 터라 등산지도를 펴놓고 '도상학적'으로 제일 빠르다고 판단한 '칠선계곡'을 선택한다. 이게 필사의 탈출로 이어진다.
이 글은 등산사적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다.
기록상 해방후 최초의 지리산 등산이고, 놀랍게도 기록상 최초의 칠선계곡 등산(그것도 등산보다 열배 힘들 하산)이다.
글이 길어질까봐 잡설은 여기서 멈추고 이제 전문을 보자.
글은 한글자 한글자 타이핑을 한 게 아니라 '구글'의 '텍스트 전환기능'을 사용한 것이다.
나름 교정을 보았지만 곳곳에 오기나 비문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맨 하단에 사진파일로 전문을 올린다
나의 智異山 山行記
東星 張在薰
1946年 8月下旬, 連日 비가 내리는 異常한 날씨였다. 金炳台君, 徐丙一君과 나 셋은 그 앞서부터 智異山 山行을 계획해 오다가 비가 와도 行하기로 合議했다. 徐君은 父親이 알피니스트로 山에 관한 조예가 깊고 書籍이 많아 父親의 영향이었는지 山에 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예컨대 “깊은 山中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溪谷의 물소리를 따라 下山하라”, “젖은 나무로 불을 피우려면 젖은 나무껍질을 깎은 다음에 불을 집혀라”, “셋이서 등산을 할 때는 제일 强한 사람이 제일 뒤에 서고 제일 한 사람이 가운데 서고 나머지 사람이 앞장을 서라”, “맹수를 피하기 위해서 밤이면 불을 피우고, 뱀을 쫓기 위해 호각을 불어라”, “물이 없고 목이 마를 때는 솔잎을 씹어라”, “雨期에 高山의 溪谷은 범람하기 쉬우니 溪谷을 건널 때는 로프로 서로를 묶어라" 등등.
서군은 일제하에서 일반인에게는 統制되어 있었던 五萬分의 一 智異山地圖를 父親의 書齋에서 찾아내어 지리산 山行의 準備를 해 왔었다.
각자가 먹을 것,필요한 장비, 부식, 非常藥 등을 準備하였다. 하지만 그 準備는 너무나 빈약하였다. 코펠 하나도 없 고 버너 하나도 없었다. 칼이라고 부엌칼, 집에서 쓰던 묵직 한 손도끼, 톱, 徐君도 말로는 모르는 것이 없는데 實際 등산경험은 自己집 뒷산, 飛鳳山 程度였다. 나머지 둘도 마찬 가지다. 이 해 여름에는 비가 잦았다. 이래서 山에 경험이 많은 徐才의 父親은 徐君 母親에게 山行을 만류할 것을 일러 놓고 출타하셨으니 母親은 우리 一行의 山行을 말려야 했고, 그래서 爺君은 아무 準備도 할 수가 없었다. 이같은 事情을 알 수 없었던 나와 金이 徐君의 집에 와 서 보니 그런 상태였다.
서君 母親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金君이 우겨 나와 徐 君은 金君을 따랐다. 둘이서 준비한 먹거리와 비상금으로 셋이서 나누어 먹고 나누어 쓰기로 하고, 떨어지면 무전여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집에서부터 간간히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가며 山淸郡 三壯면 石南行 버스에 올랐다. 石南에서 大源寺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대원사에서 하루밤을 잤다. 대원사는 徐君의 母親이 시주를 해 온 절이다. 住持스님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는 듯 하였다.
뒷날 아침 住持스님이 우리가 있는 房을 찾아와 智異山 山行을 斷念하라고 간곡히 타일렀다. 말씀인즉, 智異山이 普通山이 아니라 解放前 數年까지는 登山路가 管理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登山路를 분간할 수 없도록 풀과 나무가 무성해서 길을 찾을 수가 없다. 山을 노상 다니는 포수, 藥草캐는 사람들도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는 事例가 흔히 있는 山이 이 智異山이다. 그리고 지금은 雨期 이다. 비가 오면 잘 데도 없다. 해방 前에는 頂上에 山莊이 있었지만 지금은 허물어졌다. 이런 狀況下에서의 山行은 지 극히 위험하니 부디 斷念하라는 것이다.
셋이 住持스님의 말씀은 熱心히 들었으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본 住持스님은 自己의 상자를 案內役으로 딸려 보낼테니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셋은 이것마저 拒絶했다. 이유는 먹을 것이 모자랐고, 달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있을 수 없는 謝禮金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住持스님의 말씀으로 氣가 若干 죽은 채 대원사를 뒤로 하고 비가 내리는 智異山 中峰을 向하여, 雨衣를 둘러쓰고 나섰다. 점심때쯤 三壯面 柚坪里에 到着했지만 점심은 걸렀다. 밥을 해먹을 時間도 없었지만 食糧이 모자랄 것 같아서였다. 더워서 더 이상 雨衣는 둘러 쓸 수 없어 오다 말다 하는 비를 맞아가며 산을 올랐다. 五萬分圖에 表示되어 있는 登山路 는 온데간데 없고 磁石으로 方向을 잡고 六感으로 발로 밟아 길을 만들며 갔다.
地圖上에 表示된 中峰쯤이라 생각하고 어둡기 前에 널찍한 반석위에 旅裝을 풀었다. 배가 몹시 고파 기운도 떨어졌지만 해가 지면 금방 어두워진다. 高山에서의 저녁 準備는 서둘어야 한다”는 徐君의 山에 대한 知識 때문이었다. 숙소가 있을 리 없고 天幕도 없는데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徐君이 일러준 대로 젖은 나무를 줏어다가 부엌칼로 젖 은 껍질을 벗기고 준비한 石油를 뿌려 불을 짚혀 쌀 2인분으로 밥 3그릇을 만들어 밥을 해먹었다.
다음에는 猛獸를 피하기 위해 불을 계속 피워야 했고 비는 계속 내리는데,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한다. 方法은 하나가 자고 둘이서 불을 지펴야 했다. 자는 사람이 雨衣 두 장을 깔고 덮고, 두 사람은 불을 지키기 위해 남은 한 장의 雨衣를 兩쪽에서 맞잡고 비를 가리고 선다. 그러니 한 사람이 세 시간이나 잘 수 있었는지. .
날이 새니 비도 멎었다. 아침 일찍 頂上을 向하여 出發한다는 것이 어제의 피로, 수면 不足으로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아침밥을 끝내고 나니 해는 벌써 中天에 떠 있었다. 天王峰을 向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地圖上에는 山莊이 表示되어 있어 住持스님이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어제 밤과 같지는 않으리라는 漢然한 기대와 中間地點에서는 잘 수 없는 절박한 事情,食糧 때문이었다.
부슬비가 내리는 天王峰이 目前에 다다랐고,高度 50m를 남겨놓은 地點이다.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금 더 못가겠가고 주저앉는다. 모두가 다 지쳐있다. 점심을 안 먹었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緊急處方으로 배낭에서 쌀을 한주먹 꺼내서 徐君에게 주어 씹게 하였다. 나와 金君은 같이 먹고 싶었지만 쌀이 모자랄 것 같아 참았다. 그때 金君 얼굴을 보니 金君도 顏色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徐君이 쌀을 씹어 精神을 차릴 때까지 둘이는 앉아서 기다렸다. 徐君이 쌀을 씹는 입을 쳐다보며.... ,
頂上에 到着하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가랑비를 담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山莊을 찾았더니 나무판자를 기와모양으로 이어놓은 山莊지붕은 허물어져 비가 들쳐있고 그 곳에서는 잘 수가 없다. 山莊바닥에 흩어진 나무조각을 줏어 모아 불을 피우고 저녁 밥을 마치고 山莊 반대편에 조그마한 建物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 돌부처 2분을 모셔놓고 그 앞에 는 동전푼들이 흩어져 있었다.
오늘밤에는 여기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처님 두분을 밖에다 모시고 준비해간 어제밤에 덮던 담요로 이부자리를 깔고 셋이서 꼬부리고 앉은 채로 잘도 잤다. 그래도 뒷날 아 침 山頂에서의 東海바다 해돋이를 볼 것이라고 일찍 일어났건만 强風이 구름을 불어 올려 눈아래는 안개로 가득차 해돋 이 구경을 허탕치고 말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天王峰에 온 記念으로 먹고 남은 간장 병 하나를 돌무덤 속에 묻었다. 돌부처님을 原狀대로 모셔놓고 下山길에 들어섰다. 上峰에서 地圖를 펴놓고 자로 재었더니 馬川面 七仙洞으로 가는데 上峰에서 西北方面으로 가다가 150m 地點에 左로 下山길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길로 내려가면 馬川을 거쳐 引月,咸陽西上으로 간다고 했다. 서상에는 서군의 애인이 있어 그 집에 가면 푹 쉬어갈 수 있다고 했다. 목표는 함양서상이다.
가다가 보니 西南方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것 같았다. 金君이 그 길이 150m 地點이라 우겼다. 徐君과 나는 아직 멀었다고 했다. 그러나 金君이 한 번 내려가 보고 오겠다고 하고서 그 길을 따라 내려가더니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不吉한 豫感이 들어 金君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가 길이 있으니 내려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둘이서 구르다시피 하 여 金君이 있는 곳까지 왔다. 金君은 나와 徐君을 쳐다보고 길이 더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길이 있다고 했느냐니까 다시 올라갈 수가 없어 거짓말을 했다고 하며 너희는 다시 올라갈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다. 智異山 頂上 附近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지금 다시 올라갈 기운도 없다. 原點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原則인데도 말이다. 住持스님 말씀이 適中한 것이다. 가만히 앉아 궁리를 하다보니 까마득히 멀리서 溪谷의 물소리가 들 려 온다. “길을 잃었으면 물소리를 따라라” 가 생각났다. 멋적어하는 金君을 위로하며 徐君의 同意를 끌어내어 물소리를 따르기로 하였다.
下山길은 完全한 정글 속이다. 인적未踏의 8月의 智異山숲은 茂盛하다 못해 앞길을 가로막았다. 세사람이 쓴 美軍需品으로 흘러나온 헬멧은 정글을 뚫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물이 폭포로 되어 내려갈 때는 그를 따를 수가 없어 등을 넘고넘어 둘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륙색의 偉力을 알았다. 미끄러져 뒤로 넘어질 때 全然 걱정되지 않았다. 륙색이 잘 받쳐 주었다. 그렇게 해서 미끄러져 내려가니 한결 재미도 있었다.
점심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이 길 나오기만 학수고대, 미끄러지면서 길을 재촉했다. 午後 3時경이나 되었을까. 낫으로 나뭇가지를 자른 흔적을 발견했다. 셋은 歡聲을 올렸다. 아, 살았다. 산에 온 나무꾼이 돌아갈 길을 표시하기 위 한 표식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이 近處에 사람이 있 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安心이 됐다. 셋이서 힘을 모아 큰소리로 사람을 찾았다. 산울림으로 되돌아 올 뿐 사람의 응답 은 없었다. 낫으로 잘라놓은 표식을 따라 한참 걸었다.
5時項이나 되었을까. 幕舍하나를 發見하고 그곳에 當到하니 4~ 5名의 사람들이 木器를 만들기 위해 잘라다 놓은 나무를 토막을 내고 속을 깎고 있었다. 어떻게 반가운지 염치 불구하고 그곳에서 좀 쉬고 가자고 간청을 했으나 여기는 쉴 곳이 못되어 自己들도 곧 마을로 내려갈 것이니 먼저 마을로 내려 가라고 하면서, 요 모퉁이를 돌면 마을이 나타난다고 일러 주었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그 幕舍를 떠났다. 아무리 걸어도 마을은 안 나타났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 다. 高山은 해만 지면 갑자기 깜깜해진다. 길이 보이지 않는 다. 셋이서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六感으로만 발을 떼어 놓는다. 뱀을 피하기 위해 호각을 셋이서 교대교대로 불어가며...
모랭이 하나를 돌아서니 멀리 불빛이 비쳤다. 아, 이제 살았구나. 그 순간 힘이 다 빠져 움직일 수도 없고 앞은 캄캄 해져 발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사람 살리라 고 외쳤더니 횃불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사정 애기를 하고 그의 山幕에 들어 旅裝을 풀었다. 그이는 火田民으로 혼자 와서 이곳에 감자 농사를 지었는데 멧돼지가 다 파 먹고 설농을 했다고 하면서 밤알 만한 감자를 삶아 저녁식사 라고 먹으라고 한다.
깨진 된장단지를 끌어내어 감자를 찍어 먹었다. 우리는 이미 食糧이 다 떨어진 다음이라 이 감자를 정말 고맙게 잘먹고 남은 된장을 그이에게 건네 주었더니 그이는 또 그럴 수 없이 고마워한다. 거기에 살면서 간(鹽)이 떨어진지 이미 오래라고 한다.
아, 이런 삶도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나무는 풍부하여 따끈따끈 방을 데워 한증하는 것처럼 몸을 푸니 이 튿날 아침이 거뜬하였다. 그 아침에 그집 主人장이 통사정하기를 끼니꺼리가 없으니 未安하지만 마을로 내려가 달라는 것이다.
잘 쉬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七仙洞 里長댁 을 찾았다. 里長의 姓名은 지금 잊어버렸지만 그곳에서 세사 람이 문전걸식을 하고 人事를 땡겼는데 알고 보니 晋州 七岩동 金剛農園에 智異山의 나무를 캐어 園藝木으로 供給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晋州에 오시는 걸음이 있어 찾아주시면 은혜를 갚겠다고 人事하고 그 집을 나왔다. 모처럼 뜬 햇볕아래 七仙洞의 溪谷에서 목욕하고 빨래하고 뜨거운 바위에 빨래를 말려 입고 咸陽西上으로 向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큰길에 들어서 500m나 왔을까. 길을 가던 健壯한 壯年 두 사람이 단장을 짚고 가다가 短杖을 치켜들며 손들라고 한다. 그 모양이 하도 우스워 웃으면서 손을 들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自己들은 警察인데 調査할 것이 있으니 支署까지 가잔다. 지금 우리는 西上까지 가야 하는데 점심도 안먹었으니 배도 고프고 해서 支署까지 가서 조사받을 氣力도 없고 時間도 없으니 조사할 것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하고 얼른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은 안된다고 하고 기어이 支署로 가잔다. 理由는 그 當時에 智異山에 左翼分子가 出沒한다는 情報가 있는데 當身들의 행색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支署로 갔다. 륙색을 끌러 짐을 다 내놓으니 의심받기 좋게 되어 있었다. 도끼, 톱, 냄비, 덜마른 빨래, 신발하며 땀에 젖고 때묻은 헬멧 등 어디로 나 山사람 그대로였을 것이다. 집을 떠난 지 벌써 50째 못 먹고 거지 行脚까지 하고 왔으니 그렇게 보였을 수밖에....
徐君 호주머니에서 붉은 軍票가 나왔다. 그 사람들은 興奮을 하면서 다그쳤다. 어디서 났느냐고.... 北에서 온 晋州地檢 朴檢事의 아들이 친군데 記念으로 주었다고 하니 晋州에 照會하고서는 그때부터 待遇가 달라졌다. 金君이 배고프다고 했더니 울면 곱빼기를 세그릇 시켜다가 먹으라고 한다. 西上까지 갈텐데 引月까지 걸어가려니 여기서 時間을 다 뺏겨 늦어질 것 같다고 하면서, 引月 정거장까지만 車를 좀 태워달라고 하자 지나가는 버스로 引月까지 공짜로 태워줬다. 引月서 咸陽까지의 버스는 인월支署에서 주선해 주어 거기까지도 내를 공짜로 탔다. 먼저 支署에서 連絡이 된 것 같았다. 알뜰한 無錢旅行을 한 셈이다. 民主警察은 民衆의 公僕이라더 니, 지금도 感謝하고 있다. 身世갚을 길 없어 안타까울뿐....
고집을 피우다 當한 고생, 當然하지만 山을 우습게 본 방자함이 根因이었으니 그 以後부터 셋은 산에 대한 畏敬心이 잘 심어졌으리라 생각되고 固執도 많이 사그러 들었으리라 생각된다. 5日間의 智異山 山行은 세 사람의 人生行路에 크게 敎訓을 주었을 것이며 세 사람의 友情을 뜨겁게 깊게 두텁게 해, 오늘날까지 나의 기둥이 되었으니 젊어서는 苦生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다시는 못해볼 情다왔던 智異山行을 아련한 追憶속에서 다시 그려보며 친구의 健在를 빈다.
4학년때 (1946. 2) 왼쪽에서 김병태 장재훈 서병일그렇다면 그 시절 산행기를 발견하려면 '시대의 요구'와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10대 엘리트 고등학생들의 기록부터 우선 접근해야 할 것이다.
지리산이라면 어떨까? 경상남도에서 지리산권의 중심도시라 할 진주시의 진주고등학교(당시 진주중학교) 학생들이 이 조건을 만족시킬 것이다.
진주고등학교는 교가에 지리산이 등장할 정도로 일제 때부터 친연성이 있었다. 다행히 그때 그시절 그들의 기록에서 한편을 발견했다.
『그때 그시절』은 진주고등학교 제 17, 8회 졸업생이 졸업 5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문집이다.
(*17회와 18회는 입학동기인데, 이렇게 나뉘게 된 건 해방당시 복잡다단했던 교육제도와 관련이 있다)
이 책에는 동성 장재훈이 「나의 지리산 산행기」를 싣고 있다.
이 산행기에 대한 어줍잖은 여러 이야기는 한국산서회가 펴내는 연보 『산서』(2022년 4월 발간예정)에 투고를 했다.
책이 발간되면 그때 그 내용을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전문을 전재해볼까 합니다.
그때 그시절에만 만날 수 있는 지리산의 여러 풍정들을 만날 수 있다.
이를테면 1940년 전후 지리산 천왕봉에는 산장이 있었다는 것, 1948년 여순사건때 불타기 전 처승이 주지였던 대원사 이야기 등등이 그렇다.
법계사나 대원사루트로 평범하게 오르는 여느 산행기와 다르다. 한편의 드라마틱한 탐험기와 같다. '의외'이 많아 흥미진진하다.
준비물이 부족하여 출발 때부터 배고픔과 비박의 고통에 시달린다. 하산은 함양 서상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함양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등산 초보였던데다 등산정보가 부족하여 백무동 코스를 알지 못했다.
그 시절 백무동 코스는 지금과 똑같이 4,5시간이면 등산이나 하산이 가능했다.
그들은 초보였던 터라 등산지도를 펴놓고 '도상학적'으로 제일 빠르다고 판단한 '칠선계곡'을 선택한다. 이게 필사의 탈출로 이어진다.
이 글은 등산사적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다.
기록상 해방후 최초의 지리산 등산이고, 놀랍게도 기록상 최초의 칠선계곡 등산(그것도 등산보다 열배 힘들 하산)이다.
글이 길어질까봐 잡설은 여기서 멈추고 이제 전문을 보자.
글은 한글자 한글자 타이핑을 한 게 아니라 '구글'의 '텍스트 전환기능'을 사용한 것이다.
나름 교정을 보았지만 곳곳에 오기나 비문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맨 하단에 사진파일로 전문을 올린다
나의 智異山 山行記
東星 張在薰
1946年 8月下旬, 連日 비가 내리는 異常한 날씨였다. 金炳台君, 徐丙一君과 나 셋은 그 앞서부터 智異山 山行을 계획해 오다가 비가 와도 行하기로 合議했다. 徐君은 父親이 알피니스트로 山에 관한 조예가 깊고 書籍이 많아 父親의 영향이었는지 山에 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예컨대 “깊은 山中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溪谷의 물소리를 따라 下山하라”, “젖은 나무로 불을 피우려면 젖은 나무껍질을 깎은 다음에 불을 집혀라”, “셋이서 등산을 할 때는 제일 强한 사람이 제일 뒤에 서고 제일 한 사람이 가운데 서고 나머지 사람이 앞장을 서라”, “맹수를 피하기 위해서 밤이면 불을 피우고, 뱀을 쫓기 위해 호각을 불어라”, “물이 없고 목이 마를 때는 솔잎을 씹어라”, “雨期에 高山의 溪谷은 범람하기 쉬우니 溪谷을 건널 때는 로프로 서로를 묶어라" 등등.
서군은 일제하에서 일반인에게는 統制되어 있었던 五萬分의 一 智異山地圖를 父親의 書齋에서 찾아내어 지리산 山行의 準備를 해 왔었다.
각자가 먹을 것,필요한 장비, 부식, 非常藥 등을 準備하였다. 하지만 그 準備는 너무나 빈약하였다. 코펠 하나도 없 고 버너 하나도 없었다. 칼이라고 부엌칼, 집에서 쓰던 묵직 한 손도끼, 톱, 徐君도 말로는 모르는 것이 없는데 實際 등산경험은 自己집 뒷산, 飛鳳山 程度였다. 나머지 둘도 마찬 가지다. 이 해 여름에는 비가 잦았다. 이래서 山에 경험이 많은 徐才의 父親은 徐君 母親에게 山行을 만류할 것을 일러 놓고 출타하셨으니 母親은 우리 一行의 山行을 말려야 했고, 그래서 爺君은 아무 準備도 할 수가 없었다. 이같은 事情을 알 수 없었던 나와 金이 徐君의 집에 와 서 보니 그런 상태였다.
서君 母親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金君이 우겨 나와 徐 君은 金君을 따랐다. 둘이서 준비한 먹거리와 비상금으로 셋이서 나누어 먹고 나누어 쓰기로 하고, 떨어지면 무전여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집에서부터 간간히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가며 山淸郡 三壯면 石南行 버스에 올랐다. 石南에서 大源寺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대원사에서 하루밤을 잤다. 대원사는 徐君의 母親이 시주를 해 온 절이다. 住持스님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는 듯 하였다.
뒷날 아침 住持스님이 우리가 있는 房을 찾아와 智異山 山行을 斷念하라고 간곡히 타일렀다. 말씀인즉, 智異山이 普通山이 아니라 解放前 數年까지는 登山路가 管理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登山路를 분간할 수 없도록 풀과 나무가 무성해서 길을 찾을 수가 없다. 山을 노상 다니는 포수, 藥草캐는 사람들도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는 事例가 흔히 있는 山이 이 智異山이다. 그리고 지금은 雨期 이다. 비가 오면 잘 데도 없다. 해방 前에는 頂上에 山莊이 있었지만 지금은 허물어졌다. 이런 狀況下에서의 山行은 지 극히 위험하니 부디 斷念하라는 것이다.
셋이 住持스님의 말씀은 熱心히 들었으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본 住持스님은 自己의 상자를 案內役으로 딸려 보낼테니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셋은 이것마저 拒絶했다. 이유는 먹을 것이 모자랐고, 달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있을 수 없는 謝禮金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住持스님의 말씀으로 氣가 若干 죽은 채 대원사를 뒤로 하고 비가 내리는 智異山 中峰을 向하여, 雨衣를 둘러쓰고 나섰다. 점심때쯤 三壯面 柚坪里에 到着했지만 점심은 걸렀다. 밥을 해먹을 時間도 없었지만 食糧이 모자랄 것 같아서였다. 더워서 더 이상 雨衣는 둘러 쓸 수 없어 오다 말다 하는 비를 맞아가며 산을 올랐다. 五萬分圖에 表示되어 있는 登山路 는 온데간데 없고 磁石으로 方向을 잡고 六感으로 발로 밟아 길을 만들며 갔다.
地圖上에 表示된 中峰쯤이라 생각하고 어둡기 前에 널찍한 반석위에 旅裝을 풀었다. 배가 몹시 고파 기운도 떨어졌지만 해가 지면 금방 어두워진다. 高山에서의 저녁 準備는 서둘어야 한다”는 徐君의 山에 대한 知識 때문이었다. 숙소가 있을 리 없고 天幕도 없는데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徐君이 일러준 대로 젖은 나무를 줏어다가 부엌칼로 젖 은 껍질을 벗기고 준비한 石油를 뿌려 불을 짚혀 쌀 2인분으로 밥 3그릇을 만들어 밥을 해먹었다.
다음에는 猛獸를 피하기 위해 불을 계속 피워야 했고 비는 계속 내리는데,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한다. 方法은 하나가 자고 둘이서 불을 지펴야 했다. 자는 사람이 雨衣 두 장을 깔고 덮고, 두 사람은 불을 지키기 위해 남은 한 장의 雨衣를 兩쪽에서 맞잡고 비를 가리고 선다. 그러니 한 사람이 세 시간이나 잘 수 있었는지. .
날이 새니 비도 멎었다. 아침 일찍 頂上을 向하여 出發한다는 것이 어제의 피로, 수면 不足으로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아침밥을 끝내고 나니 해는 벌써 中天에 떠 있었다. 天王峰을 向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地圖上에는 山莊이 表示되어 있어 住持스님이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어제 밤과 같지는 않으리라는 漢然한 기대와 中間地點에서는 잘 수 없는 절박한 事情,食糧 때문이었다.
부슬비가 내리는 天王峰이 目前에 다다랐고,高度 50m를 남겨놓은 地點이다.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금 더 못가겠가고 주저앉는다. 모두가 다 지쳐있다. 점심을 안 먹었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緊急處方으로 배낭에서 쌀을 한주먹 꺼내서 徐君에게 주어 씹게 하였다. 나와 金君은 같이 먹고 싶었지만 쌀이 모자랄 것 같아 참았다. 그때 金君 얼굴을 보니 金君도 顏色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徐君이 쌀을 씹어 精神을 차릴 때까지 둘이는 앉아서 기다렸다. 徐君이 쌀을 씹는 입을 쳐다보며.... ,
頂上에 到着하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가랑비를 담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山莊을 찾았더니 나무판자를 기와모양으로 이어놓은 山莊지붕은 허물어져 비가 들쳐있고 그 곳에서는 잘 수가 없다. 山莊바닥에 흩어진 나무조각을 줏어 모아 불을 피우고 저녁 밥을 마치고 山莊 반대편에 조그마한 建物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 돌부처 2분을 모셔놓고 그 앞에 는 동전푼들이 흩어져 있었다.
오늘밤에는 여기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처님 두분을 밖에다 모시고 준비해간 어제밤에 덮던 담요로 이부자리를 깔고 셋이서 꼬부리고 앉은 채로 잘도 잤다. 그래도 뒷날 아 침 山頂에서의 東海바다 해돋이를 볼 것이라고 일찍 일어났건만 强風이 구름을 불어 올려 눈아래는 안개로 가득차 해돋 이 구경을 허탕치고 말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天王峰에 온 記念으로 먹고 남은 간장 병 하나를 돌무덤 속에 묻었다. 돌부처님을 原狀대로 모셔놓고 下山길에 들어섰다. 上峰에서 地圖를 펴놓고 자로 재었더니 馬川面 七仙洞으로 가는데 上峰에서 西北方面으로 가다가 150m 地點에 左로 下山길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길로 내려가면 馬川을 거쳐 引月,咸陽西上으로 간다고 했다. 서상에는 서군의 애인이 있어 그 집에 가면 푹 쉬어갈 수 있다고 했다. 목표는 함양서상이다.
가다가 보니 西南方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것 같았다. 金君이 그 길이 150m 地點이라 우겼다. 徐君과 나는 아직 멀었다고 했다. 그러나 金君이 한 번 내려가 보고 오겠다고 하고서 그 길을 따라 내려가더니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不吉한 豫感이 들어 金君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가 길이 있으니 내려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둘이서 구르다시피 하 여 金君이 있는 곳까지 왔다. 金君은 나와 徐君을 쳐다보고 길이 더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길이 있다고 했느냐니까 다시 올라갈 수가 없어 거짓말을 했다고 하며 너희는 다시 올라갈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다. 智異山 頂上 附近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지금 다시 올라갈 기운도 없다. 原點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原則인데도 말이다. 住持스님 말씀이 適中한 것이다. 가만히 앉아 궁리를 하다보니 까마득히 멀리서 溪谷의 물소리가 들 려 온다. “길을 잃었으면 물소리를 따라라” 가 생각났다. 멋적어하는 金君을 위로하며 徐君의 同意를 끌어내어 물소리를 따르기로 하였다.
下山길은 完全한 정글 속이다. 인적未踏의 8月의 智異山숲은 茂盛하다 못해 앞길을 가로막았다. 세사람이 쓴 美軍需品으로 흘러나온 헬멧은 정글을 뚫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물이 폭포로 되어 내려갈 때는 그를 따를 수가 없어 등을 넘고넘어 둘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륙색의 偉力을 알았다. 미끄러져 뒤로 넘어질 때 全然 걱정되지 않았다. 륙색이 잘 받쳐 주었다. 그렇게 해서 미끄러져 내려가니 한결 재미도 있었다.
점심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이 길 나오기만 학수고대, 미끄러지면서 길을 재촉했다. 午後 3時경이나 되었을까. 낫으로 나뭇가지를 자른 흔적을 발견했다. 셋은 歡聲을 올렸다. 아, 살았다. 산에 온 나무꾼이 돌아갈 길을 표시하기 위 한 표식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이 近處에 사람이 있 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安心이 됐다. 셋이서 힘을 모아 큰소리로 사람을 찾았다. 산울림으로 되돌아 올 뿐 사람의 응답 은 없었다. 낫으로 잘라놓은 표식을 따라 한참 걸었다.
5時項이나 되었을까. 幕舍하나를 發見하고 그곳에 當到하니 4~ 5名의 사람들이 木器를 만들기 위해 잘라다 놓은 나무를 토막을 내고 속을 깎고 있었다. 어떻게 반가운지 염치 불구하고 그곳에서 좀 쉬고 가자고 간청을 했으나 여기는 쉴 곳이 못되어 自己들도 곧 마을로 내려갈 것이니 먼저 마을로 내려 가라고 하면서, 요 모퉁이를 돌면 마을이 나타난다고 일러 주었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그 幕舍를 떠났다. 아무리 걸어도 마을은 안 나타났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 다. 高山은 해만 지면 갑자기 깜깜해진다. 길이 보이지 않는 다. 셋이서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六感으로만 발을 떼어 놓는다. 뱀을 피하기 위해 호각을 셋이서 교대교대로 불어가며...
모랭이 하나를 돌아서니 멀리 불빛이 비쳤다. 아, 이제 살았구나. 그 순간 힘이 다 빠져 움직일 수도 없고 앞은 캄캄 해져 발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사람 살리라 고 외쳤더니 횃불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사정 애기를 하고 그의 山幕에 들어 旅裝을 풀었다. 그이는 火田民으로 혼자 와서 이곳에 감자 농사를 지었는데 멧돼지가 다 파 먹고 설농을 했다고 하면서 밤알 만한 감자를 삶아 저녁식사 라고 먹으라고 한다.
깨진 된장단지를 끌어내어 감자를 찍어 먹었다. 우리는 이미 食糧이 다 떨어진 다음이라 이 감자를 정말 고맙게 잘먹고 남은 된장을 그이에게 건네 주었더니 그이는 또 그럴 수 없이 고마워한다. 거기에 살면서 간(鹽)이 떨어진지 이미 오래라고 한다.
아, 이런 삶도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나무는 풍부하여 따끈따끈 방을 데워 한증하는 것처럼 몸을 푸니 이 튿날 아침이 거뜬하였다. 그 아침에 그집 主人장이 통사정하기를 끼니꺼리가 없으니 未安하지만 마을로 내려가 달라는 것이다.
잘 쉬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七仙洞 里長댁 을 찾았다. 里長의 姓名은 지금 잊어버렸지만 그곳에서 세사 람이 문전걸식을 하고 人事를 땡겼는데 알고 보니 晋州 七岩동 金剛農園에 智異山의 나무를 캐어 園藝木으로 供給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晋州에 오시는 걸음이 있어 찾아주시면 은혜를 갚겠다고 人事하고 그 집을 나왔다. 모처럼 뜬 햇볕아래 七仙洞의 溪谷에서 목욕하고 빨래하고 뜨거운 바위에 빨래를 말려 입고 咸陽西上으로 向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큰길에 들어서 500m나 왔을까. 길을 가던 健壯한 壯年 두 사람이 단장을 짚고 가다가 短杖을 치켜들며 손들라고 한다. 그 모양이 하도 우스워 웃으면서 손을 들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自己들은 警察인데 調査할 것이 있으니 支署까지 가잔다. 지금 우리는 西上까지 가야 하는데 점심도 안먹었으니 배도 고프고 해서 支署까지 가서 조사받을 氣力도 없고 時間도 없으니 조사할 것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하고 얼른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은 안된다고 하고 기어이 支署로 가잔다. 理由는 그 當時에 智異山에 左翼分子가 出沒한다는 情報가 있는데 當身들의 행색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支署로 갔다. 륙색을 끌러 짐을 다 내놓으니 의심받기 좋게 되어 있었다. 도끼, 톱, 냄비, 덜마른 빨래, 신발하며 땀에 젖고 때묻은 헬멧 등 어디로 나 山사람 그대로였을 것이다. 집을 떠난 지 벌써 50째 못 먹고 거지 行脚까지 하고 왔으니 그렇게 보였을 수밖에....
徐君 호주머니에서 붉은 軍票가 나왔다. 그 사람들은 興奮을 하면서 다그쳤다. 어디서 났느냐고.... 北에서 온 晋州地檢 朴檢事의 아들이 친군데 記念으로 주었다고 하니 晋州에 照會하고서는 그때부터 待遇가 달라졌다. 金君이 배고프다고 했더니 울면 곱빼기를 세그릇 시켜다가 먹으라고 한다. 西上까지 갈텐데 引月까지 걸어가려니 여기서 時間을 다 뺏겨 늦어질 것 같다고 하면서, 引月 정거장까지만 車를 좀 태워달라고 하자 지나가는 버스로 引月까지 공짜로 태워줬다. 引月서 咸陽까지의 버스는 인월支署에서 주선해 주어 거기까지도 내를 공짜로 탔다. 먼저 支署에서 連絡이 된 것 같았다. 알뜰한 無錢旅行을 한 셈이다. 民主警察은 民衆의 公僕이라더 니, 지금도 感謝하고 있다. 身世갚을 길 없어 안타까울뿐....
고집을 피우다 當한 고생, 當然하지만 山을 우습게 본 방자함이 根因이었으니 그 以後부터 셋은 산에 대한 畏敬心이 잘 심어졌으리라 생각되고 固執도 많이 사그러 들었으리라 생각된다. 5日間의 智異山 山行은 세 사람의 人生行路에 크게 敎訓을 주었을 것이며 세 사람의 友情을 뜨겁게 깊게 두텁게 해, 오늘날까지 나의 기둥이 되었으니 젊어서는 苦生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다시는 못해볼 情다왔던 智異山行을 아련한 追憶속에서 다시 그려보며 친구의 健在를 빈다.
4학년때 (1946. 2) 왼쪽에서 김병태 장재훈 서병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