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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성였던 갯가
- 2010년 3월, 가락문학 공부방 연수자료 -
주 오 돈
다음 내용은 지난해 여름 이후 저가 적어나가는 글 ‘둘레길 여정’에서 일부를 가려 뽑았습니다. 호수와 계곡, 강과 바다의 갯가 모습을 스케치했습니다. 발길 닿은 곳마다 우리 산하는 정말 아름답습디다. 갯가 풍경을 본 대로 느낀 대로 그려내기엔 저의 감성이 무디고 필치가 둔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길섶에 맥문동 꽃이 연보라로 피었다. 내가 용추계곡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는 물봉선은 한창 잎줄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물봉선은 봉선화 사촌쯤 되는 야생화로 응달진 물가에 잘 자란다. 계곡 바닥에도 무성이 자라던 물봉선이었다. 그런데 올여름 큰물이 져서 바닥을 할퀴고 가버려 개울 가장자리 물봉선은 볼 수 없어 아쉽다. 그래도 한 달쯤 지나면 연분홍 물봉선 꽃이 가득 피어날 골짝이다.
나는 우곡사 갈림길을 앞둔 용추7교 부근 개울가로 내려갔다. 올여름 비는 잦았고 사람이 적게 찾은 골이라 물이 아주 맑았다. 나는 모자와 등산조끼를 벗고 등산화와 양말도 벗었다. 바지는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거울처럼 아른아른한 시냇물에 손을 담갔더니 아주 차가웠다. 평평한 바위에 퍼질러 앉아 발목까지 담갔다. 바로 곁에 산성으로 오르내리는 길이 있어도 오가는 사람은 적었다. <귀가 즐거웠던 날> 09.08.04
석리 고가는 김정일한테는 처갓집이요, 그의 아들 정남한테는 외갓집이다. 내가 찾았을 때는 복원공사 중으로 사전 약속 되지 않은 방문은 허락되지 않았다. 고색창연하지는 않아도 근대 한옥의 발전사를 알 수 있는 문화재급이었다. 안채, 사랑채, 곳간, 대문채 등이 부농 주택의 실용적 요소와 개화기 외래 건축이 절충된 양식이었다. 나는 울 밖에 서성이다 화왕산 능선에 눈길을 멈추었다.
이후 나는 우포늪 방면으로 계속 걸었다. 신당마을을 앞두고 길섶에 자라는 비름을 발견했다. 이럴 땐 그냥 스칠 수 없는지라 나는 배낭에 비날 봉지를 꺼내 보드랍고 깨끗한 순을 따 모았다. 아마 저녁이나 아침 밥상에 맛난 비름나물이 오르지 싶다. 사람들은 우포가 한 개의 광활한 늪인 줄 아나 그렇지 않다. 우포 말고도 목포와 사지포에다 쪽지벌까지 세 개 더 있어 탐방로도 각기 다르다. <창녕 석리> 09.08.08
나는 운전을 못해 이런 모임이면 곁에 있는 친구의 신세를 입는다. 창원에 사는 친구가 운전하는 차로 두 집 부부가 함께 다닌 지 오래다. 말복이 지난 광복절이었다. 올여름은 장마가 길어 서늘하게 보낸다싶었는데 막바지 늦더위가 왔다. 전국 곳곳 폭염주의보가 내리고 우리 지역 더위도 만만찮았다. 마침 피서지 한번 다녀오지 못한 우리에게 바닷가 걸음이 더위를 식히는 길이었다.
풍광이 아름다운 바다정원에 여장을 풀었다. 각처에서 온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리 밑 자연산 횟집에서 감성돔과 도다리회로 잔을 주고받았다. 숙소 뜰로 옮겨 숯불에 전어를 구워 밤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튿날 아침은 서호시장에서 복국으로 속을 풀고 활어와 건어물 가게를 둘러보았다. 미륵산 케이블카는 너무 붐벼 타지 못하고 겨울은 팔공산자락에서 보자면서 헤어졌다. <잘 지내게> 09.08.16
우리는 간간이 차창 밖 바다를 스쳐보면서 통영 미륵산 아래로 갔다. 하루 여정 중 아이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을 볼거리였다. 나는 닷새 전 대학 동기부부와 통영 왔다가 너무 복잡해 타 보지 못한 케이블카였다. 평일이라선지 잠시 기다리니 우리 차례였다. 나는 케이블카 안에서 통영이 친정인 교사보다 더 아는 체 했다. 한산도를 가리켰고 미래사에 얽힌 효봉선사 얘기도 했다.
십여 분 만에 팔부 능선에 닿았다. 그곳에서 정상을 올랐더니 다도해는 해무가 끼어 훤하진 않았지만 바람이 시원했다. 해풍에 밀려온 갯냄새가 산정까지 비쳐왔다. 지난겨울 용화사에서 미래사 거쳐 박경리 선생 묘소까지 걸어갔던 동선을 굽어보았다. 산을 오르길 싫어하는 십대들인데 케이블카로 상당부분을 올라서인지 군소리 없이 정상에 모두 서서 다도해를 조망하고 하산했다. <갯가 기행> 09.08.20
우리보다 앞서간 사람들은 아가씨를 돌다리 위 세워 놓고 여러 방향에서 카메라 꼭지를 눌러댔다. 당찬 모델은 우리가 구경꾼이 되어 바라보아도 자신감 넘치는 여러 동작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둑을 내려서서 모델이 선 돌다리를 건너갔다. 판신마을 쪽 비포장 둑길이 더 좋았다. 이삭을 내민 갈대가 서걱거렸다. 바랭이와 환삼덩굴이 무성했다. 앙증맞은 도꼬마리는 열매를 달고 있었다.
가을에 접어든 주남저수지는 아주 평온하고 넉넉했다. 연잎 사이로 중대백로 부리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둑에는 산에서나 보는 거친 억새가 이삭이 패어 은물결을 이루었다. 연령대가 다른 우리는 의자에 마주앉아 한담을 나누었다.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풍광은 그림 같았다. 주남저수지에서 백월산으로 이어진 화양고개에 해가 넘고 있었다. 내 마음이 호수처럼 고요했으면 했다. <가을 주남> 09.09.19
가깝고 먼 산들은 운무에 가렸다. 골마다 올망졸망한 마을은 엷은 안개에 가려 흐릿했다. 강 언저리엔 달맞이꽃이 참깨 같은 열매를 닥지닥지 달고 있었다. 환삼덩굴이나 도꼬마리도 뒤질세라 무성했다. 샛강 근처엔 갯버들이 무더기무더기 숲을 이루었다. 강 건너 학포 쪽엔 모래를 채취하는 장비들이 보였다. 멀리감치 강바닥 모래톱엔 북방 오리 여남은 마리가 선발대로 내려온 모양이었다.
둔치에서 서성이다 강둑으로 올라섰다. 4대강 정비를 위해선지 푯대로 세운 깃발들이 보였다. 나는 배수장을 따라 난 수로 곁 길 따라 걸었다. 감나무 밭엔 까치 떼가 앉아 종알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살이 오른 통통한 단감 몇 개는 까치한테 작살났지 싶었다. 호박잎 무성한 언덕엔 누렁호박 곁에 애호박이 달렸다. 누렁호박 애호박 형제가 절간에서 상좌승을 모시는 동자승 같아 보였다. <들녘 들길> 09.09.27
옛날엔 산맥이 가로 놓이거나 강이 흘러가는 지점을 경계로 행정구역이 정해졌다. 조선시대 팔도의 경계도 이와 같다. 나라와 나라 사이 국경선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 경우가 많다. 좁게는 고을이나 마을의 경계도 산줄기나 시냇물이 경계선이 된다. 이처럼 산과 강은 예전부터 교통과 통신의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이런 장애물로 산 너머나 강 건너 마을과는 사람간의 소통도 자연히 드물었다.
지역마다 있는 고유한 방언은 고립과 단절에서 오는 독특한 언어유산이다. 현대사회에선 교통소통이 원활하고 산간이나 도서벽지까지 텔레비전 시청이 가능하다. 표준어 방송과 교육의 영향으로 예전만큼 방언의 차가 뚜렷하진 않다. 그래도 사람마다 음색이 다르듯이 지역마다 말씨도 고유한 색깔이 있기 마련이다. 같은 경남권이라도 동부와 서부의 억양이 다르다. 해안지역도 마찬가지다. <산 너머 강 건너> 09.10.18
김해공항에서 창원행 리무진을 타볼까 생각하다 마음 접었다. 자주 올 걸음이 아닌지라 나온 김에 명지포구 을숙도까지 걷기로 작정했다. 남해고속도로 지선이 사상으로 건너는 다리를 지났다. 구청에서 조성한 맥도생태공원이 나왔다. 야생화전시원이 잘 꾸며져 있었다. 참나리 비비추 할미꽃 둥글레 부처꽃 원추리 벌개미취 등 익숙한 이름 속에 제철을 맞은 노란 감국이 무더기로 피어났다.
둑에는 이은상의 ‘낙동강’, 배재황의 ‘오막살이’ 시비가 있었다. 생태공원부터 내가 강가로 나와 보고 싶었던 서걱거리는 갈대가 수북했다. 갈대 사이 갯버들이 녹색가지를 드리워 있었다. 갈꽃은 회색 이삭이 나와 너울거렸다. 창원 주남저수지에서도 확인한 바 있지만 갈대 사이에 물억새가 함께 자랐다. 물억새꽃은 은색으로 휘날렸다. 명지포구 을숙도에 닿으니 밤하늘 초엿새 조각달이 걸렸다. <갈꽃 구경> 09.10.23
수산대교 근처는 강폭이 넓어 광활했다. 아래쪽은 경작지였다만 위쪽은 원시 생태계 그대로였다. 태백에서 발원하고 지리에서 샘을 보탠 강물은 유유히 흘러갔다. 옛 수산대교부터 넓디넓은 둔치는 군락을 이룬 물억새가 장관이었다. 인간사에도 그렇듯 자연사에도 때가 있게 마련이었다. 봄날 아지랑이와 여름 물안개도 피어나는 강변의 사계지만 나는 시월이 가장 아름다운 때라 생각한다.
대산들녘과 맞물린 강변이 일동마을이다. 마을 뒤 둑 너머 광활한 둔치는 물억새 평원이었다. 둑길을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은빛 물억새는 바람에 넘실거렸다. 강 건너 바위 벼랑은 곡강마을이었다. 사행천 물굽이가 밀양 쪽에서 크게 휘어 흐르는 지점이 곡강이다. 예전 곡강은 피수대로 홍수가 나면 대피소였다. 이제는 강물을 굽어보고 일출을 바라보기 좋은 전원택지로 각광받는다. <둔치 물억새> 09.10.25
마을로 드나드는 농로엔 사람이나 차량이 없었다. 길 아래 강 가장자리엔 갯버들이 무성했다. 성근 빗방울이 굵어져 우산을 받쳐 들고 걸었다. 조금 더 오르니 강폭이 넓어져 퇴적물이 쌓인 둔치엔 채소를 가꾸었다. 낯선 강변 풍경이라 구석구석 눈길을 보내었다. 운무가 살짝 가린 강 건너는 창녕 도천면 정도 되지 싶었다. 우강리 배수장 근처는 곽재우를 기린 망우정(忘憂亭)이 있었다.
말포교를 건너니 비가 그쳐 우산을 접었다. 덕남 배수장을 지나다가 도시락을 먹었다. 강아지풀과 달맞이꽃이 시든 둑에는 쑥부쟁이와 감국 꽃이 남아 있었다. 연보라 쑥부쟁이와 노란 감국 송이가 금세 내린 비에 생기를 띠었다. 덕남마을을 돌아가니 낙동강 샛강에 놓인 소랑교가 나왔다. 지천은 S자로 휘감아 돌다 본류로 흘러들었다. 넓디넓은 강 둔치엔 김장용 무배추가 그득 자랐다. <종점은 자시 기점> 09.11.08
늦가을인지라 호수 가장자리 심어 가꾼 수생식물은 성장을 멈추었다. 무성한 부들이 있었고 노랑꽃창포도 수북했다. 숲을 이룬 갈대가 꽃을 피워 서걱거리는 데도 있었다. 꽃잎은 보이진 않았다만 노랑어리연도 동동 떠 있었다. 촐랑대던 분수는 뿜어져 나오지 않아 좋았다. 내한테는 소음이었던 음악도 들리지 않아 조용했다. 낮이나 저녁 산책도 운치 있겠지만 나한테는 새벽이 아늑했다.
호수를 두 바퀴째 돌고나서 집으로 향할 때였다. 수면 위 무언가 물살을 가르고 움직이는 물체가 보였다. 호수 한복판에 나무로 짜서 만든 오리집이 있었다. 철새로 날아와 서식하는 오리가 아니었다. 새벽어스름에 잠을 일찍 깬 오리 한 쌍이 헤엄쳐 가고 있었다. 덩치가 좀 크고 흰색 녀석은 수컷인 모양이고, 좀 작고 갈색인 녀석은 암컷인 모양이었다. 녀석들 새벽부터 참 부지런한지고. <녀석들 부지런한지고> 09.11.11
나는 송촌마을과 마사마을을 지났다. 독산마을에서 둑을 넘어 세 갈래 물길로 나가 보았다. 태백산 황지에서 시작해 지리산 샘을 보탠 낙동강 본류였다. 운문사 골짝 물을 담은 밀양강과 Y자로 모여져 한 갈래가 되었다. 한강의 두물머리 같은 곳이 삼랑진이었다. 건너편 벼랑 뒷기미나루는 낙동강 파수꾼 김정한님의 글감이 되기도 했다. 나는 강 가장자리로 내려서 한동안 거닐며 서성였다.
큰 줄기 강물은 바람에 일렁거렸다. 샛강엔 갈색 개구리밥과 어리연이 동동 떠 있었다. 몸을 숨긴 청둥오리와 쇠기러기가 간식거리를 찾고 있었다. 흐름이 느려진 강물은 머지않아 을숙도 다대포로 빠져나갈 것이다. 하구로 빠져 나가면서 고요했던 강물은 거친 파도에 휩쓸려 요동치지 싶다. 둑으로 올라 옛길 삼랑진철교를 걸어 건넜다. 강 건너는 폐역이 된 간이역 낙동강역이 나왔다. <세 갈레 물길> 09.11.14
언덕 솔숲을 지나 찻길로 올라서면 롯데아파트 앞쪽이었다. 용지호수와 공원을 내려다보기 알맞은 곳이다. 비록 밤이지만 네온과 가로등으로 운치 있는 경관이었다. 밤의 호수가 불빛에 아른아른했다. 나는 롯데아파트 보도 따라 걸었다. 곱게 물든 벚나무단풍잎은 모두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했다. 비탈에는 무궁화와 배롱나무는 드러낸 야윈 가지 끝에 까칠한 열매꼭지가 달려 있었다.
나는 보도를 걷다가 어둠속 언덕 아래 눈길을 멈추었다. 주변은 모두 활엽나목이었는데 청청한 상록수 예닐곱 그루를 보았다. 나뭇잎만 싱싱한 게 아니라 선홍색 꽃망울도 송이송이 달려 있었다. 나는 가드레일을 넘지 못하고 목만 빼어 살폈다. 애기동백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지압보도 가는 좌우 산책로 수십 그루 애기동백도 마찬가지였다. 지심도나 선운사까지 갈 일 없지 싶다. <애기동백꽃> 09.11.19
장천부두에서 돌아 행암 해안으로 갔다. 임자를 만나지 못한 낚싯배 여러 척이 묶여 있었다. 방파제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손바닥 크기 노래미를 낚아 올렸다. 더러 어린 도다리도 잡힌다고 했지만 나는 낚시에 관심이 없었다. 호수 같은 진해 앞바다는 겨울바람으로 파도가 제법 일렁거렸다. 해안선과 섬들이 이방인에겐 낯선 풍광이었다.
행암 방파제에서 진해를 에워싼 산등선을 쳐다보았다. 장복산 안민고개 불모산 시루봉 만장대 천자봉이 도시를 병풍처럼 둘렀다. 추운 날씨에 산에 오르질 않고 갯가로 나오길 잘 했다 싶었다. 나는 행암에서 수치로 가는 고개에서 학개길로 들어섰다. 학개는 합계라고도 했다. 차량도 인적도 드문 아스팔트 포장길이었다. 산모롱이 돌아 내려서니 자연산 횟집 서너 채 있는 학개포구였다. <내 마음의 풍수> 09.12.20
나는 탐조대에 올라 망원경 렌즈를 가까이 당겨보았다. 큰고니는 저수지안 빙판에 모여 있었다. 쇠기러기와 큰기러기는 둑 밖 논바닥에서 보리뿌리를 파먹는 모양이었다. 이어 배수장 지나 둑을 계속 걸었다. 저수지 가장자리 갯버들은 가지가 앙상했다. 시든 물억새와 갈대는 바람에 흔들렸다. 용산마을에 배수장이 한 곳 더 있었고 폐교된 초등학교는 주남환경스쿨로 꾸며 놓았다.
용산마을에서 현지인 한 분을 만났다. 그는 엊그제까지 새가 많았는데 갑자기 줄었다면서 아쉬워했다. 나는 저수지가 얼어 샛강이나 논밭으로 나들이 갔을 거라 했다. 나는 현지인의 길안내로 저수지를 한 바퀴 방글 돌았다. 고양마을 앞둔 상수도관 근처를 지나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까이 큰고니와 쇠기러기가 떼 지어 놀았다. 털이 함초롬히 젖은 수달이 내 앞으로 헤엄쳐왔다. <아, 수달>10.01.03
예동 해동을 지나니 오산에도 폐교가 있었다. 종남산에서 흘러온 샛강은 얼지 않아 물닭들이 부지런히 자맥질했다. 강 건너는 한림정 배수장이었다. S자로 휘감아 흘러온 낙동강 본류가 밀양강과 만나면서 Y자가 되었다. 두물머리는 결빙 되지 않아 쇠오리들이 많이 보였다. 강 언저리는 갯버들이 무성했고 웃자란 밀이 파릇파릇했다. 뒷기미를 바라보는 둑에 앉아 도시락을 비웠다.
발길 닿는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산하가 있겠냐마는 그 중에도 특별한 데였다. 강 건너 뒷기미나 생림에서 바라보았던 때와는 경관이 사뭇 달랐다. 이제는 모래보다 갈대숲과 갯버들 무성한 밀양강 둑을 거슬러 걸었다. 들판 끝 산 아래는 오산에 이어 독산 외산 인산으로 산자 돌림 마을 이름이었다. 평촌 앞들 지나 대흥동이고 예림 양림간이었다. 밀양역 앞에서 지기 둘을 만났다. <두물머리> 10.01.10
샛강엔 창녕 학포와 밀양 반월 사이 반학교가 놓여 있었다. 나는 1022번 지방도를 두고도 둑길로 걸었다. 반월마을은 안개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강심에도 안개가 자욱해 내가 건너왔던 본포는 어디가 어디인지 알 길 없었다. 새로 쌓은 제방엔 묵은 물억새와 갈대가 무성했다. 기름진 땅에서 큰 키로 자란 강아지풀도 마찬가지였다. 둔치는 4대강 살리기 사업 중장비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계속 걸어 반월마을 들머리 배수장에 닿았다. 인적 없는 정자에서 도시락을 비웠다. 검세마을까지 찻길을 두고도 둑길로 걸었다. 아트막한 고개를 넘었더니 벼랑 끝 자연마을이었다. 강물이 휘감아 도는 아늑한 곡강이었다. 골목 끝 문패 성함에 지인이 있었다만 발자국소리를 죽였다. 자연의 품은 인간을 낳았고, 인간의 품은 문화를 낳았다. 강물이 흘러오고 세월은 흘러가면서. <강 이야기> 10.01.20
통영 친구는 사정이 있어 오질 못하고 일곱 친구가 만났다. 이제는 아이들이 다 자라 함께 온 집은 없었다. 대구 친구는 무주스키장에 가족들 남겨 놓고 혼자 왔다. 울산 친구는 집사람이 조카를 돌봐야할 처지라 혼자였다. 수련원에 모인 회원 부부는 모두 열두 명이었다. 수련원 시설은 아주 좋았다. 방학이라 학생 수련은 없었다. 대신 콘도는 교직원들 휴양시설로 활용 되었다.
숙소 창문 밖으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였다. 나는 친구와 백사장에 나가보았다. 파도에 밀려온 모래가 언덕을 이루고 해송은 방풍림이었다. 친구와 나는 수평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친구들은 안부를 나누고 간단한 회무 보고가 있었다. 칠포해수욕장에서 가까운 오도마을 횟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은 맛깔스럽고 창밖 밤바다 풍광이 참 아름다웠다. <나들이> 10.01.24
순조 때 천주교박해로 진해로 유배 온 김려는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라는 어류 관찰일지를 남겼다. 여기서 우해는 진해의 다른 이름이었다. 김려의 우해이어보는 현산어보보다 11년 앞서 나온 서책이다. 김려는 한창 나이 친구의 옥사에 연루되어 북녘 끝으로 유배 갔다가 다시 남쪽 바닷가로 옮겨 모두 합쳐 십 년간 귀양 살았다. 진해 땅 소금 굽는 집에 세 들어 살면서 기록을 남겼다.
진해에 처음 왔을 때는 바닷가 풍토에 적응 못해 고생했으나 차츰 익숙해졌다. 드나든 문간에다 ‘사유(思牖)’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단다. 북녘 유배지 부령 땅에서 알게 된 연희라는 아낙을 잊지 못해 생각하는 창문이라 붙였다. 그는 주인집 아들 녀석과 함께 배를 타고 나가 어류 생태를 관찰했다. 그는 어류의 명칭, 분포, 종류 뿐 아니라 잡는 방법, 조리방법, 유통과정까지 기록했다. <우해이어보> 10.01.30
대동아전쟁 때 일본군이 주둔해 포진지와 탄약고를 설치했던 지심도였다. 지금은 국방부가 관리하는 섬이었다. 작은 섬에 열 세가구가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관광객과 낚시꾼에게 민박을 제공했다. 한 민박집 평상에 자가발전소 건설 인부들이 식사를 끝내고 쉬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1박2일 출연진이 묶었다 떠나면서 남긴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만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섬 전체가 동백이 숲을 이룬 식물원이었다. 동백이 피는 절정은 삼월이지만 나는 호젓할 숲길을 걷고 싶어 일찍 찾았다. 과일로 치면 맏물에 해당하는 동백꽃이 막 피려는 참이었다. 산책길엔 먼저 피었다 떨어진 꽃송이도 있었다. 간간이 동박새가 날고 직박구리가 지저귀었다. 섬에는 비자나무, 유자나무, 후박나무, 종려나무, 팔손이나무도 흔하게 보였다. 털머위, 도깨비고비도 찾았다. <동백섬> 10.02.02
나는 노인에게 틈새를 비집어 마을에 돌다리가 어디 있는가 물었다. 마을 바깥 군사시설지역과 맞물린 곳에 작은 섬이 있단다. 빤히 보인 섬으로 건너는 데 돌다리가 놓였다고 들었단다. 지금은 그 섬이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석교는 일제 강점기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떠나야했던 원주민이 근처에 옮겨 정착한 마을인 듯했다. 예전의 석교는 화석 같은 마을이었다.
나는 석교마을을 똘똘개라 부른다고 들은 바 있기에 노인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노인은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말했다. 뭍과 연결된 작은 섬 사이 바다는 얕았고 바닥에 자갈돌이 깔려 있었다고 전해 온단다. 바닷물이 들고 날 때라던가,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지면 또르르 돌이 굴렀다고 했다. 바다 밑의 돌이 물살에 돌돌돌 구르는 갯가였기에 똘똘개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했다. <똘똘개> 10.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