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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순례길 1.
2009년 11월 20일(금)부터 26일(목)까지
자유로운 도보여행에서 늘 함께 길을 걷는 친구 아네스님과
아름다운 순례길을 다녀왔습니다.
길에서 아름다운 친구와의 뜻깊은 우정에 감사하며,
순례자 사무실에서 제공하는 많은 따뜻함에 감동받아
더 묽어지고 맑아진 마음으로 돌아올 힘을 얻은 감사를 담아 보기로 합니다.
이런 후기를 처음 올려보게 돼, 사진도 글도 부족하기 짝이 없겠지만
지난 우리들의 자취를 시간 허락되는 대로 정리해 올려보겠습니다.
9월부터 평화신문에 이창훈 기자가
아름다운 순례길을 걷고 쓴 기사를 보고
어느 날은
살아가는 자리가 힘들고 어려움에 당면한 내 삶의 자리를 다독이며 새로워지기 위해,
누구를 용서하고 이해하기보다는
내안의 삶의 자리, 마음의 자리들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래, 가톨릭 기독교 불교 원불교 4개종단이 함께 선포한
전주-완주-익산인근
180km를 연결한 ‘아름다운 순례길’을 나서보기로 했다.
20일 저녁, 전주에 도착해
순례사무실에서 예약해준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21일 토요일 아침 8시 30분에 순례자 사무실로 갔다.
출발하는 오늘의 순례일정이 너무 늦어질까 봐
박동진 차장님께서 8시 30분에 미리 나와 따뜻이 맞아주시며
순례자여권과 묵상집, 스틱을 주신다.
순례길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순례자 사무실과 전화소통하여
필요한 지원도, 혹시나 헷갈릴 수 있는 길안내도 다시 확인하자고 하신다.
드디어 아네스님과 전동성당을 향해 첫걸음을 떼어
한옥마을과 연결된 골목이 끝나는 즈음 전동성당에 도착했다.
하늘에 닿을 듯 웅장해 보이지만 둥근 곡선미가 아름다운 전동성당
전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33세)과 권상연(야고보,41세)이 1791년 신해박해 때
처형당한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성당으로
순교지를 보존하고 있는 신앙의 요람이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면서 전주에도 선교사가 들어오게 되었다.
1891년에는 전주성당 (현재의 전동성당) 주임인 보두네 신부가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민가를 사들여 임시 본당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신자가 거의 없었으나
갑오농민전쟁 등 여러 가지 사건으로 신자가 급증하여
기존의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후 1908년 명동성당의 내부를 건축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성당이 착공되어
1914년에 비로소 외관 공사가 끝났으며,
1931년에 완공하기까지 23년이 걸린 대역사였다.
벽돌은 중국인 인부 100여 명이 직접 구워서 썼고,
주춧돌은 1909년 7월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처형지인 풍남문 남문 밖
순교자들의 피흘린 성벽을 헐어 낸 돌들로 주춧돌을 썼다고 한다.
전동성당 안에 들어가 순교자의 삶을 묵상하시는 아네스님
전동성당에서 나와 치명자산을 향해 간다 .
한벽루를 향해 걷는 전주천변에는 갈대숲과 물억새와 갯버들, 야생화가 만개해 있다.
이 순례길들이 앞으로 얼마나 아름다울 것이라는 예감을 해본다.
치명자산이라고 부르는 승암산 기슭의 누각인 한벽당을 가는 중간에
전주 향교가 있다.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 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으로 현재 국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전주향교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세상 어딘가에는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따뜻하고 넉넉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지붕이 필요하다.
그 지붕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가짐이 기왓장처럼 차곡차곡 쌓이고 다져져서
빈틈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 “인의예지로 인간의 심성을 세우고 하늘을 덮어라.”
향교를 나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버리고 나면 이렇듯 가벼운 것을....
향교를 나서 몇걸음 걸으니 한벽당에 다다른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최담이 그의 별장으로 지은 누각이다.
슬치에서 시작된 계곡의 물이
크고 작은 많은 골짜기의 물과 합류하면서 여러 고을 옆을 거쳐 한벽당 아래로 흘러온다.
여기서 물줄기는 계곡의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면서
거듭 굽이틀어 남천으로 흘러간다.
옛 문인들은 이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壁玉寒流) 같다고 읊으며,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한벽당은 바위에 부딪쳐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한벽당을 출발해 갈대 천변을 따라 걷다보니 치명자산 성지이다.
치명자산 성지는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의 가족들을 합장한 묘소가 있는 곳으로
동정 부부 이순이 루갈다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루갈다 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주 시내를 굽어보는 중바위는 전주 8경 중 손꼽히는 기린봉 능선에 위치해
호남의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치명자산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과 그의 부인,
두 아들 유문석 ·유중성, 제수 이육희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에 가매장됐다가
전동 본당 초대 신부인 보두네 신부를 비롯한 신자들이 1914년에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1993년 이 묘소를 개장,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유항검은 1784년 권일신의 집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가성직 제도에 의해 신부의 권한을 위임받고 고향인 전주 초남리에 내려와
호남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유항검은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나며 독성죄가 됨을 깨닫고
이를 시정키 위해 북경 주교에게 문의 편지를 내고,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전라도 지방에서 제일 먼저 체포돼 서울로 압송당한 유항검은
대역 부도 죄로 능지 처참형을 받고 46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또한 유항검의 부인 신희와 동정 부부로 유명한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둘째아들 유문석과 동생 유관검이 순교했다.
이렇게 해서 유항검 일가는 지상의 모든 삶을 영생의 세계로 옮겼고
이들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의 확신은 일가의 단종을 가져왔다.
조정은 이들의 흔적을 아예 없앨 요량으로
대역 죄인의 집을 헐고 집터를 깊게 파 연못을 만들어 버리는
파가 저택(破家猪宅)의 형을 내렸다.
전주 초남리에서 시작된 유항검 일가의 길고도 먼 여정은 이렇게 치명자산에서 마쳤고
그 길은 시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생명은 물론 가문의 단절까지도 감수하며 천주를 섬겼고, 그 흘린 피로
호남 천주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던
유항검 일가의 고결한 신앙을 구비진 능선을 따라 오르며 되새긴다.
경사가 만만찮다.
바삭거리는 낙엽 소리가 고요 속에서 순교자들의 노래를 들려주는 듯하다.
치명자산 성지에 뫼신 성직자묘지
성직자묘지 앞에 참배하고 나서 돌아보니 아네스님이 뵈이질 않는다.
내려갔거니 생각고 바쁘게 내려와 빠른 걸음을 디뎌보아도 만나지질 않는다.
가을하늘에는 뭉게구름이요, 가을 땅에는 갈대구름이 가득.....
순례 길동무이기에 꼭 옆에 있지 않더라도 각자 자기의 지향담아 기도하며 자기길을 간다.
인근 어딘가 잘 걷고 있겠지 생각하며
순례사무실에서 준 묵상집을 꺼내 읽으며 걷는다.
나서며....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입니다.”
버리며.... “사막에서는 흐르는 강물처럼 살지말고,
어딘가에 고여있는 작은 우물처럼 살아야 합니다“
안으며....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청하며.... “나로 인하여 길을 잃은 사람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혼자 산자락을 끼고 전주천을 따르다보니 길은 잠시 들판으로 이어졌다
다시 월암천변을 향하다 이제는 월암마을을 지나 산길을 향한다.
어느만큼 가다 표지기가 보이잖아 쉬고 있는데 아네스님이 나타난다.
치명자산 성지에서,
아네스님이 “성직자묘지로 올라갈게, 어서 올라와~~” 했다는데 못들은 나는 내려왔다.
아네스님은 순례자묘지와 치명자성당을 올라갔는데
치명자성당이 특히 아름다웠다고 함께 보지 못해 아쉽다 한다.
숲속 오솔길을 내려와 이어진 호반 산책길은 더없이 다정하고 아름답다.
'O.K.CC'를 따라가는 길에 고가도로를 지나는데 벌써 정오가 넘어가고,
차들이 이따금씩은 쌩쌩 빠르게 다니는 도로여서
우리는 조심스러이 차를 살펴가며 걷는다.
월암마을을 지난 숲속에서 아네스님을 만났을 때,
간식조금 먹은 것 밖에 없어 배도 고파오는데 식당은 보이지 않고,
더러 만나는 버스 정류장엔 가까이 온천이 있는지 화심온천 광고문만 씌여있다.
찻길을 따라서 하념없이 가다 2시 30분 경에야 완주군 소양면의 화심삼거리에 도착하여
순두부마을에서 점심으로 순두부를 먹는다.
김치가 어찌나 맛있는지 두부까지 한모시켜 배가 볼록해 지도록 먹으며
남은거리를 배불러 어찌 걸을까를 염려한다.
화심에서 3km쯤 가 체육고등학교 인근 741번 도로를 따라가니 송광사 이정표가 보인다.
송광사 진입로 2km 정도 도로양쪽으로 벚꽃터널을 지나며
4월초순경 만개해 흐들어지게 핀 벚꽃을 상상하며 걷다보니 지루한지도, 힘든지도 모르게
5시 30분에 송광사에 도착했다.
송광사 매점안의 사무실에 순례왔다고 하니
순례문화연구소부터 예약을 받았다며,
어서 공양 먹으라신다.
근데 우리는 화심에서 허겁지겁 늦점심을 많이 먹으탓에 저녁공양은 사양하고,
내일 아침 6시 아침공양을 예약했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뜨끈뜨끈 하고 온수도 잘나오기에
방안의 욕실에서 씻고 옷을 빨아 널어놓았다.
처음 나서보는 아름다운 순례길에서 맞이하는 상황들이
이렇게까지 좋을 줄을 몰랐다.
빨래가 어려울까 봐 겨울용으로 준비한 옷가지들과 며칠간 간식꺼리들, 샤워용품들로
배낭을 9-10kg 메었던 힘겨웠던 우리들의 어깨와 고단한 다리는
송광사에서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첫날의 휴식을 취했다.
첫댓글 또다시 보면서 언니의 잔잔한 글과 멋진 사진때문에 아름다운 순례길에 한걸음 다가섭니다~~*^^* 두분 걸음걸음마다 힘내시라 자유행님들의 기도가 늘 함께 했답니다~~^^
그 멋진 댓글들을 다 사라지게 한 장본인입니다.~~~ 저도 이길을 꼭 걸으려합니다.님 발자욱따라 가려 합니다.^^*
두번 읽게 되어서 더 큰 감동입니다. 여러분들 모두들 다시 댓글 달아 주세요~~~
댓글을 다시...다시 또 읽으니 좋네요...담에 기회가 되면 저도 걷고 싶은 길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에 녹아 있는 보아미님의 아름다운 마음과 지혜를 읽는 것도 행복한 일이였습니다. 언제든.. 함께 이길을 걷고 싶습니다. 소망 하나로 간직할께요.
너무나 담담히 쓰신 후기를 읽고나니 당장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데 어떻게 잠재우나 걱정되네요.
늦어도 내년 봄에는 떠나볼려고 합니다.
뷔엔 까미노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신 도움말 정말 감사합니다.
아날로그 세계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시는 영아이님의 대형사고 덕분에 다시 한번 찬찬히 음미합니다. 그저 함께 갈 수 있는 날(4월 9일-14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두 분께 깊은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내년 봄에 갈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주신 보아미님께 감사를~~~ *^^*
와우~ 후기도 사진도 멋지시네요~ 보아미님 덕분에 대리만족....잔잔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전주...제 담당구역인데ㅎㅎ 다녀가신걸 이제야 알았네요~미리 알았음 응원 갔을텐데.. 송광사 들어가는 길이나 아담한 절이 인상적이여서 저도 언제가 하룻밤 묵고 싶은곳이죠~~
언니 이제야 컴앞에 차분히 앉아봅니다 순례길 후기 시작부터 감동입니다`~저는 처음에 언니문자받고 여럿이서 함께 가시는줄알았어요 세상에 단둘이 대단한 언니들 ㅎㅎㅎㅎ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