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아, 우리 아부지 그만 죽었다!
만물이 생동하고 있구만------
부모님을 먼저 보낸 친구들은 이 마음 이해 할 수 있으려나
허전함과 슬픔을 남긴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 가셨다.
경대병원, 저승으로의 다리위에서도
뭐가 그리도 아까왔던지 평생 피와 땀으로 모으기만 했던
돈 한번 제대로 써보시지도 못하시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 같은 놈이 뭐하러 태어 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었지만,
이제야 조금은 느낌이 듭니다.
당신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후회할 일이 아니었다 라는 것을 ------
그리고 어려울 때마다 큰 힘이 되어준 친구들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아부지! 고맙고 사랑합니다.
친구들아! 정말 고맙다...
구미에서 Captain(서동헌)
,
1. 인 적 사 항
주 소 경북 구미시 지산동 86번지
성 명 서 용 교
2. 추 천 사 유
한이 서려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던 것들도 세월이 흐르고, 그 세월에 묻혀 사라져 감은 왜 이렇게도 허망함으로 남을까요?
배고팠던 시절 우리 민초들의 허기짐과 곤함이 절여서 흥얼흥얼 그들의 한으로 불려졌던 노래, 그래서 모두들 다시는 부르지 않아도 하나도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노래, 구미 발검들 들노래.
지금은 적지 않은 연세에 누구보다 이 노래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할 것 같던 사람, 그러나 이 노래에 미쳐, 이 노래의 원형을 찾고 보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고, 1999년 4월 이 노래가 龜尾人의 한을 담은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기까지 그리고 전수 발전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과, 2001년 5월 구미에서 거행된 도민체전 개회식 식전 행사에서 이 노래를 선창하고 많은 박수갈채를 받으므로 전자 산업도시의 명성과 함께 문화도시로의 이미지를 드높이는 등 그의 열성은 우리 구미시민의 자랑이요, 귀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에 자랑스런 구미사람으로 기꺼이 추천합니다.
3. 공 적 개 요
위 사람은 구미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까지 구미를 한번도 떠나 산 적이 없으며, 어린 시절에는 일제 치하에서, 청년기에는 6. 25 동족상잔의 총알 밭에서, 중년에는 보릿고개의 배고픔에 허덕이며 한 평생을 보내고 이제는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 가장 불행했던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세대의 한 사람입니다.
나라가 어려웠을 때는 목숨을 걸고 나서 싸웠고, 지역 발전을 위해 항상 앞장섰으며, 특히 우리의 고유문화에 남달리 애정을 갖고 영농 방법의 기계화 등으로 사라져가던 구미 발검들 들노래 10마당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1999년 4월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 27호로 지정 받기까지 열성을 다하였습니다.
지금도, 구미의 유일한 무형 문화재인 발검들 들노래를 후세까지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유래비 세우기, 매년 고유제 지내기, 각종 방송, 신문, 행사 등에 직접 출연하여 구미 발검들 들노래 자랑 및 후계자를 양성 교육하는 등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업적은 첨부 공적조서와 같습니다.
◎ 6. 25 사변에 참전하여 총상을 입고 명예 제대함… … 국가 유공자
들노래 보존회장 서용교는 만 21세 되던 해 6. 25사변이 발발하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같은 해 11월11일 입대하여 육군 제7사단 5연대 3대대 12중대 중화기 사수로서 목숨을 걸고 평양을 지나 서부전선 최전방인 덕천지방까지 진격하였음. 그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포위되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경북 풍기 지역까지 후퇴하게 되었으나,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동부전선을 따라 진격하던 중 강원도 인제지구 전투에서 오른손에 총탄을 맞고 묵호 육군병원으로 이송됨. 거기에서 응급치료 후 군 화물선으로 다시 부산으로 이송되어 제389부대에서 계속 치료를 받던 중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1951년 11월25일 육군하사로 명예제대를 하였습니다.
◎ 구미 발검들 들노래 보존 회장으로 추대됨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힘든 농사일과 함께 들판에서 간간이 불려지던 발검들 들노래가 80년대 접어들면서 영농 방법의 기계화와 다른 산업의 발달로 주민들의 생활이 다소 넉넉해지자, 그들로부터 들노래는 차츰 멀어져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발검들에서 농사일의 힘든 것을 잊기 위해 불렀던 들노래와 생의 일부를 함께 했던 사람들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많은 분들이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고, 연세 많은 몇 명만이 가물거리는 기억으로 되뇌일 뿐 거의 들노래 전수의 맥이 끊겨져가는 가운데 1992년 3월 5일 들노래 보존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고향 구미의 유일한 농요인 들노래를 먼 후세까지 전수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주민들을 깨우치고, 유래비를 마을 앞에 세울 것을 제안하여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 구미 발검들 들노래 유래비 건립
발검들 들노래의 맥을 잇기 위한 유래비 건립에 대한 주민들의 동의는 받았지만,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명감에 구미 문화원을 들락거리며 자료를 얻고, 민속학의 권위자인 효가대 권영철박사, 영남대 고 김택규박사, 안동대 성병희박사, 경북대 김경배교수 등을 일일이 찾아 자문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유래비 건립에 대한 계획이 구체화되자, 주민들도 건립 기금 모금에 자진 참여하여 주었고, 소식이 거의 끊긴 出鄕人들도 어떻게 알았던지 자기일 인양 동참하여 주었습니다.
김관용 구미 시장님께서도 들노래의 맥을 잇기 위한 주민들 및 서용교 보존회장의 노력에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셨으며, 이와 같은 정성을 담아 구미 발검들 들노래 유래비가 지산 앞들이 내려다 보이는 지산동 120-3번지에 우뚝하게 들어설 수 있도록 기획 추진하였습니다.
◎ 발검들 들노래 유래비 제막식 및 고유제
서용교 들노래 보존회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구미시의 지원과 주민들의 정성이 모여 탄생된 유래비의 제막식에는 김관용 구미시장, 명문대학의 민속학 교수님들, 구미시 각 기관 단체장님들을 비롯하여 전 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하였으며, 사라져 가던 구미의 유일한 무형 문화인 구미 발검들 들노래의 맥을 다시 잇게 하는 계기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 후 서용교 들노래 보존회장은 매년 5월 8일 구미 발검들 들노래와 생을 같이 했던 선현들을 추모하고, 들노래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시연을 하며, 많은 저명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유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27호 지정
구미시와 구미 문화원의 적극적 지원과 들노래 보존회 활동의 활성화로 구미 발검들 들노래의 문화적 가치가 알려지고 인정되어 1999년 4월15일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도록 하는데 앞장서 노력하였습니다.
( 발검들 들노래는 구미의 유일한 무형 문화재임 )
◎ TV,신문 및 행사 등을 통한 홍보 활동
▶서용교 들노래 보존회장은 들노래의 맥을 이어가고, 널리 홍보하기 위해 자비로 들노래 열 마당을 1, 2차에 걸쳐 테이프 700개에 녹음하여 구미 시청 문화 담당자 및 出鄕人, 필요 인사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며 들노래의 보존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습니다.
▶2001년 5월 구미에서 거행된 제39회 경북 도민체전 개막식 식전 행사의 하나로 선정된 구미 발검들 들노래의 시연 한마당에 선창자로 참여하여 많은 박수 갈채를 받았으며, 전자 산업도시로만 알려진 구미의 이미지를 전통 문화가 살아 숨쉬는 문화도시로 발돋움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2001년 6월 28일 오전 8시 TBC TV에서는 인물 서용교와 함
께 구미 발검들 들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취재 방영하여 그의전통 문화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널리 알림으로 고장의 유일한 무형 문화재인 구미 발검들 들노래의 가치를 홍보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섰습니다.
▶2001년 6월5일 발행된 영남일보에서는 6. 25참전 용사로서의 소개와 함께 구미 발검들 들노래의 전승과 보존을 위한 서용교의 노력과 활동을 보도하였고,
▶1998년 5월 8일 경북 중부신문에서는 구미 발검들 들노래의 유래에 관한 서용교의 특별 기고문을 게재하였으며,
▶1996년 5월 6일 구미 KBS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김지인 아나운서와의 대담을 통해 구미 발검들 들노래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계획 등을 방송하였습니다.
◎ 비디오 테잎 300개 제작 배포
그 동안 많지는 않았지만 잊혀져가던 구미 발검들 들노래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부탁해 오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농요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으로부터 숙제를 하려는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분들을 위하여 자비로 비디오 테잎 300개를 제작하여 나눠주고 있으며 시내 각 읍.면.동에도 홍보하였습니다.
내용 1. 구미 발검들 유래비 제막 행사
2. 제39회 도민체전 식전행사 중 발검들 들노래 관련
3. TBC TV 열린마당 서용교 편(2001.6.28일 방영)
---구미 발검들 들노래를 중심으로
◎ 구미 발갱이 들소리 : 서용교 편저
구전으로만 전승되어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진 발검들 들노래에 관련된 각 종 자료들을 모으고, 누구나 알기 쉽도록 들노래에 주석을 달아 한 권의 책으로 엮고, 출판(2003년 12월) 배포(1300부)하여 조상들이 남긴 값진 문화를 영원히 보존되도록 하였습니다
◎ 발검들 들노래 후계자 양성 및 교육
서용교 들노래 보존회장은 들노래의 정통성 보존을 위해 후계자 1명(이수근), 장학생 3명을 선정하고 매월 7, 8, 9일을 정기 교육 일로 정하여, 저녁 시간에 지산동 마을회관에서 발검들 들노래를 교육하고 있으며, 제7회 경상북도 향토 민요 경창대회(2000. 12. 14)에 이들을 출전시켜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무어라 위로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훌륭하신 아버님이셨구나.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나. 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동안 아버님의 깊은 사랑이 새록새록 생각나겠지요. 그래도 힘내세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우리의 부모세대들은 다그래요 아끼고 모아서 자식 손자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서 당신은 쓰지도 못하시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요. 안타깝지만 그걸 행복으로 느끼시니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버님을 여읜 슬픔 빨리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훌륭한 아버님, 아마 좋은 곳에 가셨을 겁니다. .......
늦었지만 삼가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비나이다. 이글을 읽고 고향에 공로가 크신점 동감합니다.다만 발검들 들노래에 대한 글의 비중이 큰것 같아서 글 쓰신분께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정작 발검들(농요)에 대한 첫 경연대회와 무형문화제 기능보유자에 대한 글이 없습니다.기능보유자가 없는 후계자는 없습니다.? 비디오테잎 제작에 대해서는 알아본바가 없지만은 녹음테프제작에 대한 비용에 대해서 정보가 좀 부족한걸로 생각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