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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세한도歲寒圖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제자 이상적의 방문을 받고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그림이다. 그러나 그 그림에 함축되어 있는 뜻을 정확하게 잘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1844년 완당(추사) 나이 59세 때 제주도에 유배온 지 5년이 되었을 때 완당의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를 그렸다. [세한도]는 화제에 씌어 있듯이 완당이 그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스승 완당이 유배되어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 드렸다. 완당이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의 따뜻한 뜻과 정에 답하게된 결정적인 계기는 제주도 생활 4년째인 1843년에 이상적이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운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를 북경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준 것이었다.
<만학집>의 저자인 계복은 완당이 옹방강, 완원과 교류할 때 익히 알고 그의 학예를 흠모해온 터였다. 운경에 대해서도 완당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그의 글을 대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절해고도에서 큰 위안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1844)에 이상적은 또 하우경賀?耕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이라는 책을 보내주었다. 이 책은 자그마치 총 120권, 79책이었으니 양으로도 방대했다. 이상적의 이런 정성에 완당은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그리하여 완당은 이상적의 변함없는 사제간의 정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한도>를 그리고 그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 발문 (부분)
[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이 쓰다
완당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이 천하의 명작을 받은 이상적은, 연경으로 떠나려던 참에 이 <세한도>를 받고는 감격하여 완당에게 정중하게 깊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 삼가 <세한도> 한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너무나 분수에 넘치게 칭찬해주셨으며 감개가 진실되고 절절하였습니다. 아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 않고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번 걸음에 이 그림을 갖고 연경에 가서 표구하여 옛 지기분들에게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할까 하옵니다...]
<세한도>는 실경산수화가 아닌 완당의 마음속의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구도만으로 본다면 집과 나무를 소략히 배치한 것은 전형적인 예찬의 법이다. 그러나 필치는 완당 특유의 예서 쓰는 법으로 고졸미를 한껏 풍기고 있음에 이 그림의 매력이 있다. 여기에 [세한도]라는 화제畵題 글씨와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는 낙관이 그림의 구도에 무게와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이 감격적이다. 완당의 해서체의 대표작으로 예서의 기미가 남아 있는 듯한 이 글씨는 울림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심금을 울리는 강도가 아주 진하다.
# 참고 : 완당평전(1) / 유홍준 지음 / 학고재
秋史(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이미지라도 한 번쯤은 보신 적이 있을 이 그림은 오늘날 사람들로부터 입에 침이 마를 정도의 극찬을 받고 있지만 그 뛰어난 점을 그림의 技巧(기교)에서 찾고자 한다면 헛일이다.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844 甲辰(갑진)년의 일이다. 그의 나이 58 세였다.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 그렸다. 다 살은 나이에 정쟁에 휘말려 9 년간의 세월을 제주도 유배지에 머물러야 했으니,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능히 짐작이 간다. 울적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던 중, 신세가 초라해진 스승을 잊지 않고 제자가 중국을 다녀오던 길에 어렵게 귀한 책들을 구해서 보내왔다는 것에 크게 위안을 얻은 추사는 마음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글귀를 남겼다.
글귀 속에 추사는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든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하더니 야, 내 아끼는 제자야, 이 못난 스승을 잊지 않았으니 너야말로 진정한 송백의 기상을 지녔구나 하고 칭찬 반 고마움 반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아니면 추사 스스로도 제자의 위로에 힘을 얻어 氣槪(기개)를 잃지 않는 송백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림 속에는 초옥과 백송 두 그루와 잣나무 두 그루밖에 없으니,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의 마음 경계만 존재하고 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서면 그 황홀함에 세상은 사라지고 두 사람만 오롯이 남듯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박현수 - 세한도(歲寒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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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정리를 하다.
쌓이는 책들로 책장이 번잡스러워짐이 눈에 거슬려서 또 다시 정리를 한다. 많은 책들 중에 3권의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유흥준저 학고재 출간.. 완당평전에 눈길 머물다. 2004년 늦가을.. 이 책을 선물받았다.
책 표지에
"상수리 낙엽이 새처럼 날다." "감나무,,, ,,,,," 그리고 ",,,,,,,,,,,,,,,,,,,,다섯개의 세상이 또 열렸다." 라고 적혀있다.
"나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자루를 몽당 붓으로 만들었다."라고 이야기 했던 추사의 세계.
그 책을 보고야 추사선생의 도인(圖印)이 180개나 된다는것을 알았다.
몇년만에 책장을 넘기며 추억을 들추고 잊었던 것들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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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든 깨달음이란 항상 뒤늦게, 불현듯 닥쳐오는 법!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 겨울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