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8년 1월 조사석이 좌의정이 되고 그 해 10월에 장소희가 왕자(후일-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세자로 봉하고 장소희를 희빈으로 격상시킨다. 서인은 이에 크게 반대하다가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가고 후일 사사하였으며, 그외 많은 사람들이 파직 또는 유배되었다. 이 때 김만중은 남해로 귀양가게 되었다.
나라가 걱정이 되었다. 여색으로 인하여 임금의 성총이 흐려지지는 않을지, 희빈 장씨로 인하여 인현왕후(민비)가 자리 보전이나 할지, 경국지색으로 인하여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서인에 대한 걱정이고 자신에 대한 걱정이였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당을 위해 궁녀 장씨를 쫓을려다가 되려 자신이 쫓겨난 것이다.이런 걱정에서 '사씨남정기'를 썼다.
"유연수는 15세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에 제수되고 우화암 묘혜 승려를 통하여 어질고 덕이 많은 사(史)소저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그러나 史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史부인은 유한림에게 첩 얻기를 권유한다. 유한림은 史 부인과 정이 두터운지라 첩 얻기를 사양한다.
그러나 史 부인이 교씨를 불려 들여 첩으로 맞아 들이게 한다. 교씨가 아들을 낳고 점점 욕심이 많아지고 사악해진다. 교씨는 유한림의 서사인 동청과 결탁하여 史씨를 모해한다.
드디어 교씨는 자기가 부리는 여종으로 하여금 자기가 낳은 아들 장주를 죽이게 하고 이를 史씨부인 소행이라고 유한림에게 일려 바친다.
유한림이 노하여 史부인을 쫓아내고 교씨를 정실 부인으로 들인다. 그 길로 史부인은 쫓겨나 시댁 선산에서 지낸다. 그 후 교씨 부인이 보낸 칼잡이 냉진의 화를 피하여 다시 묘해 스님이 있는 수월암으로 피신을 한다.
한편 유한림도 교씨와 동청의 모함을 받아 엄승상에 의해 행주로 유배간다. 동청은 엄승상의 도움으로 계림의 태수가 된다. 동청은 칼잡이를 보내어 유한림을 죽이게 한다. 유한림은 칼잡이를 피하여 강물에 몸을 던진다. 기적적으로 묘해 스님에 이해 목숨을 건지게 되고 史씨 부인을 만나게 된다.
유한림은 史씨에게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한다. 엄승상도 횡포를 부리다가 천자의 벌을 받게 되고 동청도 추방되어 죽는다.
유한림은 좌승상으로 오르게 되고 교씨는 붙들려 저자 거리에서 매를 맞아 죽는다".
사씨남정기의 줄거리이다.
소설 '사씨남정기'에 나오는 네 사람과 현실 정치 판 속의 네 사람이 비슷하다.
유한림은 숙종이요, 史씨는 인현왕후요, 교씨는 장희빈이고, 동청은 조사석이다. 史씨 부인의 현덕함이 인현왕후를 닮았고, 교씨의 교활함이 장희빈을 닮았으며, 교씨에 붙은 동청이 조사석을 닮았고, 교씨에게 빠져 사리를 분별 못하는 유한림을 숙종에게 비유하여 쓴 소설이다.
김만중이 이 소설을 쓴 시기는 1689년 부터 1692년 이다. 1688년 장희빈이 왕자 균(후일 경종)을 낳고 서인이 쫓겨 난 시기이니까 소설 속에서 史씨 부인을 쫓아낸 시기는 우암 송시열을 유배시키는 부분으로 소설의 절정을 이루는 시기이다. 1694년 '갑술옥사'로 숙종은 장희빈을 다시 내치고 죽은 송시열을 복권시키는 등 서인의 시기가 곧 도래하는데 서포 김만중은 1692년 생을 마감한다.
서포 김만중은 장차 일어 날 일을 미리 예견하고 뒷날의 일을 소설로 쓴 것이다.
후학들은 김만중이 천문과 지리를 통달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런 예견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