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어떤 일월]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어떤 일월]
이양복 시집 / 창조문학대표시인선 199 / 창조문학사(2012.03.30) / 값 10,000원
================= =================
어떤 일월
이양복
눈 쌓인 풍경 안에 들어가면
더욱 다정해지리라
나뭇가지 사이사이
참새 몇 마리
푸들푸들 날아가면
샘물처럼 순결해지리라
햇살 내리쬐는
언덕을 바라보는 일이
푸른 축복이리라
분노한 일이나
미워한 일이나
다 부끄러워지고
흐르는 강물
물결치는 산
들고나는 길이
가이없이 평화로워지리라
아, 달려가고 싶은 날
벌거벗고 싶은 날
겨울 칠갑산
이양복
구불구불 숲길은
그윽하고 차갑고 고독하다
산등성이를 따라 간다
하얀 길 위로 햇살이
강물처럼 출렁거린다
눈 밟는 소리
기억 저편에서 다시 일어서는
아득한 세월
솔숲은 기다란 바람을 붙잡고
한나절 적막감 속으로 떠났다
머언 하늘빛 산울림이
간간히 골짜기를
맴돌다 사라진다
들녘에 가보기
이양복
더위가 맹위를 떨친다
긴 기차를 탄다
장쾌한 호남들녘을 지나간다
가득히 넘실대는 수로
농로가 사통팔달 열려 잇도
전봇대의 행렬이 아스라이 멀어진다
초록바다 세상
퐁요의 빛깔이 출렁인다
군데군데 마을이 작은 숲에 기대어
오늘을 풀어간다
아득한 들녘은
충만함이요 대범함이라
마음이 깊어지니 사위가 고요하다
아주 먼 곳
이양복
과일이 붙은
아주 작은 사표
페르시아
갈라서 들여다보니
홍옥보다 더 붉은
팥알보다 조금 큰 열매가
서로 뒤엉켜 있다
만져보고 맛보며
색깔에 당도에 감탄한다
히자브로 살포시 가린
여자들의 자태가
표피에 자꾸 아른거린다
광한루
이양복
그네에 앉아 펄럭이는
그 여자 동네에 놀러왔다
연못에서 서양 잉어들이
떼를 지어 유유자적하고
던져주는 먹이가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노을이 떠오른다
이 순간 누리는 한줌의 평화
가을날 물가 수양버들
하늘하늘 흔들린다
배 띄우고 배 띄워라
돌다리 너머 대숲을
지나가는 바람이
춘향이 치맛자락에
연연히 감긴다
동굴
이양복
간간 뭉게구름이
땡볕 사이로 지나간다
팔월 고추밭에
몸을 감추고
붉고 긴 터널을
천천히 지나간다
겨울 개미
이양복
설탕물 접시를 밥상 밑에 놔둔 지 오래고
관리소 소독도 별무 효과인지 오래다
몇 년 동안 아침마다 한 두 시간
집안 청소하며 많은 개미를
검지손가락으로 눌러 터트려 살생을 했다
오늘 으악 하고 놀란 일은
그 중 한 마리가 제 몸집의 열배도 넘는
물체를 끌고 가려고 용쓰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차마 그 생의 의욕을 어찌 꺾을 수 있나
오히려 뻗친 내 손가락이 부끄럽다
이제부터 그들과 공생하기로 작심한다
동정
이양복
여린 쑥이 보숭보숭 돋아난
산골 다랭이논둑을 거닐다가
방죽 안을 유심히 살펴본다
검은 구름덩어리가
하늘복판에서 노닐듯
곰살곰살 유영하는 올챙이들
천수만 새떼의
황홀한 군무에 손색이 없다
새싹 움트는 나무 몇 그루
물밑에 가만히 가라앉는다
사알살 미풍이 얼굴을 스치는데
잔물결은 오지 않는다
새들은 숨어서 노래하며
세상을 흥겹게 바라본다
설레이게 하는
봄볕 따뜻한 오후 가전리
다시 모서리
이양복
한낮 붉은 신호등
붉은 초등학교 사층 건물을 지나서
걸어 걸어 근교로 나가면
낯익은 목가적 풍경이
나를 오래 서성이게 한다
공장, 공장 저 너머
바람에 휘어지는 밀밭
철길 건널목 건너면
띄엄띄엄 포도밭, 포도밭
갈아엎은 논밭
사방으로 나누어가는 수로에
풍성한 물이 출렁거린다
라일락 향기가
봄 길을 멀리 휘감는다
둔덕마다 만발한 배꽃이다
신록이 전염병처럼
사람들을 흔들어 댄다
구룡리 봄길
이양복
신록과 녹음 사이 어두워지는 나무들
길가의 쑥이 무릎까지 왔구먼
클로버꽃들이 논물에 어릿거리고
농부의 등판이 더운 봄날
새터마을 담을 따라
머위잎이 너울거린다
들꽃마다 새 빛으로 저리 고우니
지즐지즐 울렁거린다
아름다운 눈길에 새처럼 퍼득인다
금식 이후
이양복
몇 년간 지성으로
한 끼 금식이더니
사흘간 강렬한 마무리랄까
비우고 채우는
채우고 비우는
음성으로 가라앉고
몸짓으로 가라앉고
부풀어 오르는 오욕칠정
바닥으로 내려간다
복잡한 일상을
한결 가볍게
한결 관대하게
한동안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
아내는
공유
이양복
상현달 하나
하늘 하나
머언 새벽길
너머 어둔 산, 산
너 그리고 나
여유
이양복
늦은 봄 한 낮
복숭아나무 아래 앉아 있다
붉은 꽃은
활짝 피어 어우러지고
밭 둘레 드문드문
겹사쿠라꽃이 진다
어린이날 마을 확성기에서ㅏ
술 취한 유행가 소리 어수선하고
찬찬히 보니 작은 벌들이
끊임없이 놀러 오하서
떠날 줄을 모른다
.▩.
=================
■ 시인의 말
“몇 년 사이에
당신 불평불만이 크게 줄어들었답니다”
그녀가 가끔 하는 말이다. 다행스럽다
실패나 부진이나 절망의 원인이
내부의 어리석음에 있음을 모르고
남 탓, 환경 탓, 세상 탓하며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의 병을 앓아왔던고
뉘우쳐 보아도 소용없는 잃어버린 시간이다
긴 세월 진정한 노력은 아니하고 줄기찬 인내력도 없이
빛나는 결과만 얻으려 했던 곳이다
여러 번 기회가 와주었어도
나는 준비가 모자라서 그것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지부진하게 한평생을 다 소진했다
만시지탄,
세 번째 흔적을 보이려하니 그저 부끄러운 뿐……
어리석음은 그대로인 채 한층 단순해져서 살아간다
손자들을 보살피는 그녀 뒤에서
조수 노릇하며 사는
현재의 내 삶이 심리적인 안정기라 할까
지금까지 내가 아프게 했던
모든 분들께 사죄드리고
또한 아둔한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뜻을 전합니다
2012년봄에
월산 이 양 복
.▩.
=============== == = == ===============
잉야복 詩集 [어떤 일월]
[ 해설 ] -
자연친화와 유유자적의 시학
- 이양복 시인의 시집 『어떤 일월』에 부쳐
홍 문 표
(시인. 평론가. 전 오산대총장)
이양복 시인이 그의 세 번째 시집『어떤 일월』을 출간하게 되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필자로서 반가운 것은 이 시인은 평소 수다스럽게 다작을 하는 시인이 아니라 꾸준하면서도 신중하게 창작을 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시인이란 작품을 많이 쏟아내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먼저 시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남의 시든 자신의 시든 시를 통하여 스스로 행복하고 만족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시와 삶이 어우러져 더욱 풍요롭고 빛나는 인생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인은 뜨겁게 설치는 시인이 아니라 시를 즐기며 여유 있게 인생을 사는 넉넉한 시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인은 이번 시집을 내면서 세 번째 흔적을 보이려고 하니 부끄러울 뿐이라고 했다. 어리석음이라고 했고 단순하게 살아간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삶의 심리적인 안정기라고 했다. 이렇게 서문부터 겸허하면서도 자기 반성적이고 자족적인 자세는 그가 시를 신중하지만 겸허하게 즐기고 있음을 말해 준다. 시집 제목을 보아도 특별하게 어떤 주제를 보여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시이며 그 중에서 어떤 일월을 선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는 바로 삶이 시이고 시가 삶이라는 생활화된 시, 농익은 시, 인생과 시가 함께 충분히 성숙한 여유롭고 넉넉한 시의 경지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이번 시집의 제목이 되고 있는 작품「어떤 일월」을 살펴봄으로서 더욱 분명해지게 될 것이다.
눈 쌓인 풍경 안에 들어가면
더욱 다정해지리라
나뭇가지 사이사이
참새 몇 마리
푸들푸들 날아가면
샘물처럼 순결해지리라
햇살 내리쬐는
언덕을 바라보는 일이
푸른 축복이리라
분노한 일이나
미워한 일이나
다 부끄러워지고
흐르는 강물
물결치는 산
들고나는 길이
가이없이 평화로워지리라
아, 달려가고 싶은 날
벌거벗고 싶은 날
-「어떤 일월」전문
인용한 시는 바로 시인의 시적 태도, 시를 통하여 구현 하고자하는 시정신을 극명하게 보이고 있다. 한 마디로 그의 시적 자세는 자연친화적이고 유유자적하는 시학이다. 첫 연에서는 눈 쌓인 풍경 안에 들어가면 더욱 다정해질 것이라 했다. 여기서 눈 쌓인 풍경은 바로 눈과 같은 순백의 세계 순수한 자연의 세계다. 때묻지 않은 눈의 세계야말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더욱 다정자감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둘째 연으로 확산 된다. 나뭇가지 사이로 참새가 날아가는 세계에서 순결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자연의 세계다. 셋째연도 그렇다. 햇살이 쏟아지는 언덕을 바라보는 일이 축복이라고 하였다. 흐르는 물, 물결치는 산을 들고나는 길이 평화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연 앞에서 분노하고 미워하는 일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를 대조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인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보다 다정해지고 순결해지고 축복이 되고 평화로워질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고 자연과 대립되는 인간의 세계 또는 현실의 세계는 분노와 미움과 부끄러움의 세계가 된다. 그러니 자연의 세계는 “아, 달려가고 싶은 날”이 되고 현실의 세계는 “벌거벗고 싶은 날”이 된다.
이 시인의 자연친화적인 시학은「어떤 일월」이라는 한 작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번 시집의 전부가 사실은 자연친화를 화두로 삼고 있다. 물론 그의 시적 소재는 공간적인 것도 있고 시간적인 것들도 있다. 우선 공간적인 것들을 보자.
산의 초입에서 눕는다
산마루 둥둥 떠도는 구름 꽃
구름 꽃 붉은 몇 송이
단풍은 산비탈로
산비탈로 내려오며
하루 종일 요동친다
노고단 오르는 길이
운무로 아득하고
비산하는 시원의 물소리
시원의 바람소리
웅장함과 내밀함으로
피 흘리며 서성거리는 이들
다 거두어 감춘다
-「지리산에서」전문
바라보라 저 큰 바다를
저 웅장한 바다를 보라
설레임이나 빛깔이나
야성의 몸짓을 보라
왜소하고 남루하고
연약한 삶을 짊어지고
나는 얼마나 흔들려 왔던고
분별력이 마비될 때
혼자 와서 보라
저 큰 흔들림을 보라
증오도 씻고
상처도 씻고
광막한 시대의 복판으로
되돌아가
흔들림의 바다를 생각하며
한동안 깊어져서 살 것이라
-「월미도」전문
송사리 떼 지어 노는 시냇물을
쭈그리고 앉아서 망연히 들여다본다
일어나 돌다리를 건너간다
차가운 돌다리에
따뜻한 내 몸이 닿을 때마다
섬뜩하게 전율하는 쾌감
마을 일원에 라일락 향기가 물씬거린다
옥잠화가 담 밑에서 미소 지으며
봄 햇살을 즐긴다
사람들은 외암리 아랫마을에
상류층에서 서민층 가옥까지 복원해 놓고
느릿느릿 어슬렁거리며 즐긴다
길가 여기저기
잔디꽃 또는 밥풀꽃 만발하여
환하게 마을을 밝힌다
그지없이 밀려오는 봄, 봄
-「외암리에서(2)」전문
인용한 시들은 모두 지리적 공간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지리적 공간을 소재로 한 작품을 이것만이 아니다. 사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이 지리적 소재들이다. 시집의 첫 작품 칠갑산에서 끝부분의 대천해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관광명소이거나 역사적 이야기가 있는 공간들이다. 이렇게 주유천하하며 유유히 명소를 여행한 시적 결실이라면 기행시라는 선입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인의 시들은 그렇게 많은 명소를 여행하고 있지만 기행시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만큼 이 시인의 기행시는 단지 새로운 나그네의 소감을 적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친화라는 시인의 주제의식이 하나하나 독립된 시 속에 관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시인의 다양한 여행시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지적 정보의 소개가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도 일관된 자연의 생명력과 영원함을 보여주는 창조적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리산에서」를 보면 서두에서부터 시선을 붙잡는다. “산의 초입에서 눕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눕는다는 것인가. 산마루 둥둥 떠도는 구름 꽃 몇 송이가 눕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단풍들은 산비탈로 내려오며 하루 종일 요동친다고 했다. 표현의 신선함이 돋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은 지리산만의 고유한 것일 수 없다. 그만큼 이 시인은 지리적 공간은 설명 보다는 보편적인 자연현상의 시적 형상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인의 자연은 단지 아름답거나 신비로운 시적 형상의 대상으로만 인식하지 않는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는 그 웅장함과 내밀함으로 피 흘리며 서성거리는 이들마저 다 거두어 감춘다고 했다. 여기 “피 흘리며 서성거리는 이들”이란 바로 피 흘리는 인간의 역사와 그 주체들일 것이리다. 웅장한 자연은 인간의 무모한 역사마저 거두어버릴 만큼 너그럽고 절대적인 것이다. 「월미도」에서도 그곳의 특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웅장한 바다를 본다. 따라서 이 시인에게서 월미도는 지리적 역사적 공간이 아니라 보편적인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기에 월미도를 통해 저 큰 바다와 웅장한 바다와 야성의 몸짓을 보면서 왜소하고 남루하고 연약한 인간을 대조하여 보게 된다.「외암리에서(2)」에서도 외암리의 주택이나 사람이 아니라 외암리에서 경험하는 자연이다. 송사리가 있는 시냇물, 돌다리, 라일락, 옥잠화, 봄 햇살이 있는 보편적인 자연공간이다. 다만 사람들은 그 아랫마을에 각종 가옥을 복원하여 놓고 어슬렁거린다. 이처럼 이 시인이 경험하는 공간들은 역사가 다른 지리적 공간이지만 정작 그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적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인 자연의 순수한 진실이다. 영원하고 무한한 자연과 이에 대비되는 인간의 왜소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인이 경험하는 시간의식은 어떤 것인가.
구불구불 숲길은
그윽하고 차갑고 고독하다
산등성이를 따라 간다
하얀 길 위로 햇살이
강물처럼 출렁거린다
눈 밟는 소리
기억 저편에서 다시 일어서는
아득한 세월
솔숲은
기다란 바람을 붙잡고
한나절 적막감 속으로 떠났다
머언 하늘빛 산울림이
간간히 골짜기를
맴돌다 사라진다
-「겨울 칠갑산」전문
이월에 바라보는
그 예비, 그 순수
그렇게 새순이 돋고
욕망의 녹색 들녘을 돌아돌아
달관의 들녘에 들어선다
바람에 이끌려 사라진
허상의 시간 곁에
물끄러미 앉아서
이제사 모든 매듭을
헐렁하게 푼다
그런그런 소박함이나
초연함으로
장중함이나 경쾌함으로…
-「평택들녘을 지나며」전문
잠들고 꿈꾸고
토닥이고 사귀고 안쓰럽고
세월이 간다
숲으로 가는 길이다
강으로 가는 길이다
속삭임이나
몸을 합치는 일이나
맘을 합치는 일이나
의지하고 눈물 흘리고
붉은 고뇌로 흔들거리고
세월이 간다
떠나가던 날이나
돌아오던 날이나
홀로 그렇게 기다린다
아, 세월이 간다
-「베개위에」전문
「겨울 칠갑산」은 겨울이라는 시간과 칠갑산이라는 공간이 결합된 시다. 이 시에서 겨울 칠갑산의 겨울이라는 시간은 차갑고 고독하다. 적막감으로 떠나는 시간이고 산울림이 골짜기를 맴돌다 사라지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 시인의 시간은 무상하게 흘러가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칠갑산이라는 자연공간에는 하얀 길 위로 햇살이 강물처럼 출렁거리는 여전히 생명력 있는 대상이 되고 있다.「평택들녘을 지나며」도 이월이라는 시간과 평택들녘이라는 공간이 결합된 시다. 그런데 이 시에서도 시간은 바람에 이끌려 사라지는 가변의 시간, 소멸의 시간, 지나가는 시간이지만 들녘은 순수하고 새순을 준비하며 흘러가는 시간 곁에 물끄러미 앉아서 소박함이나 초연함으로 장중함이나 경쾌함으로 모든 매듭을 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리적 자연 공간은 시간의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다. 세상이 소란하고 역사가 소용돌이 쳐도 그것은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시간일 뿐이고 자연공간은 영원히 그대로인 것이다. 한편 「베개위에」는 칠갑산이나 평택들녘과 같은 자연공간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삶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베개를 베고 살아가는 부부간의 삶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도 시간이라는 자연 질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시간적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처럼 시간을 의식하고 시간이 절실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베개위에」가 보여 주는 시간의식은 무엇인가 “세월이 간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 구절을 세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칠갑산이나 평택들녘에서도 시간을 흘러가는 것이라 했고 베개에서도 이처럼 시간을 흘러가는 것임을 강조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베개위에」가 앞의 시들과 엄격히 구별되는 것은 앞의 시에서 시간의 주체인 자연공간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베개에서 시간의 주체인 인간은 함께 흘러간다는데 있다. 잠들고 꿈꾸고 토닥이고 속삭이고 합치고 눈물 흘리고 흔들거리는 인간들은 결국 시간과 더불어 흘러간다는데 자연공간과 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를 종합해서 말하면 자연은 불변하는 주체가 되지만 시간이나 인간은 함께 흘러가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여기에 인간 존재에 대한 허무나 고독이 있다.
이놈의 세상
말하지 않고 살기로 한 것인지
그런데 침묵이
왜 그리 허전한가
왜 그리 애잔한가
억압의 끄나풀 속에서 벗어나는 날이
바로 목숨을 다하는 날인 것을
보이는 끈에 매여 있는 너나
보이지 않는 끈에 매여 있는 나나
어찌 참아내지 않고
넘어설 수 있겠나
-「보문사 그놈」에서
외로워서 노래를 부르고
외로워서 그림을 그리고
외로워서 시를 쓴다
외로워서 여행을 떠나고
외로워서 쌈하고
외로워서 달린다
외로워서 돌아오고
외로워서 술을 마신다
외로워서 울고 웃는다
모두들 외롭다
이 세상 끝까지
-「모두들 외로워서」전문
「보문사 그놈」에서 그놈은 줄에 묶여 있는 견공을 두고 한 말이다. 생기기는 수려하고 위풍당당한데 전혀 짖지 않는 것에 연민을 느끼며 그러한 침묵이 오히려 가엾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줄에 묶였는데도 전혀 반항을 못하고 침묵하는 견공의 운명은 줄에서 풀린다 해도 그날은 또 목숨을 다하는 날이라는데 이 시의 애절한 실존이 있다. 줄에 매여 있는 것도 불행한 것이지만 그 끄나풀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불행한 절망이 된다는 인식은 매우 허무주의적인 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개는 보이는 끄나풀에 얽매어 있다가 그 끈을 벗어나면 죽는 존재가 되고 인간은 보이지 않는 끄나풀에 얽매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도 그 구속의 끄나풀을 벗어나는 날은 죽는다는 공통 인식이 이 시를 비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허무는「모두들 외로워서」에서 더욱 노골화 되고 있다. 인간은 외로워서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여행을 떠나고 싸우고 달음질하고 술 마시고 울고 웃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모두들 외롭다”를 “세상 끝까지”로 단정하여 인간의 외로움은 근원적인 것이고 운명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끝내 외로운 존재이기에 절망하고 말 것인가. 이 점에 대하여 시인은 다시 자연친화적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어느새 들꽃이 키를 넘나든다
하얀 강물 위로
하얀 나비 펄럭펄럭 날아간다
나는 시방 유유자적
꽃 강물 너머로 흘러간다
흔들리는 풀과 꽃,
나무와 나와 저 강물
흔들 때는 흔들려야지
너울너울 같이 흔들려야지
풋내기처럼 귀를 자르지마
-「산책(2)」전문
홀로 논두렁길을 걸으며
전원의 고요함을 즐긴다
들꽃들이 흔들리고
나도 흔들리고
나비가 춤을 추고
나도 춤을 춘다
나들이 간 여자는 오지 않고
푸른 치마만 나풀거린다
-「대원선원」에서
바람은 소소하고
물결소리 넉넉하다
갈매기 수십 마리
아득한 비상
물결을 자꾸 어루만진다
나는 해변을 혼자 걸으며
이 봄
아늑하고 소박한 평화를 누린다
-「대천해변」에서
외로운 인간은 어떻게 구원될 수 있을까 그 하나는 자연과 어울려 유유자적하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흔들리는 것이다. 불변하는 자연 생명력이 넘치는 살아 있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산책(2)」는 들꽃들이 무성하고 하얀 강물이 넘실대고 하얀 나비 펄럭이는 자연과 더불어 “흔들리는 풀과 꽃/ 나무와 나와 저 강물”이 함께 흔들리라는 것이다.「대원선원」에서는 아예 함께 춤을 추자는 것이다. 논두렁을 걸으며 전원을 즐기며 들꽃들이 흔들리고 나도 흔들리고 나비가 춤을 추고 나도 춤을 추자는 것이다. 바로 자연과 더불어 흔들리고 춤을 추며 유유자적 하자는 것이 이 시인의 궁극적인 시학이다. 그러한 어울림 속에 외롭고 고단한 인생은 그래도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대천해변」에서 발견한 것도 바람과 물결 소리와 갈매기의 비상이다. 그래서 물결을 자꾸 어루만진다. 거기서 아늑하고 소박한 평화를 누린다.
이처럼 이양복 시인의 이번 시집『어떤 일월』은 철저히 자연친화적 상상력 속에서 유유자적 하는 시인의 넉넉한 삶이 다양한 자연공간을 통하여 형상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삶이란 덧없는 시간 속에서 부단히 흘러가는 허무가 있지만 바로 불변하는 자연과 더불어 흔들리고 함께 춤추는 화해를 통하여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는 시적 구원의 진솔한 메시지를 함께 던지고 있는 것이다.◉
.▩.
=================
◆ 표사의 글 ◆
이양복 시인의 이번 시집『어떤 일월』은 철저히 자연친화적 상상력 속에서 유유자적 하는 시인의 넉넉한 삶이 다양한 자연공간을 통하여 형상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삶이란 덧없는 시간 속에서 부단히 흘러가는 허무가 있지만 바로 불변하는 자연과 더불어 흔들리고 함께 춤추는 화해를 통하여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는 시적 구원의 진솔한 메시지를 함께 던지고 있는 것이다.
― 홍문표 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
▶월산 이양복 시인∥
∙충남 청양 출생
∙고려대 영문학과 중퇴
∙창조문학으로 등단
∙창조문학 대상 받음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집 :『그 선명한 구름꽃』『그대를 기다리며』『어떤 일월』출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