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묶어 읽는 시
첫사랑, 자이가닉 효과(Zeigarnik Effect)
유진 (시인)
잠시 한가해질 때 시집을 펼치면 한없이 따뜻해진다. 따뜻한 마음으로 읽어 들이는 시의 문장들은 첫사랑의 느낌처럼 설렘과 깨달음과 그리움에 촉촉이 젖어들게 한다.
누구나 한 번씩은 겪었을 첫사랑! 말 그대로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 느끼게 했었던 그 풋풋하고, 아련하고, 애틋하고, 따스하고, 마냥 설레던 서툴러서 아쉬웠던 첫사랑의 감정들.... 누구에게나 쉽게 잊히지 않는 경험이며, 풋풋한 아름다움으로 추억되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심리학자인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의 학설에 의하면 사람은 일을 끝까지 마치려는 본능이 있고, 일을 마치지 못하면 긴장하게 되어서 더 기억을 잘 한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어떤 일에 집중할 때 끝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게 되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긴장이 지속되다 보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 이론이다.
끝내 마치지 못하거나 완성하지 못한 일을 쉽게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현상이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면 예컨대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더 오래 기억하는 심리현상 또한 자이가르닉 효과의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시와 연애중인 시인들에게는 반드시 잊지 못할 첫사랑의 경험이 있을 것 같다. 그 풋풋하고, 아련하고, 애틋하고, 따스하고, 마냥 설레던 첫사랑의 감정들이 아마도 시의 토대를 이루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시의 옷을 입은 첫사랑의 감정들은 어떤 매개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을까?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늘 열다섯 살
수평선처럼 상큼하게 휜 니 눈썹 끝에 매달려
파랑 멀미를 하는 물잠자리다
ㅡ 차영호「첫사랑」전문 .《우리詩》2014년 2월호.
차영호 시인의 첫사랑은 금록색이나 청동빛깔의 물잠자리를 닮았다. 날카로우면서도 예쁜 말의 표현이다.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만나면 늘 열다섯 살 소년이 되어버리는 시인에게 첫사랑은 물잠자리의 비행처럼 생생한 기억으로 늘 파랑 멀미를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 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네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 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 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른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에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ㅡ 송찬호「찔레꽃」전문 . 시집《실천문학》2006년 여름호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을 그녀의 결혼식 날 아침 찔레덤불아래 묻어 두었다는 하얀 사발 속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그 아프고 비밀스런 사랑의 이별통보를 차마 다 읽지 못했었다.
세월이 흘러 고향 뒷산에서 옛 찔레나무아래 그 흰빛 사기 희미해 졌어도 하얗게 흐드러진 찔레꽃 앞에만 서면 아슴아슴 아득한 기억이 마음에 불을 지펴주는 것이다. 하얗게 밀어버린 눈썹이 초생달 모양으로 자랄 때면 잊을 수 있겠다고 장담했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저리고도 은밀한 첫사랑이다.
그래서 시인의 첫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벙어리처럼 하얗다.
유년과 청춘의 설렘 곁에는 언제나 ’찔레꽃‘이 함께 있었다. 찔레꽃이 피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이면 청춘들은 싱숭생숭해지게 마련이어서 동산의 작은 언덕 잔디밭에 앉거나 혹은 누워서 하염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꿈을 꾸기도 했을 것이다.
송찬호시인 역시 충남 보은의 시골에서 자랐다. 많은 시인들이 간접경험을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 내듯이 찔레꽃 피는 오월에 청춘남녀가 겪었을 법 한 사연을 구어체로 시화 시켰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의 사연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내게 첫사랑은
밥 속에 섞인 곤드레 같은 것이어서
데쳐져 한 계절 냉동실에서 묵었고
연초록 색 다 빠지고
취나물인지 막나물인지 분간이 안가는
곤드레 같은 것인데
첫사랑 여자네 옆 곤드레 밥집 뒷방에 앉아
나물 드문드문 섞인 밥에 막장 비벼 먹으면서
첫사랑 여자네 어머니가 사는 집 마당을 넘겨보다가
한 때 첫사랑은 곤드레 같은 것이어서
햇살도 한 평밖에 몸 닿지 못하는 참나무 숲
새끼 손가락만한 연초록 대궁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까실까실한,
속은 비어 꺾으면 툭 하는 소리가
허튼 약속처럼 들리는
곤드레 같은 것인데
종아리가 희고 실했던
가슴이 크고 눈이 깊던 첫사랑 그 여자 얼굴을
사발에 비벼
목구멍에 밀어 넣으면서
허기를 쫓으면서
ㅡ김남극「첫사랑은 곤드레 같은 것이어서」전문 . 《유심》2003년 봄호
봄에 연초록 어린잎과 줄기를 따서 묵나물로 만들어 두었다가 밥에 비벼 먹거나 죽을 쑤어 먹는 나물의 학명은 고려엉겅퀴다. 강원도지방에선 도깨비엉겅퀴로도 불리는 구황식물이다.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에 비유되기도 하는 곤드레는 대궁 속이 비어 있다고 한다.
"속은 비어 꺾으면 툭 하는 소리가 / 허튼 약속처럼 들리는 / 곤드레" 같은 것이 시인의 첫사랑이다.
데쳐져 한 계절 냉동실에서 묵었고 연초록 색 다 빠지고 취나물인지 막나물인지 분간이 안가는 첫사랑, 밥 속에 섞인 곤드레 같은 첫사랑을 차마 정면으로 만날 수 없어, 여자의 어머니가 사는 집 마당을 넘겨다볼 뿐이다. 첫사랑여자의 어머니 집 마당을 슬쩍 넘겨다보는 그 미묘한 설렘과 떨림이 첫사랑의 감정과 비유되고 있다.
나팔바지에 찢어진 학생모 눌러 쓰고
휘파람 불며 하릴없이 골목을 오르내리던
고등학교 2학년쯤의 오빠가 다시 되고 싶다
네거리 빵집에서 곰보빵을 앞에 놓고
끝도 없는 너의 수다를 들으며 들으며
푸른 눈썹 밑 반짝이는 눈동자에 빠지고 싶다
버스를 몇 대 보내고, 다시 기다리는 등굣길
마침내 달려오는 세라복의 하얀 칼라
'오빠!' 그 영롱한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토요일 오후 짐자전거의 뒤에 너를 태우고
들판을 거슬러 강둑길을 달리고 싶다, 달리다
융단보다 포근한 클로버 위에 함께 넘어지고 싶다
네가 떠나간 멀고 낯선 서울을 그리며 그리며
긴 편지를 지웠다 다시 쓰노라 밤을 새우던
열일곱의 싱그런 그 오빠가 다시 되고 싶다
ㅡ임보「오빠가 되고 싶다」전문 . 시집『검은등뻐꾸기의 울음』(2014)
젊은 남성에게 붙여진 이름이 오빠다.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어도 불리고 싶어 하는 사랑받는 “오빠”는 남성들의 시들지 않는 로망일 것 같다.
‘푸른 눈썹 밑 반짝이는 눈동자에’ 빠져서 네거리 빵집에서 곰보빵을 앞에 놓고 끝도 없는 수다를 듣고 또 듣고 싶고, 버스를 몇 대 보내고 다시 기다리는 등굣길에서 '오빠!' 영롱한 목소리로 나타날 세라복의 하얀 칼라 소녀를 기다리는 일도, 긴 편지를 지웠다 다시 쓰느라 밤을 새우던 일도, 고등학교 2학년쯤 남학생들의 보편적 추억일 것이다.
다시 오지 않는 그 시절, 세라복의 하얀 칼라 여학생을 짐자전거 뒤에 태우고 강둑길을 달리다 융단보다 포근한 클로버 위에 함께 넘어지는 꿈을 추억하는 시인의 첫사랑은 고교시절 남학생의 보편적 추억 속에 있다. 칠순의 시인이 어쩌면 열일곱의 싱그런 그 ‘오빠’가 되어 다시 한 번 건들거려보고 싶은 지도 모른다.
이제는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첫사랑, 두근거림과 선홍빛 부끄러움, 야릇한 흥분으로 설레던 싱그러운 첫사랑이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ㅡ고재종「첫사랑」전문 .시집《쪽빛 문장》에서
한 잎 한 잎 흩날리는 눈발이 나뭇가지를 두드려 보기도 하고 주위를 맴돌며 수백 번 미끄러지는 시련의 과정을 거쳐 눈꽃을 피우지만 매서운 바람 한 번이면 가지에서 떨어져 녹아버리는 눈꽃처럼, 첫사랑 대부분이 상처로 남는 서투른 사랑이다.
첫사랑은 상대를 향해 한없이 퍼붓는 순수와 여과 없는 헌신적 열정을 요구한다. 한겨울 눈꽃 피운 나뭇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꽃이 피는 것처럼, 눈과 나뭇가지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시인은 첫사랑의 상처들이 부풀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것임을 예감하는 것이다.
서투른 황홀이며 상처이고 그리고 창조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 첫사랑이다. 사랑의 아름다운 결실을 위해서는 한 대상에 대한 오롯한 인내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랑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큰물 지고
내천에 젖이 불면
간잘간잘 이빨 가는
어린 조약돌 몇 개 씻어
첫사랑
주머니에 넣고 가지요
물새알처럼 나는 자꾸 동그래지고
그 어깨의 곡선을
이기지 못하겠어요, 라고
쓰고 싶은
ㅡ신미나「첫사랑」. 시집《싱고, 라고 불렀다》창작과비평 刊.
시인의 첫사랑은 큰물 지고 난 내천에 어린조약돌 같은 것이다. 물새알처럼 동그래지는 첫사랑의 곡선을 주머니 속에 오래 넣어두고 간잘간잘 가는 이빨처럼 갈아도 다 닳도록 남아있는 첫사랑은 늘 어떤 감정의 종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시의 첫째 덕목은 채 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략은 억측과 추측을 불러일으키지만 또한 훨씬 고급스러운 환기력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군대간 애인 생일이었네
갈매빛으로 여물어가는 여름은
색색 풀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네
자동차는 더위로 흐물거렸네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데
서녘 하늘에 붉새가 날고 있었네
클클거리는 낡은 자동차를
미시령은 자꾸 끌어 내렸지만
나는 무모했었네 일생처럼 기다린
그의 스물 두 살 생일이었네
어둠조차 뜨거운 군부대 면회소
후끈해진 트렁크를 열었네
달지근하게 녹아버린 케이크,
셈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움뿐이었네
달무리 진 하늘이 금세 울 것 같았네
초코파이에 꽂아 밝혔던 애인의 스물 두 살
흘러내리는 촛농처럼 가장 뜨거운 순간이었네
주의사항에 꼼꼼해진 서른 살,
케이크를 고르다 한 시절을 맛보네
녹아든 첫사랑은 유통기한이 없다네
ㅡ 조은영 「생크림케이크」전문 .《현대시학》2004년 4월호
녹아든 첫사랑은 유통기한이 없다고 말하는 시인은 꼼꼼하게 케이크를 고르며 군복무중인 스물두 살 애인의 생일을 챙기러 미시령을 넘었던 그 뜨거웠던 날을 추억한다.
낡은 자동차를 끌고 어두워져서 도착한 군부대 면회소, 트렁크를 열자 달지근하게 녹아버린 케이크가 그리움을 말해주었고, 초코파이로 대신했던 8년 전 그 밤은 흘러내리는 촛농처럼 뜨거웠다고,
첫사랑은 서툴러서 언제나 진지하고 뜨거운 열정이기에 유통기한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첫사랑이 누구에게서나 한결같지 않아서 다행인 것 같다. 다만 유통기한이 없다는 말에 공감한다.
나의 첫사랑은 동화 속에 나오는 목동이었다. 양떼와 널따란 들꽃 언덕과 뭉게구름 피어오른 푸른 하늘과 시원한 나무그늘과 풀피리소리에 대한 그리움이 내 속에 영원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를 조사한 SBS '1억 퀴즈쇼'에서 응답자의 41%가 '처음이라 서툴러서'라고 답했고 '그만한 사람을 못 만나서', '안 이루어져서' "진심을 다해서", "순수하던 시절 진심이었으니까"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첫사랑! 그 풋풋하고, 아련하고, 애틋하고, 따스하고, 마냥 설레던 서툴러서 더욱 아쉬운 감정들.... 그리움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시의 토대가 되기도 하는 그 아련한 첫 감정이 평생토록 어떤 감정의 종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첫사랑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이미 지나버린 사랑이다. 첫 마음이자 순수의 자체인 첫사랑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랑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후회가 따를 것이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바람직한 인간관계이다. 지혜로운 삶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순간순간에 영위되는 것이다.
사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늘 처음처럼 지금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ㅡ 『우리詩』2016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