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
아들과 함께 한 경북 영양 여행 - 주실마을과 두들마을/2010. 1. 9~10
명가 이야기를 하다보면, 경주 양동마을은 한 집 건너마다 고등고시 합격자를 배출했고
영양 주실마을은 집집마다 박사 두세 명을 배출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경북 북부지방은 강원도 산골보다도 더 오지로 일컬어져 왔다.
그런 곳에 상상외로 명가들이 많다.
아들과 영양 여행을 하면서 일월산을 등산 후 명가 두 곳을 다녀왔다.
실제로 영양의 전체 인구는 18,000명 정도로 서울 한남동보다 훨씬 적다.
그런데도 도로를 지나다보면 마을 입구마다 친숙한 이름의 생가 표지판이 쉽게 보인다.
특히 영양은 문학이나 학자와 관련된 집안이 많아서 문향의 고향으로 불리운다.
조지훈의 주실마을과 이문열의 두들마을을 차례로 다녀보았다.
경북 영양 지훈詩공원에 잇는 조지훈 동상/2010. 1. 9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은 우리에게 친숙한 '승무'의 청록파 시인 조지훈(본면 조동탁)의 한양조씨가
대대로 명성을 떨치며 지조와 전통을 지켜온 명가마을이다.
일월산 아래에 자리잡아 사방으로 청기, 수비지역 등에 감싸인
경북 북부에서 오지 중의 오지라는 이곳이다.
조선조 도학정치를 외치던 조광조가 훈구파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자
친척이었던 조덕린도 정치를 버리고 이곳으로 피해서 은거하며 터전을 이루었다.
그 후로 급제하는 후손들이 있었으나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정치와 관직에 전혀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다.
결국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문중은 관직을 피해 교육과 학자로서 성공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조선말에 350여명 되던 이 마을 사람들 중 이름을 남긴 학자가 63명이다.
조지훈을 비롯하여 한국 인문학의 대가 조동일, 조동걸, 조동원 교수 등 아직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통계적으로 보면 수도권에서 고액과외를 시켜가며 교육을 시키는 것에 비해
엄청난 비율로 인재를 양성하는 셈이다.
이만하면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문중과는 물어보지도 않고 혼인을 지낸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이 지역에선 뼈대있는 문중이란 말이 그래서 중요했다.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문중은 이 지역에선 주실조씨로 불리운다.
지훈문학관의 조지훈 흉상
그 후손들 중 일반인들에겐 조지훈이 가장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인재들이 더 많다.
조지훈은 호은 종갓집의 아들이다.
우리는 조지훈이 시인인줄로만 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육사가 그랬듯이 조지훈도 펜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고 죽음을 넘나드는 괴로움에 술로 연명하던 때도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종군기자를 하면서 삶의 고비를 넘겼다.
조지훈 부인 김난희 여사의 서화
지훈의 부인인 김난희 여사도 독립운동가의 딸이다.
14명의 박사를 곁에둔 지금은 넉넉히 살아도 될 터이지만 굳이 혼자 살고싶다며
10평 되는 오피스텔에서 검약 이상으로 절제하며 서화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던 사람들이 예전 명가에선 당연했다.
명가라는 것이 그저 명가가 아니다.
지훈문학관
대부분 혼란 속에서 살아날 기회를 보며 잣대를 들이대고 있을 때 이들은 소신대로 행동을 했다
일월산의 조지훈과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육사는 이 고장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 내부
이런 오지에도 많은 명가가 있다.
대학을 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던 길에 옆에 앉은 신사 한 분이 말씀하셨다.
"창문 밖으로 가을 들녘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와 어른들 모습이 보이시나?
저 분들 자제분 중에는 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네.
아직 학생이니 꼭 명심하고 자긍심을 가지게나."
종택 별채
아들이 세세히 둘러본다.
아마도 느끼는 점이 많았으리라.
호은종택 뒤안
명가는 유명인만 나왔다고 해서 명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 인격이 필수다.
문학명가이든 음식명가이든 간에.
주실마을 전경
배모양으로 산골등짝이가 서로 맞닿아 이루어졌다 해서 주실(注室) 혹은 주곡(注谷)이라고 한다.
작은 마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이 참으로 크다.
주실마을에서 30여km 남쪽으로 내려가면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인 재령이씨의 두들마을이 있다.
두들이라는 마을이름처럼 부드러운 큰 언덕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부촌 모습이다.
정부인 안동장씨
병자호란 때 인조의 치욕적인 삼전도 항복에 세속을 버리고 이곳에 터를 잡은 이시명의 후손은
대대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이어 왔다.
특이한 것은 아내인 안동장씨도 가문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해도 나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자녀교육관을 가졌다.
그러한 장씨가 아시아에서 최초인 음식요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써내려간 나이가 일흔이었다.
책이 완성된 후 뒷면에 잘 보관하라는 당부와 함께 첫머리가 '이리 눈이 침침한데'로 시작된다.
음식디미방은 한자어로 그중 '디'는 알 지(知)의 옛말이며,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음식에 관한 책은 있었지만, 모두 한문으로 쓰여졌으며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에 그쳤다.
반면 음식디미방은 예로 부터 전해오거나 장씨 부인이 스스로 개발한 음식 등
양반가에서 먹는 각종 특별한 음식들의 조리법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가루음식과 떡 종류의 조리법 및 어육류, 각종 술담그기를 자세히 기록한다.
이 책은 17세기 중엽 한국인들의 식생활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귀중한 문헌이다.
경북 북부지방은 이렇듯 고유한 씨족문화와 개발이 되지 않은 탓에 고택들이 많다.
이러한 유산들을 발굴하여 보존하는 것이 문화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최선의 방법인 셈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비해 감성이 남다르다는 것은 당연하다.
작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이름을 낸 문인들과 유명인사의 생가 이정표가 도로변을 채우고 있다.
서당은 마을 복판에서 가장 낮은 언덕 아래에 놓여 어른들이 쉽게 자녀의 성장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은 선조가 살던 석계고택은 앞이 탁 트여 거침이 없다.
한옥문화체험관도 설립이 되어 옛문화를 체험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