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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덕고 백두대간 체험학습 4>
4. 지리산 천왕봉 구간
[ 구간소개]
흥덕고 백두대간 6월 17일 4번째 산행은 백두대간의 마지막이자 처음인 지리산 천왕봉구간입니다.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智異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백두산이 흘러서 내려온 산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는 하나의 산줄기로 이어져 있습니다. 바로 백두대간입니다. 하늘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이어진 백두대간의 첫 구간입니다. 장중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산에서 우리의 삶과 문화를 찾아가는 백두대간으로 들어갑니다. 개천문을 지나 하늘의 봉우리 천왕봉에 오릅니다.
Ⓒ하늘 봉우리 천왕봉에 서다/사진 이철승
< 산행 일정 >
-. 산행월일 : 2017년 6월 17일(토)
-. 산행출발 : 2017년 6월 17일(금) 오전 01시
-. 산행코스 : 중산리탐방지원센터-로타리대피소-천왕봉-장터목-하동바위-참샘- 백무동
-. 산행거리 : 약 14km(도상거리)
-. 소요시간 : 약 10시간
-. 난 이 도 : 상하(★★☆)
< 세부 일정 >
04:30 중산리 탐방지원센터 도착/산행 준비 & 스트레칭
04:40 중산리 출발 – 산행 시작
05:50 칼바위
07:20 로터리대피소 - 아침식사
09:20 천왕봉
10:20 장터목대피소 - 점심식사
12:00 하동바위
13:30 백무동 - 산행 마감/스트레칭
백무동펜션식당 - 김치찌개로 뒤풀이
15:30 백무동 출발
19:00 학교 도착 예정
*상기 시간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칼바위의 전설 Ⓒ 이철승
흥덕고등학교 지리산 천왕봉구간 산해의 첫발은 중산리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합니다. 해드렌턴의 불빛을 밝히고 어머니의 산으로 들어가며 천왕봉구간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탐방안내소를 지나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갑니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바닥에 깔린 산자갈을 밝으며 어둠속 숲으로 들어갑니다. 알싸한 새벽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윽한 나무 내음과 함께합니다. 조선건국 설화가 흐르는 칼바위를 지나 조금 오르면 흔들거리는 작은 나무다리입니다. 장터목과 천왕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우측 법계사로 방향을 잡습니다.
이제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과 계단이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망바위까지 오르는 길은 거친 숨과 흐르는 땀과 함께합니다. 가끔 다리쉼을 하고 체력 안배를 하며 자기 페이스를 조절하며 오릅니다. 수차례 휴식 후 망바위 이정표입니다.
망바위에 올라섭니다. 시원한 조망에 가슴이 후련합니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영신봉에서 이어진 낙남정맥의 장쾌한 능선을 눈에 담습니다. 다시 배낭을 메고 오르막을 오르면 문창대입니다. 하늘봉우리 천왕봉이 보이고 법계사가 지척입니다.
로타리대피소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법계사를 지납니다. 철계단이 이어져 있고 넓은 바위를 지나 개천문으로 향합니다.
천왕봉은 하늘을 여는 문인 개천문과 하늘로 통하는 문인 통천문을 지나야만 오를 수 있는 하늘의 봉우리입니다. 하늘 문을 열고 하늘의 봉우리로 오릅니다. 발아래 펼쳐진 수많은 산들의 중첩을 보면 왜 하늘 봉우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늘문을 열다/개천문/사진 이철승
바위벽 아래 바위틈에서 틈에 졸졸 물이 흐릅니다. 바로 남강의 발원샘 천왕샘입니다. 시원한 석간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입니다. 바로 위로 천왕봉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봉우리는 쉽게 오르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코가 땅에 닿을 듯한 오르막과 계단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념무상 발걸음을 옮깁니다. 한걸음한걸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하늘의 봉우리에 닿습니다. 천왕봉입니다. 백두에서 흘러내린 봉우리입니다. 백두대간의 시작입니다.
천왕봉에 서면 제석봉, 촛대봉, 영신봉, 반야봉으로 이어진 백두대간 마루금이 유장하게 펼쳐집니다. 중봉을 거쳐 웅석봉으로 이어진 신백두대간 능선도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산그리메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백두대간이 그려내는 최고의 예술품입니다. 백두대간 하늘봉우리의 기운을 가득 담고 천왕봉과 아쉬운 작별을 합니다.
Ⓒ제석봉에서 바라보는 지리 주능선/사진 이철승
제석봉으로 이어진 마루금은 고사목과 함께 걷는 길입니다. 푸른 초원과 구상나무, 고사목 그리고 파란하늘이 그려내는 제석봉의 풍경은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환상 그 자체입니다. 바람이 전해주는 떠들썩한 이야기 소리가 들리면 장터목입니다. 장터목에서 함께 한 친구들과 점심 나눕니다.
맛있는 점심으로 기운 차리고 장터목을 내려섭니다. 화장실 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하동바위로 이어진 숲으로 들어섭니다. 조릿대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서면 하동바위입니다. 옥상황제가 금강산 1만 2천봉을 만들 때, 전국의 기암괴석이 금강산으로 향했는데 하동에 있던 바위도 그 소식을 듣고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1만 2천봉이 다 찼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 함양방면 지리산 자락에 멈춰 섰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흔들거리는 출렁다리를 건너면 달큰한 참샘이 콸콸콸 시원한 샘물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입니다. 흐르는 땀방울이 샘물 한 모금에 금세 자취를 감춥니다. 넓적한 돌이 깔려진 길을 한참을 걷다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보이고 곧 백무동입니다. 백무동에서 어머니의 산과 작별합니다.
[ 산행 준비물 ]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자켓, 우의, 스틱, 물통, 여벌 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렌턴, 도시락 2식(아침, 점심) 등
[ 산행 자료 ] 지리산
[지리산] 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가 최초인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 되어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다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다.
Ⓒ산들이 그려내는 동양화/사진 이철승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은 ‘청학동 변증설’에서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말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
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태동하였던 것이다.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도 그랬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운동도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의 호칭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과 의로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제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 조종도, 정인홍, 김효원, 최영경 등의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란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 모성적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 지리산 이름의 뜻
1. 신라 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2. 이조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4.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칼바위]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서 은신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를 찾아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여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러지며 이곳까지 날아와 꽂히면서 하늘을 찌를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망바위] 해발 1068m
마치 경계병처럼 망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다한다. 조망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라고도 한다. 망바위에 오르면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산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법계사] 1450m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 해발 1450m에 있는 남한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절이다.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했고,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창하였다. 그 뒤부터 수도처로 알려져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탔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재건을 못하고 토굴로 명맥을 이어오다 최근에야 법당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법당 왼쪽에 거대한 암석을 기단으로 세워져 있다. 지리산 7대 사찰로 꼽히며 사찰 뒤로 암봉과 문창대가 보인다.
법계사는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었다. 그 첫 번째가 고려 무왕 6년 9월에 남원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도망가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불태운 것(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 두 번째가 조선시대 재건돼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되던 중 1908년 지리산이 항일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일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화마에 휩싸였다. 세 번째는 1948년 여수반란 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버린 것이라 한다.
[개천문]
천왕봉 서쪽의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으로 여겨진다. 통천문처럼 신비스럽고 위용을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마치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과거에는 왼쪽은 물론 오른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바위기둥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오른쪽의 기둥은 붕괴되어 없어지고 왼쪽에만 높이 10m의 문설주가 있다.
통천문이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보면, 개선문보다는 개천문이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타당해 보임.
[천왕샘] 1800m
남강의 발원지.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6m 정도의 바위 밑에서 방울방울 흘러 모인 샘물로, 1977년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석공을 동원해 물이 고일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지만 가물 때는 쉽게 말라버리기 일쑤다.
깍쟁이처럼 바위에 졸졸 흐르는 정도의 양이지만, 남강의 첫 물. 강이 되고 바다가 될 그 시초다.
◆[천왕봉] 1915.4m
남한 내륙의 최고봉.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다. 동쪽으로 개천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조식선생의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제석봉] 1808m
천왕봉 서쪽에 있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정상부근은 느슨하고 봉긋한 형태다. 과거에는 고사목이 즐비하여 별난 경치를 자랑했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수도 많이 줄었다. ‘제왕이 자리했다’는 의미이다.
[장터목]
천왕봉의 아래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개 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 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소지봉]
종이를 태우는 봉우리란 뜻으로 백무동계곡의 백무(百巫), 즉 많은 무당들이 제를 지낸 뒤 소지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하동바위]
높이 10m정도의 바위벽, 바위 중간에 작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함양에 있는 하동 바위는 또 다른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지리산 장터목에 장이 서던 날이었다. 함양고을 원님과 하동고을 원님이 지리산을 둘러보기 위해 장터목으로 향했다. 풍류를 즐겼던 두 원님은 우연한 만남에 내기 장기를 두었는데 하동 원님이 이겼다. 내기에 진 함양 원님은 놀려줄 요량으로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바위를 가져가라고 했다. 하동 원님은 후일 사람들을 동원해서 가져가기로 하고, 우선 바위 이름을 하동사람들의 바위란 뜻으로 “하동바위”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이름이 굳어져 하동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백무동] 함양군 마천면에 위치
예전부터 천왕봉에 기도를 올리려는 무당들이 모여드는 골짜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백무동이란 이름도 백명의 무당이 살았다는 백무(百巫)에서 전주 이씨가 들어오면서 백무(百武)로 그 뜻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안개가 많이 껴서 백무라고도 한다.
자료출처 : 아름다운소통, 한민족대백과사전, 국립공원관리공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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