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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문헌은 한국고전 번역원의 글을 참조 인용하였습니다.)
옛 역사에 말하는 만승(萬乘)의 의미는 무엇 입니까? 네이버 백과에서 말하는 만승(萬乘)의 의미를 보면,
"승(乘)은 병거·전차(戰車)의 뜻이다. 1만 대의 병거를 갖출 수 있는 광대한 영토를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 하며, 그 영주를 만승지군(萬乘之君)이라 하였다. 중국 주(周)나라 때의 천자(天子)는 자기 직할영토에서 1만 대의 병거를 갖추어야 하는 제도가 있었으므로 만승은 천자의 호칭이 되었다. 천승(千乘)은 병거 1,000대를 갖출 수 있는 제후라는 뜻이며, 그 영지를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 하였다. 백승지가(百乘之家)는 병거 100대를 갖출 수 있는 가문이라는 뜻이며, 경(卿)·대부(大夫)의 지위를 가리켰다."라고 되어 있고,
고문에서 말하는 만승의 의미를 보면,
상촌선생집 제51권 구정록 상(求正錄上)
주(周) 나라는 사마법(司馬法)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척(尺)이 1보(步)이고, 1백 보가 1묘(畝)이고, 1백 묘가 1부(夫)이고, 3부가 1옥(屋)이고, 3옥이 1정(井)이고, 10정이 1통(通)이고, 10통이 1성(成)이고, 10성이 1종(終)이고, 10종이 1동(同)이니 1동은 사방 1백 리이고, 10동이 1봉(封)이고, 10봉이 기(畿)이니 1기는 사방 1천 리이다. 그러므로 구(丘)에는 융마(戎馬) 1필(匹)ㆍ소 3두(頭)가 있게 되고 전(甸)에는 융마 4필ㆍ병거(兵車) 1승(乘)ㆍ소 12두ㆍ갑사(甲士) 3인ㆍ보졸(步卒) 72인이 있게 된다. 따라서 1동(同)은 사방 1백 리로서 합계 1만 정(井)이 되니 융마 4백 필ㆍ병거 1백 승이 있게 되는데, 이는 경대부(卿大夫)의 채지(采地) 가운데 큰 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를 일컬어 ‘백승지가(百乘之家)’라고 한다. 1봉(封)은 사방 3백 66리로서 합계 10만 정이니 최소한 병부(兵賦)로 6만 4천 정ㆍ융마 4천 필ㆍ병거 1천 승을 낼 수 있는데, 이는 제후의 봉토 가운데 큰 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를 일컬어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고 한다. 천자의 기내(畿內)는 사방 1천 리로서 합계 1백만 정이니 최소한 병부로 64만 정ㆍ융마 4만 필ㆍ병거 1만 승ㆍ융졸(戎卒) 70만 인을 낼 수 있는데, 이런 까닭에 천자를 ‘만승지주(萬乘之主)’라고 하는 것이다.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계사년 하 만력 21년, 선조 26년(1593년)
○ 왜추(倭酋) 등이 명 나라 조정에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태평 세상에는 오제(五帝)가 지위를 서로 주었다 하니, 어찌 중화(中華)에만 임금이 있으며 어찌 이적(夷狄)엔들 임금이 없으리요. 넓은 천지에 한 임금이 홀로 차지할 것이 아니요, 넓은 우주에 나라마다 지킴이 있소. 요순(堯舜)이 덕이 있자, 사이(四夷)가 와서 조공(朝貢)하였고, 탕무(湯武)가 인(仁)을 베풀자 팔방에서 공손히 예를 갖추었소. 대개 천하는 천하의 천하이지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닌 것이오. 나는 경략된 왜[經略之倭] 한 구석의 나라에 거하여 성지(城池)는 6척에 차지 못하고 강토는 천리도 부족하지만 항상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품었으니, 만족할 줄 아는 자는 항상 만족함을 아는 것이오. 폐하(陛下)는 중화의 주인이고 만승(萬乘)의 임금이 되었으니, 높은 임금인데도 항상 부족하다는 마음을 품고 다른 나라를 멸할 뜻을 행하여 걸주(桀紂)의 군사를 일으켜서 신의 지경을 침노하여 물[水]로 와서 누르매 항복하기가 장차 임박하였소...............
현종 5년 갑진(1664,강희 3) 6월11일 (임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갔다. 여러 승지들이 승정원에 계류 중인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였고, 옥당도 함께 들어갔다. 승지들이 공사를 다 읽은 뒤에 교리 장선징이 나아가 《통감(通鑑)》을 강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 위교(渭橋)에 나와 돌궐(突厥)을 방비한 대목에 이르러 선징이 아뢰기를,
“태종이 돌궐의 힘으로 천하를 얻어 신하로서 오랑캐를 섬겼고, 또 만승(萬乘)의 존귀한 몸으로 가벼이 편교(便橋)에까지 나아갔으니, 후세에서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종이 처음에는 신하로서 돌궐을 섬기긴 했지만 끝내 돌궐을 신하로 삼았으니, 이는 능히 하기 어려운 일이다. 태종이 친히 위교로 나갔던 것은 곧 용병(用兵)의 계략이었으니, 상도(常道)로 논할 수 없다.”
하자, 우승지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태종에게는 영특하고 호걸스러움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고, 안으로 행실이 바르지 못했으니 이 점이 바로 선유들이 허여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하였다.
위의 상촌집의 기록에서는 만승의 진정한 그 의미를 말하고 있으며 난중잡록의 기록에서는 "(황제)폐하(陛下)가 중화의 주인이고 만승의 임금"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황제)폐하(陛下)=중화의 주인=만승(萬乘)" 이란 등식이 성립됩니다.
또 위의 현종실록에서 당대의 천자인 당태종(唐太宗)은 만승(萬乘)의 존귀한 몸 이므로 당대의 천자인 당태종(唐太宗)=만승(萬乘)이란 등식이 성립됩니다. 그 밖의 고문의 여러 기록들에서 만승(萬乘)의 의미는 만승천자 즉 황제를 의미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는 만승의 나라일까요? 천승의 나라 일까요? 조선왕조실록,학자들의 문집의 기록들을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만승의 기록과 천승의 기록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같은 임금에 대해서 어느 기록에서는 만승의 임금이라 하고 어느 기록에서는 천승의 임금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기록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기록인 "상촌집"의 기록에서 분명히 만승의 의미는 천자를 의미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학자들이 그토록 신중히 하는 유교적 가치관 질서를 말로만 따르며 지켰단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록의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누군가가 역사의 기록에 손질을 가했다는 증거 입니다. 이와 관련 다음의 기록을 보면,
경세유표 제7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전제(田制) 9
내가 일찍이 건륭(乾隆 : 淸 高宗의 연호, 1736~95) 임자년(1792) 무렵에 비변사에서 기록한 서울과 외방의 유고전(留庫錢) 액수를 보니, 병조ㆍ호조ㆍ선혜청(宣惠廳) 및 다섯 군문(軍門)에 유고된 돈이 통계 100만 5천 240냥인데, 내수사(內需司)와 장용영(壯勇營) 돈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사도(四都)와 팔도(八道) 순병(巡兵)과 수영(水營)의 휴번전(休番錢), 칙수전(勑需錢) 및 각 항목의 유고전도 통계 100만 2천 350냥이었다. 당당한 만승(萬乘)의 나라의 그 부고(府庫)에 저장된 것이 이 같음에 불과하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석담일기 하권(石潭日記卷之下) 만력 구년 신사(萬曆九年辛巳) 1581년(선조 14)
○ 성혼(成渾)이 종묘령(宗廟令)으로써 배은(拜恩)하였는데, 임금은 연은전(延恩殿)에서 불러 보고 묻기를,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 되었다. 대도(大道)의 요령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니, 혼은 고금(古今)의 제왕들이 학문하던 공효로써 대답하였다. 임금은 다시 고금의 치란(治亂)과 현재 정사를 잘하고 못하는 것과 그리고 백성을 구제할 술책을 물으니, 혼은 물음에 따라 답을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얼굴을 보려고 하니 부복하지 말아라,” 하므로, 혼이 일어나 앉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를 어둡다고 하지 말고 힘써 머물면서 나의 허물을 말하여 달라.” 하였다. 그러나 혼은 이날 상소를 올려 물러가려고 하니, 임금은 좌중에서 그 소문(疏文)을 가져다 보고서, “어째서 물러가려고 하는가?” 하고, 여러번 위로하고 타일러 만류시키고는 성혼에게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시종하는 신하가 혼(渾)이 서울에 있으면서 양식이 떨어진 것을 아뢰고는 녹봉을 지급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은 좌상 노수신(盧守愼)에게, “이 말이 어떠하오?” 물으니, 수신이 대답하기를, “녹봉을 주더라도 불가하지는 않을까 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에, “녹봉을 지급하라.” 명하였다. 이이(李珥)가 듣고 말하기를, “주급(周急 빈곤한 것을 동정하여 구제하는 것)하셨으면 받겠지마는 하사하셨다면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호원(浩源)이 녹봉을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였다. 김우옹(金宇顒)이 이이의 이 말을 듣고는, 임금에게 아뢰어 녹봉으로 지급하지 말고 특별히 주급(周急)하는 뜻으로 쌀과 콩을 하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고 호조에 명하여 쌀과 콩을 실어보냈다. 혼이 상소하여 사양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주급(周急)하는 뜻은 옛 사람의 도(道)다. 가히 사양하지 말라.” 하므로, 혼은 어쩔 수 없이 받았다. 호조에서 쌀과 콩을 각각 5석씩을 지급하자 청하기에 이이(李珥)가 호조 좌랑 송대립(宋大立)을 보고 말하기를, “주급하는 곡식이 어째서 그렇게 약소하오?” 물었더니, 대립이 대답하기를, “만일 많으면 성군(成君)이 미안하게 여길 것이므로 이렇게 하였소.” 하였다. 이이는 말하기를, “이번의 일은 근대에 없던 일이므로 마땅히 후일의 성전(盛典)으로 드리워질 것인데, 만승(萬乘)의 나라에서 어진이에게 5석의 쌀을 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인색하지 않겠소?” 하니, 대립은 대답하지 못했다.
약천집 제13권 의(議)
우리나라의 병력이 비록 지극히 피폐하고 기율(紀律)이 몹시 해이해졌으나 당당한 만승(萬乘)의 나라로서 요해와 심양 사이를 지나가는 도둑 떼의 소식을 듣고는 국내에서 먼저 제풀에 놀라고 동요하여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질 듯한 형세가 있으니, 이는 진실로 천하와 후세에 이러한 소문이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용재총화 제1권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한 뒤에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鷄龍山) 남쪽의 지세를 보고 이미 경읍(京邑)의 규모를 살폈으나 얼마 있지 않아 이를 중지하고 다시 한양에다 정도(定都)하였다.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예전부터 공암(孔岩)이 앞에 있단 말이 있는데, 삼각산(三角山) 서쪽 영서역(迎曙驛)들이 바로 좋은 곳이 될 것이다.” 하였으나 뒤에 다시 이를 살펴보니, “산이 모두 등지고 밖을 향해 달아나는 형세이므로, 백악산(白岳山)의 남쪽과 목멱산(木覓山)의 북쪽이 제왕 만승(萬乘)의 땅으로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여 이곳으로 정하였다.
우계집 제3권 장소(章疏) 2 선조
평안도는 10년 기근(饑饉)이 든 끝에 흩어져 도망하여 곤궁한 백성들이 안으로는 만승(萬乘)의 임금을 받들고 밖으로는 군대의 군수(軍需)를 공급하고 있으니, 백성들의 힘이 부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율곡선생전서 제15권 잡저(雜著) 동호문답(東湖問答)
옛날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 회계(會稽) 땅에 머물러 있었으니 지극히 미약하였다 할 것이다. 그러나 10년 동안 백성을 양육하고 10년을 가르쳐 결국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를 강하게 만들어 강한 적을 멸망시켰는데, 하물며 우리는 당당한 만승(萬乘)의 나라이니 기르고 가르치는 도리를 다하면 어찌 국가가 태평하고 민생이 풍족하여 풍속을 크게 진흥시키는 효과가 없겠는가.
태종 13년 계사(1413,영락 11) 9월9일 (을유) 대간이 어가를 호종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였다. 상소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거둥(擧動)은 인군(人君)의 대절(大節)이므로 중하지 않을 수 없으며, 대간(臺諫)은 인주(人主)의 이목(耳目)이므로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태조가 천운(天運)에 응하여 개국(開國)하고, 전하에 이르러 예악(禮樂)이 모두 갖추어지니, 조선 만세의 규범이 바로 금일(今日)에 있는데, 수백 리의 먼 곳에 거둥하여 10여 일 동안 오래 계시면서 그 시종(侍從)하는 것을 없애어서 후일에 경거(輕擧)하는 단서를 열겠습니까? 공손히 생각건대, 전하는 굳세고 밝고 어질고 지혜로움이 천성(天性)에서 나와, 모든 하시는 일이 문득 예(禮)에 합하니, 대간(臺諫)에서 시종하는 것이 진실로 보익(補益)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에서 구실(口實)을 삼을까 두렵습니다. 올봄에 어가(御駕)가 평주(平州)에 거둥하였다가 드디어 해주(海州)로 가면서 대간(臺諫)의 시종(侍從)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신 등이 그윽이 헤아리건대, 대간(臺諫) 1원(員)이 가는 데 서도(胥徒)·복예(僕隷)의 수가 많아야 10인을 넘지 않으니, 만승(萬乘)의 행차에 번거롭고 간단한 형세가 10인의 더 보태고 빼는 데에 관계되지는 않습니다. 신 등이 어찌 감히 목전(目前)의 것만을 도모하고 후세(後世)의 염려를 하지 아니하여 지극한 덕(德)에 누를 끼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도록 허락하여 첨시(瞻視)를 존중하고 만세에 규범을 내리소서.”
사간원에서도 또한 상소하여 어가를 호종하도록 청하였으나, 모두 들어 주지 않았다.
태종 18년 무술(1418,영락 16) 8월9일 (병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행 성균 대사성(行成均大司成) 조용(趙庸) 등이 석전제(釋奠祭) 때문에 성균관(成均館)에서 치재(致齋)하다가 학관(學官)과 학생(學生)들과 같이 상소하였다.
“엎드려 보건대, 영락(永樂)16년 8월 초8일에 주상 전하께서 보위(寶位)를 왕세자에게 내선(內禪)하려 하시니 조야(朝野)의 신하로서 놀라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신 등은 간절히 생각하건대, 내선(內禪)하는 일은 역대(歷代)에 드물게 보는 바로서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태종(太宗)에게 넘겨준 것은 임호(臨湖)의 변에서 나왔고, 송(宋)나라 광종(光宗)이 영종(寧宗)에게 넘겨준 것은 위독한 병을 의구(疑懼)한 뒤에 나왔습니다. 대개 이와 같은 유(類)는 변고(變故)가 절박하여 모두 부득이한 것이었으나, 후세에 논의하는 자가 오히려 취하지 않았습니다.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을 시험한 것은 재위한 지 70년이나 되어서 늙은 나이에 정사에 부지런하기에 귀찮았던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거섭(居攝)하게 하였을 뿐이요, 일찍이 제위를 명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왕(文王)같은 성군은 나이가 90세를 넘겼고, 무왕(武王)이 동궁에 있은 것도 또한 80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대위(大位)를 선양(禪讓)하지 않은 것은 천하 만세의 군신(君臣)과 부자의 대륜(大倫)을 보여 주려는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 총명하신 성지(聖智)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다스리어 동식물(動植物)에 이르기까지 모두 밝은 은택(恩澤)에 젖는데, 어찌 금일을 도모하기를 갑자기 이와 같이 하십니까? 또 전하께서 연세가 겨우 중년(中年)이고 몸이 강녕(康寧)하여 부지런하고 강건(康健)하기가, 요(堯)임금의 나이가 많아서 권태(倦怠)하던 것과 문왕(文王)의 나이가 1백 세이던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데, 이에 태평 무사(太平無事)한 날을 당하여 만승(萬乘)의 짐을 벗어 버리고자 하시니, 신 등은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뜻을 내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종 31년 기사(1449,정통 14) 2월9일 (경신)
유학(幼學) 최진현(崔進賢)이 상서(上書)하기를,
“강릉부 진부현(江陵府珍富縣)을 강무장(講武場)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음은 신이 갖추 아옵니다. 예전 우리 태종께서 여기에 거둥하신 것은 놀고 사냥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온데, 뒤에 드디어 강무하는 곳으로 만드옴은 우리 태종의 본의가 아니옵니다. 근래에 길이 험하고 멀어서, 만승(萬乘)으로 가서 순행할 땅이 아니므로, 강무하는 곳을 고쳐서 망패(網牌)를 설치하는 장소로 삼아, 새와 짐승의 해를 없애고, 건두(乾豆)의 자료를 준비하게 하여, 공사(公私)가 편리하게 하려고 하였사오나, 해마다 망패가 내려가면, 여염(閭閻)을 침해하여 개와 닭이 편히 쉬지 못하여, 소란스러운 폐단이 대가(大駕)를 공돈(供頓)하는 비용보다 심하옵니다.
인조 14년 병자(1636,숭정 9) 9월22일 (계해)
우리 나라 팔도의 지방과 백성은 만승(萬乘)의 부(富)와 천리의 크기에 그치지 않는데 자강하지 못하고 도리어 위축되어 오랑캐 보기를 호랑이처럼 무서워하니, 맹자(孟子)가 이른바 ‘천리로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능히 우리 백성의 분발함을 인하여 충의심을 고취하여 중국으로 향하고, 현명한 보좌를 얻어 국정을 위임하고, 적심(赤心)을 미루어 사람들 마음속에 두면, 사람들이 자기 재능을 다하고 병사들이 사력을 다할 것이니, 일개의 미친 오랑캐를 무어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효종 6년 을미(1655,순치 12) 5월11일 (갑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근본을 맑히고 악의 근원을 막되 백성을 아끼는 것은 절용(節用)에서 시작하고 절용은 생약(省約)에서 시작하여 궁중의 용도(用度)와 군국(軍國)의 모든 수용(需用)을 다 조종 때의 옛 규례와 같이 하소서. 재물이 한없이 들어가는 것을 조금 멈추고 국가의 정항(正項)인 공납(供納)만으로 쓰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사치의 해독은 천재(天災)보다 심한데, 말속(末俗)이 이미 투박해져서 참람하여도 금하지 않으니, 몸소 거친 옷을 입는 교화를 숭상하여 사치한 풍속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대저 오래 쇠퇴한 데에서 약세를 만회하여 중흥의 큰 공적을 세우는 것이 어떠한 사업인데 터덜터덜 느릿이 걸어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사의(私意)를 구차히 쾌하게 하고 대계(大計)에 소홀히 하여, 본심을 간직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 허물을 듣기 싫어하고 일을 하는 데에는 먼저 백성의 재물을 다 씁니다. 잗단 오락에 빠져 금원(禁苑)이 놀이를 구경하는 마당이 되고 사화(私貨)를 불려 내사(內司)가 도피하는 자를 모이게 하는 수풀이 됩니다. 인척을 높여서 관방(官方)이 어지럽고 희노(喜怒)를 경솔히 써서 상벌이 어지러우며, 아첨이 풍속이 되어 사신(私臣)이 등용되고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날로 성하여 덕을 숭상하는 것이 쇠퇴합니다. 깊은 궁중에서 한가히 계시는 동안을 신이 아는 바가 아니나 가무와 여색, 술이 또한 어찌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증하겠습니까. 뵙건대, 전하께서는 불세출의 자질로 큰일을 할 때가 되었고 만승(萬乘)의 자질을 가지고 여러 대를 이어온 기업(基業)을 이어 받으셨으므로 비상한 공적을 머지않아 기대할 수 있는데, 지(志)가 기(氣)에 빼앗기고 의(義)가 이(利)에 가리워서 지사(志士)가 해체되고 백성이 실망하게 하십니다. 전국 때 말세의 임금이 단단히 마음먹고 오래 생각하여 세운 것이 있었던 것만 못하시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현종개수실록 1년 경자(1660,순치 17) 7월16일 (기사)
신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선정(善政)을 베푼 것이 많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신하들의 기대에는 석연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신처럼 어리석고 졸렬한 자질로도 깊이 우려하고 크게 걱정하는 것은 전하께서 혹 교태(交泰)의 뜻을 어겨 점차 비폐(否閉)의 상(象)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소 신료들에 대하여 지성으로 도와주기를 구하는 뜻이 없어 대신(大臣) 가운데는 고굉(股肱)의 임무를 부탁할 사람이 없고 근신(近臣) 가운데는 심복(心腹)의 직임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억지로 편안하고 구차스럽게 용납되기만을 생각하여 마음을 다하는 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책이 묘당에서 강론되지 않고 얼굴을 바로하여 과감히 말하는 기풍이 대각에서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계옥(啓沃)하여 선언(善言)을 진달하는 직무도 경연에서 끊어졌는가 하면 백관과 유사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태만하여 직무를 폐기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상하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 만사가 날로 실추되고 풍속이 날로 투박해지고 조론(朝論)은 날로 비하되고 사기(士氣)는 날로 저상되며 민생(民生)은 날로 곤궁해지고 국세(國勢)는 날로 떨어집니다. 당당한 만승(萬乘)의 나라가 누적된 병이 오래되어 쇠하여진 탓으로 혈맥이 시들어 금방 목숨이 끊길 것 같은 사람과 같아서 청명하고 성대하게 분발하고 진작시키는 상(象)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의 기상을 살피시건대 형통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비색에 가깝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어찌 군신들만의 죄이겠습니까. 또한 전하께서 호오(好惡)를 치우치게 따르심에 따라 이런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황당하기만 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제7권,율곡 이이의 석담일기 하권(石潭日記卷之下),율곡선생전서,남구만의 약천집,성현의 용재총화,성혼의 우계집,태종실록,세종실록,인조실록,효종실록,현종실록에서
조선은 만승의 나라 즉 만승천자의 나라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태종실록의 기록에서는 태종임금의 행차가 만승의 행차라 기록하고 있고, 또 태종임금이 보위를 물려주려는 그 행위에 대해 만승의 짐을 벗으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태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종임금은 완연한 만승천자 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 다음의 기록을 보면,
태종 1년 신사(1401,건문 3) 3월18일 (정축)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가 상서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전하께서 천승(千乘)의 지존(至尊)으로 아래로 필부의 용맹을 본받으시어 친히 궁시(弓矢)를 차고 숲속에 드나드시니, 신 등은 간절히 전하를 위하여 위태롭게 여깁니다.”
위의 기록에서는 태종임금이 천승의 지존 즉 제후국의 왕 입니다. 태종실록의 어느 기록에서는 태종임금이 만승천자라 기록하고 있고 어느 기록에서는 천승 제후라 기록하고 있으니 이처럼 기록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달리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태종 1년은 서기 1401년 입니다. 이 당대에 조선의 태조임금은 태상왕으로 생존해 있었고 또 조선의 정종임금 또한 상왕으로 생존해 있었습니다.
즉 이 시기에 위로는 임금이 두명 이므로 정식으로 천자가 아니므로 천승지존이라 했을수도 있다는 저 개인의 사견으로 추론해 볼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또 위의 기록에서 병자호란 그 당대 혹은 그 후대의 기록인 인조실록,효종실록,현종실록,남구만의 약천집,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제7권의 기록에서 이 당대는 소위 청(淸)때이며 조선은 청에 항복이라는 굴욕을 겪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이 당대의 조선은 만승의 나라 즉 만승천자의 나라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해가 둘 일수는 없습니다. 전제군주 시대에 조선이 사대를 하는 나라가 명이며 청인데 조선은 스스로가 만승천자국이라 말합니다. 참으로 황당하기만 합니다. 사대를 하는 만승국은 무엇이며 사대를 받는 만승국은 무엇입니까?
조선이 만승국의 그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대를 하는 나라에게는 스스로가 천승국이며 천승제후국이라는 일관성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조선이 당당한 만승천자국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조선이 사대를 한 명이며 청의 본질은 조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관련하여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은 변방 오랑캐의 반란사건이었기에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라 기록하지 않고 병자년에 일어난 호란(胡亂) 즉 오랑캐들의 반란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결과에 대해 현재의 역사에서는 조선이 청에 항복하여 제후국이 되었다지만,실은 제후국이 되지도 않았으며 청대 이 당대에도 조선은 만승천자국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 하였기에 인조실록,효종실록,현종실록,남구만의 약천집,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제7권의 기록에서 조선이 당당한 만승천자국이라 기록을 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보면,
성호사설 제17권 인사문(人事門) 일본 충의(日本忠義)
관백은 가장 동쪽 끝에 있으면서 일찍이 왕(王)이라고 일컫지 않고 정이 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동북쪽에는 하이국(蝦夷國)이 있는데, 그 땅은 북쪽으로 돌아 흑룡강(黑龍江) 밖에까지 연접하였고, 사람들은 심히 영악(獰惡)하고 독살스러워 제어하기 어렵기가 흑룡(黑龍)의 대비달자(大鼻撻子 서북변의 오랑캐)와 같다. 그 정이(征夷)라고 한 것은 이 따위를 진압하기 위함이니, 중국이 연경(燕京)에 도읍함과 같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일본에 있어서 일본의 관백의 의무는 심히 영악(獰惡)하고 독살스러운 하이국을 제어하는데 있기 때문에 왕(王)이라고 일컫지 않고 정이 대장군이라고 했다고 했으며 이 관백=정이대장군의 역할이 중국이 연경(燕京)에 도읍함과 같다고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저작인 다산시문집의 기록을 보면, 황제의 수도=도읍은 동경,서경,남경,북경 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조선의 역사에 대입을 시켜보면 조선에도 동경,서경,남경,북경등과 중경,상경이 더 있습니다. 이를 성호사설의 기록에 또 대입하여 보면,
북경의 역할은 일본의 경우 처럼 관백=정이대장군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조선의 역사에서 북경 지역은 조선의 제후로서 일본의 경우 처럼 관백=정이대장군이었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명(明)이며 청(淸)으로 만들어 조선의 역사를 축소,왜곡하였던 것입니다.
역사에서 북경은 황제국도 아니며 조선의 일개 관백=정이대장군의 역할의 군벌 제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즉 청은 만주족 혹은 조선의 북인 세력 혹은 조선의 북인세력과 만주족 연합의 군벌제후에 불과하며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병자호란이며
병자호란 이후에 이들이 얻은 이득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북경지역에 대한 완전한 독립적인 지위와 중조(中朝)에 대한 권문세족적인 세도정치라 생각됩니다.
병자호란 이후에 중조의 세력은 그 힘을 크게 상실했지만 조선은 여전히 중조의 역할을 하였기에 인조실록,효종실록,현종실록,남구만의 약천집,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제7권의 기록에서 조선이 당당한 만승천자국이라 기록을 하였던 것이고 또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의 임금의 사당은 여전히 천자(天子)의 사당인 칠묘(七廟)=구묘(九廟)이었으며,일부 지극히 제한된 기록이지만 조선의 효종 임금이 쓰던 관모는 천자의 관모인 통천관이라 기록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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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찾아주셨네요..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무한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