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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게 한국사의 흐름을 정리한 원고를 올립니다. 부족한 점을 비판하여주세요.
한국문명사 강좌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서장
1.1 역사의 대문 앞에서
본고는 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에 와서 한국문화의 성격과 그 역사적 변천과정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한국역사의 줄거리와 특성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한국은 지금으로부터 110여년 전 서양인에게 “숨겨진 나라(은둔국)”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 한국인은 연간 1000만명이 해외 유명한 곳을 관광한다. 이제 한국은 감추어진 나라가 아니라 세계사를 이끌어가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한국은 분단국가로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지만 한국인은 전쟁을 크게 염려하지 않고 있다. 이는 평화를 지켜온 보이지 않는 역사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인터넷 강국, 경제대국, 민주국가의 화신, 올림픽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활발한 체육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화려한 현재가 있기까지에는 슬프고 아픈 험난한 역사가 있었다. 100여년 전 한국은 이웃나라 일본에 식민지로 전락되어 주권을 잃어버리고 민족은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갖은 수난을 당하였다. 세계2차대전의 전범국가인 일본제국주의는 한국민족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애려는 정책을 실시했다. 한국말과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한국역사를 왜곡하여 세계에서 열등국가와 문화적 창조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식으로 역사를 날조했다.
한국민족은 1919년 평화적인 3.1 만세운동을 일으켜 동방의 불빛이 꺼지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 상햐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국내외 투쟁을 주도했다. 1945년 일본제국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았으나 공산주의 이념이 확산되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와 분쟁이 일어나는 최첨단지역이 한국이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일본군을 축출한다는 명분으로 북위 38선을 경계로 진주하였다. 한국의 장래가 이들에 의하여 조종되어 새로운 국가건설이 평탄치 않았다.
유엔의 감시 하에 치러진 민주선거가 38선 이남에서만 치러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동시에 북쪽에서는 공산주의 국가인 조선인민민주주의 국가가 세워졌다. 1950년 북한의 침입으로 4년간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미국을 포함한 유엔 16개국이 대한민국을 지원했다. 중공은 북한을 지원했다. 1953년 휴전으로 전쟁의 포성은 멈추었으나 남북분단은 고착돠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가 되었다. 전쟁은 100만명 이상이 전사나 실종되었고, 1000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으며, 경제 상태는 세계의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되어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런 상태에서 한국은 산업혁명을 최단기간에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전쟁의 위협 속에 성장한 독재정권을 타도하여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한국은 현대사에서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
그런 역사적 성취의 저력은 무엇일까? 이는 한국의 역사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것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지나온 과거를 연구 대상으로 하지만 그 종국적 관심은 현재의 우리와 그리고 내일의 역사창조에 있다.
지금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세계를 자유롭게 다니지만 옛날에는 한 지역에 태어나면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리적으로 큰 제한을 받았다. 한국사의 무대는 현재의 남북한을 포함한 한반도만이 아니라 수천년간 만주대륙이었다. 한반도로 국경선이 확정된 것은 600여년 전이다. 현대의 한국인의 심성에는 선조들이 광활한 만주대륙에서 말을 달리던 모습과 상상력을 소유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 고분 벽화와 고구려 시조의 신화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며, 우리나라 산맥의 중심축인 백두대간의 정수리인 백두산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역사란 커다란 강물과 같아 그 나갈 방향이 스스로에게 있고 인간이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역사에는 우리가 구체적, 분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역사에서 변화된 것만을 주로 살펴보지만 지속되는 것이 더욱 많다. 한 시대를 주도했던 사상이 다른 사상으로 바뀌면 그 이전의 사상은 일반 사람들의 사상으로 가라앉아 지속된다. 따라서 현재 한국인의 심성과 생활 속에는 우리나라가 아주 먼 옛날 하늘임의 후손이 내려와 다스렸다는 신화, 고대의 무속적 신앙과 불교적 신앙, 풍수지리적 사상, 유교적 신념, 성리학적 이념 등이 알게 모르게 전해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근대화 이전까지의 역사를 다루겠다. 현재의 한국을 심층적으로 알기 위해 역사여행을 떠나보자.
1-2. 한국의 지리적 특색과 인구
역사는 일정한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지리는 인간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다. 서해와 남해에는 3,900여개의 섬이 있다. 이는 십만년전에는 중국과 한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었다. 서해는 호수에 불과했다. 동해는 울릉도와 독도가 있을 뿐 망망대해로 수심이 깊다. 서해에는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최고 9미터에 달한다.
위치는 북위 33도에서 43도에, 동경 124도에서132도에 걸쳐 있다. 면적은 22만 평방 km로 영국, 뉴질랜드, 루마니아, 라오스, 에콰도르와 비슷한 크기이다. 중국의 50분지 1이고 일본보다 약간 작다. 중국과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 지질은 고생대에 형성되었다. 남해안에는 공룡이 살았던 발자국 화석이 남아 있고, 제주도는 경관이 아름답고 수억년의 지층의 변화를 보여주는 특이한 곳이다.
백두산에서 뻗은 산맥이 함경도의 개마고원을 이루고, 함경산맥과 태백산맥으로 이어져 남쪽으로 뻗어 전라도의 지리산과 경상도의 산줄기로 이어지는데 이를 백두대간(백두산의 큰줄기라는 뜻)이라고 칭한다. 전국의 지형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 거의 모든 강이 대부분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산이 전국토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평야는 서부에 집중되어 있다. 남북의 길이는 1000km이고, 동서는 175km이다.
신석기 이래 기원후 10세기 까지 한국인의 생활공간은 만주와 한 반도였다. 만주지방은 흑룡강성으로부터 길림성의 남쪽까지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고, 그 남부지방에 장백산맥의 산줄기가 동에서 서쪽으로, 흥안령산맥이 장백산으로부터 만주의 동북쪽으로 뻗어 있어 강은 남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만주지역은 현재 중국이 차지하고 있으나 신석기와 청동기 그리고 고대의 고조선, 고구려의 영토로 10세기 초 발해가 거란족인 요나라에 멸망하기까지 한민족의 활동무대였다.
한국의 기후는 냉온대 기후이다. 4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 여름의 기온은 최고 섭씨 40도에서 겨울의 영하 43도에 달할 정도로 계절의 온도 차가 대단히 크다. 일년 강수량은 1000mm이다. 그 강수량의 대부분은 7-8월에 내리는 장마비와 12월-1월에 내리는 눈으로 채워진다. 국토 최남단과 최북단의 여름 온도 차는 겨우 3도이지만 겨울의 온도차는 30도가 넘는다.
한국의 봄(3-5월)에는 남풍이 불어오며, 온 산천에 꽃이 핀다. 가을에 강남에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 여름(6-8월)에는 무더우며, 사람들은 해안이나 강가, 산속으로 피서를 간다. 그리고 여름에는 한 두 차례 태풍이 분다. 태풍은 많은 비를 몰고 와서 홍수를 만든다. 가을에는 논밭에 누런 곡식이 익어가고 온 산은 새빨간 단풍이 든다. 특히 가을에 익는 사과의 새콤한 맛과 배의 단맛은 최상이다. 낮과 밤의 온도차가 심하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면 북풍이 찬 공기를 몰고 온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뒷 산 아래 남향집을 많이 짓고 살아왔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추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온돌을 개발하였고, 이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한국 주택의 특이한 보온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추운 겨울은 한국음식의 특징인 김치와 된장, 간장 등 발효식품을 발달하게 하였다. 겨울철에는 봄철에 북쪽으로 날라갔던 기러기, 황새들이 한반도 전역에 날라 내려온다. 이들은 현재 국토가 분단되어 사람들은 넘을 수 없는 삼팔선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연의 전령이다, 38선 주위의 남북 폭 10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는 60년 동안 사람의 손발이 미치지 않은 곳으로 온갖 생물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서식해온 생태계의 보고이다.
현재 한국의 인구 5천만명, 북한인구 2천5백만명으로 남북한 총인구는 7500만에 이르고 있다. 세계인구 73억명에 비하면 100분의 1에 해당하는 인구이다. 인구밀도는 세계에서 최상위에 속하고 있다. 현재는 도시의 인구가 전 국민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나 50년 전에는 농어촌의 시골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1920년대에 결혼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20세 이하였는데 최근의 결혼 연령은 30세 이후이고, 1970년대부터 시작된 산아제한정책에 의하여 인구의 출생률이 급감했고 현재는 저출산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의약의 발달로 사람들의 수명이 늘어나 현재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자 80세, 여자는 86세에 이르고 있다. 한국은 이미 고령화사회로 진입하였고, 연령별 인구분포는 나무 막대기를 세워 놓은 꼴로 노년층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 한국문명의 태동
문명이 한 지역에서 고도로 발달시킨 제도와 문화를 뜻한다고 할 때 한국의 문명사를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문명간애는 상호 교류가 있기 때문에 공통점과 유사점이 있지만 지리적, 역사적 과정이 다르므로 그 차이가 분명히 있을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중국과 국가체제를 공존했던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한국문명이 중국문명이나 일본문명에 흡수되지 않았다는 점을 특히 유의해야할 것이다.
한국의 고대문명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한국 사람의 먼 조상은 약 기원전 1만년 전에 한반도에 들어온 신석기 시대 사람들에까지 올라간다. 물론 한반도에는 50만년 전에 들어 왔던 구석기인들이 살았던 유적과 유물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신석기 시대 사람들에까지 이어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유적과 유물은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았던 움집의 터가 여러 곳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들은 토기를 만들어 썼는데 그 특징은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했고, 밑이 뾰죽한 팽이모양이다. 토기를 땅에 묻기 위해서 아래 부분을 뾰죽하게 만들었다. 빗살무늬 토기는 시베리아, 그리고 유럽 북부지방, 중국의 만주지방, 그리고 한반도, 일본 등지에 나타나고 있다.
2~1 청동기 문명
새로운 청동기를 가진 종족이 기원전 2천년 전에 만주와 한반도에 들어왔다. 한국의 청동기는 기원전 5천년 전의 중국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다른 계통이었다. 한국의 청동검은 비파형 세형동검이고, 청동경에 많은 가는 빗살을 새긴 특징을 가진다. 빗살무늬는 1mm 안에 5개의 줄을 그을 정도여서 그 기술의 정밀함에 현대의 과학자들도 찬탄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를 최초로 건설했다. 그들의 족장이 남긴 무덤이 고인돌(지석묘)이다. 전 세계에 5만개의 지석묘가 있는데 그 중 한반도에 3만개가 있어 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석묘는 큰 것은 수십 ton, 작은 것은 수 ton에 달하여 이런 묘를 만들려면 남을 부릴 수 있는 지배층이 형성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대역사를 수행하려면 그들 나름의 기술축적이 있어야 가능했다. 이런 청동기 시대에 이루어진 국가를 ‘성읍국가’라고 칭한다. 성읍이란 용어는 주거지역을 성으로 둘러 싼 형태를 뜻하며 삼국의 초기 기록에 성 중심의 정치단위가 많이 나오고 있음에서 취해졌다.
이 시기 한반도와 만주지역에는 수십개, 내지는 수백개의 성읍국가가 세워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일의 삼한의 70여개 국가 이름이 전하고 있는 것은 2세기 중엽까지 존속했던 한반도 남부의 성읍국가 이름이다. 북부에는 부여, 동예, 옥저 등 수십 개의 국가 이름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청동기를 가진 집단은 말을 탔기 때문에 신석기 시대 사람들보다 이동의 범위가 크게 넓었다. 인간 사회에 전쟁이 시작되는 등 인간 활동이 많아졌다. 그래서 청동기 시대에 세계의 문자가 발명되어 자신들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중국의 중원지역에서는 기원전 5천년 전에 ‘갑골문자’가 나타나 이것이 기원전 10세기경 주나라 시대에 오늘의 한자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지역과 한국, 일본에는 선사시대에는 독자적인 문자의 발명이 없었다. 왜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청동기에 문자가 생기지 않았을 까? 이는 일정한 지역에 멈춰 오랜 동안 살지 않고 자주 이동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새로운 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온 집단은 원래의 토착민이었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을 쉽게 지배했다. 외지에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하늘님의 후손’으로 칭하여졌고, 토착민은 지신족으로 표현되었음을 신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늘님(天帝)은 모든 신통력을 갖추었음을 뜻한다. 지신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뜻한다. 이는 신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건국 시조 신화는 예외 없이 천제의 아들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와 지신족의 왕비를 얻어 낳은 아들이라는 남자 중심의 ‘천손강림신화’이다. 뒷날 하늘에서 사람이 어떻게 내려올 수 있는가 하고 의심을 하게 되자 난생신화로 변화한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는 단군신화이다. 이 신화에서는 하늘님의 아들이 지상에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신화는 천제자의 아들 해모수가 지상에 내려와 유화와 결혼하는 것으로 서술되고 유화는 알을 낳아 주몽으로 탄생하였다는 내용이어서 천손강림신화가 난생신화와 접합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한국의 건국시조 신화는 중국의 시조신화와 구조적으로 다르다. 중국의 국가 시조는 모두 여자가 보통사람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이상한 감응을 통해서 낳았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화는 구적되다가 후일 문자로 기록된 것이지만 민족의 신화는 후대인들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자유로운 해석을 할 수 있는 민족문화의 공동유산이다. 천손족의 후예라는 의식은 각 시대마다 특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신화를 자기체험으로 추체험하게 된다. 하늘님의 보호는 현재 대한민국의 애국가의 제1절 가사에 강조되어 전 국민이 수시로 부르고, 올림픽이나 세계 경기에서 태극기의 게양과 함께 세계 만방에 울려 퍼진다.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문화와 천재강림신화는 한국고대문명의 원초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2. 철기문화의 도래와 중국 한자문화의 수용
한국과 만주지역에 철기문화가 전래된 것은 기원전 4세기 경 무렵이다. 이무렵 중국은 전국시대로서 분열된 각국이 부국강병책을 써서 격심한 전쟁을 하던 시기이다. 중국의 철기문화는 기원전 1000년경 주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전국시대 화북지방에 있었던 연(燕)나라를 통해서 철기문화가 전래하였다.
철기문화의 전래는 땅을 파는 농기구의 발전으로 농업생산이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철제무기의 생산으로 전쟁양상이 이전과 달라졌다. 즉 청동기 시대의 성읍국가에서는 약탈전쟁이 있었다. 철제무기를 소유한 집단은 전쟁에서 이기면 그 지역을 영토로 삼아 영구 지배를 하는 정복전쟁이 나타났다. 이는 군량을 비축하여 대규모의 군대가 징집되고,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결과였다.
연 나라 장수였던 위만은 고조선을 탈취하여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위만조선이다194B.C.-108 B.C.). 위만조선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이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400여년간 싸우던 전국시대가 진(秦)시황이 통일을 이루었으나 곧 한나라로 교체되었다. 중국의 전란기에 일부의 중국인들이 요동과 한국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그들은 철기문화와 한자문화를 전래하였다.
한국은 한 무제(r.140 B.C-87 B.C.)의 침략을 처음으로 받았다.(107 B.C) 무제는 요동지방과 한반도 북부지방을 영토로 다스리던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수도 평양을 함락시고 그 땅에 낙랑, 현토, 진번, 임둔 4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낙랑군 이외의 3군은 곧 원주민의 반발을 받아 20-30년 후에 퇴출되었다. 낙랑군만이 한 나라가 망한 후에도 지속되어 313년에 고구려에 의하여 퇴출될 때까지 400여년간 지속되었다. 이는 거점 도시일 뿐 만주 전역이나 한반도 북부를 모두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이 조선을 점령 지배했다는 사실로 과대 포장되어 인식되었다. 낙랑군의 존재는 한반도에 중국문화 즉 선진의 철기문화, 한자문화와 유교문화를 전파하는 거점 도시였다.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후 2-3세기 사이에 한 반도와 만주지역에 수백개의 소규모 성읍국가가 세워졌다. 그 중 대부분의 나라는 곧 망하고, 철기문화를 수입하여 영토를 넓히고 수백년간 역사를 지속한 나라로는 만주의 부여(기원전 2세기~494), 고구려(37B.C.~668)와 한반도의 백제(18B.C.~660), 가야(기원전후~562), 신라(57B.C.~ 935) 등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사에서 이들 국가 중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들어 삼국시대로 지칭함은 고려 초의 역사서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중국의 한자가 전래되어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하였고 중국의 선진 문화가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한자는 만주지역의 고구려와 한강가의 백제에는 기원 전후에 전래되었고, 경상도의 가야와 신라는 1-2세기 후에 전파되었다. 고구려는 국초부터 역사를 쓰기 시작하여 7세기 말까지 여러 사람이 기록을 남긴 역사기록이 100권에 달했다. 이를 유기(留記 남겨진 기록이라는 뜻)라고 칭했다. 이에는 고구려의 웅장한 신화와 역사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기초자료로 삼아 태학박사 이문진은 600년에 신집-새로 편집한 책이라는 뜻 5권으로 정리하였다. 백제에서는 400년경에 고흥이라는 박사가 서기(書紀)를 편찬했고, 신라에서는 6세기 중엽에 거칠부가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또한 우리의 소식이 문자로 기록되어 중국에 전해져 중국 역사서에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한자의 전래와 함께 유교의 경전이 도입되었다. 공자가 편찬한 5경과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 좌전 등이 들어와 국가의 교육기관에서 학습되었다. 한자의 전래는 유교문화 만이 아니라 새로이 들어온 불교의 경전을 한역하여 한국에 불교 경전이 전래 수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는 기원후 300년경이다. 또한 한자의 전래는 한국말을 기록하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한자의 뜻과 음을 빌려 한국의 말을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한국말을 그 어순대로 기록하는 방식이 ‘이두문’이라고 한다. 이두문은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설총(655-?)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런 방식은 이미 고구려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런 기록이 전하지 않고 있어서 한자가 처음 전해졌을 때의 문자사용에 대한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뿐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지어진 금석문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지금 중국 길림성 환인현 집안에 서 있는 ‘광개토대왕릉비’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신라의 금석문은 6세기 초의 경북 영일군에서 최근에 발견된 ‘영일 냉수리 신라비’가 가장 오래된 것이나 최근 목간(木簡)자료가 다수 발견되어 깊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고구려 제17대 광개토대왕(r.374-412)의 능비는 414년에 세워졌고, 높이 4,2미터, 광폭 1.2미터의 거대한 돌에 1778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중 1400여자가 판독되고 있어 많은 역사적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사진)
광개토대왕릉 곁에 세우진 이 능비는 유창한 한문으로 써져 있어 이때에는 이미 한문의 사용이 능숙한 단계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고, 6세기 초에 세워진 영일냉수리 신라 고비의 문장은 아주 서툰 한식 문장임을 알 수 있어 신라의 한자 사용이 고구려에 비하여 수 백년 뒤진 것을 알 수 있다.
2-3. 한국 신화의 내용과 특징
한국의 신화에는 지구와 인간의 출생에 대한 창세기의 신화가 기록으로 전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회남자 淮南子에 의하면 창세기의 신화를 전하고 있다. 회남자는 한고조의 손자인 劉安이 쓴 책이름이다. 회남자에는 1이 2를 낳고 2가 3을 낳는다. 1은 무엇인가? 이를 ‘신’ 또는 ‘도(道)’로 보았다. 이것이 2인 음양을 낳았고, 이것이 하늘과 땅이며, 음양이 이후 만물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런 1을 주역에서는 태극이라고도 했다.
한국의 신화에 창세기의 신화를 전하고 있지 않음은 문자의 사용이 늦었기 때문이다. 오직 국가의 시조신화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가장 오래된 신화는 1188년에 승려 일연에 의하여 써진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는 단군신화이다. 이에는 「고기 古記」의 자료와 위서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쓰고 있다. 즉 단군신화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환인 천제의 아들 중 한 사람인 환웅천왕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 그를 지상에 내려 보내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당시 호랑이와 곰이 사람이 되고 싶어서 환웅천왕에게 빌었다. 그러자 환웅은 그들에게 쑥 20다발과 마늘 세 개를 주면서 이를 먹고 100일간 해를 보지 말라고 했다. 그 주문을 호랑이는 끝내 지키지 못했고, 곰은 지켜 사람이 되었다. 그가 웅녀이다. 그 웅녀는 환웅과 결혼을 하여 단군을 낳았는데 단군은 조선이란 나라를 세워 도읍을 아사달에 정했다. 이가 단군왕검이고 중국 요 임금과 같은 때였다.
이 신화는 상고의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였을까? 환웅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온 집단이 있었음을 뜻한다. 즉 청동기를 가지고 온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고 곰은 원주민 집단을 뜻한다. 새로이 들어온 집단과 원주민의 집단이 결합하여 국가를 건설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신화의 기본 구조는 건국시조가 하늘님의 아들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남자 중심의 천제강림신화가 원초적인 것이고, 난생신화는 이에서 갈려져 나온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이미 모계 사회단계를 지나 부계사회의 단계에서 국가건설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신화에서는 천제자인 해모수가 지상에 내려와 하백의 딸인 유화와 결혼을 했고 유화가 알을 낳아 주몽을 출생시켰다.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여섯 부족의 추장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의 시조 혁거세도 하늘에서 말이 알을 가지고 왔는데 이에서 깨어난 사람이라고 하였다.
한국인은 성읍국가 때에 나라의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국중대회인 제천행사가 있었다. 이는 천제가 강림하여 시조를 나아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과 전지전능한 하늘님에게 풍년을 빌고 재난이 없도록 하는 종교행사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던 성읍국가의 공통된 습속이 있었다. 고구려 주몽의 신화는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의 첫머리에 신화의 기본 골자를 적고 있다. 이에서 이 신화는 당시 고구려인에 의하여 믿어졌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시조와 시조의 어머니인 유화는 국초부터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신궁에 모셔졌다. 하늘님의 신앙은 조선시대의 일반 사람의 부인이 맑은 물을 장독대에 떠 놓고 비는 민속신앙과 착한 사람은 하늘이 복을 내린다는 보편적 상식으로 계승되어 오다가 1860년 최제우가 개창한 새로운 종교운동인 동학에서 “사람은 하늘과 같은 존재”이고 하늘님을 극진히 모시는 종교 사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3. 고대국가의 성립과 그 문화
힌국사의 시대구분론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사회발전에 따른 구분법으로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왕조에 의하여, 삼국시대, 남북조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구분하는 방식이다. 이는 한국사에서, 왕조가 500년이상 지속되고, 사료가 왕조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두 가지 방식의 시대구분법을 함께 소개하겠다.
삼국시대라 함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건국하면서부터 공존했던 기원전 1세기부터 668 고구려의 멸망으로 신라에 의하여 통합된 시기 7-800년간의 역사를 뜻한다. 이 시대는 한국의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 고대국가의 특징은 좁은 성읍국가에서 전쟁을 통해 넓은 지역을 새로이 강역으로 편입하면서 관습법으로 통치하던 수준에서 왕의 명령과 국가의 법률로 다스리는 율령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국왕은 정복사업을 통해 왕권이 강화되고, 신분제도의 정립과 통치기구의 확립에서 한국적인 특색을 가진 삼국시대의 역사를 만들었다.
삼국의 초기 즉 기원 300-400년까지는 삼국만이 아니라 많은 성읍국가가 공존해오다가 삼국에 의하여 병합되었다. 이 시기는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공존했다. 성읍 국가 중 집단적으로 칭해지는 마한과, 변한, 진한이라는 삼한이 있었다. 삼한은 한강 이남에 있었던 국가의 집단으로 마한 54개국, 변한 12개국, 진한 12개국의 명칭이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의 「 동이전」에 보이고 있다. 고려초기에는 삼한은 삼국의 전신으로 인식되었고, 삼국을 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삼한은 1897년 대한제국의 명칭으로 채택되어 오늘의 국호 ‘대한민국’의 기원이 되었다.
3-1. 고구려의 발전과 문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기원 전 37년에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길림성 회인현에 수도를 정하고 국가이름을 고구려라 칭하였다. 이곳에는 오녀산성(사진 참조)과 평지성이 있다. 이 근처에는 그들의 고유한 무덤인 적석총 무덤 10여기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고구려(高句麗)’라는 말은 ‘높은 읍성’이라는 뜻인 점으로 보아 오녀산성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산성은 100여m의 높은 언덕 위에 쌓아졌다. 동북쪽은 능하가 둘러 흐르고 남서쪽은 절벽이어서 천혜의 요새이다. 그러나 오르고 내림이 불편함으로 후일 환인현으로 정치적 수도를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이름이 주몽인데 이는 부여말 추모에서 유래한 것이다. ‘추모’라는 말은 원래 ‘백발백중의 명사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추모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도 전하고 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새겨져 있다. 추모가 말을 타고 북부여를 탈출할 때 엄리강을 만나 추격군을 따돌린 이야기가 대왕능비에 다음과 같이 써져 있다.
“나는 하늘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신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자라야 거북아 다리를 놓거라!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다리가 놓아져 강을 건넜다.”
이는 가장 위기에 처했을 때 시조 추모왕이 자신의 부모가 하늘님과 강의 신의 후손임을 말해 신통력을 부리는 장면을 웅변으로 묘사한 것이다.
고구려는 수도를 졸본성에 정한지 50여년 만에 그 곳에서 300km 떨어진 더 깊은 산골인 집안현 국내성으로 옮겼다. 이는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고, 동북쪽으로는 높은 산이 둘러싸여 있고, 오직 동쪽으로는 깊은 계곡을 따라 들어와야 하는 천혜의 요새였다. 이곳은 425년에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00년간 수도가 되었다. 고구려가 이처럼 수도를 옮긴 것은 중국 위나라의 침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국내성은 평지성이다. 유사시에 피난하기 위한 성으로 북쪽 20km 지점에 환도산성을 쌓았다. 환도산성은 동서북쪽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오직 남측의 문만이 나 있으며 이에서 적을 막아내기가 용이한 성이다. 이 환도산성의 입구에는 현재 적석총 300여기가 남아 있는데 이는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구려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미천왕(r. 300-330)대에 한4군 중 유일하게 평양에 있던 낙랑군을 쳐서 소멸시켰고, 소수림왕(r. 371-383)대에는 서울에 태학을 세워 적극적으로 중국문화의 수용을 하였다, 또 왕은 불교를 공인하여 불교문화를 또한 공식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율령을 반포하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런 국가체정비가 된 때에 그 손자인 광개토대왕(r. 391-412)대에는 수군과 기병을 동원하여 남쪽으로 백제를 공략하고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깊숙이 진출하였고, 북쪽으로는 길림성 전역을 차지하였고 서쪽으로는 요하이동으로 영토를 넓혔다.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이 되었다.
장수왕 (r.413-491) 대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고, 국호를 고려로 개칭하여 왕조말까지 250여년간 사용하였다. 평양천도는 거대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교통이 편리한 곳을 택했고 식량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농업중심의 국가로 전환했음을 뜻한다. 고구려가 이후 남진정책을 추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고려라는 국호는 고구려의 약칭이 아니라 개칭이었다. 한자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며서 아름다운 국호를 만든 것이다. 그후 궁예가 901년 세운 나라의 첫 국호였고, 918년에 이를 계승한 왕건이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고려라는 국호는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이를 삭제하고 ‘고려’라는 당시의 기록을 모두 ‘고구려’로 환치해 놓은 결과 고구려의 고려라는 국호사용은 조선왕조 600년 동안 잊혀졌다. 그러나 진실은 감추어질 수 없다. 현재는 고려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라는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고구려의 후기 국호는 수나라 100대군의 침략을 두 차례, 당나라의 다섯 차례 대침입을 격퇴한 강대국으로 인식되어 중국, 터키, 몽골, 러시아에 널리 알려졌다. 이는 한국을 대칭하는 국호로 20세기까지 사용되어 왔다.
고구려는 5개의 부족이 연맹체를 형성했고, 족장대표들이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구려가 강역을 넓혀 새로운 인민을 포함하게 되자 이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작업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이는 고구려 관료의 등급 명칭에 ‘使’자가 들어 있는 것에서 유추된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한강 가에 있던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현재의 충북 충주까지 영토를 확대할 정도로 치열한 공방전을 자주 수행하였다.
고구려의 집정 수상 연개소문(617~666)은 642년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운 뒤 독재정치를 수행하고 당나라에 대한 강경외교노선을 유지여 당나라 태종 대에 수 차례의 침입을 당하였다. 이를 비록 방어했지만 그가 죽고 아들이 정권을 농단하다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 왕국은 멸망되었다. 평양의 3만8천여 호가 당나라에 의해 강제 이주되어 평양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고구려의 유적 중 건축물은 모두 파손되고 오직 산성과 무덤이 남아 있다. 산성은 고구려초기부터 국가의 존립을 위한 목적으로 중요한 요새에 산을 등지고 강을 낀 지형을 택해 축조했다. 고구려의 무덤은 초기 적석총의 양식과 횡혈실 석실무덤형태로 발전하였다.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은 7,000여기로 파악되고 있으며, 거대한 피라미드인 장군총의 규모는 고구려의 국력을 보여주고 있다.(밑면의 길이 32m, 7층, 높이 12.4m) 횡혈식 석실 고분 내의 벽화는 고구려인들의 신앙과 민속, 예술세계, 건축술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쌍용총에 그려진 주작, 현무, 청룡, 백호의 4신도와 하늘의 해와 달을 상징하는 그림, 그리고 영혼을 하늘에 실러다 주는 세발 달린 까마귀의 그림, 사냥하는 모습 등에서 말을 타고 대륙을 달리던 고구려인의 기상을 읽을 수 있다. (고분벽화 사진)
3-2. 백제의 발전과 문화
백제의 시조 온조는 고구려 시조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온조집단은 압록강을 건너 계속 남하하여 현재의 한강 하류에 이르렀다. 그는 기원 전 18년에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니 현재의 서울 시 강동구 잠실일대이다. 이들은 원래 그 곳에 있던 마한 54개국 중 백제(伯濟)국을 점령하여 백제(百濟)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거대한 몽촌 토성이 남아 있다. 따라서 지배층은 고구려계통으로 성은 부여씨였고, 주몽사당을 세워 매년 제사지냈다. 피지배층은 삼한의 원주민이었다.
백제는 낙랑으로부터 중국문화를 쉽게 받아들여 고이왕(r. 234 -285) 때에는 중앙의 통치제도를 정비하고 근초고왕(346-374)에는 영토를 크게 넓혀 북으로는 고구려와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왕을 사살해 원한을 샀다. 남으로는 충청남도, 전라북도의 마한국을 흡수했다. 아직 신라와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았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아 하남위례성에서 공주로 천도하였다. 성왕(r. 523-554)은 중흥을 위해 538년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하였고, 신라와 함께 한강유역을 고구려로부터 탈환하였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이에 백제와 신라와는 심각한 적대관계를 가져 잦은 공방전이 진행되었다. 성왕은 충주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삼국 간의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공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무왕(r. 600-641)은 수도 부여성을 정비하고, 전라남도의 마한세력을 통합했으며, 경상도 진주지역으로 진출하여 신라와 싸웠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641-660)은 신라를 공격하여 경남지방을 탈취하고 합천의 대야성을 빼앗고, 신라의 수도를 위협할 정도로 진출했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660년 멸망하였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개방적인 국가로서 중국의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박사제도를 수용하여 전문기술자도 박사라 칭하였으니 와당을 굽는 기와박사도 있었다. 384년에 새로 들어온 불교를 공인하여 불교왕국을 이룩했다. 익산의 미륵사탑과 태안의 마애석불, 백제의 금동대향로는 불교와 도교의 깊은 사상을 담은 뛰어난 예술품이다. 특히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많은 금속 공예품은 백제문화의 정수를 알려주고 있고, 백제문화는 일본과 신라의 고대문화를 건설함에 기여하였다. (사진 태안마애석불, 백제금동대향로) 백제의 예술품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온화하면서 우아하고 정교하다. 백제에 대한 기록은 왕조의 패망에 의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3-3. 신라의 발전과 문화
신라의 건국은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여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된 나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읍국가의 시기를 가장 오래 유지했던 후진의 나라이었다. 내물마립간(r. 359-401)년 경에는 백제의 사신을 따라 중국에 통교했고, 지증왕(r. 500-513)왕 대에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국호를 신라로 고쳤다.
신라는 법흥왕(r. 514-539) 때에 전래한 불교신앙을 공인하게 되었다. 새로이 들어온 불교와 전통신앙이 충돌하는 모습이 잘 전해지고 있다. 또한 법흥왕대에는 율령을 반포하여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강력한 왕권이 수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진흥왕(546-576)은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고구려 영토인 죽령이북, 철령이남의 10군을 탈취하고 백제와 함께 한강 유역을 탈취한 후 백제의 몫이었던 하류지방까지 탈취하여 한산주를 설치했고, 경남의 고령지역의 대가야 세력을 혁파하여 이 지방을 강역으로 확보했다. 그리고 대왕은 함경도 이원, 함흥, 북한산, 창녕지방에 순수비를 세워 새로운 국토의 확보와 인민을 국민으로 흡수함을 선언하는 글을 남겼다. 또한 거칠부로 하여금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고, 청소년 교육집단인 화랑제도를 국가에서 승인하여 국선(國仙)으로 인정했다. 또한 도성 안에 국가의 융성을 기원하는 거대한 황룡사를 건축하고 백명의 고승을 초치하여 전몰장병의 위령제로 팔관재를 지냈다. 진흥왕의 전사자와 유가족에 대한 우대정책은 이후 100년간 지속적으로 행해져 청소년이 전쟁에서 죽음을 영광으로 여기는 풍조를 만들었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 귀퉁이에 위치했기 때문에 중국문화의 수용이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늦었다. 초기에는 중국문화를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수용했다. 한강유역을 확보한 이후 많은 고승이 중국에 보내져 불교문화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러나 자기 전통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문화를 수용했기 때문에 국민의 일체감이 강하여 잦은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막아내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전쟁에서 죽은 유가족은 골품제에 편입시켰다. 골품제는 혈통중심의 신분제도이다. 왕과 왕비는 같은 친족끼리 근친결혼을 했고 이를 성골 진골이라 했다. 일반관료는 경주 6부족이 차지한 6두품, 5두품과 전공을 세운 사람이 골품에 편입되었다. 골품에 따라 승진할 수 있는 관직에 규정되고 집과 수레의 규묘도 규제되었다. 골품제는 세 명의 여왕이 즉위하는 특이한 역사를 가지게 하였다 이는 신라의 멸망기까지 큰 틀을 유지했다.
3-4. 신라의 삼국 통일
7세기 동북아에는 국제적인 대 전쟁이 일어났다. 분열되었던 중원를 통일한 수나라에서는 만주에 돌궐족과 연합하는 고구려 세력에 위협을 느꼈다. 수나라는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두 차례 침입하였다. 그러나 대패하여 많은 전사자를 내고 나라가 곧바로 망하였다.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도 두 차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전쟁에서 실패했다.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고구려, 왜, 당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렸다. 당태종은 먼 거리에 있는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김춘추는 국왕으로 추대되어 태종무열왕(r.654-661)이 되어 나당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나라에서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땅을 지배하고 신라마저 흡수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출병하기도 했으나 패퇴되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고구려의 정복에 성공을 거두었다. 당나라에서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만주 지역을 지배하려 하였다. 신라는 적대세력이었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과도한 영토적 지배를 꾀한 당나라와 싸우는 나당전쟁이 670년부터 676년까지 16년간 한반도에서 지속되었다. 전쟁의 결과는 신라의 승리로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 내에서 축출하므로서 삼국의 통일을 달성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는 김유신(595~673) 장군의 공로가 컸다. 그는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을 지키는 전쟁과 통일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후일 신하로서 대왕에 추존되는 영광을 누렸던 인물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국민족의 실체를 형성함에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대동강 이남과 원산만까지의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고 삼국간의 치열했던 잦은 전쟁을 종식하게 되었다. 신라는 통일로 인하여 영토와 인구가 3배로 확대, 증가되었고 이후 전쟁이 없는 대평화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라의 문화로는 경주시 황남동 적석 고분군에서 출퇴된 금관과 장식품, 분황사와 황룡사지의 불교 유적, 첨성대 등이 있다. 신라는 비록 늦게 출발하였지만 멸망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져 고대국가로의 발전과정, 통일전쟁 등에 대한 풍부한 문헌 자료를 남겼다. 그래서 삼국시대의 역사와 정치상황, 문화를 연구함에 신라측 자료가 대부분 이용되고 있다. 신라는 통일과정에 화랑제도의 활용, 원광, 자장, 원효, 의상 등의 고승의 협조, 강수와 같은 명문장가의 외교문서 작성, 33천이 내려와 태어났다는 김유신의 헌신적 노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r.661-681)의 뛰어안 통치술, 전국민의 헌신적 협조 등이 통일을 달성한 원동력이 되었다.
나당동맹의 체결로 신라는 독자적 연호 사용의 폐지, 당나라 복제의 수용 등이 있었고, 나당전쟁으로 인하여 동맹관계가 파괴되자 당나라에서는 문무왕을 교체하려는 정책을 썼으나 문무왕의 정중한 사과와 능난한 외교문서로 인하여 이는 취소되고 곧바로 다시 친선관계가 복구되었다.
4. 남북조시대: 통일신라와 발해의 평화적 공존
4-1. 통일신라의 사회와 문화
신라는 통일로 인하여 조세 수입이 대폭 늘어나고 영토가 크게 확대되었다. 전국을 9주 5소경제도로 편제하였다. 즉 원래의 신라지역에 3주, 백제지역에 3주, 고구려지역에 3주를 설치하였다. 5소경은 피정복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중요지방에 설치한 도시로 가야지방, 남원지방, 충주지역, 청주지역, 원주지역에 설치했다. 또한 삼국의 유민을 포섭하여 9서당이란 군단을 편제했다. 통일신라기는 신라가 만들어온 집사부 이하 13부의 통치체제, 골품제의 신분제도, 17관등급제도 등을 유지해왔기에 시대적으로 고대에 속한다고 본다.
신라 통일 이후 200여년간 전쟁의 위협이 없는 장기간의 평화를 맞이했다. 이 동안 경주의 귀족은 호화롭고 풍요한 생활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건축물이 불국사였다. 이에는 통일신라의 석탑의 정형인 3층 석가탑과 화려한 다보탑을 세워졌다. 건물 구조는 현상세계와 내세, 그리고 불법의 상징인 3 세계관과 불교의 우주관이 반영되었다. 불교계에는 당나라의 선종불교가 수용되었다. 선종불교는 교리 중심의 교종에 대하여 승려 자신이 부처님의 마음을 깨달아 직접 얻는 것을 종지로 하는 새로운 불교신앙이었다. 선종 승려는 기존의 권위와 허식, 부패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초기에는 경주 귀족의 지원을 받아 사찰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에 지었다. 이 때 만들어진 선종사찰이 점차 지방문화를 끌어 올리는 역할을 했다. 대천의 성주산에 세워진 성주사, 지리산 남원에 세워진 실상사, 전라도 장흥에 세워진 보림사 등이 유명했다. 선종은 불상이나 불탑보다 자기를 깨닫게 한 스승을 중시하여 그들의 유골을 모시는 부도의 제작이 특징이었다.
4-2. 발해의 건국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그 땅을 영토로 확보하기 위하여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으나 30년만에 고구려 부흥세력에 의하여 쫒겨 났다. 바로 발해의 건국운동이었다.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대조영(r.698-719)이 발해국을 세워 당군을 축출했다. 발해는 당나라와 산둥반도에서 싸워 승리를 거둬 만주와 오늘의 시베리아에 걸치는 사방 5천 킬로미터의 대국을 이룩했으니 해동성국(海東盛國 동북아의 강국이라는 뜻)이라 칭했다.
현재 영토주의에 입각하여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이 지방정권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이는 역사의 왜곡으로 두 나라는 지방정권이 아니라 독립된 국가였다. 926년 발해는 거란의 요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 때 발해의 왕자 대광현은 5만명을 이끌고 왕건 고려국에 귀순했다. 고려 태조는 그에게 왕씨의 성을 내렸고 동족의 국가로 인식하여 이를 멸한 거란에 대해 절교하는 강경책을 취했다.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여진족이었다. 발해의 통치제도는 당나라의 3성6부제를 수용하였으면서도 모든 왕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수도가 지금 흑룡강성의 혼춘이었기에 남진정책을 취하지 않아 신라와 장기간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 ‘高麗’국이라 칭하고 시조가 천손족이라 한 점에서 고구려의 계승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발해를 한국사로 파악한 것은 고려 후기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찾아진다. 조선 전기의 우리 역사서에서는 발해를 서술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역사지리학자들에 의해 발해를 북국, 신라를 남국으로 칭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남북국시대로 설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북국의 역사지도 사진)
4-3. 신라와 당의 교역
당나라와 신라의 친선관계는 활발한 교역활동을 이루게 하였다. 산둥반도에는 신라인이 거주하는 신라방이 만들어지고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는 완도에 해상왕국을 건설할 정도로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국가에서 국비로 파견되는 유학생이 많았다. 또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당나라에 건너간 많은 승려가 있었고, 해외무역을 하는 상인집단도 많았다. 한때 귀국해야할 유학생이 140명에 달하였다. 당시 인구를 300만명으로 계산하면 그 비중은 대단히 높은 것이다. 그들은 6-7년간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합격하기도 했다. 그들은 당시 최고의 국제적인 지식인이었다. 귀국한 유학생들은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신라가 골품제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방학생들을 교육시켜 고려 초 과거제도가 실시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4-4. 호족의 출현과 후삼국시대
780년대부터 신라가 멸망한 935년 까지 150년 동안에 20왕이 교체되는 잦은 왕위쟁탈전이 일어난 정치적 혼란기였다. 중앙에서의 왕위쟁탈전은 지방통제력을 약화시켰다. 그 결과 군수나 성주는 조세 수입과 군사력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또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호족도 새로이 출현하였다. 이 시기를 호족의 시대라 칭한다. 전국에 크고 작은 수백명이 호족이 나타났다. 이들 호족 중 궁예는 철원지방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켰고, 현재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견훤은 전주를 점령한 후 후백제를 세웠다. 경주의 신라 왕권은 경주 일대를 장악한 지방호족에 불과한 상태였다. 포악한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왕건은 고구려의 후기 국호인 고려를 국명으로 택하고 친신라정책을 써서 경순왕의 귀부를 받았고, 최후로 견훤까지 포섭하여 그 아들 신검세력을 격파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했다.
5. 중세사회 -고려 시대의 역사와 문화
5-1. 고려의 건국과 태조의 정책
고려(r.918~1392)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시키고 이를 개척하여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국호를 고구려 후기 국호를 그대로 취한 것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를 천명한 것이다.
또한 태조는 후삼국의 내란기에 전쟁을 통한 흡수보다는 각 지방 호족의 귀부를 받는 호족연합정책을 사용하였다. 호족연합정책이란 귀부한 호족에게 성씨를 내려주고 결혼관계를 맺었으며, 호족의 지방자치권을 승인하고 그 자제를 볼모로 삼는 정책이었다. 태조의 결혼정책은 19가문으로부터 26명의 왕비를 취할 정도였다. 그 결과 태조는 많은 호족의 귀부를 받아 후삼국을 쉽게 통일할 수 있었다. 천년 왕국 신라의 최후 왕 경순왕(r. 927-935)이 귀부한 것도 호족의 귀부와 같은 유형이었다.
태조는 고승과 학식이 뛰어난 학자를 초치하여 전란을 수습하는 방안을 들었으며 휘하의 용맹한 장수들에게 성의를 다해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후대 왕들에게 지켜야할 정치적 방안 10조목(훈요십조)을 써서 남겼는데 이는 왕조말까지 후손들이 유념하는 선조의 교훈이 되었다. 그 중에는 국교인 불교신앙의 과도한 폐단을 논하고, 왕위는 현명한 사람을 택할 것, 중국 제도를 수용하되, 고유풍속을 소홀히 하지 말고 거란의 풍속은 받아들이지 말 것, 서경(평양)을 중시할 것, 국가 축제로 하늘, 큰 산, 명산대천의 신령, 바다의 용신을 위한 팔관회와 연등회를 준수할 것.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도록 간언을 따를 것, 역사와 유학자의 교훈을 따를 것 등이었다. 태조는 후손들에 의해 실물크기의 동상이 만들어져 매년 철 따라 옷을 갈아입히고, 후대 왕들이 피난할 때 항상 모시고 다니는 고려왕조의 수호신이 되었다. (태조동상 사진)
5-2. 과거제도의 실시와 사관(史館)의 설치
제4대 광종(r,949~975)은 호족의 득세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중요한 정책을 실시했다. 그 하나는 중국에서 실시해온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는 앞으로 조선왕조까지 1000년간 운용된 인재선출방식으로 문인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가문중심, 혈통중심의 인사 채용에서 본인의 독서와 작문의 실력에 의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은 국왕이 능력 있는 문신을 확보하는 제도였다. 고려왕조에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신분은 지방의 향리로 편제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호족의 후예들이었다,
광종이 실시한 또하나의 정책은 중국 당나라의 역사편찬제도를 수용하여 실록과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 편찬하였다. 즉 사관(史館)을 설치하여 각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기관으로 삼았고 여기서 전왕조의 역사를 편찬하였다. 후삼국의 전신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삼국사로 편찬하였다. 이 책은 현전하지 않지만 1145년에 김부식이 다시 편찬한 삼국사기의 원자료였다. 이 책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서술하여 고려왕조의 성립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주된 편찬목적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중심으로 삼국사가 정리되었다고 추정된다. 과거제도의 실시와 사관의 설치, 실록 편찬 작업은 조선왕조말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5-3. 왕권 강화와 중세적 통치제도의 수립
태조의 호족연합정책의 후유증은 왕위세습에 강하게 나타났다. 광종은 공신세력과 호족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그의 이런 정책은 이후 반감을 사서 광종의 업적이 역사기록에 누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려의 왕권을 강화시켜준 계기는 거란의 침입이었다. 이 때 왕조의 외침을 막기 위해 호족의 자치권이 회수되고 호족은 군현의 향리직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왕족은 작위를 주어 우대하되 정치일선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신라의 왕족의 골품제의 관행을 껜 중요한 조처였다.
고려 제7대 성종(r.981~997)은 문반과 무반으로 짜여진 중국 관료제를 도입하였고, 3성6부제의 정부조직, 유교정책의 실현으로 동아시아의 중세보편주의 체제에 진입하였다. 3성(省)은 원래 당나라에서는 권력이 나뉘어진 세 기관이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이 합쳐져 중서문하성으로 권력이 일원화되고 행정을 담당하는 상서성은 그에 예속되었다. 성종은 황제를 칭하던 관행을 버리고 제후국의 격에 맞는 왕실 용어를 사용하고 효자의 표창, 노인의 우대, 농업의 중시, 백성을 위한 정치 등 유교의 핵심정책을 도입 운영하였다. 이는 고대에 독자적인 정치구조와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던 데서 선진의 중국의 통치제도와 문물을 수용한 것이다. 통치체제의 이러한 변화는 고려 왕조가 고대 국가 시기에 편제된 골품제 사회를 개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려왕조의 특권층인 문무반 관료들은 성씨와 본관을 가지게 되어 현재 한국인 성씨의 기원이 되었다.
5-4. 삼국사의 재편찬-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
고려 조에 신라의 유학자 설총과 최치원이 추숭되어 국립대학인 국자감의 문묘에 배향되었고, 원효와 의상이 불교계의 국사로 추봉되었다. 이는 신라문화가 고려조에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의미한다. 국초에 고려왕조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은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실제 고려왕조는 신라의 강역과 인민, 그리고 그 문화를 계승한 왕조였다. 그러나 과거제 실시의 초기에는 경기, 황해도 일대의 호족들의 자제가 중요한 재상직을 가지게 되던 상황에서 인종 4년 이자겸의 난과 인종 11년의 묘청의 난으로 재상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축출되는 것을 계기로 경주세력으로 신라 왕실의 후손이었던 김부식 3형제 모두가 최고의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이 수상직에 오르면서 국초에 써진 고구려 중심의 삼국사를 신라중심의 삼국사기로 다시 쓰게 되었다.
그는 삼국사기에서 고려가 신라 왕실을 계승한 왕조로 서술하였다. 이는 견훤과 궁예는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국가가 아니라 신라의 반역자로 서술했다. 그는 신라의 건국연대가 삼국 중 가장 빠를 뿐만 아니라 가장 늦게 멸망하여 고려와 연결된다는 점을 들어 신라본기를 책의 첫머리에 실었다.
그는 고구려 멸망을 논한 자신의 글에서 나라를 지킴에 백성의 결속이 지리나 자연환경(天時)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가혹한 징세, 폭정으로 인화를 잃으면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썼다. 역사는 정치에 교훈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과거 왕들의 잘잘못, 신하의 충성심,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삶의 편안함 등을 주로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고대의 신화중심적 역사로부터 벗어나 역사에서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고 평화주의, 국제주의를 강조한 점에서 중세적 합리주의적 역사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역사관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의 역사관으로 이어졌다.
5-5. 무신집권과 대몽항쟁
고려왕조는 문신이 국정과 군사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이에 무신들의 불평이 폭발하여 무신들은 구데타를 일으켜 문신을 제거하고 100년동안 집권하기도 했다(1170~ 1270). 그러나 집권 무신들은 왕실을 없애지는 못했고, 몽골족이 침입하자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40여년간 항쟁하기도 했다. 무신집정가들의 대몽항쟁으로 고려왕조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정복한 대원제국 아래서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원나라와 관계 하에서 고려 왕실의 자주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은 고려인이 해외진출을 많이 한 시기이고, 많은 인적 물적 교류가 있었다. 송나라 문화가 통째로 고려에 수입되었다. 송나라의 주자학이 이 시기에 들어오고 송나라 왕실도서관의 장서가 그대로 고려에 전해짐으로 중국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학습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고려왕조는 왕조말까지 국가적 위기에 수십만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강국이었다. 고려의 북진정책은 압록강어귀로부터 함경도 도련포에 까지 확대되고 윤관(?~1111)은 여진을 두만강 밖으로 몰아내고 9성을 쌓았으나 이를 곧 돌려주었다.
5-6. 고려의 멸망과 왕조교체
새로 선 명나라가 철령 지방의 영유권을 무리하게 주장하자 고려 우왕은 무주공산인 만주의 고토를 차지하려고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1388). 원나라 시대 만주지역은 심왕이라는 직을 고려 왕족이 임명되어 통치되던 곳이라 고려의 연고권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출정 장수 이성계가 반기를 들어 회군하여 우왕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 새로 성리학을 배운 신흥사대부의 협조 하에 조선왕조를 열었다(1392). 내란을 거치지 않고 이룬 왕조교체였다.
5-7. 고려사회의 성격
고려왕조는 불교, 도교, 유교, 전래토속 신앙등 사상적으로 개방된 사회였으며. 사회신분제에서 혈통주의의 골품제를 청산하고 문무반의 귀족, 서민, 노비계층으로 분화되었으나 신분의 상승이 비교적 자유롭게 개방된 사회였다. 일반 서민은 농업생산량의 10분의 1을 조세로 내어 조세부담도 그리 크지 않았다. 산업에 있어서 농업의 중시는 물론 국제 교역, 상공업도 발전하였다. 재산상속은 자녀 균분제였고, 제사도 자녀가 돌아가며 지냈으며, 여자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사회였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중원의 송, 동북아의 요, 금과 비교적 대등한 관계를 정립하였다. 또한 송나라의 문화와 종교, 학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점에서 문화적으로도 개방된 사회였다. 전 국민의 축제인 팔관회와 연등회가 매년 성대하게 치러진 것도 고려왕조의 활력적인 면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시대에 불교신앙은 국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자기 집에서 불교를 신앙하는 거사불교(居士佛敎)로 발달했다. 또한 자연신에 대한 숭배가 적극적이었고, 땅의 지세와 기운이 인간이 화복을 결정해준다는 풍수지리사상이 발전하였으며, 큰 산이나 유명한 인물의 신령을 모셔 제사지내는 신사(神祠)가 많았다.
5-8. 고려시대의 문화
고려왕조의 예술품으로는 비취색의 상감 청자, 불교사찰, 세 번이나 간행된 팔만대장경 등을 들 수 있다. 금속활자가 세계에서 최초로 발명되어 불경을 찍었다. 그리고 민중의 노래가 정리되어 현전하고 있으며, 문사들의 문집도 이 시대부터 나타나 조선왕조에 와서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편찬된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승 일연 편찬의삼국유사, 이승휴가 우리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를 시로 쓴 제왕운기가 현전하고 있다.
일연과 이승휴는 거대제국 신흥 원나라의 억압 하에서 현실을 합리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았다. 삼국유사는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함에 대단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민족지적인 서술과 불교적 설화, 신라의 향가 등 중요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특히 일연의 역사관은 삼국사기에서 소홀히 다룬 인간 역사에서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초월적인 역사의 힘을 강조하고 한국고대문화의 축을 담당한 불교문화를 강조했다. 특히 그는 한국민족이 천손족의 후예라는 것을 신화의 기록을 통해 강조하고 중국 역사와 출발이 비슷한 시기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음을 상세한 단군신화를 통해 강조하였다. 이승휴는 우리의 역사무대 즉 요하이동의 만주와 한반도가 중국과 확연히 다른 하나의 세계임을 선언하고 일국의 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 속의 역사를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 자국사에서는 단군조선으로부터 당왕조인 고려까지 오랜 역사를 연면히 유지해 왔음과 천손이 통치한 신성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우리의 역사는 장구했기 때문에 신흥 원제국과는 달리 앞으로 지속될 것을 묵시적으로 주장했다.
6.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6-1. 새왕조의 건국과 역사의 계승
대륙에서 원나라가 명나라에 의하여 중원에서 축출된 후 25년 고려왕조는 신흥무장 이성계에 의하여 멸망하고, 새로운 조선왕조가 개창되었다.(1392). 조선왕조 건국파들은 우왕(r.1374-1388)이 제거된 후 그가 공민왕의 친자가 아니어서 왕씨가 아니라 辛氏 설을 퍼뜨려 그의 아들 창왕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왕씨 중 한 사람을 왕위에 앉혔다. 고려왕조를 지키려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혁명파는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토지의 수조권을 국가가 장악하여 관료에게 나누어주는 과전법을 1390년에 실시하였다. 새왕조에서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 지금의 서울로 천도하고 도성을 쌓고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을 만들어 국가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고려 후기 무신집권 이후 병권이 사병화된 것을 통수권을 회수하여 국가군대로 전환시켰다.
고려시대의 과거제도는 계승되었으나 무과가 새로이 증설되었다.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하던 사관은 춘추관으로 개칭되어 왕조실록을 더욱 충실하게 준비, 편찬했다. 군주를 교육하는 경연제도, 언관의 대간제도도 큰 틀은 고려조의 제도를 계승하였다. 조선조에는 국초부터 내린 왕의 명령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만세토록 사용할 수 있는 법전을 만들었다. 그것이 경국대전이다. 이로 인하여 조선왕조는 성문법에 의하여 통치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6-2. 민족문화의 체계적 정리
제4대 세종(r. 1418~1450) 대에는 영토를 지금의 두만강과 압록강까지 확보하여 두만강 가에 6진, 압록강 가에 4군을 새로 설치하여 남방 사람들을 이주시켜 우리 영토로 만들었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영토가 확정되었다. 세종은 천문관측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독자적인 달력을 만들었고,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와 시간을 재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제작하였다. 학문발전을 위해 집현전 학사로 하여금 전문적 독서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민족문자를 제정하니 이것이 바로 한글이다. 한글은 세계의 문자사 상 가장 과학적인 글자이다. 한글로 불경과 유교 경전, 농서 등을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양반의 아녀자와 사대부의 기초 교육에 사용되었다.한글로 써진 소설이 많이 읽혀졌다. 한글은 1894년에 국가의 공식문자로 정해져 교육되었다.
고려왕조 실록을 기초로 기전체의 고려사 139권을 50년간 6번의 수정작업 끝에 완성하였다. 선조왕들이 국가 건설에 있었서 당한 어려움을 후대 군주들은 잊지 말고 검소한 생활로 나라를 지키라는 교훈을 주려는 ‘용비어천가’를 한문과 국문으로 지었다.
또한 세종은 전국의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하기도 하여 국가의 문화적 기반과 통치체제를 크게 정비하였다. 제7대 세조와 성종대에는 한국학이 전분야에 걸쳐 당대의 학문수준으로 총정리되었다. 즉 대명회전에 준하는 성문법인 경국대전을 마련하였으니 이는 국가의 헌법과 같은 최고의 법전으로 1894년 폐지될 때까지 실행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자치통감에 준하는 동국통감이 편찬되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다루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가 하나의 편년으로 합쳐서 기술되고 많은 정치적 논평을 실었다. 중국의 대명일통지에 준하는 동국여지승람의 편찬, 중국 문선에 대비되는 동문선, 중국의 농서 농상집요에 대비되는 것으로 종래의 농업 방법을 정리한 농사직설의 편찬, 향촌 의약의 처방전을 정리한 향약집성방, 한국음악을 정리한 악학궤범과 악장가사의 편찬 등은 당시의 한국문명을 정리한 것으로 한국사의 유지에 문화적 토대를 마련한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고금의 예법서를 연구하여 국조오례의와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여 예치국가로 나가는 방향을 설정했다. 이러한 민족문화의 민족의 실체를 명확히 함에 크게 기여하였다.
6-3. 조선왕조의 신분제도
조선조의 신분제는 사족양반과 중인, 평민, 노비의 네 신분이었다. 사족(士族)양반(兩班)은 조선왕조의 문무반 관료직을 담당하거나 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의 전 가족을 지칭하는 특권 신분이었다. 사족 양반은 왕족과 사대부 계층 그리고 역대 왕조의 지배층을 모두 망라한 점에서 그 수가 늘어났다. 이들은 아직 향리와 서리에 있는 사람은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을 억제하였으며, 양반의 서얼 출신을 배제하여 중인신분으로 격하하였다.
사족 양반의 결혼은 철저히 신분을 지켜야했다. 다른 신분과 결혼하면 사족 양반신분에서 떨어져 나갔다. 사족 양반은 서울의 도성 내에도 거주하였지만 전국의 시골에 흩어져 살았으며 시골에 살 경우 읍내에 살지 않고, 인근의 산수가 좋은 곳에 살았다. 그들은 관직을 갖지 않을 경우에도 일생동안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려조의 관료계층과 구별되었다. 물론 관료들이 일생동안 공부를 하는 관습은 고려조부터 형성된 것이다. 논어를 만번 읽은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독서가 아니라 외우는 외골수 독서에 집중했다. 사족 양반은 거의가 시인이고 부모를 모시는 효도를 제1의 가치로 살았다.
양반들이 해야할 일은 관직을 통해 승진하여 이름을 후세 남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관직은 일정한 수로 제한되었는데 이를 차지하려는 학자들은 크게 증가되어 마침내 서로 밀어내기식, 당파를 짓게 되고 당쟁을 치루기도 했다.
서리와 향리의 직책은 세습의 징수, 호구의 파악, 역의 부과 등 중요한 직책이었음데도 불구하고 세습되는 역(役)으로 취급되어 그들에게 일정한 봉록이 주어지지 않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었다. 기술자인 역관, 의관 등은 문화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면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중인신분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민은 군역을 의무를 지었다. 이들은 직접 오위의 군사로 책정되어 매년 2개월간 서울에 와서 군인으로 근무해야했고, 일부의 사람은 군역을 진 사람들의 경제적 부담을 담당하였다.
사회의 최하층에 노비 신분이 있었다. 노비는 서양의 노예와 비슷한 존재이면서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며, 재산을 가질 수 있는 점에서 농노와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10만명을 넘지 않던 노비가 16세기 말에는 전 국민의 3분지 1이상인 200만 정도로 불어났다. 이는 양천교혼을 할 경우 그 자손은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이고 양반들의 특권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더욱 증가했다. 노비는 양반들의 수족이었다. 그들이 없었더란 양반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과거시험을 보러감에도, 결혼함에도, 아이를 키우고 부모의 상을 치름에도 그들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몸종이었고, 노동력을 대주었으며, 살림의 밑천이었다. 양반들은 노비의 ‘신공 (身貢-몸값)’을 받아 경제적 부를 누렸다. 노비는 세습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매,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는 국민이 아닌 소유주의 사유물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양반들의 양민을 노비의 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그토록 증가된 것이다.
6-4. 사림 시대와 문화
사림이란 선비집단을 뜻한다. 선비란 그 연원이 고려조의 학사(공부하는 지식인), 고려말의 사대부(지식인과 고위관료)라는 용어와 관련된다. 그런데 조선조 16세기의 선비(士)란 개념은 성리학의 이념과 가치를 실천하는 학자 겸 관료를 뜻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학이란 경전에서 말한 선비의 학문목표와 방법을 실천하는 학자를 뜻한다.
“제일 먼저 자기 뜻을 성실하게 가지고 마음을 바르게 가져,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수양해야 한다. 자기 집안을 잘 다스린 다음에 더 나아가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
자기 수양은 개인적 욕심을 버리고 공정한 마음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절제를 철저히 하려는 자를 군자라 하고 그렇지 않고 개인적 욕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소인이라고 배척하였다. 군자만을 사귀는 선비집단을 사림이라고 한다. 사림은 공적으로는 절의정신을 크게 중시했다. 절의정신은 충성심의 갈빗 뼈와 같았다.
절의정신의 형성과정을 역사적으로 보면 세 번의 혹독한 정치적 시련과정을 거쳤다. 첫 번은 고려멸망과 조선 건국과정이다. 고려왕조를 지키려 죽음을 바친 정몽주과 신왕조에 벼슬살기를 거부한 길재 등의 희생이 있었다. 두 번째는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낸 세조(r 1455-1468)가 일으킨 1453년의 관료들의 숙청사건이다. 이때 세조의 찬탈은 반대한 수십명이 종로에서 능지처참이 참형을 당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전락했다. 셋째는 새로이 관직에 진출한 관료들이 대간직에 있으면서 고위 관직을 가지고 부귀를 누리는 집단을 매도하다가 숙청을 당한 네 차례의 사건을 들 수 있다. 이런 세 차례의 사건을 거치면서 피를 흘리며 희생당한 사람들의 정신이 고위관직자와 하위 관료가 모두 함께 추앙되는 시기가 16세기 중반이다. 16세기 중엽에는 모든 정치적 권력을 사림이 담당하여 이후 20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절의를 지키다가 희생된 사람들은 사림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들은 연고지인 지방에 설립된 수백개의 서원에서 추모되었다.
사림은 도덕정치를 강조했고,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성리학적인 도덕사회를 이룩했다. 사림의 시대에는 당쟁이 심했다. 이때에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있을 수 없었고 사족 양반의 사기, 절도, 폭행은 거의 없었다. 정치는 공론에 따른다고 해서 사림들의 여론을 중시했고, 국왕들은 백성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인 군주가 영조(r.1724~1777)와 정조(1777~1800)이다.
영조는 세종의 정치를 이상으로 흠모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사림들의 당파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고 백성의 군역을 줄이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했고, 고문금지법을 제정하였다. 정조는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다시 강조하였고, 집현전과 같은 궁중학문연구기관인 규장각을 만들어 젊은 뛰어난 학자들의 길렀고, 공노비의 해방, 자신의 정치일기인 일성록을 상세히 썼다. 세종과 영조, 정조의 공통점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표방하고 그들은 꾸준한 노력으로 당대 학문을 주도할 정도의 가장 뛰어난 학자였다는 점이다.
이런 영정조 시대 조선 사회는 엄청난 국가 기록물을 남겼으니 이를 일러 “기록물의 홍수시대”라고 칭할 정도이다. 행정부서인 6조의 역사를 정리 편찬 출간하였고, 죄인을 조사한 문서, 왕실행사의 일정과 결과를 기록하고 그림과 글로 남긴 의궤,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매일 매일의 일기, 중앙의 다섯 군영의 기록 등이 작성되었다. 그 밖에 개인의 역사서, 일기, 농서와 의약서, 지리서 그리고 수만권의 개인학자들의 문집 등 기록물이 넘쳐났다. 그래서 문헌의 나라라는 칭호가 생기기도 하였다.
6-5. 성리학의 발달
조선 초기인 15세기에는 성리학은 국가와 고위관료들에 의하여 선언적으로 주장되었다. 군주에게 강조된 경연교재가 종래의 당 태종의 정치논담인 정관정요에서 성리학이론서인 대학연의와 주작학 입문서인 근사록 등으로 바뀌었다.
16세기에는 성리학의 철학적 연구가 심화되어 주자학의 본령을 꿰뚤었다. 이황(1501~ 1570)과 이이(1536~1584)등이 대표적 성리철학자였다. 그들은 우주만물의 근본을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고 인간의 심성을 철학적으로 논했다. 특히 이황은 제자교육에 심혈을 기울렸고 그의 학통은 조선후기 영남 일대의 남인계의 학문적 종장이 되었다. 이이는 성리학을 현실정치에 실현하려고 노력한 학자관료였다.
성리학이 한국에 토착화돤 것은 17-8세기이다. 성리학은 주자학이라고도 칭한다. 이 주자학은 계통을 중시했다. 역사에서 정당한 계승국가를 정통을 이어 받았다고 강조되었다. 가문에서는 종통이라 해서 장자중심의 가통이 수립되었다. 또한 학문의 계승관계인 학통이 중시되어 당파가 학통으로 계승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식의 계통을 강조한 성리학에서는 곁가지를 소홀히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상과 종교를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학문적 폐쇄성을 가지고 있어 성리학이 깨지지 않고는 자기 변화를 위한 다른 사상의 수용이 불가능했다. 이는 19세기 천주교 박해사건을 일으키고, 근대화시기에 서양 사상의 수용을 저해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고려시대의 합리성이나 다양성, 개방성이 크게 뒤진 닫힌 사회이념이었다. 실질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했다.
또한 산업정책에서도 농업만이 이익을 창출하는 산업으로 인식하였다. 위정자는 농부의 농사짓는 시기를 침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양반들이 농업에 참여하여 전국토의 농지개간은 18세기에 이르러 최고조에 이르렀다. 또한 당시 집약농법이 개발되었다. 농업에서 가장 무서운 자연재해와 흉년을 넘기기 위한 조처로 환곡제도가 마련되어 수백만 섬의 곡식을 국가에서 비치했다. 이익의 추구를 극도로 억제하는 성리학 사회에서는 상공업은 천시되고 국가의 통제 하에 발전할 수 없었다. 수공업은 농민이 자급자족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국제무역이 금지된 국가였고, 외국에 유학생을 한명도 보내지 않은 왕조였다. 17세기말 18세기에는 상공업에 변화가 일어나 화폐경제시대로 진입하였으나 농업중심의 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6-6. 일본과 여진족의 침입 실학의 발전 –
임진왜란: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전쟁광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3일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15만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침략의 명분은 명나라를 쳐서 정복하겠으니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명과 사대관계를 가진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요구였다. 조선의 지방 관군은 소규모였기 때문에 이런 대군을 방어할 수 없었다. 그리고 20일 만에 수도가 점령되고 국왕은 평양, 의주로 파천했다. 평양과 함경도 전역이 점령되어 초반전은 일본군의 일방적 승리였다. 200년간 큰 전쟁을 치른 경험이 없었던 조선은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5월 이순신이 이끄는 함대에 의해 연이어 완전 패배를 당하였고, 일본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점령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 대항하였고, 후방의 점령지역인 영천 경주지방이 탈환되기도 했다. 육지 전투에서 전세를 완전 역전시킨 것은 1593년 1월 명나라 군대에 의한 평양탈환작전이었다. 명나라는 적을 조선 땅에서 격파하기 위해 5만 명을 파견하여 조선군과 합동작전으로 평양성을 탈환하자 일본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수도 서울이 1년만에 탈환하여 일본군은 해안가로 물러가 주둔했다. 명나라와 일본군 사이에 긴 강화회담이 4년간 복잡하게 진행되어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1597년 일본군은 재침함으로써 명군도 5만명을 즉각 파견하여 이를 막아냈다. 일본군의 재침은 임진왜란 때 공략하지 못했던 전라도 지방을 공략하여 노비, 서적, 도자기 기술공 등을 약탈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경기도 남단 직산전투에서 일본군은 명군에 패해 해안지방으로 후퇴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은 철수하니 7년을 끈 전쟁이 끝났다.
이 전쟁으로 한국인은 피해는 대단히 컸다. 2년간 농사를 짓지 못하여 논밭이 묵었고, 전국민이 식량기근으로 죽은 사람의 고기를 뜯어 먹는 참혹한 현상이 벌여졌고, 거기에 전염병까지 돌아 죽어가는 시신이 길에 이어졌다. 명나라 군대에게 식량을 운반해주는 일, 일본군의 약탈을 막아내는 일로 백성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였다. 조선의 지방행정은 전라도, 경상우도, 충청우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2년간 공백상태였다. 이는 중앙정부가 평안북도로 옮겨져 지방 통제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6-7만명이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가고 수만명이 전쟁에 죽어 가정이 크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사족 양반들의 특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들이 의병을 일의켜 싸운 자는 공신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거주지 이동을 하였다. 그 결과는 사대부들이 자기 조국의 지리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어 산과 강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지도를 정확하게 그렸으며, 국가를 지키기 위한 지리적 요새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다. 역사를 지리적 바탕 위에서 살핀 역사지리학 연구가 조선후기에 일어난 새로운 학문 경향이었다.
여진족의 침입:
여진족은 지금의 중국 동북 3성 즉 만주 땅에 사는 부족이다. 뛰어난 지도자를 만나면 강성한 국가를 만들었다가 그 국가가 망하면 다시 부족 상태로 흩어져 역사를 계속하지 못했다. 아골타는 1115년 금나라를 세워 요를 멸하고 중국의 송나라를 쳐서 양자강 남쪽으로 밀어내고 북경에 도읍을 했다. 1234년 원나라에 의하여 금 나라가 멸망된 후 여진족은 다시 부족의 상태로 흩어졌다가 명나라 하에서 느슨한 상태로 부족생활을 영위하였다. 산업은 낮은 단계의 조방 농업과 목축업이지만 항상 식량의 부족을 느껴 조선으로부터 곡물 지원을 받았다.
부족의 영웅 누르하치가 나타나 부족을 통합하고 1616년 후금을 세웠다. 후금은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 침입을 해 왔다. 1627년의 침입은 조선에서 광해군이 인조에 의하여 축출되는 정변으로 조선의 외교 노선이 반후금 정책으로 바뀐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침입이었다. 3만 기병이 침입하여 8일만에 황해도 황주를 점령하였으나 양국의 사정에 의하여 형제의 맹약을 맺고 회군하였다. 1636년 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하여는 배후세력인 조선과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10만 대군을 이끌고 5일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하였고,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해 40여일간 항전했으나 할 수 없이 항복하여 군신관계를 맺었다.
여진족의 두 차례 침입은 조선 지식인에게 엄청난 사상적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야만족으로 멸시해오던 여진족이 중국을 차지하여 온 세계의 문명이 파괴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명나라를 존경하고 청나라를 멸시하는 풍조와 성리학을 조선 학자들이 지켜야 한다는 풍조를 형성했다. 이는 큰 착각이었다. 이는 조선중화주의를 주창하는 중요 배경이 되었다.
전쟁으로 피폐한 조선을 재건하고 새로운 국가로 만들기 위한 사회개혁안이 학자들의 전문적 연구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를 실학이라고 칭한다. 이는 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 이익(1681-1763), 정약용(1762-1836)에 이어지는 사회개혁론은 토지경작을 농민이 균등하게 하게 하여 국민의 생활을 안정되게 하자는 것이 공통적인 문제의식이었다. 이들은 경제제도와 통치제도의 개혁을 통해 심각한 현실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방안을 깊게 연구했다. 즉 경국대전 체제를 폐기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혁명적 연구였다. 또한 18세기 서울에 사는 학자로 북경에 사신을 다녀온 학자들은 당시 양반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청나라의 문화를 무조건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발전한 산업기술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북학 사상이라고 하며 이들은 국제무역, 도로 개선, 기술혁신 등을 강조했다. 이 시기 한국학은 전 분야에서 개인학자들에 의하여 심도 있게 연구되었다. 18세기 조선 문화는 중국문화를 따라잡는데 거의 성공적이라고 할 만큼 문화가 발달했다. 중세문화를 뛰어 넘는 근세적 경향의 학문연구였다.
그리고 서양지식이 들어와 이제까지 중국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고, 지구는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굴며,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천문적 지식도 가지게 되었다. 서학이란 종교운동도 일어났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발전한 학문은 성리학을 연구하는 주류와 실학이란 비주류의 학문이 함께 발전하였다.
지식인에게 큰 흥미를 끌었던 서학운동은 유교의 전례문제와 충돌하여 금압을 했지만 천주교 신자는 늘어만 갔다. 천주교는 개인의 인권과 자유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하층양반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19세기 천주교는 두 차례의 박해를 받았다. 외국신부 13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서는 성리학을 강화해야한다는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했고, 해안가에 나타나는 외국선박에 대해 쇄국정책을 썼다.
6-7. 19세기의 정치적 부패와 반란
사림이 정치를 운용하던 18세기에 집권층 관료들은 청렴한 정치를 수행하였지만 사림이 등한시한 지방행정에서 향리와 중인서리들의 부정부패는 왕조의 암적 요소로 자라고 있었다. 그들은 조세징수, 군역의 차출, 호구작성 등 중요한 행정을 맡고 있으면서도 국가로부터 일정한 봉급을 받지 못하였다. 더구나 19세기에 들어서서 왕실 외척의 세습적 지위확보와 직권 남용은 지방 수령의 직을 돈을 받고 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토지세금의 징수, 군역의 징발, 환곡제도의 각종 부패가 수령과 향리들의 농간에 극도로 문란해졌다. 이에 민간의 저항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서북지방의 홍경래난(1811)을 필두로 1960년대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 지방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왕조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6-8. 조선후기의 근세적 성격
조선시대를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는 연구 추세도 있지만 본고에서는 15-16세기를 조선전기, 17-9세기를 후기로 구분하여 후기 사회를 중세와는 다른 근세사회로 파악한다. 후기도 비록 경국대전 체제하 국가가 운영되었지만 중세사회로 보기에는 너무 큰 변화가 보이고 이를 근대사회로 파악하기에는 미흡하기 때문에 근세(pre-modern ages)로 칭한다.
우선 신분제의 구조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양반 사족층의 증가와 노비신분의 급격한 감소가 새로운 변화양상이다. 양반신분은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곡식을 국가에 바치는 사람에게는 비록 허직이지만 양반의 관등급을 주어 양반신분으로 인정한 것이다. 18세기 호적를 분석한 결과 양반은 전국민의 40%로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노비신분도 임진왜란을 계기로 도망노비가 속출하여 주인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사례를 분재기라는 문서에 급증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가도 그 추쇄가 수령들의 협조로 가능했으나 이제 많은 사람들이 주거 이동을 하면서 도망노비를 잡아옴이 불가능했다. 특히 공노비인 국가노비는 거의 명부에만 있을 뿐 실상을 파악할 수 없어 1800년에 공노비 해방이 정책적으로 취해졌다. 양반들의 노비 소유는 수백명 단위에서 수십명 내지는 수명으로 크게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조선 후기는 가호(집) 단위로 부과되던 지방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지 않고 쌀이나 돈으로 바치는 대동법이 실시되어 물류 교류에 큰 변화를 가져와 5일마다 열리는 장시로 전국의 유통망이 형성되었고, 상평통보라는 금속화폐가 유통된 점은 중세사회와 다른 점이다.
조선 후기는 가호(집) 단위로 부과되던 지방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지 않고 쌀이나 돈으로 바치는 대동법이 실시되어 물류 교류에 큰 변화를 가져와 5일마다 열리는 장시로 전국의 유통망이 형성되었고, 상평통보라는 금속화폐가 유통된 점은 중세사회와 다른 점이다.
조선후기를 근세로 파악하는 중요한 이유는 문자를 해독하는 식자층이 크게 늘어났고, 현실문제를 학문연구대상으로 삼은 실학풍이 일어났음은 중세를 뛰어넘는 변화였다. 여기에 우리나라 지리를 중심으로 역사문제를 고증하는 역사지리학이 발전했다. 학자들이 자기나라의 역사와 지리, 산업, 의약 등의 중요성을 깨달기 시작했다는 점은 바로 근대에 서양의 민족주의가 도래하였을 때 민족의식으로 전 국민을 쉽게 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7, 맺음말-한국문명사의 특성
한국문명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 10세기 이후 한국인의 활동무대는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한반도는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며, 주산업은 농업이었다. 한국의 역사는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되나 신석기인들이 와서 정착생활을 하였고, 청동기를 소유한 집단이 새로이 들어왔다.
한국문명은 청동기시대에 성읍국가를 만든 지석묘사회로부터 시작하여 그후 3000여년을 국가체제를 유지해오면서 스스로 시대마다 문제를 해결해왔다. 청동기 시대에 생긴 수 백개의 성읍국가 중 수백년 역사를 이어온 나라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벡제, 신라 가야의 여섯 나라였다. 이들 나라는 건국 시기는 차이가 있으나 모두 건국시조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공통점은 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제강림신화이라는 점이다. 이는 남자 중심의 신화였으며, 천신과 지신의 결혼으로 시조를 낳았다는 공통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각 국가에서는 전 국민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모임을 1년에 정기적으로 가졌다. 이 때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즐기는 풍속이 있었다. 이런 천손족의 후예라는 의식은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위대한 성취를 하게 하거나, 어려운 시대상황을 이겨내는 정신적 역할을 하면서 계속 지속되어 내려왔다. 하늘님의 신성성은 1860년대에 새로이 일어난 민족종교인 동학의 중심사상으로 나타났고 현대의 애국가의 가사에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한국문명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4세기 경에 전래한 철기문화와 중국의 한자의 전래를 들 수 있다. 철기문화는 농기구와 무기의 발전을 통해 한국사회에 정복전쟁을 가져왔다. 이 새로이 인민과 영토를 영구 지배하는 전쟁양식으로 소규모의 지역국가에서 강역국가란 고대사회를 탄생시켰다. 한자의 전래는 역사의 기록을 가능하게 하였고 함께 유교사상이 전래되었다. 이는 문명의 교류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의 고대국가는 전쟁을 통해 국토를 확장했고, 왕권을 전재화시켰다. 또한 율령격식으로 독자적인 관등급체계와 통치조직 등을 반포하고 운영했다. 이에 왕권을 뒷받침하는 불교의 수용이 있었다. 불교의 수용은 왕족의 신성성, 호국사상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회화, 건축, 조각, 음악의 차원으로 발전하여 고대문명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한국고대사회의 특징으로는 신분제가 왕과 왕비족을 중심으로하는 특권귀족층이 형성되었고 관직을 차지는 귀족신분이 수도에 살았다는 점이다. 고대의 신분제로 신라의 골품제가 구체적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상호 국경을 접하면서 영토확장을 위한 치열한 전쟁이 계속 일어났다. 이런 전쟁은 마침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되고, 고구려도 멸망되기에 이르렀다. 신라와 당나라는 빼앗은 지역의 관할권을 두고 대립하였다. 신라는 당나라군대를 축출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지역에서는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만에 부흥국가인 발해가 새로이 건국되었다. 발해와 신라는 남북조 국가체제를 200여년간 유지했다. 이 때 양국은 상호 전쟁이 없이 평화를 장기간 누렸다.
8세기 말부터 신라에서는 귀족 간에 왕위계승을 위한 쟁탈전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그 결과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자 그동안 구축했던 수도중심의 통치체제가 와해되고, 수 백명의 지방세력가들이 새로이 등장하였으니 이들을 ‘호족’이라 칭한다, 호족은 무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했거나 지방의 군사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성주나 장군 등이 중심이었다. 이들이 정치세력으로 발전한 것이 9세기 말의 궁예, 견훤이었고 이를 후삼국 시대라 칭한다. 궁예의 휘하에서 성장한 왕건이 정권을 장악하자 국호를 태봉에서 고구려가 장수왕이후 250여년간 사용해온 ‘고려’로 정하면서 고구려 계승국가임을 자처했다(918). 왕건 태조는 호족연합정책을 써서 지방 호족들의 귀부를 받아 후삼국체제를 재통합하게 되었다.(935)
고려사회는 고대에 형성된 골품체제를 해체하고 지방 호족을 끌어들인 새로운 신분제 사회로 개편되었다. 이 때 사상적으로 전통신앙인 천령과 명산대천의 자연신에 대한 신앙을 중시하여 매넌 정기적인 국가의 행사로 치러졌다.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도 유교, 도교적인 신앙이 자유롭게 행해졌다. 중세사회의 특징은 새로이 개편된 사회를 이끌어 가기 위해 선진 중국의 통치제도를 수용했다는 점이다. 즉 문·무반으로 구성된 관직체계, 관료선발 방식의 과거제도, 삼성6부의 통치기관의 수용,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기구가 설립되고, 대간제도가 운용되었다. 고려사회는 신분상승, 신앙과 종교, 산업의 자유로운 발전, 여성의 활발한 사회적 활동 등 여러 가지 점에서 개방된 사회였다. 또한 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풍수지리사상도 발전했다.
문신 중심의 고려사회는 무신집권이라는 100년간의 역사도 있었고 원나라의 침입하자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항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세계의 거대 제국인 원나라 하에서 왕조를 유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 때 많은 인적, 물적 교류가 이루어졌고, 송나라 문화와 도서가 고려에 들어왔다. 고려에서 내란을 거치지 않고 평화적인 왕조 교체가 이루어졌다. 고려의 문치, 문신 중심의 사회는 조선왕조로 계승되었다.
15세기에는 민족문자인 한글이 만들어지고, 우리나라의 법제, 역사, 문학, 지리, 농법, 의약, 음악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국문명의 성립을 위한 문헌적 기초를 다졌다. 조선조 사회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선언하면서, 불교의 배척과 억압, 전통신앙의 규제, 산업에서 상공업의 천시 등 사상적으로 닫힌 사회였다.
그러나 고려조부터 시작된 공부하는 관료 계층의 확대는 군주를 성군으로 만들고 도덕적 신료들인 군자가 정치를 하는 사림시대를 이룩하였다. 이들은 18세기 기록문화의 홍수시대라고 칭할 정도로 엄청난 문헌 기록을 만들어 냈다. 또한 개인학자들의 깊은 학문적 연구가 중국학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백성을 위한 통치가 크게 진전되었다. 도덕적으로 인격을 갖춘 선비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왕과 자신, 자녀들의 공부를 강조하는 사회풍조, 다양한 신앙과 종교가 충돌 없이 공존해온 문화전통, 천신과 지신을 포함한 자연신에 대한 숭배사상은 한국 역사 발전에 보이지 않는 저력이 되었다.
(201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