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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 🌟
2024년 7월 7일 주일 예배
( 인도,설교: 정성욱 선교사 )
🌟 다 같이 기도함으로 7월 7일
주일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7월
첫째 주 주일을 허락해 주시고 전국
각지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에 다 함께
모여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시간 저희들에게 임재하여 주셔서
저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저희들이 주께 드리는 기도의
응답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시는 말씀의 은혜받게
하옵시고 저희와 가족들에게 주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오며
곧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찬송가
https://youtu.be/e4G8B_pFZck?si=mPk7HFL3RxVt2Ow8
🌟 교독문입니다.
시편 110편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요엘 2장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 한 주간도 주 안에서 평안하셨는지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오늘 주일 예배 말씀은 사도행전 2장을
주해를 참고하여 함께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 2장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Pentecost)은 처음 추수한 보리의 단을 하나님께 드린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며, 칠칠절(출 34:22; 신 16:10), 또는 그 날이 ‘첫 열매를 드리는 날’(민 28:26; 출 23:16)로 불려졌습니다.
1세기 경 사두개인들의 계산법에 따르면, 유월절 후 첫 번째 일요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로 지켜졌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 불려졌습니다. 또한 이 날은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로 여겨졌는데, 이는 출애굽기 19장 1절의 날짜 기록에서 추론한 것입니다.
오순절 아침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던 집안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이 바람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하면서 바람(생기)에게 명하여 죽은 자들 위에 불라고 했을 때, 마른 뼈였던 자들이 새 생명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 강림의 외적인 표적은 볼 수도 있었고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불의 혀”같은 것이 나타나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출 3:2)과 같이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세례 요한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며, 본문의 문맥에서도 바람과 함께 불이 성령의 능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뜻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을 했습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식의 한계를 넘어선 말을 할 뿐 아니라, 평소에는 구사할 수 없는 타언어로 말을 합니다.(외국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것을 ‘영적인 은사’로써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 이하에서 ‘은사’ 문제를 다루면서, 방언이 성령의 역사임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고린도 교인들이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은 책망했습니다.
오순절에 신적인 황홀경에 빠져 제자들이 말했던 언어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었던 자들에게 아무런 해석 없이도 이해되었던 말이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사도들이 아람어나 헬라어가 아니라 애굽과 소아시아, 그리고 로마 세계의 방언을 말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이 때 사도들이 말한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행 2:11)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 여러 지방의 언어로 말하여졌다는 것은 성령강림 사건이 복음의 세계 전파를 위한 예비 단계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세계각국에 널리 흩어져 살던 유대인이 칠칠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크게 운집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든 이유는 성회로 모여 특별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할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이었습니다(민 28:26). 그들은 사도들이 각기 자기들의 난 곳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칼빈에 의하면, 누가는 그들이 놀란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원래 사도들이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면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지역에서 출생하였지만 글이 이제 하나님의 할 일들과 하늘의 지혜에 대해서 당당히 말했다는 사실이고, 둘째로는 그들이 순식간에 새로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9-11절에는 그들이 온 각 나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나라들의 목록은 문맥과 관련되어 있으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메소보다미아인들”은 유대의 동쪽에 살았던 사람들, 곧 아람어를 말하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지역은 과거에 앗수르인들이 북쪽 이스라엘의 열 지파로부터 포로로 잡은 자들을 거주시켰던 지역으로써 가장 먼저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생겨난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흩어져 살게 된 그들은 민족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후에 느부갓네살 시대에 유다의 포로들로 말미암아 더욱 증가되었습니다. 바사 왕국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는 대신에 그동안 살던 곳에 계속 머물기를 원했으며, 그 후 많은 이민자들로 인하여 그 수는 더욱 증가하여 팔레스타인 동쪽 지방의 유대인들의 수는 약 10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지명 가운데 “유대”라는 표기는 대체로 오기(誤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언급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기록된 “유대”라는 명칭은 애굽의 국경 지방에서부터 유브라데에 이르는 지역, 곧 솔로몬과 다윗 왕에 의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통치되던 지역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 목록에 시리아가 빠져 있다는 의문도 함께 풀릴 수 있습니다.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소아시아의 그 지방들에 규모가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중간(13-19장)에 보면 이에 대한 증거가 제시되어 있으며, 필로(Philo)는 말하기를 “아시아와 시리아의 각 도시에는 매우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Embassy to Gaius, 245). 소아시아의 북쪽 만(Coast)에서부터 어떤 자들은 흑해를 건너 왔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 비문들은 크리미아(the Crimea)에서 발견됩니다.
“애굽과 및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서” 온 방문객들도 디아스포라 지역 중에서 유대인들이 유난히 많이 사는 지역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B.C. 6세기 초부터 계속 애굽에 거주해 왔으며, 특히 헬라가 애굽을 정복하고 B.C. 331년에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된 이후 그 수는 계속 증가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인 필로는, A.D. 38년에 애굽에 약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구역 중에 두 구역의 전 주민이 유대인이었다고 말합니다(On Flaccus 6, 8). 구레네 유대인들은 사도행전의 다른 곳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6:9; 11:20; 13:1). 애굽의 톨레미 1세(Ptolemy Ⅰ)는 그 왕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많은 수의 유대인들을 구레네에 정착시켰습니다.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유럽 본토를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B.C. 2세기 경에 로마에는 유대인 거류지역이 있었는데 B.C. 62년에 폼페이(Pompey)가 승리하여 팔레스타인에서 사로잡아 왔다가 후에 자유롭게 해 주었던 유대인들로 인하여 그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로마의 비문에서는 로마에 최소한 7개의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이방인을 개종시키는 유대인들의 활동에 있어서 로마는 왕성한 활동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온 로마 사람들 가운데에는,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 개종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개종자’란 유대인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세 가지 의식을 지킨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완전한 교제를 누리도록 허용된 이방인이었는데, 그 세 가지 의식이란 첫째, 성인 개종자를 위한 할례였고 둘째, 증인들 앞에서 죄를 참회하는 것과 셋째,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의식 중에 첫 번째 의식 때문에 남자들보다는 여인들 중에 완전한 개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남자들은 완전히 개종하지 않은 채로 만족했는데, 이런 사람들을 대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God-fearer)”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방 지역에 대한 언급은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을 언급함으로써 끝이 납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아라비아는 홍해에서 유브라데에 이르는 지역, 곧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동쪽 지방에 있는 나바티안 왕국(the Nabatean)을 일컫는 말로서 그 수도는 페트라(Petra)입니다. 이 왕국은 아레타스 4세(Aretas Ⅳ) 치세시에(B.C. 9 -
A.D. 40) 그 권력이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아레타스 왕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그의 딸이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B.C. 4 - A.D. 39)의 첫 번째 부인, 즉 헤롯이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했던 부인이라는 사실로써 잘 암시됩니다.
이 모든 방문객들이 사도들과 제자들의 신비한 외침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유대 지도자들은 이른바 ‘종교 의식서들’, 즉 ‘쉐마’를 비롯한 ‘18기도문’과 음식에 대한 축복 기도문 등을 아무 언어로나 암송하는 것을 허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큰 명절 때에는 예루살렘에 많이 모였기 때문에 명절 기간에는 여러 나라의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자주 울려 퍼졌습니다. 그런데도 이 순례자들이, 제자들이 각국의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고 놀란 것은 그들 모두가 갈릴리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의 또 다른 의미는 바벨탑의 저주를 반전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목격하면서도 사도들을 조롱하였고, 저들이 술에 취했다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누가가 이 구절을 기록한 이유에 대해, 그들이 타락한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극소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방언의 차이점을 세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방언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큰 일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11절)이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인 반면에,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것들은 특성면에서 달랐습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듣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언어였던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 말은 뜻을 알 수 없으며 통역자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각각의 방언은 목적면에서 달랐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은 증거가 되는 것, 곧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바 그들이 성령을 받았음을 입증하는 최초의 표적이었으나, 이에 비해 고린도전서에서 언급된 방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일부 사람들에게 주어진 지속적인 ‘은사’입니다.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큰 무리가 그 주위에 몰려 들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 군중들을 향해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무리들을 놀라게 했던 현상에 대한 설명과(14-21절) 둘째, 케뤼그마(kerigma) 즉 사도적 선포에 대한 윤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는 선지자 요엘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요엘의 예언을 인용했다는 것은 이러한 날, 곧 성취의 날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공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세에 나타나신 바 된 것이다(벧전 1:20). 말세(마지막 때)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끝을 맺는다. 그 때는 올 세대(the age to come)와 현 세대가 동시에 겹쳐지는 때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확신을 가지고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17-21절의 말씀은 요엘 2장 28-3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요엘은 ‘주의 날’ 곧 그분이 의와 자비로 행하실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특히 요엘의 예언 가운데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바라고 회개하라는 요청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며(욜 2:12-14), 이러한 회개의 요청은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에서 나타납니다(38절). 그러나 베드로가 실제로 인용하고 있는 구절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내용은 “모든 육체에”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리라는 예언입니다. 누가는 이 말씀에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라는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부어짐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는 환상과 꿈, 그리고 입의 말을 통한 예언의 은사입니다.
존 스토트에 의하면,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과 해설은 사해문서에서 ‘pesher’ 혹은 구약 본문을 그것의 성취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먼저 베드로는 ‘이것이 그것입니다’(16절)라는 말로 그의 설교를 시작하는데, 그의 청중이 목격한 ‘이것’은 요엘이 예언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요엘이 쓴 ‘그 후에’라는 말을 ‘말세에’로 의도적으로 바꿉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마지막 날이 도래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세 번째로 그는 그 본문을 예수님께 적용시킵니다. 그래서 구원이 가져오시는 ‘주’는 이제 시온산에 살아남은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시는 여호와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죄와 심판에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19절과 20절에 묘사되어 있는 대로 자연 세계를 통해 계시된 기사와 표적들은 베드로가 설교할 당시의 상황에 더욱 호소력 있게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대낮의 태양이 어두움으로 변한 것을 목격한지 7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적은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 곧 심판의 날이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지는 날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상징입니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는 예수가 주시요 메시아임을 선포합니다. 초대 사도적 케뤼그마는 언제나 네 가지의 내용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성취의 날이 도래했음을 알리고 둘째, 예수의 사역과 죽음과 승리를 말하고 셋째,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예수의 사역과 죽음과 승리로 인해 성취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끝으로 회개하라는 요청을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이러한 네 가지 요소가 모두 나타납니다.
23절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을 말합니다. 십자가형으로 예수를 죽인 손은 “법 없는 자들의 손”이었지만, 그러한 행위를 부추긴 것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즉, 예수의 죽음을 꾀했던 자들은 백성의 지도자인 제사장들이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자들은 그들의 선동을 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브레이크록(E. M. Blaiklock)에 의하면, 베드로 앞에 모여있는 회중은 그리스도의 수난 주간에 큰 소리로, “호산나, 바라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쳤던 바로 그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처형에 가담했던 모든 자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를 성취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제시된 대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메시아는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눅 24:25, 46; 행 17:3, 26:23 참고).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죽음에 넘겨준 자들과 그를 죽인 자들의 죄가 결코 감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 곧 하나님의 사죄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청중들을 향해 참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인간들이 예수를 재판하여 확정했던 형벌이 그보다 더욱 높고 위대한 재판에 의해 번복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으며, 그를 매고 있던 죽음의 결박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아는 죽음에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메시아의 고난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따라 정해진 것이라면 그의 부활과 영광도 역시 그러합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해 구약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25-28절은 시편 16편 8-11절의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예수의 승귀는 곧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고 여겨졌습니다. 베드로의 논지에 의하면 여기에 인용된 시편의 말씀은 다윗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영혼은 죽은 자의 처소로 갔으며, 그의 육체는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라는 말씀은 메시아로서의 왕, 곧 “위대한 다윗의 그보다 더 위대한 아들”을 가리키는 말씀이며, 다윗은 그의 모형으로서 예언의 영을 받아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예언의 말씀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그러기에 예수는 약속된 메시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3-35절에서는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역시 다윗의 시편이며, 하나님께서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말했던 “주”가 메시아라는 일반적인 신앙을 마가복음 12장 35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 입증됩니다. 그 내용은, 다윗이 몸소 하나님의 우편에 앉기 위해 하늘로 승천하지 않았기에, 이 말씀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이며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높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33절), 하나님의 우편에까지, 즉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눅 22:29)는 자신의 말대로 우주를 다스리는 최상의 자리에까지 높임을 받았습니다. 시편 110편 1절의 말씀과 일치하는 예수의 승귀는 초기 사도적 전파 내용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것으로써 기독교 신조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남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36절의 말씀으로 설교를 끝맺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요,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임을 주장하였으나(막 14:61), 산헤드린 공회는 그의 주장을 참람한 것으로 여기고 그를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주장이 진실임을 옹호하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 주(主)요 메시아로서 자신의 우편에까지 높이셨습니다. 그의 메시아됨(Messiahship)은 그의 수세시에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함께 인정되었으며 그의 부활로 확증되었습니다.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베드로의 설교는 매우 효과적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양심을 자극했습니다. 만일 나사렛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라면 그를 박해하고 죽게 만든 죄보다 더 큰 죄는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구원의 소망을 두어야 할 예수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근심하며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묻는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즉,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를 메시아로서 고백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것이며, 사도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요청과 더불어 세례를 받으라는 요청이 함께 나타납니다. 세례를 받으라는 요청은 그 청중들에게 생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청중들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막 1:4)를 외치며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요청한 세례는 요한의 세례에는 없던 새로운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성령의 은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식인데, 그것은 주의 영광된 재림으로 인해 이루어질 최종적인 구원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와 연관지어 볼 때 그것은 이스라엘이 바라던 소망의 실현이요 성취였습니다.
F.F. 브루스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the gift of the Spirit)와 성령의 은사들(the gifts of the Spirit)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메시아를 통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 자신이며, 성령의 은사들은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11)고 말씀하신 대로 성령께서 나눠주시는 영적인 기능들입니다. 38절에 약속된 성령의 은사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임하시는 성령 자신입니다. 이 성령의 은사가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포함할 수 있으나 가장 우선 적용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성령에 의해 신자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 자기들의 죄사함을 위해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3천 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면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요 14:12)고 하신 말씀이 이뤄진 것입니다.
회개한 3천명의 사람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사도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전달한 것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떡을 떼며”라는 말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을 규칙적으로 수행했음을 의미합니다. 브레이크록에 의하면, ‘애찬’(떡을 떼는 것, 42절)은 성찬을 포함하고 있으나, 후에 성찬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함께 먹는 것은, 특별히 부활절에는 언제나 교제의 주요한 표지였습니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사람들의 회개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었습니다. 회개한 자들의 마음의 감동은 사도들이 행하는 기사의 표적들을 인하여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있을 때 행하신 기적들이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이었던 것과 같이, 사도들이 행한 기적 또한 그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함께 거하며, 메시아 안에서 하나라는 깊은 의식 하에 개인의 소유를 내어놓고 서로 통용하였습니다. 재산을 많이 가진 자들은 물론 가난한 자들까지도 자기들의 물건을 팔아 개인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물건을 통용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려는 의식이 강할 때만 일어날 수 있으며, 그러한 의식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공동 생활은 곧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4:32-5:11).
오순절 이후 믿는 사람들은 매일 성전 경내에서 모여 예배드리며 복음을 증거하였고, 집에서는 주님의 정하심을 따라 떡을 떼며 친교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규칙적으로 모였던 장소는 성전 바깥 뜰 동쪽편에 있는 솔로몬의 행각이었습니다(3:11; 5:12). 교제의 만찬은 관례상 성전 경내에서 먹을 수 없었으므로 각 집에서(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먹었습니다. 그들은 모임 내부에서 기쁨을 갖고 서로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대했으며, 밖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선행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으며,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그 충실된 남은 자들의 모임에 더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지막 때를 맞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우리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공중 강림과 재림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전국과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주로 제가 거주하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인 영남 지역에서
복음을 많이 전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기독교 복음화율 통계를
보니깐 예전에 비해서 영남지역에 복음화율이
높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입니다.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말씀처럼 우리들에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영남지역과 나아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다시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상급을 받는
이 복된 사역에 저와 함께 동참하시는
성도분들이 모두 되시길 축원드리겠습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옵소서!
그리하여 가족들과 이웃들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주의 날에 들림받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명 감당할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영육 간에 강권함을 주옵시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도 주옵소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오며
곧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교회 헌금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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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352-0425-0825-73 정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