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미스테리의 인물 가운데 가장 연구대상 중 한사람인 듯 싶다. 한 세대가 지나며 이제는 그에대한 평가가 완화되었다는 것에대해 부정할 수는 없지만 김일성만큼이나 베일에 싸여진 인물도 드물 것이라는 게 현대사의 수수께끼이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태생인 그의 집안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친가는 물론 외가며 친인척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고 증조부인 김응수는 셔먼호가 대동강에 표류했을때 주민들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김응수는 주민들이 셔먼호와 선원들에게 돌을 던거나 셔먼호를 전소시키는데 동참하지 않고 숨어서 이를 지켜보다 비밀리에 예수를 접했다.
당시 김형직 장로와 강반석 권사는 평양 대부흥집회를 통해 만났다. 당시 강반석의 선친 강돈욱은 창덕학교장으로 엘리트였고 김형직은 시무장로였다.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은 주일학교를 통해 성장했고 외조부인 강돈욱이 그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김형직과 강반석은 각각 1926년과 1932년에 사망했는데 이에대한 의혹이 꼬리를 물고있으나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당시 조선에서도 자라기 시작한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 부모형제는 물론 친지들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대대로 빈농출신이던 김형직부부는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게되면서 가계를 일으켰으며 이에 최대 수혜자는 김일성이었다. 그의 아들가운데 첫째아들인 김정일이야 무엇을 하는지 알고있지만 둘째와 셋째,냇째가 모두 지하교인이라는 점이다.
지금도 평양에는 김일성이 가족들과 같이 출석하던 칠곡교회와 봉수교회가 남아있다. 2001년에는 조선그리스도연맹의 초청으로 이재서 총신대교수가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평양에 남아있는 교회들은 대외 선전용으로 밝혀진 바 있다.
김형직은 평양 대부흥 집회를 통해 강반석을 만났고 신앙적으로도 어린나이였으나 기도만큼은 누구보다도 뜨거웠고 이러한 모습에 끌려 강반석이 성년이 되던 해 결혼하였다. 초창기에는 집사로 봉직하다 30세때 권사가 되었다. 끼니 걱정을 하던 이들 부부는 강 베드로 권사의 부친인 강돈욱장로가 창덕학교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차츰 가계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는 이게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며 겸손함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성주)을 낳던 해에 김형직 장로는 105인의 일원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되어있었다. 이후로 가석방 될 때까지 매년 성주를 데리고 면회를 하였으며 뒷바라지와 함께 성주에게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이라며 존경심과 동시에 반일감정을 심어주었다.
옥중에서 김형직은 동료재소자인 백범을 전도하기도 했는데 백범은 한때 승려생활을 했으며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일행 중 한명인 일인을 시해하자 일경을 피해 공주 마곡사에 은신했던 백범을 존경했다며 그분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김형직 장로의 신앙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김형직은 가석방 이후 또다시 기미만세운동에 동참하다 재투옥 되었고 징역5년을 언도받은 뒤 출옥한 지 1년도 채 안되어 의문사하였다. 김형직 장로의 49재를 치르고 강반석 권사는 성주,영주,철주 등 세 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났다. 그런데 이들이 만주로 떠난 지 6년만에 강반석 마저 한 줌의 흙이되어 돌아왔고 얼마 후에는 철주마저 주검이 되어 귀국했다. 사안은 병사로 알려졌지만 그 부분에서 의혹이 없지않았다.
주일학교시절 김일성의 행동을 당시 필자의 외조모님은 매우 못마땅히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20년이 자나서 그에 의한 군대에 일가족들이 죽임을 당했으니 더욱 그에대한 증오심이 얼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해방 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운 뒤 선친과 형제의 이름을 딴 사범대학교와 행정구역, 철강소의 이름을 사용했다.
때문에 셋째아들 김창일이 가짜교회의 목사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김일성은 주일학교시절 못 말리는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하루는 용변을 보던 목사님을 향해 새총으로 명중시키는가 하면 여전도사의 치마를 들추어내 봉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교인들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조들께서도 어린시절 대부분 개구쟁이였다면서 성주에대한 기대는 무궁무진했다.
김일성(성주)은 태어날 때부터 아니 출생하기 전부터 우람한 체격이어서 강반석은 그를 낳을때 무척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좀처럼 아이가 나오지않자 서양의술을 동원해 제왕절개를 해야한다는 말을 했으나 자칫 산모는 물론 아이도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생
각에 거절하였다. 강반석은 '나는 잘못되어도 상관없지만 아이만은 정상적으로 자라야한다'고 했으니 아이에대한 모정이 얼만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김일성은 1912년 4월15일 식구와 교우들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 김일성은 이러한 슬하에서 부족한 것 없이 완구류는 물론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 없었을 정도로 풍요롭게 생활했다. 우여곡절 끝에 낳았기에 누구보다도 애지중지 키웠던 김일성이었기에 젊었을 때부터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10세 생일 때 선물로 받은 장난감 총으로 늘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다.
김일성의 부친이던 김형직은 3.1운동의 핵심인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그가 의문사 했을때 교인들은 고생고생하다 이제 겨우 살만했다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며 애석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교인들은 김장로와 강권사가 워낙 신앙심이 깊어 하나님께서 좀 더 일찍 천국으로 초대한것이라고 생각하라며 성주의 남은 식구들과 친척들을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부친과 모친의 장례 때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태연한데 대해 조문객들은 내심 슬프기는 해도 부모님이 천국에 갔다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영특해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성명학적으로도 대단한 사주였다고 한다. 풀이대로 '일생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성인군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주대로 본명인 진짜 김일성은 보천부전투에서 일본군 100만 명을 물리친 공적을 이루었다. 김성주와 같은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결코 지주를 증오하지않았고 애국심이 투철했다.
김성주 집안처럼 모태신앙은 아니었지만 소년시절 새총으로 일본순사를 린치한 혐의로 이를 체포하려는 일경에 당시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수사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손 목사와 인연이 되어 기독교인이 되었고 독립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되기 전인 1945년 8월 의문사 했으며 이에대한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1943년 얄타회담을 통해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뉘는 의견을 접한 미,소 연합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김일성부대는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자 소련군의 한반도 입성을 차단하기위해 청진일대에 대대적인 작전개시에 돌입했지만 돌연 김일성이 사망하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름을 도용한 주일학교출신 김일성은 한자로 金日成이지만 진짜 김일성은 金一聖으로 불렸다.
김일성이 만주에 체류하던 그 시기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장군도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박성식에 의해 시해되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역사는 일본 100만대군을 물리친 김일성보다 3000명을 물리친 김좌진을 기억한다. 보천보전투로 유명해진 전설의 항일투사 김일성은 이에 앞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기도 한 그는 이름때문인지 북한의 군주 김일성에 가려져 그의 명성은 빛을 보지 못하여왔다.
독립운동사는 물론 기독교사에 있어서도 김일성이라는 인물에대해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10여년 전 만 하더라도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면 불이익을 당하던 시절이었기에 좀처럼 진위를 가리는데 순조롭지 않았던 것만은 자명하다. 김미영 한동대교수는 김일성이 일본군 100만 명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위해 개선문을 세웠으나 정작 김일성스스로가 개선장군임을 내세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비교적 최근에 강의를 통해 알려진 사실로 지난해 에스더기도운동본부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좋은 자료가 되었다. 만약 김일성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으면 해방정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결국 김일성이 사망함에따라 조선은 외세에 의해 광복을 맞게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이것으로 무속신앙의 하나인 역학이 얼마나 미신적이고 허무맹랑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김일성에대해 이름대로 되었다고 그를 추앙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으니 기가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김일성은 해방 후 귀국하여 자신이 마치 보천보전투에서 일본군 100명을 물리친 개선장군인 양 행세하였고 평양에 개선문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은 장대현교회가 있던 자리에 금수산 궁전이 들어섰고 그곳에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5년만에 700만 동족을 죽이고(그때 필자 외가도 크흑ㅠ.ㅠ) 1천만 이산가족을 남긴 인류 역사상 전후무후한 행적을 남긴, 지금도 남기고 있는 김일성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도 개신교가 비난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이를 볼 때 안티가 결코 좌편향인사들이라고 보는것에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다고 할 수있다. 토론방이나 사이트를 보면 기독교와 공산당의 공통점을 들면서 기독교와 북한체제를 싸잡아 비난하곤 한다. 종교토론방에서 ‘예수’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네티즌으로 어찌나 끔찍하게 비방을 하는지 차마 인용하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예수님을 좌빨 협잡군으로 매도하는 그가 왜 필명을‘예수’라고했는지 예수님의 이름을 먹칠한 셈이다.
2004년에는 상지대 김정란 교수가 인터넷신문 기고를 통해 위와 같은 비유로 논란이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역시 기독교집안에서 자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예수님을 전형적인 사회주의자로 몰아붙인 바 있다. 이렇듯 전대미문의 악인 김일성이 기독교집안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기독교를 부정하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이것을 보노라면 자칫 기독교가 종교와 이념의 차이를 떠나 공공의 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판의 예로 들어보면 친박연대가 민노당과 손잡고 반정부연합을 결성한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긍정적인 면에서 생각한다면 진보와 보수가 하나되었음을 느끼게 되지만 이처럼 암담한 하나됨은 인류역사에 전무할 것이다.
다시 말해‘당시 교회가 어떻게 가르쳤기에...'라는 식으로 공격하는 현실을 보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이것은 가정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자신들은 무척 고생을 했기 때문에 자식만큼은 절대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사고방식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한 결과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건장한 체격때문에 아이들로부터 늘 주인행세를 하였다. 식사때도 그는 어른보다 먼저 수저를 드는 것이 습관화되었는데 물론 이것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자식부터 먼저 먹였던 부모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긴하다. 그럼에도 그의 자녀(김창일,김경희)가 진짜 기독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조부인 김형직-강반석의 신앙심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김형직은 1917년 3월 23일 장일환(의장), 배민수, 백세빈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였다. 강양욱은 김일성의 담임을 맡기도 하였다. 강양욱은 강반석의 아버지 강돈욱의 육촌동생으로 해방전까지 감리교 계통인 평양 암정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사람의 가치관 형성과 인격형성에 관한 사회심리학적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가치정향은 대부분 어린시절에 형성되며 성인기의 정치정향에도 영향을 미친다. 학습이론과 정신분석학, 모방학습이론 등은 유아기 또는 아동기에 사람의 성격과 인격이 완성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