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은 충청남도 한 중앙에 있는 오지이다. 청양군의 중앙에는 칠갑산이 있다, 청양군은 10개면인데 칠갑산 서북편의 6개면, 칠갑산 동남편의 4개면으로 구분되어 서북6개면은 홍성과 예산에 접해 있는 옛날 청양현지역이고, 동남편 4개면은 옛날 정산현 지역으로 공주와 부여가 가까운 생활 권이다. 칠갑산의 높은 고개는 지금은 터널로 뚫려 평지처럼 자동차가 드나들지만 아직도 청양이 전체 군의 실질적 생활의 중심지역이 되지 못하고 있다. 칠갑산은 차령산맥의 마지막 산 기운이 크게 뭉친 산이다. 해발 561m이고 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고려시대의 유명한 불상을 가지고 있는 장곡사가 현전하고 있다.
청양군의 큰 혈맥인 대동맥과 같은 내가 금강천(金剛川)이다. 금강천은 현재 강원도 와 전남의 영암에 있는 냇물로 알려져 있으나 청양에도 금강천이 있다. 청양의 금강천은 현재의 지형지도에는 지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장평면 지천리 마을을 돌고 돌아 간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하류지방에서는 금강천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 금강천에 들어오는 작은 시내는 다음과 같다. 청양의 대치면 칠갑산에서 발원하는 시내와 청양읍 형산리, 시전리. 위화리에서 발원은 하는 작은 시내가 청양읍에서 합류하여 읍내를 관통한다. 금강천 즉 지천은 청양읍내를 벗어나면 남양면 금정리,용두리,구치리 여러 작은 시내물이 합쳐지고 대치면 작천리(까치내)에서 장곡사로부터 흘러내리는 장곡천을 합쳐 지천리를 구비구비 돌고 돌아 장평면죽림리와 부여군 은산면 거전리
가곡리, 용두리를 돌아 부여군과 청양군의 경계지역을 지나 청양 청남면 인양리와 부여군 규암면 금암리에서 금강에 합쳐진다. 지천은 전국에서 청정한 시내로 전국에서 으뜸이다. 까치내 시내에서 가재와 고동이 잡히고 있어 요즘 여름철에는 피서지로 성가를 높이고 있다. 까치내는 한자로 작천으로 표현되는데 지천의 북쪽 장곡사쪽이고 이는 대치면에 속하며 시내 남쪽의 마을은 지천리로 장평면에 속해 있다.
칠갑산은 충청남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자연상태가 앞으로 잘 보존될 것이며, 이런 공원을 생활주거지의 중앙에 둔 도시였다면 얼마나 좋을가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울창한 숲을 가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자연방치해두면 자연유산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직 칠갑산은 생활의 중심지역 공원으로서의 역할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칠갑산하면 '콩밭 매는 아낙내야"라는 주병선이 부른 노래로 , 칠갑산 천장리 얼음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또한 이곳은 백제가 멸망하였을 때 부흥운동을 활발히 하였다. 정산면 두릉성이 아직도 유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조선 말기와 3.1운동 때에는활발한 의병투쟁의 중심지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월 29일은 청양에 가기로 예정되었다. 청양은 청정하고 고요한 점에서 항상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곳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30세까지 자란 곳이고 고향이기도 하다. 아직도 아는 분들이 이곳 저곳에 살고 있는 정든 곳이다. 그리고 부모님과의 기억이 주절주절 매달려 있는 곳이다.
청양에서 열리는 학술대회 '청양의 의병과 합천(合川)전투"라는 주제의 토론좌장을 3 달 전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는 충청역사문화연구원과 청양군청에서 공동지원하는 행사였다. 나는 청양을 가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고향이기 때문에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뵙는 인사를 드릴 수 있고, 고향에 사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항상 좋은 곳이다.
그리고 이번 학술행사에 참여하는 분이 거의 모두 안면이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다정스러운 분위기가 될 것은 미리 예상했던 것이다. 들뜬 마음으로 청양을 가는 날을 기다려왔다.
그런데 막상 청양을 가는 교통편에 문제가 바로 전날 생겼다. 애초에는 대전에 내려가 동생, 형님과 함께 동생차로 가려고 예정했는데 갑자기 동생이 허리가 아파서 못간다는 통고를 받았다. 집식구는 내차를 가지고 가라고 했으나 혼자 차를 몰고 가는 것이 자신이 없었다. 자가용은 갈 때에는 내가 타고 가지만 올 때에는 버리고 올 수 없어 차를 모시고 와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전철로 천안까지 가서 공주 또는 청양가는 버스편을 타려고 마음먹고 8시 50분에 집을 나섰다. 학회는 오후 2시였다. 마을버스로 구성역에 가서 분당선을 타고 수원에 가서 천안까지 전철을 탔는데 마침 급행이었다. 천안에서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날에 갔다. 마침 그 때 충청역사문화연구원 실무책임자가 전화가 와서 공주에 가기로 했고, 고향장평면까지 들러가기로 약속을 받았다.
12시 경에 공주에 도착하여 터미날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정을경 박사와 하광학박사를 만나 그 편에 장평면에 가서 재실을 짓는 현장을 잠간 보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제가왔습니다고 인사를 드렸다.
이곳은 동쪽에는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서쪽과 남쪽은 금강천(지천)이 흐르며 멀리 부여의 부소산이 보인다. 앞의 넓은 장평들이 펼쳐진 아늑하고 따스한 기운이 가득한 평화로운 곳이다. 이곳에 언젠가 나도 자리를 함께 할 곳이다. 10분 후 우리는 청양을 가기 위해 내가 자란 낙지리 길을 택했다. 차가 달리는 동안 나는 이곳 저곳의 사연과 그곳에 오래 시간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했으나 시간이 짧았다. 낙지터널을 지나 우리가 탄 차는 장곡사 앞 작천리(까치내)의 금강천을 돌고 돌아 청양에 1시에 도착하였다. 장곡천은 지금도 고동과 가재가 잡히는 아주 맑은 시냇물이다. 칠갑산에서 발원하여 까지내를 지나 화산을 돌아 부여 고란사 위에서 금강으로 유입된다. 유입되기 전의 내이름이 금강천으로 불리운다. 현재 장곡사는 칠갑산이 충청남도 도립공원이다. 나는 차에서 하박사와 정박사에게 현장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의 설명은 바로 주마간산격처럼 빠르게 지나쳤다. 청양에서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고 회의장에 갔다.
회의장에는 이응선 친구와 황인세 친구를 만났고 이종누나도 함께 와서 만났다. 이응선씨는 초등학교 동창일뿐만 아니라 이종매부인데 자기 집에 가서 자고 가라고 다정한 제안을 했으나 이는 후일로 미루어 두었다. 황인세는 중학교 동창으로 3년간 옆자리애 앉아 공부한 친구이다.
청양군수와 악수를 하고 청양의 어린이 출생수를 물었더니 100명이라고 한다. 나는 다시 한번 놀랬다. 군민이 3만명인데 어리아이가 100명이 태어났다고 하니 청양군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청양의 의병활동은 인근의 어떤 군에 비해서도 활발했고, 그 빈도는 전국에서 안동다음 갈 정도로 치열하였다고 한다. 의병은 1895년 민비시해로 인한 을미의병, 1896년 단반령에 대한 의병, 1905년일본의 침략에 대한 을사의병등이 일어났는데 의병장은 최익현, 민종식, 안병찬, 이세영들이 주역이었다. 특히 민종식은 홍주의병으로 알려진 합천투는 당시 청양군이었고, 청양군에서 홍주성을 점령하려고 진격하다가 합천에서 공주에서 파견된 일제의 헌병과 싸운 전투였음을 발표자들은 밝혔다.
특히 충남대학교 김상기 교수의 논문과 박민영박사 (독립기념관 연구사), 곽호제 교수(총청도립대학교), 박경목 서대문역사박물관 소장의 중요한 발표가 있었고, 전문가의 토론자가 토론을 맡아주었다. 지정토론자 이외에 일반 방청석의 질의를 4명이 받아서 토론은 40분이나 늦추어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충청남도 역사문화원 원장 이종수박사와 청양군수가 끝까지 자리를 함께 해주셔서 감사를 드린다.이 원장으로,로부터 작년에 정영호박사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돌아가셨다니 하고 나는 선생님을 추모하는 마음을 가졌다. 커피를 타다가 쓸어져 급서하셨다 한다. 동해안에 추모비를 세운다니 그 때까서 인사를 드려야겠다.
돌아오는 길은 버스를 다섯번이나 갈아타느냐고 힘들었다. 밤 10시30분에 도착했다. 하루동안 나를 즐겁게 해준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린다.그리고 청양군의 발전이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