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칠선계곡(서암정사,벽송사) 탐사 *
- 촉 석 루 -
2005. 2. 13(일) 손주 데리고 지리산 칠선계곡에 있는 서암정사를 찾았다.
벽송사 암자인 서암(西庵)에는 벽송사의 전 주지 원응(元應) 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와 1989년부터 시작하여 10여년에 걸쳐 화엄경 금자사경을
완성하고 주위의 자연석 암반 위에 대방광문 (大方廣門: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극락전(極樂殿 : 아미타여래가 주불이 되어 무수한 불보살이
조각된 부처님의 이상 세계 모습), 광명운대(光明雲臺 : 구름 일듯이
무수한 불보살이 상주하는 곳), 사자굴(스님들의 수행 장소)등을 조각하고
만들어 그 화려함과 정교함, 웅장함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 화엄경 감자 사경 >
팔만사천가지 불경 중에서 가장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 경전의 하나가
화엄경이며, 사경은 부처님의 은혜를 기원한다는 불교적 용어이고 금자
즉 금으로 글을 쓰는 것은 부처님을 그없이 존경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화엄경의 총 글자수는 587,261자이다. 화엄경 금자사경은 서암의 주지스님인
원응스님께서 1989년 6월부터 1999년 초까지 약 11년에 걸쳐 완공했다.
칠선계곡 맞은편 오도재 휴게소 전망대에 있는 지리산 안내사진
휴게소에는 팔각정(智得亭)이 세워져 지리산 정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손에 잡힐듯 웅자한 자세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
서암정사 극락전 입구
서암정사 극락전 내부 석불상(1)
서암정사 극락전 내부 석불상(2)
서암정사 극락전 내부 석불상(3)
서암정사 극락전 내부 석불상(4)
극락전입구 석불상
자연석에 조각된 정교한 석불
극락전 뒷길로 오르면 만나는 석불상 입구
고드름과 대나무가 조화를 이루며 겨울그림을 만들고 있다.
수백년은 됨직한 해송과 석불상이 조화를 이루며 객을 맞이 한다.
극락전 아랫쪽 경사면을 이용한 다실(茶室)에는 蘭과 주방이 함께 조경되어
있으며, 비구니승 한분이 무아의 경지로 몰입하고 계신 모습에 바람소리도 숨을 죽인다
경사면을 최대한 살려 옥상은 극락전 입구 도로로 활용되는 내전
벽송사 입구 양편에 마주보고 서 있는데 남자장승은 호법대신이며
여자장승은 금호장군이다. 왼쪽에 있는 장승이 여자장승으로 입이
합죽하며 꼭 다물어 뺨이 움폭 패어 있는데 지금은 머리 부분만 불에 타 손상돼 있다.
오른편 남자장승은 짱구로 양에 왕방울 만한 눈알이 튀어 나오고
우뚝 솟은 코는 얼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키는 2m남짓으로,
참나무로 조각돼 있고 얼굴 표정은 소박하면서도 위압적이며
과장과 질박을 동시에 표현해 장승의 성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사찰 입구의 두 장승은 절 입구의 이정표 겸 사천왕문격으로 절의
수호신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무서운 형상의 장승을
지나 5백여m의 숲속길을 오르면 새로 단장한 벽송사가 나타난다.
벽송사는 6·25당시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기도 하는 등
근래에 접어 들어 수난을 당했다.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던
탓에 국군 토벌대와의 교전으로 사찰이 불타고 수많은 인민군들이 죽었다 한다.
벽송사의 소실은 지리산자락 곳곳에 남겨진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흔적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을 통해 인생무상을 느끼고 구도의 길을 걸었던
벽송대사의 정신이 서린 벽송사에서 4백여 년이 지난 후 동족간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또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다.
벽송사 나무장승은 그 풍부한 표정에서 민중미학의 본질을 유 감없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승가운데 하나이며,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나무장승과 쌍벽을 이룰 만큼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정도 되는데, 지하에 1m 정도가 묻혀 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m 정도가 더 묻혀 있 어, 드러나 있는 것은 2m 정도이다
칠선계곡으로 오르는 출발점이 되는 추성리 입구에서 왼쪽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벽송사가 고요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보광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 한 채씩 그 리고 앞쪽에 일주문과
종루, 뒤쪽에 산신각이 있는 아담한 절이다.
조선 중종 15 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벽 송사라 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
조선 중종 15년(1520년) 3월 벽송 지엄대사가 창건했는데 처음에는
벽송암이라 했다.
그 후 숙종 30년(1704년)실화로 불에 타버린 것을 지안대사가 신도들의
모금을 통해 완전히 중수 했으나 6·25로 다시 불타버렸다.
지금의 사찰은 지난 63년 원응 구환스님이 이곳에 와 절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벽송사는 절 뒤의 큰 소나무 두 그루도 위풍당당하다.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바로 앞에 솟은 두류봉을
쳐다보는 맛도 괜찮다.
벽송사 골짜기는 가야국 왕이 신라에 쫓겨 국골에 진을 쳤을 때
이곳에 얼음을 저장했다고 해서 유래한 '얼음터'라는 지명이 있다.
보물 제 47호인 벽송사 3층 석탑이라 불리는 이 탑은 탑비나 유래를 전하는
문헌이 없어 건립 경위를 알 수 없는데, 2중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 석탑이다.
이 탑은 위치는 원래 벽송사 대웅전 동편에 세워놓은 것인데 사찰이 아래로
옮겨져 탑만 남게 됐다. 제작수법이 흡사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나
사찰의 조성 연대가 1502년 조선조 중종 15년이니 조선시대의 탑으로 본다.
지면에 방향의 지대석을 깔고 그 중앙에 다시 지대석을 얹어 놓고 그위에
1단의 얕은 턱을 마련한 중석을 두고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였다.
탑신석은 옥신석이 각각 한 돌인데 옥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었으며 옥개석은
층단이 초층과 2층은 4단이나 3층은 3단이다.
옥개석은 전각의 반전이 있으며 상륜부는 복발과 노반이 남아 있다.
각 층의 체감 비율이나 석재의 결구수법이 잘 정돈되어 있으나 전체 조형의 힘이 없다.
손주 해동이가 할아버지의 소원성취 기도를 드리고 있다.
벽송대사는 70수를 넘기고 열반했는데 수많은 사리가 나와 염주와 함께
석불에 보관해 왔으나 6·25 당시 불에 타 아깝게도 벽송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됐다. 벽송대사의 창건 설화 속에 싸리로 광주리를 만들던 곳은
그후 광주리점동이라 불리었으며 지금은 광점동으로 불린다.
팔각정에서 지리산 정기를 모우고 있는 손주 해동이 녀석
벽송사는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자리잡은 사찰로 숱한 창건 설화와
이에 얽힌 얘기들이 남아 있다. 칠선계곡의 들머리인 추성동에서 2km남짓
떨어진 산자락에 위치해 큰 마음먹고 찾지 않으면 일반 등반객들이 한번
찾기 어렵다.
벽송사는 우선 입구의 목장승부터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고 이에 읽힌 사연도
질퍽하다. 신재효의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가루지기"(변강쇠타령)의
주무대가 벽송사일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은데 이는 함양에, 특히
등구 마천땅에 유난히 장승이 많았던 까닭일 것이다.
"가루지기"타령 내용 중에는... 천하의 오잡년 옹녀가 천하의 변강쇠와 내외 삼아
함양 땅에 살았다.
잡질 외에는 아무 재간없는 강쇠란 놈 나무 해오라니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 뽑아 패어 불을 때고 따뜻한 방에서 옹녀와 놀아나는지라. 원통한 함양 장승신
서울 노량진 나루터의 우두머리 장승 찾아 나섰다.
성이 난 우두머리 장승 팔도에 통문 돌려 수만 장승 새남터에 모이게 하고
강쇠란 놈 응징 방법 강구한다. 결국 8백여 가지 병으로 강쇠에게 병 도배해 죽게
한다... 는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 함양땅이 본 무대로 추측된다.
지리산 권역의 문화가 "음잡한 소리"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고 다양함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권선징악의 형식을 지향하던 우리 고대 문화의 단면은 "가루지기"
이외에 인근 남원군의 흥부마을을 무대로한 "흥부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만큼 지리산이 한민족, 특히 남도 주민들에게 애환과 낭만, 그리고 풍자와
풍류의 장소로, 또는 삶의 터전으로 크게 자리매김 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벽송사는 입구의 기이한 형태를 한 두 목장승에 얽힌 사연과 사찰의 소실,
중건 등에 얽힌 얘기 외에 사찰 창건에 얽힌 설화가 매우 흥미롭다.
지금으로부터 4백60여 년 전, 전북 부안군 송씨 가문에서 송지암이 태어났다.
총명해 10세가 되기 전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고 20세에 무과에 장원급제 해 장군의
칭호를 받고 변방에 나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인간이 서로 죽여야 하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인생 무상을
실감 계룡산에 들어가 불교수행에 정진한다.
용문산, 오대산, 백운산 등지를 거치면서 수도를 쌓던 중 자신이 나아갈 바를
찾아 지리산 어딘가에서 수도를 하고 있다는 법계정심대사를 찾아 지리산에
입산한 것이 57세 되던 해.
그 무렵 법계대사는 조선 조정의 척불의 화를 피해 지금의 광점동에서 싸리나무로
광주리를 만들어 내다 팔고 있던 터라 수도를 하기 위해 찾아 온 송지암에게
수도는 커녕 광주리 만드는 일만 시킬 뿐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뭔가 깨우침을 기대했다가 3년여 동안이나 잡일을 하게 되자 어느날 대사의
문하를 떠나려 했다. 대사는 "가고 오는 것은 자유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선뜻 대답했다. 이에 광점동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가니 대사가 "지암아,
너는 도를 받아라"고 소리쳤다. 깜짝 놀라 그 길로 돌아가 무릎 꿇고 경솔함을 사
죄하니 모든 것이 걷히고 마침내 도를 깨쳤다 한다.
모든 물욕과 욕망이 사라지고 만물의 원리를 깨닫게 되고 대사로부터 벽송대사의
칭호를 받게돼 벽송대사는 자신이 깨우침을 얻게 된 곳에 사찰을 세우니 바로
지금의 벽송사라는 것이다. 벽송대사가 득도한지 3개월 후 법계정심대사는 운명했다.
벽송대사는 곧 사찰을 세워 수많은 제자들의 마음 밭에 법비를 내렸다고 한다.
벽송의 문하에서는 그후 서산대사의 스승이 되는 부용, 경성등 두 고승을 배출하는
등 조선시대 한국 불교의 맥을 이어 왔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