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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양들메길 원문보기 글쓴이: 산시조(최영수)
1.산행일시: 2011.11.20.05:50-15:23
2.날씨: 안동기상대, 맑음, 평균기온:3.3℃ 최고기온:7.1℃ 최저기온:0.3℃ 평균운량:0.0 일평균풍속(4.2m/s) 일평균습도(38%)일조시간(9.5hr)
3.산행코스: 용화리 절구골(05:50)-일월산 자생화공원-선녀암- 선녀탕골-대티골갈림-쿵쿵목이(9:45)-외씨버선길 합류(11:24)-희망우체통(11:40)-2등수준점(11:58)-텃골(12:08)-윗대티초입(12:41)-진등이정표(13:06)-큰골(13:11)-뿌리샘(13:22)- 말머리등(13:59)-뿌리샘갈림(14:06)- 대티골합류(14:32)- 일월산 자생화공원,광산(15:23)
4.gps 기록: ** Speeds in 20-11-11 03:23:03 PM **
Average Speed: 3.2 km/h Total Time: 09:33:18 Cartographic Length = 30.928 km
*외씨버선길 및 대티골 숲길만 15.05 km (고도 표시)
5.산행형태: 솔로산행 카페 대절버스 이용, 홀로산행
6.遊山歌
별 보러 갔었던가 조망 보러 갔을테지
백암산 두렷하이 동쪽바다 보이는지
반변천 흘러내려라 아픈 기억 살펴 안지.
古山子도 알아주던 우리 믿음 뿌리라지
천주교도 깃들어서 외래 신앙 품었다지
애간장 끓이었다네 절절한 소원들이.
산나물 좋다하니 봄에도 오고 싶네
설경 또한 좋다하니 해맞이도 와보려네
솔깃해 외씨버선길 다시 한번 와보겠네.
7.지명정보
가.일월산 : 봉우리가 해처럼 생겼고 맞은편 산봉우리가 반달같이 생겨 동해를 바라보면 바다에 해뜨는것을 밝게 볼수있어 일월산이라 함. 경북 영양군 일월면(日月面)과 청기면(靑杞面)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219 m. 태백산맥에 속하며, 이 산에서 낙동강의 상류 지류인 반변천(半邊川)이 발원한다. 남서사면에 천화사(天華寺)가 있으며 동쪽 사면에 용화사지(龍化寺址)가 있다. [출처] 일월산 [日月山 ] | 네이버 백과사전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산이며, 지질은 편마암류(片麻岩類)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으로 약 17㎞ 지점에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청량산이 위치한다. 산정에는 동서로 두 봉우리가 있는데 동봉은 일자봉(日字峰)이라 하여 주봉이며, 서봉은 월자봉(月字峰, 1,170m)이라 한다. 남쪽 사면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半邊川)이 발원한다.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일월산 중에는 귀한 약초가 많고 수도하는 사람들의 움집이 많은 것이 특색이며, 납·아연 등의 광산이 있어 현재 채굴 중에 있다. 유적으로는 조선 세조 때 남이장군이 토적(土賊) 아룡(亞龍)의 족당을 무찔렀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남의포(南誼浦)와 봉감탑(鳳鑑塔)·석문입암(石門立巖) 등이 있다. 사찰로는 동쪽 사면에 용화사지(龍化寺址)가 있고, 서남쪽 사면에 천화사(天華寺)가 있다. 현재 산정에는 통신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고,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 산을 일월산이라 하게 된 것은 동해가 눈 아래 보이는 이 산정에서 동해의 일출과 월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산이라는 뜻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옛날 산정에 천지(天池)가 있어서 그 모양이 해와 달 같다는 데서 불렀다는 설이 있다.
* 월자봉 : 동쪽으로 동해가 보이고 해와 달이 솟는 곳을 먼저 바라본다 하여 일월산으로 부르며 정상에는 일자봉,월바종 두봉우리가 솟아있고 청축사라는 절터와 황씨부인당,영화사,천화사,용화선녀탕 등 볼거리가 많다.일월산은 음기가 강하여 女山으로 알려져있고 그믐날 내림굿을 하면 점괘가 신통해진다 하여 전국각지의 무속인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무속인들로부터 성산으로 추앙받는 산이기도 하다.
*일월산: 영양군 일월면과 청기면, 봉화군 재산면 등에 걸쳐 있는 일월산은 백암산에서 칠보산으로 이어지던 낙동정맥이 853m봉을 지나면서 서쪽으로 가지를 쳐 솟구쳐 올린 산이다. 일월산은 일위산(日圍山), 일우산(日雨山), 쌍요악(雙曜岳)등으로 불린 적이 있으며 산의 형세가 순하게 생겼다 하여 순산(順山)으로도 불린다. 이 산에는 산의 품과 산세만큼이나 약초와 산나물이 많다. 아울러 월자봉 아래에는 '황씨 부인당'이라고 하는 신령각이 있는데, 이 황씨부인당에 있는 황씨 부인의 혼령이 태백산에 있는 단종의 혼령보다 영험하다 하여 혹자는 이 산을 '신령의 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 일월면 용화리[龍化里, Yonghwa-ri]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日月面)에 있는 리(里)이다. 고사리와 참나물이 유명하여 산삼, 송이, 복령, 더덕으로 마을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주막거리, 벌매골(伐梅谷), 절구골, 항골, 큰거리(大溪), 대티(大峙), 용화(龍化), 칡밭모기 등이 있다. 용화(龍化)는 옛날 신라 때 이곳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구룡 모두 하늘로 올라 가고 고려 때 구룡이 하늘로 올라 간 이곳에 용화사라는 절을 지었으니 땅 이름 또한 용화라고 불렀다 한다.
[출처] 용화리 [龍化里, Yonghwa-ri ] | 네이버 백과사전
* 용화리 : 문암리에서 일월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마지막 마을이다. 옛적부터 골짜기가 깊으며 북쪽과 서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합하여 내를 이루며 산의 모양이 아름답다. 대티 마을 서쪽 골짜기에는 칡이 온 산을 뒤덮어 밭과 같이 칡이 많이 자생한다. 봄이 되면 고사리와 참나물이 유명하여 산삼ㆍ송이ㆍ복령ㆍ더덕으로 마을의 소득을 올려 준다.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본래 영양군 북초면의 지역으로서 용화사(龍化寺) 절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용화곡(龍化谷) 또는 용화동 혹은 줄여서 용화(龍化)라고도 이른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큰거리ㆍ절구골ㆍ항골ㆍ대티를 합하고 용화리라고 하여 일월면에 들게 했다. 마을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먼저 용화사(龍化寺) 절에 대한 전설이 있고, 명암(鳴岩)과 일월광산(日月鑛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용화리 3층 석탑과 선녀탕(仙女湯)을 들 수 있다. 옛날 이 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모두가 뜻을 이루어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이 곳에 용화사 절을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곳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의 이름을 용화라고 하게 되었다. 용화사는 그 뒤 없어졌으나 절터와 탑만 남아있다. 명암(鳴岩)의 사연을 알아보자. 명암은 올바위라고도 하는데 호박소 위에 있다. 십여 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굴이 있으며 정월대보름이면 이 바위가 운다고 한다. 아울러 일자봉(日字峯) 동북쪽으로는 선녀들이 내려 와서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이 있는데, 여기가 반변천의 원류(源流)가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선녀탕 밖에서 쉬고 있노라면 폭포에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산새 소리며 매미들의 소리와 함께 어울려 마치 듣는 이가 신선이 된 느낌을 받게 한다.
*일월광산(日月鑛山): 대티 서북쪽에 있는 광산으로서 아연이며 구리와 납ㆍ철 등을 캤다고 한다. 일제 때에 광산을 열었는데 지금은 폐광산이 되었다.
*용화리 삼층 석탑: 일월산 남쪽 광산촌이라고 불리우는 용화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탑을 쌓은 시기는 탑의 짜임으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경상북도 문화재 제 8호(1972)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탑의 높이는 3.5 미터이며 기단(基壇)의 폭은 2.12미터가 된다.
http://www.yyg.go.kr/open_content/area_introduce/tradition/naming/irwol
영양 일월산 야생열매·약초 씨 마른다; 전문 채취꾼들로 몸살…야생동물 겨울철 먹이 부족 우려 기사입력 |경북일보 2011-10-11
본격적인 단풍철을 맞아 영양군내 일월산 등지에 등산객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산림속 야생열매와 약초 등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특히 최근 영양군 일월산 일대 산삼 등이 무더기로 발견 됐다는 언론보도 등으로 이 지역 일대가 유명해지면서 전국에서 몰려든 심마니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영양군은 임야가 전체 면적의 86%나 차지해 깊은 산중마다 인근 주민들과 전문 채취꾼들까지 나서 야생 열매를 마구잡이로 채취하고 있어 야생동물의 겨울나기가 크게 위협받고 있으며 생태계 파괴도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10일 해당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본격적인 단풍철을 맞아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외씨 버선길과 일월면 용화리 대팃골 마을 일월산, 검마산, 울련산, 맹동산 등 주요 산에는 송이버섯과 약초, 도토리와 머루 등 야생열매 채취 행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지역의 도토리 등 야생열매가 무공해 건강식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산행보다는 돈벌이를 위한 전문 채취꾼들의 야생열매 싹쓸이는 심각한 실정이며, 일부 등산객들과 채취꾼들은 산열매뿐만 아니라 식용 약초와 관상용 야생화 등을 캐가기도 해 말썽을 빚고 있다. 이 때문에 야생열매 채취가 극성을 부리면서 영양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다람쥐와 노루, 멧돼지, 산토끼 등 일대 야생동물들이 겨울철 먹이 부족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정형기기자 jeonghk@kyongbuk.co.kr
*주막거리 :일제 시대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이 곳에 주막을 차려 수비면 신암리의 비상광(碑霜鑛)에서 채굴한 비림을 싣고 옮기는 말 달구지가 하루 3,40 대가 이 곳을 지나면서 주막에서 쉬어 갔기 때문에 주막거리라고 하였다(조영석(64) 제보).
*벌매골(伐梅谷)ㆍ매곡(梅谷)ㆍ반매곡(盤梅谷)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 매화가 떨어져서 반 위에 있는 모양을 한 한 묘지가 있다고 알려져 이른바, 그 매화낙지(梅化落地)를 찾기 위해 김씨(金氏) 일가가 머물면서부터 마을이 이루어지고 벌매골 또는 매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홍영락(62) 제보).
의미 부여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가 있겠으나 마을 이름들의 얼개로 볼때 매-미-물-의 걸림을 고려하면 이 또한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매곡(梅谷)의 ‘매’는 물을 뜻하는 것으로서 매곡-물곡이란 걸림을 떠 올릴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삼국사기』에서 수원(水原)-매홀(買忽)의 대응에서 물이 ‘매’임을 알 수 있다.
*절구골 :용화사에서 사용하던 호박이 마을 입구 하천에 떠 내려 와 있는 것을 보고 경주 최씨(慶州崔氏)가 제일 먼저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절구 이름을 본따서 절구골이라고 불러오고 있다(홍영락(62) 제보).
마을 앞 하원에 옛날 용화사 절에서 쓰던 절구호박이 내려와 있으므로 절곡이라 불리움.
(국토지리정보원)
*항골ㆍ함골(函谷):옛날부터 산의 골짜기가 깊어 호랑이가 많아 이웃 마을에 내려 와 집짐승을 잡아 먹기 때문에 불안하였다. 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경주 배씨(慶州裵氏)가 큰 함정을 파 두고 머물면서 호랑이가 잡히기를 기다렷다. 함정을 여러 곳에 많이 파 놓아서 함골이라 불렀다고 한다(한동희(58) 제보).
*큰거리(大溪)북쪽과 서쪽의 깊은 산에서 흘러 내려 오는 개울물이 합하여 큰 내를 이루며, 주변의 산세도 아름다웠다. 큰 시내 옆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기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처음으로 이 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이 곳을 큰 거리라고 불렀다 한다(김승규(55) 제보). 한자로 보아서 큰거리의 ‘거리’는 시내를 뜻하는 ‘걸’에서 비롯한 말로 보인다. 냇물이 있어야 농사를 잘 할 수 있으니 물이 삶의 원천이 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대티(大峙)ㆍ웃대티ㆍ아랫대티: 지금으로부터 액 300여년 전 윗대티는 충주 지씨(忠州池氏), 아랫대티는 고성 이씨(固城李氏)가 처음으로 개척하였는데, 윗대티와 아랫대티 사이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대나무로 죽제품을 많이 생산하였다고 전해 온다(김승규(55) 제보). 물론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대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한자를 보나 땅 이름의 상관성으로 보아 대티는 큰고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마땅하다. 고개를 뜻하는 티(峙)는 구개음으로 되어 티-치로 소리가 바뀐 것으로 볼 수 잇다. 여기 고개 티(峙)는 한국에서 만들어 쓰던 한국 한자음이다.
*용화(龍化): 옛날 신라 때 이 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구룡 모두 하늘로 올라 가고 고구려 때 구룡이 하늘로 올라 간 이 곳에 용화사라는 절을 지었으니 땅 이름 또한 용화라고 불렀다. 용화사는 지금 없어졌으나 유적으로 탑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지호동(59) 제보). 우리나라 여러 곳에 용과 걸림을 보이는 곳이 많이 있다. 이는 물을 다스린다고 믿었던 용 신앙이 땅 이름에 베어 들었기 때문이라고 미루어 볼 수 있다.
http://www.yyg.go.kr/open_content/area_introduce/tradition/naming/irwol
*선녀탕골 : 일월산 동쪽 기슭에는 용화선녀탕이 숨어있는데 선녀암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2~3분쯤 산길을 오른 뒤에 계곡으로 내려서면 용화선녀탕이 반긴다. 높이 10m쯤 되는 폭포 아래로 파인 웅덩이가 욕조를 닮아 신비스러우며, 선녀를 다스리던 신선이 내려와 살펴보고는 물이 맑고 부드럽다며 선녀들의 목욕을 허락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 웅덩이를 선녀탕, 이를 품은 골짜기를 강림골이라고 일컬으며 지명을 따서 용화계곡이라 하며, 백옥 같은 몸을 비스듬히 누이고 새소리를 벗 삼아 목욕하는 선녀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듯하다.
*윗대티: 대티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웃대티라 불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대티가 대치로 변화하여 지금은 웃대치라 부름.
*댓골 : 월자봉 동쪽 골짜기로 큰골이라고도 부르며 대티골에서 연원되었다.
*대티골 : 대치 마을 앞산과 뒷산에 대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대티라 하고 지금은 대치라 불리고 있음.
*쿵쿵목이 : 높이 1160m,월자봉과 선녀탕,윗노루목과 방아목으로 갈리는 요충지로서 유래 불명. 일자봉의 서쪽에 있음.
*일월재 : 월자봉의 북쪽에 있는 재. 높이 약 900m,북쪽의 31번도로나 서쪽의 재산면으로 연결되는 임도, 동쪽 우련전 마을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음.
*우련전 (雨蓮田) : 봉화군 갈산리에 소재함. 풍수설에 의하면 이곳에 연화 부수형의 명당이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60년대 말에는 68세대가 거주하였으나 화전민 철거정책에 따라 많이 줄어 지금은 18가구가 살아가고 있으며 주로 고랭지 채소와 산채를 재배하는 산간 오지로서 고랭지 채소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특히 산채는 일교차가 크므로 향기가 강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진 특산물로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정착한 적도 있음.
*칡밭목 : 마을 서쪽 골짜기에는 칡이 온 산을 뒤덮어 밭과 같이 칡이 많이 자생하여 이름붙었다.
*텃골 : 옛 국도길에서 최북단에 있는 해발 600m의 고지대로 밭농사를 지었음.
*뿌리샘 : 낙동강 상류인 반변천의 발원샘으로서 해발 642m에 위치함. 발원지주차장에서 서쪽으로 약 1.8km 지점에 있음.
*진등 : 옛 국도길과 대티마을을 직결하는 등산로로서 화엄정사쪽으로 이어지는 긴 능선이라서 이름 붙은 듯함.
* 동화재 : 동편에 꽃이 많다하여 동화재라 함. (청기면)
다. 주실마을과 조지훈
일월산 남쪽자락.. 숱한 학자 문화자원..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속하는 주실마을은 북쪽으로 일월산이 있고, 서쪽에는 청기면, 동쪽은 수비면, 남쪽은 영양읍과 맞닿아 있다. 조지훈이 태어난 주실마을은 전통마을 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와 개화 개혁으로 이어진 진취적인 문화를 간직한 매우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조지훈은 시인이요, 국문학자로서 본관은 영양 호는 지훈, 한의학자로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의 4남매중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명은 동탁이며, 고풍의상·승무 등의 민족적 전통이 담긴 시작과 지조론 등의 평론을 남기셨다.
그는 [청록집, 승무, 봉황수,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등 많은 시집을 남겼으며, 생가는 영양에서 20분 거리에 있고, "주실" 마을 입구에는 "빛을 찾아가는 길" 이라 새겨진 조지훈의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생각 인근에는 조지훈이 어렸을 때 수학했던 월록서당과 여러 문화재가 있다.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근대의 대표적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 선생이 태어난 곳은, 이 지방 주택의 전형적인 형태의 ㅁ자형이며 전면·측면 모두 7칸으로,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측 1칸에 지훈 선생의 태실이 있다.
라. 황씨 부인당
* 첫번째 전설
지금부터 약 160여 년 전 순조 때 청기면 당리에 살던 우씨(우씨)의 부인 평해(평해) 황씨(황씨)는 남편과 혼인하여 금실 좋게 살았으나 딸만 9명을 낳아 시어머니의 학대가 극심했다. 황시 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얼굴을 들고 시어머니와 남편을 대 할 수 없어 아홉째 딸이 젓 뗄 무렵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씨댁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다. 이 무렵 일월산에 산삼이 많이 났는데, 산삼 캐는 사람이 산삼을 캐려고 자기가 지어 놓은 삼막(삼막)에 갔더니, 황씨부인이 자기의 삼막에 소복단좌하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나 되돌아서려는데, 황시부인이 말을 하기에 자세히 보니 분명 살아 있는 황씨부인이었다. 황씨부인은 자기 시어머니와 남편의 안부며 딸의 안부를 묻고는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산삼 태는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으나, 어쩐지 마음이 섬뜩하여 그 길로 산을 내려와 우씨댁에 가서 그 이야기를 전하였다. 금실 좋게 살던 우씨는 부인을 잃고 삶의 재미를 모르고 살던 중, 자기 부인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장 삼막에 가보니, 과연 자기 부인이 앉아 있어, “여보!”하고 달려가 손을 덥석 잡으니 부인은 사라지고 백골과 재만 남았다. 남편은 탄식을 하면서 백골을 거두어 장사지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황씨부인의 한을 풀기 위해 그 자리에 당을 지어 주고 ‘황씨부인당’이라 했다고 한다.
(이재춘 제보, 유달선 조사, 박진태 외 1인 공저, 『영남지방의 동제와 탈놀이』,태학사, 1996)
*두번째 전설
약 150년 전 순조 때 청기면 당리에 우씨 청년이 일찍 과부가 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오두막집과 것은 땅마지기만으로 농사를 지으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다. 이웃마을 평해 황씨와 결혼하여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며 살았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사는데, 아들의 지극하던 효성이 약해지자 사랑을 빼앗긴 청상과부 시어머니의 시샘과 질투는 더욱 심해져서, 며느리의 조그만 실수도 용서하지 않고 학대했다.
그리하여 황씨부인은 차라리 저승에 가서나마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남매를 집에 남겨 두고 우물에 가는 척 집을 나와 일월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산삼 캐는 사람이 움막 안에서 목을 매고 죽어 있는 낮선 부인을 발견하고 놀라서 산을 내려 왔다.
그때 이 마을에 살던 영천 이씨 명존 이란 사람이 황씨부인이 현몽한 대로 남편에게 알리니, 남편이 황씨부인의 유골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그 후 황씨부인이 다시 이명존의 꿈에 나타나 “여보시오. 나는 어린 자식을 두고 일찍 목숨을 끊은 죄로 저승에서도 방황하는 혼령이오니, 가난한 우리 남편을 대신해서 내 외로운 혼령이 쉴 수 있도록 당사를 세워 주시면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말하여 이명존이 황씨부인의 현몽대로 당사를 지어 그녀의 원혼을 위로했다고 한다.(『경북마을지』,하,1992)
*세번째 전설
옛날 옛날 영양군 일월산 밑에 황씨라는 처녀가 살았다. 마을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총각이 둘 있었는데, 그중 몸은 약하지만 마음이 고운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식을 올렸다. 혼례를 올린 날 신랑은 뒷간에 갔다가 오는 길에 마치 칼을 들고 자신을 기다리는 듯한 사내의 모습이 신방에 언뜻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그 날로 타관으로 도망쳐 버렸다.
신랑이 타관으로 도망간 사실을 모르는 신부는 녹의흉상에 족두리 화관을 쓴 채로 하루 이틀 기다리기를 오 년여 계속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낯선 마을에 정착한 신랑을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 지방에 있는 처녀에게 새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백일을 채우지 못하고 죽기를 네 번이나 했다. 무당을 찾아가 사연을 물어 본 즉, 죽은 귀신이 아직도 너를 기다리기 때문에 네 자식은 모두 죽었고, 모두가 사는 방법은 귀신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사내는 무당의 말대로 고행의 옛집을 찾아가서 폐가가 된 신방에 들어가 보니 신부는 초야의 모습 그대로 시체가 되어 풀 더미 속에 앉아 있었다. 사내가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신부가 나타나 나를 업어다가 일월산 산마루에 앉혀 달라고 부탁하였다. 꿈에서 깨어나 신부의 부탁대로 하자 죽은 신부는 “이제는 하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에 사내는 산에 있으면서 바위를 쪼아 족두리를 쓴 신부 모양의 석상을 만들고, 작은 사당을 지어 조석으로 봉양하다가 돌 신부 옆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산사태로 사당이 무너지고, 오랜 세월이 흘러 사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1946년 부산에 살던 한 아낙네가 병에 걸려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한 여자가 나타나, “나는 일월산 황씨부인인데, 나를 파내서 섬기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일월산으로 함께 가서 초막을 짓고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발이 닿는 대로 가다가 웅덩이에서 족두리를 쓴 석상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당집을 짓고 석상을 섬겼다. 그 이후 그 아낙네의 병을 씻은 듯이 나았고, 아울러 황씨부인당의 영험을 받아서 용한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김열규 에세이』 중 ‘일월산 산신된 새색시’ 참조)
마. 외씨버선길(오이씨처럼 볼이 조븟하고 갸름하여 맵시가 있는 버선)길
1930년대 일제시대 산자락을 잘라 청송에서 시작하여 영양,봉화,강원도 영월로 이어지는 31번 국도를 닦아 일월산에서 나오는 광물을 채광해 봉화로 옯기던 그 수탈의 기억을 가진 길로서 민초들이 징용으로 끌려가 희생당했던 흔적이 남은 길이다. 이 길을 by2c(영양,강원도 영월,청송,봉화의 두문자)사업의 일환으로 둘레길을 구상하였다.
우리나라 대표 청정지역인 청송, 영양, 봉화, 영월4개군이 의견을 내고 힘을 합해서 "외씨버선길'을만들어 냈다는 것은 대단히 역사적인 일이다. 이런 일을 하면 으레 있기 마련인 지역이기주의도 없었고, 너 잘났네, 나 잘났네 하는 고함질도 없었다. 이름을 지을 때도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서 표현한 보일 듯 말 듯한 '외씨버선길'이라 짓자고 의견을 내니 일초도 지나지 않아 박수소리 요란하게 온 산천에 울려 퍼지면서 만장일치로 결정하였으니 행정기관에서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일이라 산천도 놀라고, 숲도 놀라고, 이 지역 토박이 새들도 놀랐더라. 이제부터 두메산골의 특산품인 청정공기를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한 사발씩 맛보시라! 온몸이 정화되어 얼굴이 해맑아지고, 머리는 가벼워지고 발거음도 사뿐해지니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길이 아닐 수 없으니 이 길 이름을 일명 '청춘을 돌려주는 길'이라 칭해도 과연 구라라 여길 사람들이 없으리라.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청춘을 되돌려 받으시라! 지화자! 조오타!
< '외씨버선길' 홍보 책자 '영양'에서 개그맨 전유성이 지은 '외씨버선길'의 탄생 내력>
바. 반변천<디지털 안동문화대전 인용>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용전천[지방하천]에서 시작되어 경상북도 안동시 용상동 낙동강[국가하천]에 합류되는 반변천[국가하천]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문산에서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반변천에 합류되는 하천[지방하천]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신한천(神漢川)이라 불렸다. 반변천[국가하천]의 유수의 계통을 보면 본류는 낙동강, 제1지류는 반변천으로 낙동강의 최상류에 위치해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반변천[지방하천, 구 지방2급 하천]의 유수의 계통을 보면 본류는 낙동강, 제1지류는 반변천이다.
반변천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다가 영양읍 북쪽에서 장군천과 합하고 남쪽으로 청기천과 합류한 뒤 청송군 진보면 어천리에서 구암산의 발원지인 용전천과 합류하여 임하댐을 이루고,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에서 보현산이 발원지인 길안천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안동시 정하동에서 본류인 낙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안동시에서 낙동강과 합류되는 반변천은 116.1㎞의 큰 지류로서 안동시의 동남쪽에서 낙동강과 합류하여 낙동강의 본류를 본격적으로 만들면서 서쪽으로 흘러간다. 전 유역의 65%가 40도 이상의 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데 합류점에서 거슬러 올라가 약 28㎞ 지점에 있는 도연폭포를 기준으로 상류의 하상은 주로 사암이며, 하류는 화강암과 편마암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강수량이 적어 영농 조건이 불리하나 고추와 잎담배 등의 특용작물이 유명하며 1992년 완공된 임하댐이 있다. 반변천 수계에는 잉어·참붕어·누치·백조어·드렁허리·각시붕어·쉬리 등 한국 특산종이 많이 살고 있다. 특히 임하댐에서는 수입어종과 치리·동자개·빙어 등 다른 하천에서 옮겨온 어종은 거의 볼 수 없으나 안동댐은 이들 어종의 증가로 토착 어종이 줄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