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지오그래픽 11월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의 내용을 간추리면...
16세기에 만들어진 미투리 한 켤레가
애절한 편지와 함께 발굴돼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1586년 6월 1일 지금의 안동시 정상동 지역에서
살던 임신한 과부가 사별한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아내의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짚신)♡
♣400년전의 사부곡(思夫曲)♣
"원이 아버님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어서 나를 데려가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 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 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 곳에 가 있을 뿐이니
아무래도 내 마음같이 서러울까요?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이상 인용된 편지글은 대부분 현대어로 표기)
* 병술년(1586년) 이응태의 무덤에서 나온 아내의 편지 *
"해설" - 안귀남 (안동대학교) -
이 편지는 1998년 4월 24일 안동시 정상동의 택지 조성을
위해 이장(移葬) 작업을 하던 중 고성이씨(固城李氏)
족보에도 미상이었던 이응태(李應台)의 묘에서 발견되었다.
관 속의 시신(屍身)은 건장한 체격의 젊은이로서 턱에는
짧은 수염이 나 있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누워 있었다.
미이라 상태로 발견된 시신도 화제였지만 더욱 세인의
주목을 끈 것은 시신의 가슴 부분을 덮고 있던 한글 편지였다.
그 편지는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쓴 애절한 사랑의 편지였다.
병석에 누워 있던 남편이 31살의 젊은 나이로 죽자 아내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 속에 눈물을 머금고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남편을 먼저 보내는 아내의 안타깝고 애틋한 사랑 표현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는 이 편지는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 와서도 현대인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편지의 크기는 가로 58.5㎝, 세로 34㎝이며 봉투는 따로 없다.
편지의 구성은 내면과 외면으로 나누어져 있다.
외면에는 ‘원이 아버님께’라는 수신자 표시가 있으며,
내면에는 사연과 함께 발신자와 편지를 쓴 날짜가 적혀 있다.
종이가 극히 귀한 당시였으므로 외면의 수신자 표시는
그 자체로 겉봉투와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현재 이 편지는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글 편지에서 내면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 편지의 내면 구성은 4단계로 나누어진다.
내용의 첫 구절은 오른쪽에서 10㎝정도 들어간 지점에서 쓴
"자내 샹해 날?려"로 시작되며, 못다한 사연은 다시 종이를
옆으로 돌려 위쪽 여백 5㎝ 지점에서 두 번째 내용인
"하늘 아래 이실가"로 이어진다.
그래도 지면이 부족하자 다시 돌려
"그지그지 업서 이만 적뇌이다"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짜와 발신자는 다시 편지를 돌려
"병슐 뉴월 초 날 지?셔"라 적고 붓을 내려 놓는다.
마지막 사연을 쓴 뒤에는 같은 방향으로 날짜와 발신자를
적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편지는 다시 편지를 돌려 오른쪽
여백의 첫 줄에 적고 있다.
결국 순서상으로는 가장 나중에 와야 할 발신자 표시가
내면의 첫 줄에 놓이게 된 셈이다.
이 편지는 남편이 죽고 입관하기 전인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쓴 편지이다.
조선 후기의 고성이씨 족보에 나타난 이응태의 생몰
연대(1555-1586년)를 참조할 때 병술년은 1586년으로 추정된다.
편지의 내용으로 볼 때, 이응태가 죽을 당시에는
아내와 원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아내의 뱃속에 또
한 명의 아이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고성이씨의 족보에는 성회(誠會)라는 아들의 이름만 나오는데,
이 편지의 "원이"는 바로 성회(誠會)로 추정된다.
뱃속의 아이와 아내에 대한 기록은 족보의 어디에도 없어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이응태는 고성이씨의 17대 손으로 아버지 이요신
(李堯臣, 1523~1611)의 2남 3녀 중 둘째 아들이다.
이응태는 죽기 전 얼마간 병석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남편이 병석에 눕자 아내는 남편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함께 엮어 정성껏
미투리를 삼았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그 신을 신어 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미투리를 쌌던 한지에는
"이 신 신어 보지도 못하고..."라는 글귀가 남아 있어
더욱 보는 이의 안타까움을 더한다.
형님은 젊은 나이로 죽은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접부채에 만시(輓詩)를 쓰고, 아버지는 생시에
아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비단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아내는 남편이 평소에 입던 옷가지와
꽃무늬 비단 저고리를 관 속에 넣어 주었다.
백년해로의 기약도 헛되이 속절없이 젊은 남편을
떠나보내야 했던 아내의 심정은 어떠했으랴.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아내의 한글 편지 중에서 한 구절을 살펴보자.
당신 언제나 나에게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는데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십니까...(중략)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너무도 좋았던 부부의 금슬이 끊어지게 되자 아내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래도 살 힘이 없으니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으니 빨리 나를 데려가 달라고 한다.)
아직 어린 원이는 이제 누구의 말을 듣고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셨나요... (중략)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는 건가요. 구절구절 남편에 대한
애절함이 배어 있는 원이 엄마의 사랑가는 400년을 지나서도
여전히 읽는 사람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31살 젊은 남편의 죽음 앞에 아내의 애절함이 녹아 있는
이 편지는 문학성뿐만 아니라 국어학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 편지는 아내가 남편에게 보내는 최초의 한글 편지로서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어로 "자내"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국어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내"는 많이 발견되었으나
아내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내"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편지가 발견되면서 "자내"는
청자 대우의 등급과 관련하여 "하소체"와 호응하는 2인칭
높임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음이 입증된 셈이며,
16세기 후반에는 아내와 남편은 서로 "자내"라는 호칭과 함께
"하소체"의 등급을 사용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부부간의 호칭법이나 청자 대우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첫댓글 음악에 취해 피곤했던 몸이 우수수 풀리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잘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잘 감상합니다.
많은 것을 생각해 합니다.
좋은 자료에 감사합니다.
애절한 사연을 적은 애틋한 사랑의 편지로서 먼저가신
부군의 넋을 못내 위로하는군요 400년전
사랑의 편지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함니다
좋은 글과 그림 감사합니다.
항상 기분 좋은 일과 즐거움이 가득하시길..
지금도이런부부있을까.훌륭합니다.
감사합니다
노래감상 잘 했습니다
그때에도 이렇게 애틋한 사랑을 표현했다니 놀라웟고 가슴을 뜨겁게 하는군요.사부곡도 ........
좋은글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려요
좋은 자료 고맙씁니다
사랑 하는 마음은 4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른것이
없네요 애절한 사부곡 잘보고 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