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nwontae column h-9
광주가 어딘가 (긍지를 갖고 내공을 기르자) 2014.12.10.
광주! 우리나라 5대도시, 민주성지, 야당도시, 학생독립운동, 교육도시, 예향이라 한다. 광주가 전남의 도청 소재지였음을 모르는 세대가 사회중추를 이뤄가고, 광주‧호남 출향인들의 2세,3세 수도권‧대도시권 시민권자들이 낯설어하는 요즘에도 항일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 전통을 자랑한다. 얼마전 4.19 학생의거발상지탑도 세웠다. 동양철학의 삼생만물(三生萬物) 에 맞춰 학생독립운동, 4,19의거, 광주항쟁이란 민족정기 구현의 삼합을 갖춘 것이 되려나!.
광주! 하면 무진주와 견훤이 떠오르는 것은 1946년 9월 미국식 학제따라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거룩한...“이란 구절의 노래를 즐기는 중학교에 해방 후 첫 번 째 신입생으로 배운 광주를 자랑하는 노래가 생각나서다. 노래 제목도 기억이 없고, 가사도 전체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대목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특별한 해설이 있었지 않았을까? “맑은 가람 한 고비 흘러내린 곳 / 무진주라 옛 이름 불리우 던 곳 / 그리워라 내 고향 신라 말엽에 / 포석정 애화지은 견훤의 고장.” 이란 구절이다.『포석정 애화(鮑石亭 哀話』란, 삼국시대 가장 높은 문화와 해외교류로 우뚝 섰다가 안일의 늪에 빠져 멸망한 백제의 부활을 외치며 무진주. 광주에서 후백제 건국의 기틀을 다져 왕이 된「견훤(甄萱)」얘기다. 서라벌에 쳐들어가 포석정에서 한가롭게 노는 신라 55대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비를 욕보이는 등 쑥대밭을 만들고는 신라 마지막인 경순왕을 들어 앉히고 한동안 군정을 펴지 않았는가.우리 역사상 적대국 수도를 점령하여 통치세력을 섬멸하고 새 왕을 세운 것은 이 후백제「견훤」뿐이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중고교 응원가 중 최고로 알려진 “우러러보아라! 우러러보라!”를 지은 「김문상(金汶常)」선생 작사로 기억한다. 작곡도 ‘우러러보아라‘ 작곡한「김형구(金衡求)」선생이다. 후일 해군 법무감을 지낸 김문상 선생은 애향심, 모교 사랑이 대단한 선배교사인데 우리 1학년만 배우는 미국식 제식교련을 맡아 차렷, 열중쉬어, 36방향행진까지 가르치며, 자신이 지은 노래도 배워 줬는데, 향토, 모교학생으로서의 자부심 긍지를 가지라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를 배울 때에도 후백제나「견훤」을 아쉬워하는 호의적 감정을 느끼게 했었다.
승자의 논리가 작용하는 고려사자료도「견훤」은 장대 강건 뛰어난 무장이며, 용병 전략에 능한 장군으로, 영남의 의성 문경까지 영역으로 영호남을 누볐고, 고려 태조 왕건도 덤비지를 못 했고, 중원의 많은 나라(吳, 越, 契丹, 後唐) 등과도 사신을 주고받아 고려에만 매달린 신라가 따르지 못하는 활기를 보였다. 간사한 문신들로 해서 민심을 잃고 학정에 빠졌다 한다. 견훤이 온당한 테크노크라트 집단이나, 행정참모들을 만나 왕건에게 밀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백제의 부활을 다짐했으니 일본, 중국 연안을 아우르는 요새 넘보는 “동북아연안국가연합“을 선도한 문화국가를 이루고, 터자리인 무진주 광주는 탄탄한 번영을 누리며 동북아의 거점 지역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못해보냐 !
호남! 한국 중국 일본을 하나의 해양생할권으로 엮어내려 최초의 동북아FTA를 실행해가다 서라벌의 시새움에 꺾인「장보고」가 청해진 완도에서 기틀을 다졌고, 진도의 삼별초가 숨돌리며 몽고에 항쟁 할수 있었던 것도 물산과 인심의 뒷심이다. 나주사람「임백호(白湖 林悌)」는 “중국의 주변국들 마다 모두 황제라 호칭하는데 오직 조선만이 중국을 주인으로 섬기니 어찌 살며, 죽긴들 하겠느냐, 나죽어도 곡하지 말라(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 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했다. 스스로 중국황제라도 자칭해야겠다는 품새다. “사내가 스므살에 나라를 평안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느냐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는「南怡」의 기개가 로컬형이라면 임백호의 기개는 글로벌 스타일이다.
고려태조 왕건이 호남사람 중용 말라했다는 훈요십조가, 후세 조작으로 굳어 지고, 왕건이 절대 숭앙한「도선국사」는 영암,「장화왕후」는 나주,「동산원부인과 문성왕후」는「견훤」의 외손녀, 개국공신「신숭겸」은 곡성 출신이고, 왕건이 '나주 40여개 군은 내 울타리와 같다한 기록도 있단다. 임진왜란에 호남의 육상전에서 유일하게 왜적을 물리친「정여창」을 역적으로 몰아 당쟁의 희생으로 죽여 놓고, 차령이남 지세가 모반의 형국이라 억지도 쓴다.
하긴 엄청난 연봉의 중책을 맡았다가 부정을 고발한다며 부부가 나서서 들쑤셔 댄 사람을 지방의 요직에 특채하고, 불법지시 하더라며 나팔불고 최고 지휘권자와 맞장 뜬 중견 간부를 국회의원 시키면서, “왜 우리고장 사람 임원시키지 않느냐”. “ 왜 고위 요직 안주느냐” 하면 아무리 정의로운 거사를 했다지만 “너 같으면 시키겄냐?” 되물어 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호남이 아니었으면 나라가 없어질뻔 했다(若無湖南是無國家)“는 이순신의 말은, 산등에 올라 해전을 구경하던 시절에 고기잡이 배로 먹거리 실어나르고, 만신창이가 되도록 배저어 싸우며 제고장을 스스로 지키고, 우리 군사와 함께 싸우는 자력 협동의 전라도 모습에 감격하여, 조정에 소외 당한 일선의 ‘콤벳솔져’로서 감동과 아쉬움을 들어낸 것은 아닐까.
호남은 풍요롭고 관대했다. 김제평야, 경기평야, 김포평야, 김해평야 등이 없었던 시절, 호남은 거의 전 국민의 먹을거리를 공급했다. 곡식은 물론, 수라상의 전복에서 출산과 생일의 미역국거리, 조기 갈치 온갖 젓갈에 이르기까지 철따라 맛깔스런 해산물이며, 모든 갖은양념거리로 온 나라 잔치상과 괜찮은 밥상을 책임졌다. “약무호남 시무민생”이기도 했었디.
광주‧호남! 미래에서도 ‘약무호남 시무국가’의 긍지를 이어가려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광주‧호남이 꼭 맡아 해줘야 할 일,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야 한다. 돈 달라, 감투 달라 말고,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해낼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5년 임기 대통령 체제에서는 제편에 몸빋친 사람 돌보기도 너무짧은 터에, 판 뒤집힌 뒤에 개평달라 끼기 보다는 먼날 보며, 광주‧ 호남 밖에는 할 수도 없고, 대한민국에는 꼭 필요한 일. 그 것을 찾아 맡아나가야 한다. 그게 무엇일까? 찾는데에도 긍지와 자부심의 자세가 전제 되어야 한다.
그래야 “포석정 애화지은 「견훤」의 고장“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애용 된 ”신천지에 휘날리는 우리 동포야, 길이길이 기다리던 오늘 왔구나, 무등산에서 단련된 기술로 …“를 외치며 ”신천지에 휘날리는 지혜의 고장“이 되어 다시 우뚝서는 긍지의 고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