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운 폭우 (곽재구)
어젠 참 많은 비가 왔습니다
강물이 불어 강폭이 두 배로 더 넓어졌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금세라도 줄이 끊길 듯 흔들렸지요
그런데도 난 나룻배에 올라탔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흙탕물 속으로 달렸습니다
아, 참 한 가지 빠트린 게 있습니다
내 나룻배의 뱃머리는 지금 온통 칡꽃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폭우 속에서 나는 종일 꽃장식을 했답니다
날이 새면 내 낡은 나룻배는 어딘가에 닿아 있겠지요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의 지름길은 얼마나 멀고 또
험한지........
사랑하는 이여.
어느 河上엔가 칡꽃으로 뒤덮인 한 나룻배가 얹혀 있거든
한 그리움의 폭우가 이 지상 어딘가에 있었노라
가만히 눈감아줘요.
그토록 많은 비가 (류시화)
1.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렸구나
밤 사이 강물은 내 키만큼이나 불어나고
전에 없던 진흙무덤들이 산 아래 생겨났구나
풀과 나무들은 더 푸르러졌구나
집잃은 자는
새 집을 지어야 하리라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려
푸르른 힘을 몰고 어디론가 흘러갔구나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내 머리맡에선
어느새 이 꽃이 지고 저 꽃이
피어났구나
2.
그토록 많은 비가 내리는 동안
나는 떡갈나무 아래 선 채로 몸이 뜨거웠었다
무엇이 이곳을 지나 더 멀리 흘러갔는가
한번은 내 삶의 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모든 것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한번은 이보다 더 큰 떡갈나무가
밤에 비를 맞으며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 생각은 얼마나 더 깊어지고
떡갈나무는 얼마나 더 풍성해졌는가
3.
길을 잃을 때면
달팽이의 뿔이 길을 가르쳐주었다
때로는 빗방울이
때로는 나무위의 낮선 새가
모두가 스승이었다
달팽이의 뿔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먼 나라 인도에도 다녀오고
그곳에선 거지와 도둑과 수도승들이
또 내게 길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병들어 갠지스 강가에 쓰러졌을 때
뱀부리는 마술사가 내게 독을 먹여
삶이 한 폭의 환상임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 영원히 나는 입맛을 잃었다
4.
그때 어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치고
빗속을 날아갔었다
밤이었다
내가 불을 끄고 눕자
새의 날개가 내 집 지붕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나서도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나는 병이 더 깊어졌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황인숙)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내가 많은 비를 맞아서 (황학주)
연년이 내가 길에서 많은 비를 맞아
죽도록, 무구한 삶의 배에 불을 지피고 싶었을까
날이 새는 길 위에서 미치게
당기는 아랫배를 가만 참아 보았다
네 밑으로 떨어진 상한 내 사랑들이
길 푸릇푸릇한 잡풀과 멧새알을 올려놓고 싶은
오래도록, 긴 길이었다
누가 누구의 희망을 버렸는지 모르지만
거짓 입맞춤이 한번이라도 없었기 망정이지
사랑마저 욕될뻔 했다
연년이 많은 비를 맞은
쓸쓸하게 손이 떨리는 시간이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그 후, 모든 것을 홀로 기다린
나 이대로
많은 비를 맞은
이 가슴의 못을 안고
많은 물집이 발가락을 데리고 가는
섬뜩한 종적에 몸을 비비면
세상은 또 한 번 벽촌을 빌려줄는지
너의 밀보리빛 고요한 불이
내 기운 등을 익혀주던
청복동은 아니더라도
멧새처럼 깨끗이 가지에 앉지는 못할지라도.
목숨처럼 (조은)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만나고
악수도 그곳에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
아, 기적같이
부르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은 비가
밤비 (김광균)
어두운 장막 너머 빗소리가 슬픈 밤은
초록빛 우산을 받고 거리로 나갈까요
나즉히 물결치는 밤비 속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포와를 가면
바람에 지는 진달래같이
자취도 없는 고운 꿈을 뿌리고
눈부신 은실이 흩어집니다
조각난 달빛같이 흐득여 울며
스산-한 심사 우에 스치는 비는
사라진 정열의 그윽-한 입김이기에
낯설은 흰 장갑에 푸른 장미를 고이 바치며
초라한 가등 아래 홀로 거닐면
이마에 서리는 해맑은 빗발 속엔
담홍빛 꽃다발이 송이송이 흩어지고
빗소리는 다시 수없는 추억의 날개가 되어
내 가슴 우에 차단-한 화분을 뿌리고 갑니다
비 (나해철)
비오는 날은
젖었다
함께라면 기쁨에
따로라면 그리움메
젖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당신은 뼈아픔에
나는 슬픔에
젖었다
당신 얼굴에 흐르는 비로
멀리서도
내 얼굴 젖었다
비 (이병기)
짐을 메어 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메어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비 (천양희)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
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비 그친 뒤 (안도현)
담장 밑 텃밭 상추 푸른 냄새가
3층 교실까지 올라온다
딱정벌레같이 엎드려 사는 슬라브지붕집 빨랫줄에
누군가 눈부시게 기저귀를 내다 넌다
저 아기도 자라면 가방 들고 딸랑딸랑 이리로 걸어 올 것이
다
비가 (2) (기형도)
-붉은 달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자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
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
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
다. 아아 난간마나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는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
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
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
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
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
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
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
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
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
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새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
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이 적시
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니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
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
을 벗어나면서.
비가와도 이제는 (오규원)
-순례 13
비가 온다, 어제도 왔다.
비가 와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
슬픈 것은 슬픔도 주지 못하고
제 혼자 내리는 비.
비 속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비 속에서 우산으로
비가 오지 않는 세계를 받쳐들고
오, 그들은 정말 갈 수 있을까.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도
우산 밖의 비에 젖고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젖은 몸으로
비오는 세계에 참가한다.
비가 온다.
슬프지도 않은 비.
제 혼자 슬픈 비.
비가와도 젖는자는 (오규원)
-순례1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멈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 제주시편 2
바다를,
물빛을,
가만히 내버려둘 것
한눈으로 붙잡지 못하는 부피가 버겁다
아무리 퍼내도 걷잡을 수 없는
코발트 물빛이다
방파제와 정적이 서로 혀 들이미는 오후,
내 꿈을 유채꽃 대궁 위에 올려놓는다
가까이 다가가면 애월 길은 미끈거리는 食道
검은색의 비애에 사로잡힌 건 내 소용돌이다
칼날이 된 바다가 옆구리에 박힌다
천천히 서 있는 전신주들,
느낌표처럼,
터질 듯 부푼 어떤 생의 입구마다 꽂혀 있다
애월 바다는 파랑 주의보에 익숙했으리
검은색 따라간 며칠 새
몇 개의 부음을 받았다
길 전체가 목관 악기인 애월에서의 해미 같은
우중의 나이 (기형도)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1
미스 한, 여태껏 여기에 혼자 앉아 있었어? 대단한 폭우라
구.
알고 있어요. 여기서도 선명한 빗소리가 들려요. 다행이
군. 비
오는 밤은 눅눅해요. 늘 샤워를 하곤 하죠. 샤워. 물이 떨
어져
요. 우산을 접으세요. 나프타린처럼 조그맣게 접히는 정
열? 커
피 드세요. 고맙군. 그런데 지금까지 내 생을 스푼질해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시한 소리예요. 기형도 씨 무얼했죠? 집
을 지
으려 했어. 누구의 집? 글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허물었
어
요? 아예 짓지를 않았지. 예? 아니, 뭐. 그저…… 치사한
감정
이나 무상 정도로, 껌 씹을 때처럼.
2
등사 잉크 가득 찬 밤이다. 나는 근래 들어 예전에 안 꾸
던 악
몽에 시달리곤 한다. 시간의 간유리. 안개. 이렇게 빗소리
속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내 흘러온 짧은 거리 여기저기서 출렁거
리는
습습한 생의 경사들이 피난민들처럼 아우성치며 떠내려가
는 것
이 보인다. 간혹씩 모래사장 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건조
한 물
고기 알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그런 식으로 또 나의 일년은 마취약
처럼
은밀히 지나가리라. 술래를 피해 숨죽여 지나가듯. 보인
다. 내
남은 일생 곳곳에 미리 숨어 기다리고 있을 숱한 폭우들과
나무
들의 짧은 부르짖음이여.
3
고양일 한 마리 들여놨어요. 발톱이 앙증맞죠? 봐요. 이렇
게 신
기하게 휘어져요. 파스텔같이. 힘없이 털이 빠지는 꼴이
란……
앗, 아파요. 할퀴었어요. 조심해야지. 정지해 있는 것은 언
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야.
4
시험지가 다 젖었을 것이다. 위험 수위. 항상 준비해야 한
다.
충분한 숙면. 물보다 더욱 가볍게 떠오르기. 하얗게 씻겨
더욱
찬란히 빛나는 삽날의 꿈. 당신의 꿈은?
5
지난 봄엔 애인이 하나 있었지. 떠났어요? 없어졌을 뿐이
야. 빛
의 명멸. 멀미 일으키며 침입해오던 여름 노을의 기억뿐이
야.
사랑해보라구? 사랑해봐. 비가 안 오는 여름을 상상할 수
있겠
어? 비 때문은 아녜요. 그렇군. 그런데 뭐 먹을 것이 없을
까?
6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묻는다면. 미스 한. 혼자 앉아서 이
젠 무
엇을 할래? 집을 짓죠. 누구의 집? 그건 비밀. 그래. 우리
에게
어떤 운명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품었던 우리
들 꿈
의 방정식을 각자의 공식대로 풀어가는 것일 터이니. 빗소
리.
속의 빗소리. 밖은 여전히 폭우겠죠? 언제나 폭우. 아. 그
러면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논리…… 300원의 논
리.
여름엔 여름 옷을 입고 겨울엔 겨울 옷을 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