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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 주석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한복음 13:1-17)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에 따른 교훈을 하신 것은 그가 배신을 당한 바로 그 저녁에 일어난 일이며, 또 유월절 식사와 성만찬 규례를 제정하신 그 자리에서였다고 보는 견해에는 모든 주석가들이 일치하고 있으나, 그 일이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있었는지, 아니면 후에 있었는지 또는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복음서의 기록자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생략해 버린 부분을 기록에 넣고, 다른 복음에 기록된 부분들과 기록해 넣기에 어려움이 있는 부분들을 생략해 버리는 일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기록해 나가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기록된 대로라면 30절에서 유다가 밖으로 나간 것은 뜰에서 그리스도를 체포하기 위하여 이미 약속된 사람들을 부르러 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트푸트(Lihgtfoot)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분명한 의견을 제시한다. 즉 본장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이 14잘 끝까지 계속되고는 있으나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근거해 볼 때 유월절 저녁이 아니고 마태복음 26장 2-6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유월절 이틀 전에 베다니의 만찬자리에서 마리아가 그녀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 위에 향유를 부었던 저녁이었을 것이라 한다. 만일 이 저녁이 아니라면 또 다른 유월절 이전의 만찬 자리에서 되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자리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처럼 많은 사람이 있었던 자리가 아니고 그의 제자들만 있어서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을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야기를 읽게 되는데,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써 결코 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혹은 겸손의 기적). 마리아가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자, 주님은 그녀의 기름 부음을 허락하신 것이 자신이 존귀케 되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기름 부음과 조화를 이루는 겸손한 일을 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왜 이 일을 하셨을까? 만일 제자들의 발이 더러웠다면 그들 자신이 발을 씻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공연히 이상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 거기엔 언제나 충분한 이유가 담겨져 있는 법이다. 이 일도 장난거리로 웃어대면서 실시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엄숙하고 심각한 분위기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네 가지 이유를 살필 수가 있다.
1. 주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서(1, 2절).
2. 아랫 사람을 섬기는 자발적인 겸손의 예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3-5절).
3. 베드로와의 말씀 중에 나타내신 대로 영적으로 청결케 됨의 중요성을 drkfmcl시기 위해서(6-11절).
4. 제자들에게 한 본보기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12-17절).
이러한 4가지 이유에 대한 설명이 이 부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의 내용이 되겠다.
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신 대로 그의 제자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증거로써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1, 2절).
1. 주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실이다(1절).
(1)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이 열두 제자는 가장 가까운 그의 추종자들이었음이 사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요, 가족이요, 진실한 마음의 친구들이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그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오직 이들만을 그의 것으로 삼으셨다. 주님은 다른 세상에 그의 것들을 가지고 계셨으나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사람들을 돌보시기 위하여 그것들을 잠시 떠나 오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불러 내셔서 친구로 삼으시고 한 가족처럼 대화를 나누시면서 그들의 위로자와 존경의 대상이 되셨다. 주님은 그들을 자유로이 행동하시도록 해 주셨고 그들의 결점들을 보시고도 너그럽게 용납하셨다. 그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계속해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에게 사랑과 친절 베푸시기를 그만두시지 않으셨다.
주님의 주위엔 그들보다 좀더 나은 자질을 지니고 있으면서 주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밀어내시지 않았고, 더 좋은 새 제자들을 더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한 어부들을 끝까지 제자로 삼고 그들을 지키셨다. 제자들은 연약하고 지식이 모자라며 은총을 받지 못한 자들이었고 우둔하며 기억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주님은 때때로 그들을 꾸짖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심에는 끝이 없었다.
(2) 이들 열두 족장들이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들이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이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소유로 삼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 가지고 계셨다. "자기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첫째,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로서 그가 세상 가운데서 직접 찾아 내어 지극히 사랑하셨고 그 자신의 사명을 위하여 성별시켜 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특별한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람"(his own)이란 말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질 때에는 타 이디아(ta i;dia)라고 기록이 되었는데, 이는 그의 것에 해당하는 말로써 "그의 소" 등과 같이 그의 것이지만 주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 소유권이 바뀔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tou.j ivdiuj - 즉 그의 사람들(his own persons)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한 사람의 아내나 자녀 등과 같이 영원히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는 말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사람들을 정중하게 대우했다. 그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헌신함으로 선의의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그들을 동료로서 받아들이고 그들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써 만족스러운 사랑을 주었다. 비록 그들이 이 어둡고 부패하고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제 주님은 그가 이럴 수도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 가시려고 하시면서도 이 땅에 남아 있을 그의 사람들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계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아픈 어린 아이에게 더욱 마음을 두는 것과 같은 주의 돌보심이 필요했다.
[3] 주님은 그의 사람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 사랑은 무궁한 사랑이며(렘 31:3) 시작에서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무엇도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주님은 그의 사람들을 ei`j tevloj - 즉 끝까지 사랑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과의 모든 관계에서 완전하시며 결국에는 그들을 완전한 사랑의 세계로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2. 회개한 한 여인이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닦음으로써 자기사랑을 나타낸 것처럼(눅 7:38) 그리스도는 제자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그들의 발을 씻김으로 나타내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그의 사랑이 변함없고 또 겸손한 사랑임을 보여 주려고 하셨고, 또 "충성스러운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주인이 나아와 수종하리라"(눅 12:37)고 하신 약속을 재확인하며, 주인이 종을 수종들므로써 그들에게 말할 수 없니 크게 놀라운 영광을 맛보게 해 주시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은 여인이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을 보고 인색한 마음으로 불평을 터뜨림으로써 그들의 부족한 신앙을 드러내었으나(마 26: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의 증거를 주신 것이다. 우리들의 연약함이 주님의 친절을 무시하고 말살시킨다.
3. 주님께서 유월절 이틀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교훈을 보여 주신 것도 두 가지 이유에서 연유된 것이다.
(1) 첫째는 그가 떠나온 아버지께로 돌아갈 날을 오랫 동안 기다리던 중에 그 시간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1] 주님이 떠나 가심으로써 생겨지는 변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 변화는 주님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승천에서 완성에 이른다. 주님께서 떠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그리스도인도 세상을 떠나게 될 터인데 그 때에 아버지께로 가서 먼저 가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사납고 악하고 불충실하며 고통과 유혹의 세상으로부터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업적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2] 이 변화의 때가 지금 그리스도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 시간을 때로는 그의 원수들이 승리하는 시간(눅 22:53)이라고 했고, 때로는 주님이 승리하시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주님께서 받으실 고통의 때는 정해졌고, 그 고통의 깊이는 한때에 불과했다.
[3] "예수께서 그의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지니신 통찰력을 본다. 주님은 그의 공생애의 처음부터 그때가 올 것과 언제쯤이 될 것까지도 아셨고, 그리고 지금 그때가 온 것을 알아 차리셨다. 우리는 우리의 때가 언제 오게 될는지를 모르므로 마땅히 해야 할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예고를 통하여 우리의 때가 온 것을 안다면 우리는 마땅히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모든 준비를 갖추기에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벧후 3:14). 주님께서 그의 이별에 대한 재빠른 통찰력 속에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주께서 장례되기에 앞서 그의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 성결케 되신 것처럼, 50일 후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별케 될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행동이었다(레 8:6). 우리도 우리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뒤에 남아 있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도움될 일을 해 주어야 한다.
(2) 둘째는 이때에 사탄이 유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배반하도록 유혹했기 때문이다(2절). 이 삽입된 구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1] 유다가 배신하게 된 근본을 살펴 보면 사탄의 형상을 나타내는 본래적인 악이 작용한 것이다. 사탄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여 그에게 암시를 주며, 또 그 암시가 인간의 본성과 어떻게 뒤섞여 작용을 하는지를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는 아주 강력한 죄의 요소가 있고 이 죄의 요소에 세상과 육신으로부터 오는 유혹이 접촉될 때에 바로 사탄이 죄악의 알을 낳고 부화시킬 수 있는 둥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다의 배신에 있어서 구가 그처럼 아무런 적의도 없이 쉽게 선생을 배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탄이 구원자의 왕국을 파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행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사탄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고 말았다.
[2] 왜 하필 이 때에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가? 그 이유를 살펴 보자.
첫째, 주님이 떠나실 시기가 가까워진 이때에 유다가 그를 배반할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성취 속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나는 지금 고난받을 준비가 이미 다 되어 있다"라고 말했던 것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원수들로부터 받을 위협이 악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그것에 대비하여 더욱 열심히 준비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유다는 이미 사탄의 덫에 걸렸고, 다음으로 사탄은 베드로와 남은 제자들을 목표로 공격을 시도하려 하고 있으므로(눅 22:31)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견디어 낼 수 있도록 강화시키기 위해서이다. 만일 이리가 양떼를 공격하여 한 마리를 물어가면 이때야말로 목자가 남은 양들을 더 잘 보존할 때인 것이다. 상처에 감염이 시작될 때 소독약을 뿌리는 법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지적하기를 예수께서 머리에 기름 부움을 받았을 때 유다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중얼거리는 것을 다른 제자들이 들었다고 한다(요 12:4; 마 26:8 참조). 그러므로 유다의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그와 더불어 악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주님은 겸손한 교육을 통하여 제자들을 강하게 무장시켜서 임박한 위험에 대비케 하신 것이다.
셋째, 주님을 배반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유다가 바로 주님의 12 제자 중 하나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여기서 그의 제자 중의 하나가 잘못을 저지름으로 인하여 모든 제자들이 다 버림을 받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들의 발을 씻기셨다.
동료 중의 하나가 사탄의 마음을 품고 배신자가 됐지만, 남은 자들이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 안에 위선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사랑하시며 그의 제자들 속에 유다 같은 사람이 섞여 있음을 아시면서도 그의 제자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신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주님의 훌륭한 겸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세상으로 하여금 주께서 지니신 사랑이 얼마나 겸허한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 행하신 일이다. 주님께서는 중재자로서의 그의 사명을 알고 계셨고, 지금 그 사명을 신중히 생각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셨다"고 하시며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놀라움과 아울러 주께서 하시려는 일에 대하여 의아심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의 말을 씻기시기 시작하셨다.
1. 바로 여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가 중재자라고 불리우는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1)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하늘과 땅의 소유자로서 주께서 그의 맡으신 위대한 모든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필요한 모든 것을 부여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한 모든 것을 중재하고 화해를 이루는 중재자의 권리가 그의 손에 주어졌고, 인간들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처리하고 다스릴 권세가 그에게 위탁되어졌다. 따라서 주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법적인 상속자로서 그것들을 통치하고 심판할 권리를 그 손에 가지게 된 것이다.
(2)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말의 뜻은 주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만이 아니고,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영광 가운데 존재하고 계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대사로서의 사명을 위탁받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아들로서 오셨으며, 바로 하나님께서 보낸 자이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선택되어 하나님을 위하여 고용된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신 자이시다.
(3)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란 주께서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그 영광을 다시 입으실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갈 것이고, 하늘로부터 난 자는 하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이, 이제는 우리의 대리자로서 하늘의 아버지께로 가셨다. 주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우리는 기쁨과 평안을 느낀다. 그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단 7:13)에게로 가셨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시 110:1)고 하셨다.
(4)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아셨다." 자기의 영광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요람 속에 누워 잠자고 있는 왕자가 아니라, 주님는 자신의 위치와 영광받으실 때에 대하여 분명히 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허리를 낮게 구부려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을 어떻게 하셨을까?
[1] 주님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이버지께로 갈 때(1절)가 가까이 온 줄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교훈과 유산을 남겨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2] 또한 이 일은 배신한 제자로부터 당하는 고통 속에서 주님을 굳세게 해 주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유다는 주님을 배신하고 있었고, 주님은 그것을 또한 아셨고, 그 결과로 일이 어떻게 진전될 것도 아셨다. 그러나 반면에 주님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임을 아시고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수행하셨다.
[3] 이 사건은 주님의 겸양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며 칭송하게 해 준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 이해할 수 없고 놀라운 사건으로써 나타나는데(사 57:17, 18; 호 2:13, 14) 여기의 본문에서도 이 사건은 주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며 동시에 이렇게 허리를 굽히는 겸손을 통하여 우리도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다. 이 구절의 겸양과 다음 구절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들과를 비교해 보라(시 65:45; 사 57:15; 66:1, 2).
2. 이 같은 겸양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스스로 실제의 굴욕을 받으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받으며 중재자로서의 권위와 권능을 가진 것을 아시므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예복을 갈아 입으신 후 제자들을 물러서게 하시고 주님께 충성을 표시하는 예식을 수행하게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님은 그 반대로 당신의 위대한 겸손을 본보기로 보여 주셨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자만심으로 사람을 추켜 세우는 것보다 하늘나라와 행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의 영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확신과 함께 그의 마음을 지극히 낮은 자리에 둘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길 만큼 낮은 자리에 처하였던 것이다.
(1) 주께서 행하신 행위 자체는 노예들이 하는 일로써 하인 중 가장 천한 계급의 사람이 이 일에 고용되었었다(아비가일이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삼상 25:41). 만일 주님께서 제자들의 손이나 얼굴을 씻겼더라도 그것은 큰 겸손의 표가 되었겠는데(엘리사가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부었다. 왕하 3:11) 그리스도는 이처럼 고역을 치루시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셨으니 우리가 열정적으로 찬양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 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이웃의 형제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2) 제자들은 낮과 비참한 처지에 처해 있으면서 그것의 몸이나 발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또 자주 목욕도 안했으므로 무척 더러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행하신 이 일은 실로 위대한 겸손의 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볼 때 그들은 생도요 하인이며 따라서 그들이 주님의 발을 씻겨야 했고, 또한 그들은 주님께 의존되어 모든 희망을 주님께 걸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수많은 활동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상사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천한 일을 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착 달라붙음으로써 그들의 눈에 들고 진급을 꾀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천한 일을 하신 것은 결코 정책적인 의도에서가 아니고 순수한 겸손에서 하신 일이다.
(3) 주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하여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식사하던 중에 이 일을 하신 것은,
[1] 마음의 동요나 불안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식사 중일지라도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필요한 음식보다도 의무를 다하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요 4:34).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은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신 설교가 아니고, 제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여 주는 이 만찬의 광경을 길이 남겨 두시는 것이었다.
[2] 식사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더러운 발을 씻김으로써 비위가 약한 자는 속이 메스꺼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무례함과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청결함과 경건함은 잘 어울린다) 지나친 호기심이나 열정으로 덤비지 않으며, 욕망과 사심에서 벗어나서 훌륭한 예절을 몸에 익히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다.
(4) 그는 곧 일을 하기 위한 하인의 복장이 되셨다. 그의 길게 늘어진 겉옷을 벗어 둔 것은 그가 하고자 하는 봉사에 적합한 옷차림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안일한 평온보다 오히려 고통의 길을 자초한 사람들의 길에 우리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 자만심을 고취시키고 진로를 방해하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마음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정진해야 한다.
(5) 주님은 검박한 예식처럼 이 일을 수행하셨고, 한 사람도 빼놓지 않으시고 발을 씻기셨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이제까지 해왔던 사람처럼 아무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이 일을 다 해내셨다.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라고 기록된 말씀은 하인들이 그의 한쪽 팔에 수건을 걸치거나 앞치마를 하는 것처럼 하셨다는 말이다. 옆에 세워져 있는 물항아리(2:6)에서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일이 끝난 후에 수건으로 닦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모든 제자의 발을 다 씻기신 것이 아니고 네뎃 사람의 발만을 씻기셨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추측에 찬성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 주님께서 제자들 모두의 발을 씻겨 주셨다는 것은 주께서 그의 제자들 중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포용적이고 관대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6) 주님께서 유다의 발까지 씻겨 주셨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유다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26절). 디모데서에 보면 명부에 올려 교회가 돌보아 줄 과부의 자격 중에 성도의 발 씻겨 준 경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과부들은 교회가 주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는데(딤전 5:10), 주님은 가장 악한 죄인을, 지금 발을 씻김 받으면서도 주님을 배신할 것을 궁리하고 있는 자의 발을 씻겨 주셨기에 축복을 받으신 것이다.
많은 성서 번역자들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주님의 모든 사명 중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며 모든 것이 그의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그는 영광의 책상에서 일어나셔서 빛의 겉옷을 벗으시고 인간성으로 허리띠를 두르시고 하인의 형태로 오셨다. 그는 누구의 도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돌보아 주시기 위해 오셨고 피를 쏟고 영혼까지고 쏟아 주시고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는 대야가 준비되어진 것이다(계 1:5).
Ⅲ.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영적인 청결과 죄의 오염으로부터 영혼이 깨끗하게 됨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베드로와의 말씀 가운데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6-11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항들을 주목하게 된다.
1. 베드로는 그의 주께서 이 천한 봉사를 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6절). 주님께서는 수건을 허리에 두른 후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그에게 오셔서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내어 뻗으라고 명하셨다.
크리소스톰은 추측하기를, 주님께서 제일 먼저 발을 씻긴 사람은 선생이 발을 씻어 주는 영광을 받아들일 준비를 가장 먼저하고 있던 유다였을 것이며, 유다는 그의 선생이 스스로 비천한 자리에 내려 앉으신 것을 보면서 속으로 즐거워했을 것이라고 한다. 5절에 나타난 바에 따른다면 주님은 이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가 베드로에게 오셨고 처음으로 그의 발 씻기심의 의미를 말씀하신 것 같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처음으로 가셨던지 간에 베드로에게 오셨을 때에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여기에서 인칭을 나타내는 말에 강조점이 있다.
즉 "우리가 당신을 우리의 주인이신 줄 알고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이 세상의 구주와 통치자로서 믿고 있는데 그러한 신이 어떻게 이 세상 벌레같이 같이 아무 가치도 없는 죄인인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한 번 만져 주심으로 문둥병이 깨끗해지고 장님이 보게 되고 죽은 자를 일으키신 그 손으로 내 발을 씻기실 작정이십니까?" 이 의미가 이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기쁨으로 대야와 수건을 들고 주님의 발을 씻기고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을 자랑으로 삼게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눅 17:7, 8). 마땅히 이렇게 되었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려 하니 "이런 일은 전에도 없었던 격에 맞지 않는 일이옵니다. 이런 일을 제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베드로는 말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될 때 겸손 특히 우리를 향하신 그의 겸손에 대하여 우리는 감탄과 감격할 것뿐이라는 것이다(14:22). "주여! 도대체 내가 누구이기에 내 아버지의 집을 내게 주신단 말입니까?"
2. 이처럼 놀라움으로 하는 질문에 주님은 즉시로 만족을 주셨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7절)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의 반대를 침묵케 하기에 충분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 순순히 주님의 하시는 일에 복종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 그는 지금 이 일의 중요성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을 무조건 반대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무엇을 말씀하시거나 행하실 때에는 항상 그 속에 선한 것을 나타내시던 그 분의 의지와 지혜에 묵묵히 따르기로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무조건 따를 것을 가르치시면서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것을 판단하려고 애쓰지 말고 다만 내가 행하는 일이니 그것이 유익한 것인 줄만 알고 믿으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어두움 속에서 수고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서와 또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들이 전혀 무지와 무능 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어떠한 불평도 말하지 못하고 겸손히 입다물게 되는 것이다(히 11:8).
(2) 베드로가 잠잠했던 이유 중 또 하나는 이후에 알게 될 그 무엇이 어렴풋이나마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주님은 "네가 지금 씻김을 받는 것이 필요한 줄은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셨고 이 말씀 속에는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 중죄를 저지를 때가 지적된 것 같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까지도 그 의미를 현재에는 모르다가 장래에야 비로소 알게 될 일들을 행하셨다.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실 뿐더러 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미천한 인간이 되시고 인간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신 것은 그가 죽으신 후에도 이해되지 않다가 결국은 그것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할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히 2:17). 잇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섭리의 사건들이 먼저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 줌으로, 우리가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고난의 사건들이 가장 친절한 은혜 가운데 되어진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 자체 안에 의미심장한 무엇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것의 의미가 재생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줄 때까지, 또 성령이 위로부터 그들에게 임하실 때까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통하여 역사하시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섭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든지 간에 그의 뜻에 맡겨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 그것이 우리에게도 최선의 길이 된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라고 단호히 거절했다(8절). 이 말은 굳은 결심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1) 겸손과 공손의 예를 본다. 베드로는 과거와 똑같이(눅 5:8) 지금도 그의 주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러 겸손한 체하는 것은 그 받은 상을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법이다(골 2:18, 23).
(2) 베드로의 이러한 겸손 속에는 주님의 뜻에 대한 반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네 발을 씻으리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그렇게는 절대로 못하십니다"라고 하면서 "그건 합당한 일이 되지를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대답의 결과는 그리스도보다 자신을 더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받기에 너무 값지고, 진리라고 믿기에 너무 기쁜 소식이어서 복음이 제공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고 오히려 불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그리스도도 그가 하실 일을 계속 주장하시면서 베드로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1) 불복종에 대한 심각한 경고로써, 만일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리고 이렇게 적은 일에까지 네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너는 내 제자 중 하나가 될 수 없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보다 더 지혜로움을 자처하고 나서서 복종을 요구하는 주의 명령에 계속 논쟁을 했더라면, 그는 실제로 주님께 대한 충성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말씀을 따라서 주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것을 최대한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 이상의 예절은 필요가 없다.
(2) 또한 이 말은 영적 청결의 필요성을 선포하신 것으로써 이러한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내가 너의 영혼을 죄악의 오염에서 씻어내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고, 내 흥미를 조금도 끌지 못하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씻기심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고 그들만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1]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모든 행복을 가졌다는 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는 말이며(히 3:14),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왕에 그리스도와 좋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이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씻으시도록 그와 관계를 갖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소유하시고 보살피시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성결케 하시는데, 이것은 그들을 씻으시는 일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훌륭하신 업적, 그리고 의로우심과 그의 영과 은혜에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결코 그의 영광에도 함께 참여할 수가 없다.
5. 이제 베드로가 발 씻겨짐에 대하여 단순한 복종 이상으로 가진 열심을 보자(9절)뿐 베드로의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뀌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자신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마자 그는 곧 그의 잘못을 인식하고 마음을 변경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결심 이외의 일에는 단호하게 결심하지 말아야겠다. 왜냐하면, 곧 그 결심을 철회해야만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목표를 세움에 있어서는 인내심으로 집요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마음을 주목하자.
(1) 베드로는 "주여 제가 그렇게 서둘러 말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철회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를 씻어 주시는 행위가 마땅히 거절해야 할 주님의 수치가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의 권세요. 은혜인 것을 깨닫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닫게 된다.
[1]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취소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2] 조만간에 주님은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하실 것이다.
(2)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은혜와 그 우주적 영향력을 깨닫게 되었을 때 베드로가 취한 행동은 귀찮을 정도였다. 그는 이와에 그의 손과 머리까지고 씻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스도로부터 격리되거나 그와의 관계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들이 볼 때에 가장 엄청난 죄악이다. 따라서 이 죄악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열심히 매달려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씻겨 주셔서 의롭고 정결케 하여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간청하여야 한다. "주님, 제가 주님에게서 잘려나가지 않도록 갱생케 하시는 청결을 통하여 주께 합당한 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주여, 타락의 때가 묻은 내 발뿐 아니라 악한 계획으로 인한 오점과 분별없는 잘못으로 인하여 땀흘려 더러워진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진정으로 성결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전체가 다 성결케 되기를 원하며, 혼과 영과 몸이 잘 보전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살전 5:23)는 사실이다.
6. 그리스도께서 부연하여 더 설명하신 말씀들은 영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1) 주님은 그에게 충실했던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말씀하신다(10절). "이미 목욕한 자는" (집에 목욕 시설이 없어서 밖에서 목욕하고 돌아와야 하는 나라들에서 흔히 있는 대로) 집에 돌아왔을 때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으니," 그의 손과 머리는 이미 깨끗하고 발만이 걸어오느라고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극에서 극으로 전환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자기의 발을 씻기지 못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주께서 자기의 세례식에서 하신 일과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는 손과 머리까지고 씻어달라고 외쳤다. 이때에 주님은 다음과 같은 교훈 가운데로 그를 인도하셨다. 즉, 발을 씻을 필요가 있으나 손과 머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 의롭게 된 상태에서 발만을 씻김받는다는 것은 무슨 유익을 말해 주는 것인가를 살펴 보자. 그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씻김을 받았고 온 몸이 깨끗하여졌다는 말은 그들이 마치 자격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은혜로써 용납되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또 다시 죄를 범하고, 나서 후회할 때에 재차 의로운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절차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 절차가 또 다시 필요하다면 우린 자주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때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확증이 구름에 가린 듯 모호하고 그로부터 오는 위안과 평강이 중지된 것 같아도, 이미 인정된 의롭다 하심은 아직도 변경되거나 취소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하지만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은 한 번도 후회없이 이루어진다. 마음은 청소되고 장식될 수 있지만 사탄의 궁전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씻겨지고 그리스도에게 종속된다면 결코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2]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매일 주의해야 할 일을 살펴 보자. 그것은 발을 씻는 일이다. 즉 그들이 죄악으로부터 깨끗게 되기 위하여 자신들의 연약함과 과오를 반성하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믿고 날마다 그 은총과 계약을 맺는 일이다. 우리는 또한 신성을 모독하는 모든 잘못된 일들을 끊임없이 주시함으로써 우리의 발을 씻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을 삼감으로 우리의 길과 발을 청결케 해야 하기 때문이다(시 119:9). 제사장들은 성별되었을 때에 물로 씻겨졌고, 따라서 또 씻을 필요가 없는 데도 회막에 들어갈 때는 그들의 발과 손을 대야에 씻음으로써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다(출 30:19, 20). 우리를 깨끗게 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모든 준비는 우리를 거만하게 하기보다는 좀더 주의하도록 만든다. 내가 내 발을 씻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더럽힐 수가 있을까! 어제 받은 용서로의 고마움으로 오늘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가야 한다.
(2) 유다를 생각하시면서 주님은 "너희가 깨끗하다, 나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10,11절).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하신 말씀으로 깨끗하여졌다고 말씀하셨다(15:3). 주님은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가 깨끗하다고 하시고 나서 그런데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유다는 제외해 놓으셨다. 제자들은 유다를 포함해서 모두가 세례를 받았으나 모두가 다 깨끗해진 것은 아니었다.
[1]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리우며, 스스로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에 있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2] 주님은 그의 백성과 그의 백성이 아닌 사람을 알고 계시다(딤후 2:19). 주님의 눈은 참된 사람과 비열한 사람, 깨끗한 사람과 불결한 사람을 구분하실 수가 있다.
[3] 주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다가 후에 배반자로 드러난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의 배신이 위선의 분명한 증거가 됨을 알게 된다.
[4] 주님은 제자들 모두가 다 깨끗지는 않다는 것을 제자들 스스로가 알도록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왜냐하면 이런 사실을 알므로써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것이 혹시 내가 아닐까? 그리고 주님께 대하여 "주여 나는 끼끗한 쪽에 속합니까? 더러운 쪽에 속합니까?" 라고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위선자가 누리는 것이 판명될 때에, 그것이 결코 놀라움이나 우리에게 거리끼는 것이 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Ⅳ.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우리에게 한 예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주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설명은 그 일을 모두 마친 후에 얘기되어졌다(12-17절).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주님께서 그가 하신 일의 의미를 말씀하실 때에 얼마나 엄숙한 분위기였는가를 생각하자(12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고 하셨다.
(1) 주님은 그 설명을 하시는 일이 다 끝날 때까지 보류하셨다.
[1] 그들의 복종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주께서 하시는 일을 알 수 없었고, 자기들이 사건의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할 때에는 묵묵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했다.
[2] 수수께끼를 풀기 전에 수수께끼 문제 자체에 해당하는 일을 완전히 마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고난이 모두 끝나고 영광의 옷을 다시 입으신 후에 그가 앉으셨던 자리에 앉을 준비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시고"(눅 24:45, 46) 그의 영을 부어 주셨다.
(2) 주님은 그가 발을 씻어 주는 일의 의미를 설명하기에 앞서, 제자들이 설명할 수 있는지 물어 보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주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고 단순히 가르치기 위한 필요성에서 뿐만이 아니고, 이 교훈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관심을 더욱 추켜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 속에서 "내가 너를 알게 하리라. 네가 주의를 집중하면 내가 말하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요한복음 13장 주석
주님의 뜻은 성례전적 암시들이 설명되어지고, 그의 제자들이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그 의미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젖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예식이 무슨 뜻입니까?"(출 12:26)라고 질문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기반 위에서 주님은 이 말씀들을 하고 계신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이 명칭들은 너희가 나와 얘기할 때에 내게 준 명칭들인데, 실로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3절). 너희는 내 제자들이고 나는 너희의 선생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다음을 주의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생이요, 주님이시다. 구원자시며 구세주이신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요 선생이란 것이다. 그가 우리의 선생(dida,skaloj)이란 말은 모든 필요한 진리와 규율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과 교사이시며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시는 예언자이시라는 것이고, 우리의 주님 ku,ri/oj - 즉 우리의 지배자와 소유주로서 우리들을 맘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권력과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란 말이다.
(2) 예수를 선생과 주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그것은 단순히 치켜 세우는 인사로서가 아니고 실제의 사실이며,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이다. 아주 경건한 생활을 하던 허버트씨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록할 때에는 꼭 "나의 주인"이라고 표현했다. 여기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나의 선생이시여! 당신의 음성이 어찌나 달콤한 지요! 마치 용연향(향수의 원효)이 감별사에게 같은 향기를 풍기듯 당신의 부드러운 말씀은 보배로운 향기를 풍기는군요. 나의 선생이시여!"
(3)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생과 주님으로 부름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주님은 그의 명령이 인간의 육과 혈기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 이전에 먼저 복종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생과 주님이 되시는 것이 우리 자신의 승낙에 의한 것이고 자주 그를 선생과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영광 가운데 주님의 돌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주님께서 여기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4절)라고 가르치신다.
(1)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교회에서 일어서서 행하는 예식의 하나로 제도화하여 가르쳤다. 그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상대방을 향한 겸손한 사랑의 표로써 서로의 말을 씻겨 주었다. 성 암브로스는 이 제도를 택하여 밀란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실시했다. 성 어거스틴은 손으로 이 행위를 행하지 않고 마음으로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도 찬성하지만 때때로 기회가 오면, 손까지고 병행하여 사용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였다(딤전 5:10).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업신여기고 포기해선 안 된다. 칼빈은 말하기를 "수난 주간 목요일에 연례적인 관습으로 교황이 행하는 이 예식은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우리의 의무는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로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4절). 그리고 안세니우스는 또 말하기를 교황의 이 예식은 아주 무뚝뚝하게 진행이 되었는데 원래 주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의무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2) 이 말씀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으로써, 가르치기 위한 모범이었을 뿐, 성만찬과 같은 성례전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비유로써 주님은 여기서 세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1] 겸허한 자기 비하이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낮아지셨고(마 11:29), 또 비천한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거니신 것을 배워야 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비천하게 생각하고 형제에게는 존경해야 한다. 또한 죄악 이외의 모든 것을 자신보다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비록 이처럼 비천하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의 유익을 드러내게 된다(삼하 6:22, 네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주님은 자주 제자들에게 겸손함에 대하여 가르치셨고, 그들은 그 교훈을 잊고 있었으나. 지금은 주님께서 이런 방법까지 동원하여 가르치시니 그들은 이 교훈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2] 자기를 낮추는 겸양이란 봉사적인 것이어야 한다.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은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사랑으로 허리를 낮게 숙이는 봉사적 행위를 말한다. 이런 일들은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면서도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사도 바울과 섬김 받으러 오시지 않고 도리어 섬기러 오신 주님에게서 발견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들에 대하여 아무런 의무를 지지 않고 있는 사람들, 심지어 우리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고 돌보아 주고, 위하여 고통 당하며, 시간을 소모시키면서 자신을 낮추는 일에 대하여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여행 후에 발을 씻음으로 예절을 지킴과 동시에 피로를 풀어 주는 안락함을 얻듯이 서로의 발을 씻어 줌으로 피차간에 신임과 평안을 주게 되고, 형제의 이름을 높여 줌으로써 피차에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전 10:24; 히 6:10 참조). 의무란 상호 교류적인 것으로써, 우리는 형제의 도움을 받음과 동시에 또한 형제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3] 주님은 "죄악의 오염으로부터 서로의 발을 씻기라"고 하심으로 서로가 성결케 되기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고 오스틴과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했다. 주님께서 그랬듯이 우리는 형제의 범죄함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피차에 성결케 되기 위하여 서로 도와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을 씻어야 한다. 이 자비로운 행위는 먼저 자기 점에서부터 시작하여(마 7:5)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형제들의 실패와 서로 싸우는 것과 특히 그들에게 임한 죄악의 오염을 슬퍼하면서 그들의 죄로 더러워진 발을 우리의 눈물로 씻어 주어야 한다. 진실된 마음으로 그들을 견책하고 그들을 회개케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며(갈 6:1) 다시는 죄의 진흙탕 속에 빠지지 않도록 충고함으로 그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다.
4.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방금 보여 주신 본보기에 따를 것을 강하게 명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절실하게 나타내 보여 주신다.
(1) "나는 너희의 선생이고 너희는 내 제자이므로 너희는 내게서 배워야 한다"(15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으니 내가 행한 것과 같이 너희도 행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해 보자.
[1] 주님은 얼마나 훌륭한 선생이신가! 그는 교리를 가르치듯 본보기로써 가르치셨고, 이 목적을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 가운데 거하셨다. 그가 보여 주신 것은 그의 거룩한 종교가 가르치고자 하는 은혜와 의무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보여 주신 본보기는 조금도 잘못이나 실수가 없이 수행되었다. 여기서 주님은 그 자신이 법을 지적하고 영광스럽게 만드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군사들에게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라"(삿 7:17)고 말한 기드온이나 아비멜렉(삿 9:48, "너희는 나의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그리고 씨저(그는 그의 부하들을 "나의 전우"라고 불렀고, 그의 평상 용어는 "가라"가 아니고 "오라" 였다)와 같은 지휘관이었다.
[2] 우리는 성실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 그가 써 준 것을 우리는 그대로 노트에 필기하는 학생이 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되고, 또 그가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보기는 특별히 목사들이 본받아야 할 것으로써, 그들에게는 겸손함으로 베푸는 자비심과 거룩한 사랑이 나타나야 하고, 또 이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가르치셨던 것을 그들의 목회의 최종 목표로 삼고 봉사해야 한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의 대리자로서 내보내시면서 분부하시기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도 받지 말고 돈도 가지지 말며 이러한 사람들의 형편에 맞도록 여러 모양을 취하라(고전 9:22)고 하셨다. 또, 내가 너희들의 더러운 발에 대하여 행한 일을 너희도 죄로 더러워진 모든 죄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라. 그들을 씻어 주어라고 하셨다. 이 일이 유월절 저녁만찬 자리에서 되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사건의 의미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한 규율을 선포하는 것으로써, 성 참예자들은 먼저 생활이 새로워지고 참된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성결된 사람이어야 하며, 그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제단 주의에 나아 올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건은 주님께서 행하신 것과 같이 요청이 없을지라도 그렇게 하고, 보수가 없을지라도 자발적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서로 남을 낫게 여기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이 사랑의 봉사를 결코 보수를 바라며 하거나 또는 맘에 없는 데도 억지로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2) 주님은 "나는 너희의 선생이고 너희는 내 제자이므로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일이 아무리 비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행하기에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아무리 화려하고 또 대사로서의 권능을 지녔다 할지라도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 가운데 주님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그들이 이해할 수 없다든지 또는 지나치게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행하신 일을 우리들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마 제자들은 서로 발을 씻겨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속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고상함을 지니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을 막기 위해서 주님은 제자들의 위치가 주님의 종이 위치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다. 곧 그들은 선생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선생의 명성과 관련된 일은 제자들의 명성과도 깊은 관련이 됨으로 제자들은 선생의 하시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주의해 보자.
[1] 우리는 부패된 인간의 본능을 발동시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친절한 겸손과 우리의 유익을 도모하시는 그의 뜻을 업신여김으로 우리 자신을 높이고 주님을 낮추어 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마음을 삼가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주님이 우리보다 더욱 위대하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안에 어떠한 형태의 겸손을 나타내시든지 간에 우리는 그보다 더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주님은 자신이 겸손해지심으로 겸손함이 얼마나 고귀하고 영예로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고 제자들에게는 죄를 제의한 모든 것을 자기들보다 낫게 여기도록 명하셨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당신이 최선을 다하여 그 일을 행하여 보면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선생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참 진리이다. 주님께서 봉사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오직 권세를 가지고 횡포를 부린다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깨닫게 될 뿐이다.
5. 주님은 제자들이 복종해야 할 것을 명하시며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끝마치신다. "만일 너희가 이것을 알고 또는 보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리를 펴고 남을 지배하는 사람이 행복한 줄로 알고 있다. 서로의 발을 씻기는 일은 재물을 늘리거나 지위가 올라가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못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생각이 옳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행복한 사람은 서로의 발을 씻겨 주기 위하여 허리를 숙이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네가 만일 이것을 알고"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이해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궁금증을 가져다 준다. 그들은 세상 왕국에 대한 깊은 환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의무를 그들의 환상에 배치되는 것으로 여겨 버렸는지, 아니면 이 의무를 옳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그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이 훌륭한 교훈을 통해서 한층 격려된 것은 사실이고, 또한 이것이 훗날 그들이 바라는 행복을 성취시킬 수 있는 필요 조건이 된 것이 틀림 없다.
(1) 이것은 일반적인 주님의 분부에 적용할 수 있다. 다음을 유의하자. 우리가 의무를 깨닫는다는 것은 큰 유익이지만, 그러나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행복은 감소된다. 안다는 것은 행동에 옮기기 위한 것으로써,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 지식은 공허하고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아니, 오히려 죄를 더욱 악화시키고 파멸을 촉진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옮을 것이다(눅 12:47, 48; 약 4:17). 알고 행하는 사람에게만 그리스도의 왕국은 확증되고 그들이 바로 현명한 건축가들이다(시 103:17, 18).
(2) 여기서 행함이란 특별히 겸손과 남을 도우라는 분부에 적용된다. 우리가 실제로 겸손하게 되는 것보다 더 깊은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열정적이고 과격한 사람은 않은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적은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죄악과 증오 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신 법도대로 참으로 겸손하고 서로 복종하며 섬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소수라도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일들을 잘 알며,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복종하고 봉사하면서 살기를 바라면서도 자기 자신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유다의 배신(요한복음 13:18-30)
주님은 여기서 선생을 배반하려는 유다의 음모를 알고 계셨으나 이제서야 최초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드러내 놓으셨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배반을 당하시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로써 때때로 주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자기들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일 것이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아니했었다. 이제 여기서,
Ⅰ. 주님은 그 일에 대하여 공공연히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18절). 나는 "내가 택한 자들과" 내가 지나쳐버린 자들이 누구인지 알므로 너희들 모두가 나의 분부한 일들을 행하기를 바랄 수가 없다.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 말씀은 성취될 것이다(시 41:9). 주님은 아직도 그 죄와 범죄자에 대하여는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다만 그들의 궁금증만 더해 놓으셨다.
1.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모두 옳지는 않다고 선언하신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 주신 좋은 것들이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소떼를 구별하여 나눌 수 있을 만큼 분별력있는 말씀으로써 자기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구별해 내여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으시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신 말씀은 제자들과 아울러 그를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유다가 제자들 속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선한 사람들의 집단 속에서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랑이 함께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부정하고 선을 가장한 사람들은 하나도 들어갈 수 없는 축복된 사회에 우리가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2. 주님 자신은 누가 바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를지를 아셨다.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서 일반적으로 불러내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소수의 선택된 사람인가를 아신다는 말씀이다. 다음을 살펴 보자.
(1) 선택된 사람들이란 주님께서 선택권을 가지고 지명하여 불려낸 사람들이다.
(2) 선택된 사람들을 주님은 아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가 한 번, 사랑으로 지명하여 불러내신 사람은 그 누구도 잊으시는 법이 없으시기 때문이다(딤후 2:19).
3. 주께서 배신당하리라는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주님은 그의 가족 속에 장차 배신할 것으로 예상하는 한 사람을 넣으시고 그의 배신하려는 생각이 진전되어 가는 것을 막지 않으심으로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범죄함을 막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동일한 범죄는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가 인용하고 있는 이 말씀은 다윗이 그의 대적들의 배신에 대하여 한 불평으로써 유다의 주석가들은 그 대적이 아히도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로티우스는 유다의 죽음이 아히도벨의 죽음과 같을 것임을 암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인용된 시편 구절(시 41:9)에 나타난 다윗의 형편은 병중이라는 것을 참작할 때, 배신의 사건은 아히도벨의 도망이라기보다는 다윗의 다른 친구 중 하나가 저지른 잘못일 가능성이 더 짙다. 이 사건을 주님은 유다에게 적용하신 것이다.
(1) 제자로서의 유다는 최고의 특권 집단 곳에 받아들여져서 주님과 함께 앉아 떡을 먹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서 사랑도 받았고 그리고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지닌한 가족이 되었다.
주님은 그의 친구들을 친절히 대해 주셨고 유다를 포함한 제자들은 주님을 정성껏 섬겼다. 어디를 가시든지 누님은 유다를 데리고 다니셨고 그들은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접시에서 음식을 나누며 같은 컵으로 마시며 사제의 정을 나누셨다. 유다는 주님과 함께 발효된 빵으로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놀라운 영광도 가졌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않은 주님과 함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이 다 진실한 제자는 아니라는 점이다(고전 10:3-5).
(2) 배신자로서의 유다는 가장 비열한 배신을 행함으로 죄를 범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다.
[1] 그는 주님을 버리고 등을 돌려 제자들의 집단을 떠나 버렸다(30절).
[2] 그는 주님을 멸시하고 발의 먼지까지도 떨어버리면서 주님과 그 복을 비웃었다. 아니 오히려,
[3] 그는 주님의 원수로 돌변하여 레슬링 선수가 자기의 상대방을 집어 던지기 위하여 먼저 걷어 차듯이 발로 주님을 차버렸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이런 일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고 한때 주님의 제자였다가 후에 주님의 원수로 변하는 사람들에게서 언제나 발견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주님을 찬양하는 듯이 가장했다가 이제는 주님을 대항하여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은혜를 망각했다는 이유에서 뿐 아니라 배신과 불충이라는 죄목으로도 정죄된다.
Ⅱ. 주님은 유다가 배신하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말하는 이유를 설명하신다(19절).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그것이 거침돌이 되어 너희가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며 내가 너희의 기다리는 그 분인 줄을 믿게 하려함이로다."
1. 주님은 닥쳐 올 일에 대한 명석한 통찰력으로 이번 일에 있어서도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참 하나님인 것을 확실히 증거하여 주셨다. 사실 의심할 만한 아무 근거가 없는데도 주님은 유다가 그를 배신하리라는 것을 예언함으로써 자신이 인간의 마음 곳의 의도와 생각까지도 파악하실 수 있는 영원한 말씀임을 증명했다. 배신에 대한 신약 성서의 예언들이 후에 성취된 것을 보면, 이 글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는 거이며 따라서 성서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확립된다.
2. 구약 성서의 모든 구조와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해 가면서 주님은 자기가 진정한 메시야라고 증거하며 모든 예언자들은 이 메시야에 대하여 증언했다고 한다. 따라서 성서의 기록대로 그리스도는 고난받아야 한다고 하셨다(눅 24:25, 26; 요 8:28).
Ⅲ. 주님은 제자들과 그가 불러내어 돌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신다.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이 말씀의 의도는 다른 성경에 나타난 바와 동일한 것이지만 여기서 그 통일성을 논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겸손하고 스스로 비천한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의 스스로 비천한 행위를 보고 너희를 멸시할 사람들이 있겠으나, 반면 너희의 그 일을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너희의 행한 그 일로 인하여 너희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은 부활하신 일을 통하여 자기가 존귀하게 된 것을 깨닫는 사람은 이 세상의 여론에 의하여 비방을 받아도 만족해 할 것이다. 세상 여론은 제자들 중에 배반자가 하나 있었던 것을 지적해 내면서 지금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제자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들고는 "너희가 과연 진실했느냐?" "다 똑같지 않느냐?"고 다구쳤다. 그러나 주님은 유다의 범죄로 인하여 제자들 모두를 나쁘게 생각지 않으셨고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들을 소유하시며 영접하실 것이다.
유다가 설교자로 있을 때에 그럴 영접했고 그의 설교에 의하여 회심하고 교화된 사람들은 유다가 후에 배신자로 증명되었다 할 지라도 무엇이 잘못되거나 또 후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유다를 보낸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은 인간이 무엇인지 잘 모르며 더욱이 그가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는 더욱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보내서 우리 앞에 나타난 사람들을 우리는 그에게 어떤 이상이 생기기 전까지는 영접해야 한다. 낯선 사람을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도적을 대접한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계속 그들을 접대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천사를 대접하는 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에 대한 모든 비난과 공격이 아무리 잘 계획된 것일지라도 결코 우리의 사랑을 꺾지 못할뿐더러 우리가 받은 상급을 가로막지도 못한다.
1. 여기서 우리는 기쁨으로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목회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다. "비록 내가 보낸 자가 연약하고 가난하며 다른 사람들처럼 다분히 감정적 기분에 좌우된다고 할지라도, 그가 만일 나의 가르침을 전하며 정기적으로 그 직임을 수행하고 기도의 생활과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그를 영접하며 환대하는 사람은 나의 친구가 될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님는 지금 세상을 떠나려 하시면서 또한 제자들에게 자기의 다리자가 되어 말씀을 전하기를 분부하셨다. 그리고 이 분부를 소중히 여겨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그의 법도에 복종하며 그의 말씀 속에 제시된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2.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 요구되고 있다. "나를 영접하는 자와 그의 대리자를 영접하는 자는 동시에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심부름으로 와서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같이 아버지 이름으로도 세례를 주기 때문이다."
반면, 일반적으로 "나를 자기 주권자와 구주로서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자기 몸의 일부분으로 그리고 최고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으므로 그의 종교를 택하는 것만 유일한 진리의 종교를 택하는 결과가 된다.
Ⅳ. 주님은 제자들 중 하나가 계획하고 있는 음모를 모두들 앞에 밝히 드러내 놓는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잠시 시간을 두어 제자들로 하여금 그 다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동안"심령에 민망"하셨다. 어떤 몸짓으로든지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 보이신 후에 증거하였다. 그는 엄숙하게 선언하셨다(마치 법정에서 증인이 손을 들고 선서하듯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언제나 나를 따르던 너희들 중 하나가!"
아무도 감히 주님을 배신할 수 없었으나 주님께서 믿고 후일 주께서 떠난 다음에 그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배신했다. 이것은 운명론적 필요성에 의하여 유다가 이 죄를 담당하게 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예언에 뒤따라 일어나긴 했으나 예언이 그 원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죄를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유다의 이 흉악한 죄를,
1. 주님께서 예견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비밀에 싸이고 미래에 일어날 일로써 모든 생물의 눈에 감추어져 있다고 할 지라도 그리스도의 눈 앞에서는 낱낱이 벗겨지고 공개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행할 것을 알기 이전에 벌써 인간의 마음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므로(왕하 8:12) 그들에 의하여 되어질 일까지도 보신다. "네가 패역한 지라 칭함을 입을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사 48:8).
2. 주님은 남은 제자들의 안전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유다 자신까지도 구원하고 악마의 덫에서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배신의 사건을 미리 말씀하셨다. 배신자들은 자신들이 발각된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음모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유다는 주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알고 계심을 알고 시간을 지연시켰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더욱 큰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3. 주님은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 일을 묘사하실 때에 "심령이 아주 민망"하셨다. 주님께서 여러 번에 걸쳐서 그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지금 유다의 망은과 배신을 말씀하실 때처럼 심령이 민망하셨던 때는 없었다. 이 일은 주님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의 제자들의 실수와 낙오는 주님의 심령에 무거운 부담을 주고 그리스도인의 범죄는 주님의 슬픔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온 너희들 중의 하나가 나를 배신하다니! 나는 너희를 신실하다고 믿었고 너희는 내게 존경을 표하더니, 이제 내게서 무슨 잘못을 발견했기에 나를 배신한단 말이냐?"라는 생각이 주님의 가슴속에 파고 들었다. 그들은 마치 불효 자식이 자기를 먹여 주시고 키워 주신 부모의 마음에 슬픔을 가져다 주는 것과 똑같았다(사 1:2; 시 95:10; 사 63:10).
Ⅴ. 제자들이 이 경고의 말씀을 재빨리 파악했다. 그들의 주님께서 거짓말이나 농담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서로 보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뉘게 대하여 하시는 말씀인지"궁금히 여겼다.
1. 그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자기들에게 집중된 시선으로 난처함을 표명했다. 이 말씀을 그들에게 공포감마저 주어서 주님을 어떻게 쳐다봐야 할지 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심히 고통당하시는 것을 보았고 따라서 그들도 고통을 당했다. 이 일은 제자들이 후히 대접받던 잔치 자리에서 일어난 일로서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또한 그와 함께 슬퍼하며 고민하는 것이다. 다윗이 그의 아들의 반역을 보고 울 때에 그를 따르던 모든 신하들이 함께 울었듯이(삼하 15:30) 주님의 제자들도 지금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주님의 슬픔은 특히 주의 이름으로 종된 사람들이 악한 행실을 저지르는 것으로써, 이것은 마땅히 주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슬픔이어야 한다.
2. 제자들은 누가 반역자인가를 찾아 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누가 마음속의 죄로 인하여 얼굴이 붉어지는지 또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충성스런 제자들의 양심에 가책이 없기 때문에 떳떳이 얼굴을 들 수 있는 반면, 죄를 저지른 자는 이미 양심에 화인을 맞아 부끄러워하거나 얼굴을 전혀 붉히지 않았으므로 이런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해 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주님은 제자들을 혼동시켜 어 줄 모르게 만드신 후 잠시 동안 자신의 마을 가라앉히고 일의 내막을 말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고, 제자들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셨다. 때때로 주위를 휘돌아보며 잠시 쉬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법이다.
Ⅵ.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의 생각을 설명하시며 특히 그들 중 누가 주를 배신할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두려워했다. 그러나 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명백한 말만이 그들을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길이며 주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배반자를 알려 주여야 하는 고통을 벗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1. 제자들 중에서 주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이며 주님 다음 자리에 앉아 있던 요한이 이 문제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는 최적격자였다(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한복음 21장 20, 24절과의 비교에서 보면 이 제자는 요한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제 다음의 사항들을 주목해 보자.
(1) 주님께서 이 제자에게 대하여 가지신 특별한 친절을 표현함에 있어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하였다. 주님은 그들 모두를 사랑하셨으나(1절) 요한은 특히 사랑스러웠다. 요한이란 이름이 은혜스럽다는 뜻이다. 구약 성서에서 계시로 인하여 영광을 얻었던 다이엘은 신약의 요한처럼 대단히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단 9:23) 주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지금 요한이 앉은 자리의 위치와 그의 자세를 살펴 보자.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어떤 나라에서는 식탁에 앉을 때에는 모두 기대는 자세를 취하여 첫째 사람의 가슴에 둘째 사람의 머리를 기대고 계속해서 셋째 사람, 넷째 사람 순으로 앉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써는 자유롭게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하여튼 요한은 주의 품에 기대고 있었고, 이것은 바로 그 당시에 가장 사랑받는 취하는 자세였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누워서 주님과 더불어 남들보다 좀더 자유롭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독생자를 사랑하사 그의 품에 품으시고(요 1:18) 저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요 17:21). 모든 성자들이 얼마 안 있어 아브라함의 품안에서 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발 앞에 눕는 자는 그의 품에 기대어 눕게 될 것이다.
(3) 요한의 이름이 여기에 숨겨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이 이야기의 기록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는 대신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란 말을 쓰고 싶어했다. 다윗이나 솔로몬의 궁전에는 언제나 왕의 친구가 하나씩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기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다는 사실을 명예로운 명칭으로 삼았다. 그가 자기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자기가 자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와 똑같은 경우를 당면했던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안에 한 사람을 안다"고 했다.
2. 모든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가장 열심히 누가 배반지인가를 알려고 했다(24절). 좀 떨어진 거리에 앉었던 베드로는 요한에게 신호하여 질문하게 했다. 베드로는 일반적으로 지도자격이었고 매사에 앞장 서기를 원했다.
인간의 본성이 이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담대해져서 답변해 달라고 질문할 때에도 겸손과 지혜의 법을 지킨다면, 이 법들은 그를 인내심 많고 봉사적인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형태의 사물을 주신다. 그러나 교회에서 항상 앞장서는 사람은 생각이 좀 모자라며, 조심성이 있는 사람은 용기가 부족하다. 주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베드로가 아니고 요한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베드로는 그 배신자가 자기 자신이 아닌 것과 도대체 누가 배신자인지를 알기 원했고, 다른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물러서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가능하면 주님의 제안까지도 가로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 우리를 기만할 자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결국 그것은 주님께서만 아시는 일이다. 왜 베드로가 직접 질문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요한의 자리가 책상에 가까웠기 때문에 주님의 귀에 대고 살짝 물어 볼 수 있었고, 또 사담을 나누듯 쉽게 답을 얻어낼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어떤 흥미있는 관심사가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흥미를 충족시키며 그들의 기도에 우리 자신을 의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3. 따라서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속삭이기에 편리한 위치에서), 주여 누구오니이까"(25). 여기서 요한이 보여 주는 것은,
(1) 그의 동료들과 자기 자신이 취하고 있는 자세에 대하여 감사한 것이다. 이 순간에 요한이 가진 영광을 베드로는 가지지 못했으나, 그러나 주님께서 요한에게 들려주시는 힌트와 선언의 말씀을 소홀히 넘겨버리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은 때로 주님의 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유익한 것을 배우게 되며 자신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임을 상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요한은 자기가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베드로에게 감사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두 받은 바 은사가 각기 다르니 받은 대로 행할 것이다(롬 12:6).
(2) 선생께 대한 경외심이다. 그가 여기서 선생의 귀에 대고 속삭이면서도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보면 그가 한 가족의 일원으로 용납되고 함께 생활해 왔으면서도 그의 선생께 대한 존경심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무엇을 표현하든지 간에 존경심을 가지고 할 것과, 또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비밀의 헌신을 한다고 할 지라도 공중 앞에서와 같이 단정한 태도로 행할 것을 일깨워 준다. 정중한 영혼은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고 또한 주님의 위대하심과 아울러 자신의 비천함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
4. 주님께서는 이 질문에 곧 답해 주셨는데 그 사실을 다른 제자들이 계속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면 요한의 귀에 대시고 속삭여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주님께서 한 조각을 찍어다가 유다에게 줄 때에 요한은 엄밀히 그 행동을 관찰했고, 유다는 이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그 떡을 받고 맛있는 떡조각을 검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1) 주님은 암호로 배신자를 지적해 내셨다. 그는 배신자의 이름을 요한에게 말로 가르쳐 줄 수도 있었으나 이렇게 하심으로써 요한의 관찰력을 시험해 보실 수 있었고 또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악한 형제들은 말로써 알려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풍기는 암시, 즉 그들이 맺는 열매라든지 그들의 명을 판단함으로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들을 바로 판단하기 위하여는 부지런함과 계속적인 주시함이 필요하다.
(2) 주님께서는 떡조각으로 표시를 삼으셨는데 이는 아주 적절한 암시였다. 그것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배신자는 그와 함께 떡을 먹는 자로서 그 일행 중의 하나이라는 말씀을 성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행위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행위로써 다음과 같이 우리를 가르쳐 준다.
[1] 주님은 때때로 배신자들에게 떡조각을 주신다. 말하자면 세상에서의 부귀, 명예, 쾌락 등이 떡조각들인데 이같은 신의 섭리가 악한 사람들 손에 때로 주어진다. 유다는 자기가 떡조각을 받은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했을 서이다. 이와 같은 바보스런 사람들의 번영은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2] 우리는 우리에게 악의를 가지고 대드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나타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유다의 음모를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식탁에서 아무에게도 행하지 않은 친절을 베풀어 떡을 떼어 주었다. "남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대로 주님은 행동하셨고, 우리도 이를 시행하여야 한다.
Ⅶ. 유다 자신은 여기서 그의 악한 생각을 깨닫는 대신, 오히려 그 마음을 굳혔고 그에게 주어진 주님의 경고는 그의 죽음을 끌어들이는 냄새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은,
1. 사탄이 그를 포로로 삼았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탄이 그를 지배함으로써 유다의 마음이 우울해지고 혼란을 일으켰거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날뛰게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극한 상황이 벌어지고 유다가 돼지떼와 함께 바다에 빠져 질식했더라면 그것이 유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를 지배함으로써 그에게 주님 자신과 주님의 교훈에 대한 편견을 주어 주님을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경멸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의 마음속에 불의한 마음의 소산인 탐욕이 불붙게 하여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구애되지 않고 행할 결심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1) 전에는 그에게 사탄이 들어와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 사탄이 그에게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유다는 처음부터 파멸의 아들로서 마귀였으나(요 6:7)) 지금은 사탄이 완전히 그를 지배하여 그 속에 꽉 들어찬 것이다. 선생을 배신하고자 하는 그의 목적은 이제 완전히 무르익어 단단히 결심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지금 더 악한 일곱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눅 11:26). 다음의 사항을 유의해 보자.
[1] 사탄은 육의 일만을 행하는 모든 죄인들 속에 거하고 있으나(엡 2:2) 어떤 때는 다른 때보다 더 분명하고 강하게 몰려 들어가 큰 악을 심어 줌으로써 그의 인간성과 양심을 자극시킨다.
[2] 주님은 배신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많은 수의 사탄들이 거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유다의 죄가 그의 다른 박해자들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2) 떡조각을 받은 후에 사탄이 어떻게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갔는가? 아마도 유다는 그 떡조각이 자기를 지적하는 것임을 이 때에 알고서 그의 결심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주님께서 주신 자비의 선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더 악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고 회개를 일으키는 대신 더욱 마음이 굳어지게 했다. 머리 위에 쌓은 숯불이 녹이기는커녕 더욱 굳어지게 만든 셈이다.
2. 여기서부터 주님은 유다를 제자의 무리로부터 제외해 놓으시고 그의 마음의 욕망대로 실행하라고 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 말씀은 유다의 악한 생각을 권하거나 정당화시키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1) 유다를 사탄의 행위와 권능 속에 포기해 버리는 말씀이다. 주님은 사탄이 이미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아무 어려움이 없이 그를 정복한 것을 아셨고 유다는 지금 아무 힘없이 사탄에게 항복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를 회개시키기 위하여 주님께서 사용하신 여러 가지 방법들은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므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만일 네가 너 자신을 파괴할 결심을 했거든 지체 말고 계속하라. 그리고 그 결과를 네가 차지하라"고 하신 것이다. 악령이 환영을 받으며 들어오면 선한 영은 당연히 물러서는 법이다.
(2) 유다에게 그의 악행을 행하라고 요구하시는 도전적인 말씀이다. "너는 내게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어서 실행에 옮겨라. 빠르면 빠를수록 나는 환영한다. 나는 너의 배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다음을 유의해 보자.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하시는 고통과 죽음에 자발적이셔서 그의 맡으신 일이 지연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주님은 유다가 그를 배신하는 일이 마치 자기가 지금 막 하려고 하는 어떤 일인 양 말씀하신다. 악한 일을 구상하거나 고안해 낸 사람은 반드시 그 악한 일을 실천하고야 만다.
3.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속삭이시는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 떡조각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요한을 제외하고는 제자들이거나 다른 손님이거나를 막론하고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다."(28절)었다.
(1) 다른 사람들이 주님께서, 유다가 배신자라고 말씀하셨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유다가 그런 사람일 줄을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다음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주님의 제자들이 그들 중 하나가 배신자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아 염려하는 바람에 주님의 하시는 일을 재빨리 파악하지 못한 우둔함은 용서받을 수 있는 과오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주님께서 "바로 그 사람은……"이라고 거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만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도록 잘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들 중의 누구를 함부로 의심하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사랑은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2)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행위가 주님께서 재정을 맡고 있는 유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할 무엇을 명시하는 줄로 생각했다. 이 경우에 그들이 추측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얼마 안 되는 재정을 지출해서까지 하시려고 하시는 일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를 배운다.
[1] 경건해지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잔치에 필요한 것들을 사야 한다. 주님께서도 유월절 음식을 잡수기 위하여 방은 빌렸지만 그 식탁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나가기에 필요한 서들은 정확히 계산되고 잘 쓰여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 비용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우리의 복음적인 예배는 값비싼 제물을 필요로 하는 모제의 율법에 근거한 예배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2]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은,
첫째, 주님은 여러 여인들의 손으로 거두어진 현금으로 살으셨지만(눅 8:3) 그의 적은 것을 나누어서 비록 적으나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주님은 가난해서 뿐만 아니라, 무료로 치료를 해 주는 등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의무에서 충분히 예외일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의 구제를 위하여 제자들의 생존에 필요한 물질 중에서 꺼내어 나누어 주는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엡 4:28).
둘째, 종교적 잔치의 때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적절한 때로 생각되었다. 유월절을 기념하시면서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자비로움을 경험할 때에, 동시에 우리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로움을 지녀야 한다.
4. 여기서 유다는 자기의 계획을 수행하기로 각오를 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중요하게 관찰해야 한다.
(1) 유다의 재빠른 동작을 보라. 그는 곧 나가서 그 집을 떠났다.
[1] 제자들의 무리 중에서 자기의 정체가 명백하게 밝혀질 것을 두려워했고 딴 제자들이 모두 자기에게 달려들면 혹시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최소한도 그의 계획을 진행시켜야 할 이유 때문에 그 자리를 뜬 것이다.
[2] 그는 마치 주님의 무리들과 사도들의 사회에 싫증을 느낀 사람처럼 나갔다. 주님은 그를 내쫓을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는 자기 스스로를 쫓아내버린 것이다.
[3] 그는 자기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기와 이미 계약을 맺은 사람들을 만나 약속을 해 두려고 나갔다. 이때 사탄은 그의 속에 들어가서 그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유다로 하여금 서두르게 만들었다.
(1) 그가 나갈 때는 "밤이었다."
[1] 직업에 종사할 때에 계절이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때가 밤이었으나 사탄은 유다 속에 들어가니 그는 밤의 찬 공기나 어두움이 문제되지 않았다. 사탄의 종이 이처럼 사탄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모험적 봉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게으르고 겁쟁이였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2] 이 때가 밤이었기 때문에 유다는 그의 자존심을 상하거나 위장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대제사장들과 만나는 모습이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 같은 어두움의 일을 행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로써 밤을 생각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다(욥 24:13).
그리스도의 떠나심이 예언됨(요한복음 13:31-35)
이 부분부터 14장 마지막 부분까지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책상 앞에서 나눈 대화였다. 만찬이 끝나자 유다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주님과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은 아주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것은 우리들이 책상 앞에서 친구들과 더불어 나누는 대화가 종교적으로 유익한 것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가르쳐 준다. 주님은 이 대화를 시작하신다. 우리가 만일 이처럼 선한 관계를 조성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 관계를 교육적 목적에 사용하기 위하여 좀더 겸손해지면 질수록 우리는 또한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특히 지위나 평판, 재능 등으로 통솔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흥미를 저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실제에 있어서는 여기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이었겠지만) 살펴 보자.
Ⅰ. 그리스도께서 받게 될 고통과 죽음이 지니고 있는 위대한 신비성을 제자들은 몰랐다. 따라서 그들은 그러한 일이 그리스도에게 생기지 않기를 바랐음으로 주님은 그의 십자가의 거침돌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이 교훈의 말씀을 들려주신 것이다. 주님은 거짓 형제인 유다가 나갈 때까지는 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악한 자들이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유익한 대화에 지장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다가 밖으로 나가자 주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셨다. 유다가 그들의 사랑이 충만한 만찬을 더럽히고 제자들의 집단의 거침돌인 것을 발견하고 그를 제해버린 때가 인자의 영광받은 때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사회가 정결함으로써 영광을 받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교회가 부패하면 그리스도가 비난을 받게 되고 그 부패함을 깨끗게 함으로써 그 비난은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유다는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한 수레바퀴를 굴리러 나갔고, 즉시 성사될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 지금 그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다.
1. 여기서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말씀이 있는데 우리에게 한없이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1) 주님은 그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셔야 한다. 가장 큰 치욕과 불명예로움을 입고 악이용되며, 그의 친구들의 비겁과 원수들의 오만함으로 인하여 모욕을 당케 되실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1] 주님은 사탄과 어두움의 세력을 쳐부수고 영광의 승리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제까지 감추어 두셨던 듯한 확신으로 갑옷을 삼고 하나님과 인간의 적들을 몰아내실 것이다.
[2] 주님은 인간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시는데, 이 피는 만인에게 줄 끊임없이 마르지 않는 기쁨과 은혜의 샘이며, 인간 모두에게 영원한 정의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3] 주님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의 고난에서의 인내, 용기 등에 대한 위대한 표본으로써 세상의 멸시를 견디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뜨거운 정열과 인간의 영혼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베풀었던 많은 기적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고통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고통을 통하여 받으실 영광이 과거의 어떠한 영광보다도 도 큰 영광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1]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족시켜 드리는 것으로써 이 수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주님께서 받으셨던 모든 수난의 대가는 엄청난 이익이었다. 율법의 목적은 풍성하게 이루어졌고, 주께서 통치하시게 될 영광을 결국 선포되고 지탱되었다.
[2] 주님의 수난은 그의 거룩하심과 자비로우심의 명백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그의 창조와 섭리를 통하여 나타나지만 구속의 사업을 통하여 더욱 분명히 밝혀진다(고전 1:24; 고후 4:6).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수난 가운데서 그 사랑을 인간에게 나타내신다.
(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계시다면, 주님은 그의 수난 이후에 놀라운 영광을 받을 것이 분명해진다. 주님은 이같은 사실을 역설하고 계시다. 즉,
[1]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사람들은 진정으로 영화로와진다. 지옥과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비방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화롭게 하시기로 마음먹으시고, 그대로 실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화롭게 하시기로 마음먹으시고, 그대로 실행하셨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놀라운 표적과 기적들로써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만들자, 이 놀라운 사건이 핍박자들로 하여금,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고난 중에서 영화롭게 만드신 후에 더욱 큰 영광을 주셨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시고 그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있게 하신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 안에서(evn e`outw/|)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신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인 자기 속에서 영광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 형성되어 있는 그의 나라 안에서만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인간성 자체 내에서도 영광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의 빠른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은 후에 그의 추억 속에서 영광을 얻지만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영광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주님은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7장 5절에 기록된 대로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그의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계 3:21) 진실로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랴!
[3] 주님의 영광은 즉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주님은 그의 앞에 다가온 기쁨과 영광의 위대함을 보시지 않고 그 임박함을 또한 보셨다. 이는 그의 슬픔과 고난이 곧 끝나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왕자들이 행한 선행은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오랫 동안 보류되어 있는 수도 있으나 주님은 당장에 그 보상을 받으신 것이다. 물론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40시간과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이란 기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시로 영광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시 16:10).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그리고 그 고난으로 영화로와 지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며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다음을 주목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신다는 데는 그의 겸손과 함께 그에게 주어진 보상이 이미 고려되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신을 겸손케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케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놀라운 영광을 얻으신다면 그 아들 역시 영광을 받게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사 53:12 참고).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 사람들은 그와 함께 영화롭게 되는 행복을 가지게 될 것이 틀림 없다.
2.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가르쳐 주실 때에 제자들의 마음은 그 뜻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먼 거리에 있었으므로 우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33절)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현재 당면한 상황에서 두 가지 기회를 포착하여 선용하도록 제시하신다.
(1) 주께서 그들과 함께 이 세상에 계실 기간이 지극히 짧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그들을 "소자들"이라고 부르셨다. 이 말씀은 그들이 연약함을 보시고 사랑스러움과 염려심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아버지로서 그들을 세상에 남겨 두고 가셔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하신 말씀으로써 그들에게 축복을 빌어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이란 말씀을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말씀인지 아니면 승천에 대한 말씀인지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지 간에 하여튼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리한 점을 잘 이용하라고 하신다. 만약 주님께 물어 볼 질문이나 바라고 싶은 말씀, 훈계 등이 있으면 지금 곧 물어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계실 시간이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이 도움을 받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그 도움을 이용해야 한다. 잠시 후면 더 이상 도움을 얻지 못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셔야만 행복과 위안이 있는 줄로 생각하지 말고, 마치 어린 아이가 유모의 보살핌 없이 걸어 가듯이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길과 방법을 제시된다 하여도 우리가 그 속에 언제까지나 쉬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과 방법은 우리가 영원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할 뿐이다.
(2) 이제 주님께서 가시는 그 세계에까지 제자들이 따라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다른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시는데(7:4), 이는 죄인들을 설득시키고 각성시키기 위해서 하신 말씀으로 제자들도 재빨리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1]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떠나가신 이후에 주님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으리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와 다시 함께 있게 되기를 너희가 원하리라"는 뜻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배워온 대로 자비심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절실히 요구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안위자이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이 고생을 할 때마다 실제적 위안을 직접 주셨으나 그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여 그가 주시는 위안의 진정한 가치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너희가 나를 찾되 만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는 "너희가 나를 찾으리라"라고만 말씀하신다. 즉 제자들도 유대인들처럼 주님의 육체적 모습을 찾지는 못할 것이나 그에게서 동등한 가치를 지닌 무엇을 찾게 됨으로써 그 수고가 헛되지는 않을 것임을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비록 찾지는 못했을지라도 선한 의도를 가지고 무덤 속에서 주님의 사체를 찾으려 했었다.
[2]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는 세계에서 빛과 더불어 거하시러 가시는 주님의 높으신 뜻과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낮고 미래에 대한 심각한 생각들을 나타내 준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자기를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신 이유는(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그들이 주를 섬길 수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좀더 부지런하고 조심성있게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에겐 용기와 결단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에까지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도망해 버렸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도 가지지 못했고 또 그들의 사명과 이 세상과의 싸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면류관에꺼지 따라갈 수 없다.
Ⅱ. 주님은 형제 사랑에 대한 위대한 의무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35절). 유다는 밖으로 나감으로써 자기가 거짓 형제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에 해독을 주는 질투나 의심을 서로 해서는 안 된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의 유다가 섞여 있긴 했으나 그들 모두가 유다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유대인의 적대심이 최고조에 달했으므로 제자들도 주님께서 당하시는 어려움을 함께 당할 각오를 해야 했고, 바로 이러한 곤경 가운데서 형제적 사랑은 서로서로에게 큰 힘을 이루는 것으로써 절대 필요하였다. 상호간에 주고받는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주장을 살펴 보자.
1. 이 사랑은 주님의 명령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34절)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하나의 사교적이고 유쾌한 것으로써 또는 훌륭하고 유익한 것으로써만 가르치시지 않고 그의 나라의 가장 근본적 법으로써 명령하신다. 이 사랑의 법은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명령과 병행하여 주장된다. 이 명령은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통치자의 명령이요, 또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구원자의 명령으로써 우리의 영혼의 병을 치료하는데 필요하고, 영원한 행복을 준비시키는 데 필요한 명령이다. 이 명령은 새 계명으로써,
(1) 다시 새로워진 계명이다. 이 계명은 태초로부터 있었고 자연의 법칙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모세의 율법 중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이었다. 그런데 이 계명이 신약에서는 새 법의 수여자이신 예수의 가장 중요한 계명 중 하나로써 새 계명이라고 불리워진다. 이것은 마치 오래된 책이 새로 간행될 때 수정되고 증보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계명이 유대 교회의 전통에 의하여 밀려나고 부패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이 계명을 소생시키시고 새 계명이라고 부르셨다. 복수와 앙갚음을 정당화하는 율법이 그 시대를 지배했고 자기 사랑이 성행했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시대감각에 뒤진 모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던 때에 주님께서 이 계명을 말씀하시자 그들은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2) 새로 작곡된 노래가 새로운 붐을 일으키듯이 이 계명을 특별한 감사를 내포한 훌륭한 명령이다.
(3) 이 계명은 결코 쇠하지 않을 새 계약처럼 늘 새롭게 보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을 계명이다. 믿음과 소망은 앍아질지라도 이 계명은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4) 주님께서 이 계명을 주실 때, 이 계명 자체가 분명히 새 계명이었다. 전에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너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나, 지금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서로 서로 짊어지는 상호적인 의무를 말씀하심으로 이 계명은 더욱 강한 힘을 지닌 새 계명이 되는 것이다.
2. 주님께서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것이 형제적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주장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이유와 그 같은 사랑의 법칙은 오랜 세대 동안 감추어진 채로 있었는데, 지금 완전히 새 것으로 드러나면서 새 계명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본보기로 보여 주신 사랑을 이해해야 한다. 주님은 그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셨고 진심으로 염려하여 주셨으며, 그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하여 가르치시기도 하고 의논도 해 주셨다. 그들과 함께 기도도 하셨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셨으며, 그들이 비난을 받을 때에는 변호하여 주셨고 약해졌을 때에는 편을 들어 주셨다. 그리고 공중 앞에서 그들이 자신의 어머니나 누이나 동생보다 더 가깝다고 말씀하셨다. 때로는 제자들의 잘못을 꾸짖기도 하셨으나 또 때론 공감도 해 주셨고 용서도 해 주셨다. 진정으로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방금도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여야 하며, 끝까지 사랑하여야 한다.
(2) 주님께서 그의 생명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은 특별한 사랑의 본보기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는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을 행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당연히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바라시고 계시다. 이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우리가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으로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잡아야 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은 거저 주는 사랑으로써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공들인 것이어야 하며, 값비싸고 변함없고 끈기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각자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기억하고 우리도 실천해야 한다(롬 15:1, 3; 엡 5:2, 25; 빌 2:1-5).
3. 제자들의 행함에 대한 평판이 따르게 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절).
다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즉 우리는 사랑을 갖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 근본을 가져야 하고 습관화해야 한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주님의 제자임을 나타내 보여 주는 표식임을 알아야 하겠다. 이 행위로써 주님는 제자들을 아시고, 제자들 자신이 자신을 알며, 또한 남들이 제자들을 알아 본다. 따라서 이 사랑의 행위는 주님의 가족들의 통일된 차림새요 드러난 특징이며 아울러 주님은 이 행위로써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하셨고 제자들을 남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다. 이제 누구든지 서로 다정한 사람들을 보면 "저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야.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어"라고 말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1)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무척 바라며 신경을 쓰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각자가 자기의 길을 가는 세상이었으나 제자들은 서로 간에 진심을 주고 받는 관계였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기적을 행함으로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이 기적만을 행하는 자는 "소리나는 꽹과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고전 13:1, 2).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께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참 교회의 핵심이 되신다.
(2) 제자들이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한결 나을 때에 주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무엇보다도 남을 존경하도록 가르치는 데는 형제적 사랑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러한 사랑이 지닌 매력적 능력을 사도행전 2장 46,47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터둘리안은 초대 교회의 영광을 말할 때에, 서로를 위하여 염려해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나타낸 그들의 사랑에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던 자들이 말하기를 "보라, 저들의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이라고 했다(Apol. cap. 39).
(3) 만일 주님의 추종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직책에 대한 비난 뿐만 아니라 신실성까지 의심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 주님이시여, 이들이 당신의 신도입니까? 이 감정적이고 악하고 원한을 품고 나쁜 성격을 가진 자들이?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요청받고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우리의 의견과 상충되고 모든 습관이 다를 때에 그들에 대하여 겸허해지고 그들을 용납해 줄 수 있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다운 모습을 지녔다고 확인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자기 확신(요한복음 13:36-38)
이 귀절들에서 우리는,
Ⅰ. 베드로의 호기심과 그것에 대한 확인을 알 수 있다(35절).
1. 베드로의 질문은 대담하고 솔직했다. 주님께서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33절)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 형제적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에는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저 넘겨버리더니, 이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자들이 모르도록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질문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왜 우리 자녀들에게 계시되고 속해있는 것보다 하나님께만 비밀로 속해 있는 것에 대하여 더 관심을 갖는다든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 보다 하늘에서 되어질 것을 더 알고 싶어하고, 주어진 양심보다 호기심에 끌려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우리의 실수들이다. 평이하고 교훈적인 대화는 곧 시들해지고 할 말이 없어지는 반면에, 의심스러운 문제에 관한 논쟁은 끝없는 말의 싸움으로 계속 되어지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대화 중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2. 주님의 대답은 교훈적이었다. 주님은 그가 가시려고 하는 세계에 대한 어떤 특별한 말씀이나 또는 전에 그의 고난을 말씀하시던 때처럼 장차 받으실 영광과 기쁨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다만 36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지금 너는 나를 따를 수 없으나 후에는 나를 따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1)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베드로가 십자가에까지 그리스도를 뒤따를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은 베드로가 아직은 주님의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실 만큼 믿음과 결심이 강건치 못하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주님께서 고난 당하실 때 베드로가 겁먹은 것에서 증명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은 잡히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이 자기를 따라올 수가 없을 터이니 그들의 길로 가게 해 주라고 하셨다. 그들의 현재의 능력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과 고난을 아직 정해 주시지 않으신다. 각자의 능력에 맞는 나날이 그들에게 전개될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순교할 각오를 했다 하여도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그로서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으며, 다만 후일에 그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선생처럼 결국은 십자가의 형을 받응 것이다. 베드로가 지금 고난을 피했으므로 그는 영원히 고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한 번 십자가를 놓치면 그것으로 끝장 나는 것이 아니고 여지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더 큰 시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을지도 모라는 것이다.
(2) 또 우리는 그것을 베드로가 주님의 면류관에까지 따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제 주님은 그의 영광을 입으실 것이며 베드로는 그와 동행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안 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면서 "네가 지금은 나를 따라 올 수 없다. 너는 아직 천국에 들어갈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또한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먼저 있었던 자들이 너의 자리를 준비하러 들어가야만 하고, 너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운 후에 약속된 때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신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자마자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홍해와 가나안 땅 사이에는 황무지가 있기 때문이다.
Ⅱ. 베드로의 확신과 그것에 대한 확인을 알 수 있다.
1.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뒤에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아서 "주여, 왜 지금 내가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단 말입니까? 주님은 저의 성실성과 결단을 의심하십니까? 제가 분명히 약속합니다만 그런 기회가 오기만 한다면 주님을 위해 제 생명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라고 요청한다. 이같은 베드로의 태도는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7:35) 그리스도께서 어떤 먼 나라로의 여행을 계획하시는 줄로 알고, 그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갈 것이라는 자부심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은 주님께서 그 자신의 고난을 종종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는 주님께서 죽으러 가실 것을 말씀하시는 줄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지금 로마처럼 주와 함께 가서 죽을 결심을 하고, 주님 없이 사는 것보다는 그와 함께 죽는 것이 더 낫다고 결심한다. 다음을 보라.
(1) 베드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주님을 위해 제 생명을 바치겠나이다. 제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나이까?" 베드로는 그가 생각한 그대로를 말했으며, 그의 결단은 경솔하기는 했으나 불성실하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다음을 주목하자.
주님은 우리들의 생보다도 우리들 자신을 더 사랑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을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행 20:24).
(2) 베드로는 자신감에 넘쳐서 "주여, 왜 제가 지금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까? 주님께 대한 저의 충성심을 의심하십니까?(삼상 29:8)"라고 반문하였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진실된 사랑이 그 신실성에 대하여 힐책을 듣는다는 것은 유감된 일이라는 것이다(21:17). 주님께서는 제자들 중의 하나가 악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누구인지 판명이 되고, 그리고 밖으로 나가버리자 곧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기의 신실함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실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당신을 따를 수 없다는 밀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우린 스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고, 반면 우리가 이런 저런 것들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얘기를 들을 때면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실상 우리는 그리스도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무능한 인간들이다.
2.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깜짝 놀랄 만한 예언을 하셨다(38절).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시며, 또한 또 우리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시고, 결코 자만하지 못하게 하신다.
(1) 주님은 베드로의 지나친 자만을 나무하셨다(주님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야, 네 약속은 너무 허황되어 믿을 수가 없구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투쟁적이어야 하는지 너는 아느냐" 그리고 죽는다는 것이 네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니라"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셨을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결심을 철회시키도록 하시지 않고,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드셨는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함께 갖도록 하셨다. "주여, 주님의 은혜가 저를 그렇게 하도록 해 주신다면, 저는 주님을 위하여 생명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속해서, "네가 나를 위하여 죽을 수 있겠느냐? 너는 물 위를 걸어서 내게로 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느냐" 내가 고난에 대하여 얘기할 때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던 네가 아니냐? 배와 그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는 일은 쉬운 일이나 네 생명을 바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열심히 투쟁해 오셨는데, 그의 제자들은 결코 선생만 하지 못했다. 우리는 주제넘는 자신감을 가지고 떠드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상처난 갈대로 어떻게 기둥을 삼으며 병든 아이가 어떻게 승리할 수가 있겠는가? 자신을 가리켜 매우 크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2) 주님은 지금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침착한 마음으로 베드로의 소심함에 관하여 예언하셨다. 베드로가 그의 자랑하기 좋아하는 입을 열어 "주여,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라고 엄숙히 선고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늘 밤"이란 말씀을 하시지 않은 이유는 이때가 유월절 이틀 전쯤 되었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에, 아니 닭이 처음 우는 시각과 나중 우는 그 짧은 시각 사이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여기서 닭의 울음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고요한 밤중에 주님의 수난의 사건이 발생하고 또 베드로는 그의 호언장담한 것이 실패하게 될 것을 선포하는 울음소리였다. 주님의 통찰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2] 닭의 울음 소리는 베드로의 회개의 기회로써, 만일 주님께서 이 예고의 말씀을 하시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결코 뉘우치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이 이미 마음 곳에서 계획되고 있음을 아셨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경우는 전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예견하시고 계셨다. 죄인의 사악함 뿐만 아니라 성자의 연약함도 아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첫째, 그가 주님을 부인하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으로써, 주님을 따로 나서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제까지 따라 다닌 것까지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둘째, 그는 급한 김에 한 번만 이런 실수를 범할 것이 아니고, 세 번씩이나 거듭거듭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대로 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예언이 평범한 사건처럼 자세히 기록된다면 숙명론적 생각으로 인하여 일부러 그렇게 꾸며지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결과를 이루게 될 것이므로, 예언은 불분명하고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에 대한 예언은 간단하고 분명한 예언이지만 베드로의 죄에 있어서 주님은 공모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같은 예고의 말씀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얼마나 통분해 했을까! 혹시 그는 하자엘(Hazael)처럼 "주의 종을 개취급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의 마음이 심히 동요된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가장 안전할 서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상은 가장 위험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연약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또한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