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화창한 봄날,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은 향긋한 봄내음을 풍기며 이리오라고 유혹의 손짓을 합니다.
마음은 이미 떠 있으나 막상 움직이기에는 왜 이리도 시간이 없는지...
뭔가 짧게 당일치기로 여행하면서도 산뜻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곳이 없을까.
이제 그런 고민 접어두시길.
지리산을 여행하는 길은 숱하게 많습니다.
노고단, 뱀사골, 피아골 등등... 갈라지는 길도 많고 등반코스 또한 당일로부터 시작하여 길게는 2박3일을 잡아야 하는 코스도 있을만큼 지리산의 품은 무척 넓습니다.
하지만 당일로 충분한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하자면 중산리로 해서 가는 길을 소개하고 싶네요.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위치한 이곳이 바로 지리산의 고지인 천왕봉과 제일 가까운 곳이랍니다.
증산리 입구에는 지리산 빨치산으로 유명했던 지역이었던만큼 빨치산 토벌전시관이 자리잡고 있구요,
시인 천상병의 유명한 시, 귀천(歸天)이 큰 비석에 씌여 있습니다. 중산리는 천상병시인의 고향으로 일년에 한번씩 문학축제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또 유명한 사진작가 임소혁씨의 지리산의 사진갤러리가 있구요.
중산리의 소개는 이 정도로 마무리 짓구요.
작년 일찍 찾아온 무더위 탓에 6월에 갔는데 정말 더워 미칠 지경이더군요.
봄에 등반한다면 습도나 날씨, 분위기가 딱 유쾌하지 않을까 추천하고 싶네요.
일단 위 사진에 대한 자료는 작년의 것임을 밝힙니다.
아버지랑 아는 형님 한분과 함께 지리산을 등반했습니다.
길은 대충 마음에 들더군요. 글쎄, 생각하시는 분들 나름이겠지만요.
10년전에 제가 학생이었을 때 지리산을 등산했을 때의 길에 비하면 지금의 이 길은 아우토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어렴풋한 학창시절이 떠오르더군요.
의지력과 자제력 양성, 인생에 닥칠 시련들을 헤쳐 나가기 위해 필요한 인내심과 모험심과 도전정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지리산은 필히 통과해야 할 관문이다 라는 선생님들의 반 강제의 정책으로 전교생이 울면서 걸어야 했던 길.
아, 아련하네요.
다행인 것은 그 추억의 길은 이제 온데간데 없다는 사실입니다.
옛날의 좁고 험한 길은 간간히 띌 뿐 가파르다 싶은 길은 테라스목으로 둘러두고 철다리가 세워지고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더군요.
발에 타박상이라도 입을세라 가파른 나무길 위엔 충격완화 고무판까지 깔려있고 반반한 돌길로 탈바꿈되있더군요.
이 정도의 산행이면 콧노래를 부르며 가도 딱이겠다 싶더군요.
지리산은 무언가 신비롭습니다.
산 자체가 주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지만, 지리산이 주는 느낌은 또 다른 산이 주는 것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한참 올라가니 헬기가 뜨더군요. 뭘 나르려는건지, 탐방객들 파악을 하는 건지 귀찮게 자주 왔다갔다 하더군요.
중턱쯤 올라서면 약간의 한계를 느껴갑니다. 그 한계란 운동부족의 결과물로 판명이 뚜렷해지죠.
숨은 차오르고, 등에는 도시락이 들어있는 가방밖에 없는데 천근만근입니다.
한발짝 떼고 먼산 바라보고, 한발짝 떼고 지나온 길 보고- 이건 다음 발자국을 떼기 위한 위장된 몸부림 같은 겁니다.
창피했습니다. 아버지, 형님보다 훨씬 더 젊은 놈이 약한 모습 보이면서...
중턱에 법계사라는 절이 있고 그 앞에 맛있는 약수가 있습니다.
지리산의 샘물이죠. 이 물이야말로 진정 산수(山水)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물맛을 음미하는 것은 탐방객의 사치입니다. 오르는데 전념해야 하니까요.
올라가다보니 노고단 코스로 내려오신 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통닭과 소주를 권하시더군요. 배가 고팠지만 정상에 오르는 일이 급한 우리 일행은 서둘러 앞을 향했습니다.
역시 산에 오면 모든 사람이 화목하게 되고 친구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반갑고요.
참, 요즘은 등산객이라는 말이 없고 '탐방객'이라고 하더군요. 지리산에 붙힌 도표나 안내문 글귀에도 등산객이라고 하지 않고 탐방객이라고 써놨더라고요.
국어가 많이 변화된 것 같습니다. '탐방객'이 더 맘에 들지 않습니까? 뭔가 더 프로패셔널하지 않나요.
천왕봉 600미터를 앞두고 바위 앞에서 포즈 잡으신 아버지.
아, 이제 앞으로 남은 600미터가 '고비'라는 사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
엄홍길 대장이 그랬던가요.
산을 정복한다는 얘기는 어처구니 없는 표현이라고.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거리면서도 천근만근되는 발걸음을 내딛으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건 산이 나를 맞이하고 있다는,
꼬옥 인정하고 싶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상에 올랐을 때 이상한 것이 산의 돌변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산의 노기같은, 산의 변덕같은, 산의 호통같은 비명, 산의 분노같은 하소연, 산의 터프함같은 울음이 바람이 되어 정상을 휘젓더군요.
우리가 올라온 산등성이와 계곡을 타고 바람은 미친듯이 올라오더군요. 몸을 가누기 힘든 바람들이 몸을 때리면서.
아부지 말씀, 사진이나 빨리 찍고 가자. 춥다.
쳇, 남길 게 사진인데도 지리산 정상다녀온 인증샷. 제 것 공개 못합니다.
왜냐? 힘겨운 산행탓 돌변한 바람탓에 몰골이 말이 아니라서.
촬영 후 잼사게 내려왔슴돠.
정상에서 먹으려고 꺼냈던 김밥도 다시 배낭에 넣고 백미터쯤 내려와서야 겨우 바람의 맹공격을 피할 수 있는 한적한 바위장소를 물색. 산에서 먹는 엄마가 싸주신 김치김밥, 어느 밥맛에 비할까. ㅎㅎ
이게 바로 행복이라는 거야.
지리산 전경 한컷.
이런 산의 품이 있어서 우리가 새로운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 얼마만큼 우리가 느끼며 살까?
내려오다가 말도 안되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 나무가 보이시나요?
벼락을 맞은 것처럼 한가운데가 구멍이 푹 파여버린 이 나무, 마치 여러분은 이 나무가 죽은 나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이 나무 생생합니다.
여느 나무 못지않게 싱싱한 이파리를 흔들며 환히 웃더군요.
몸이 아주 박살이 나버렸는데, 어떻게 그 열악함 속에서 물을 빨고 양분을 걷어올려 이파리를 만들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을까.
나무가 그러더군요. 희망을 잃지 말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나를 보시라고. 이렇게 싱싱하고 굳세게 서 있다고.
지리산 한 발자욱 한 발자욱 한 장면 한 장면이 감동이더군요.
내려오는 길이 더 힘겨웠습니다.
다리가 풀린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보폭감을 상실하고 다리와 다리사이의 간극이 불규칙해지면서 휘청휘청대는 건 기본이고.
정말 힘들었던 건 무릎이 아프더군요. 발 한번 떼어 바닥에 딛어지는 충격감을 무릎이 먼저 느끼면서 제 전두엽 속에 통증이라는 메세지를 계속 전송합니다. 미칠 지경이죠.
그래도 그 무릎을 달래면서, 앞으로 열심히 운동하겠다고 다짐하며 산을 내려왔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주의사항.
곰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후 산행하시길.ㅋㅋㅋ
그렇지 않으면 만나서 연락처 주고 받으시던지요.
전 개인적으로 맞닥뜨려봤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회가 없었습니다.
올해 시간 내서 또 지리산에 오르려는 계획 중입니다.
자, 그럼 모두 지리산의 매력에 푹 빠지셨나요?
올봄 여행지 중 하나로 추천할만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