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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대한 지략을 가진 소수림왕의 리더십
화려한 조명을 받는 스타 뒤에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 스타 탄생을 도운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다. 화려한 조명을 받은 고구려의 영웅 광개토태왕에게도 그의 등장을 준비한 위대한 조력자 소수림왕이 있었다. 소수림왕(재위:371~384)은 광개토태왕의 큰 아버지로 고구려 17대 임금이었다.
소수림왕은 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설립을 통해 고구려를 고대국가로 확립한 임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는 그가 신체가 장대하고 웅대한 지략이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의 웅대한 지략과 리더십은 무엇이었을까?
불운한 아버지를 둔 아들
소수림왕의 이름은 구부로, 고국원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구려 16대 임금인 고국원왕은 대단히 용감한 임금이었지만, 운이 매우 나빴다. 331년 왕위에 오른 고국원왕의 최대 근심은 서쪽에서 힘을 키운 모용선비족의 나라 전연이었다. 342년 전연의 왕 모용황은 5만 5천 군사는 둘로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전연에서 고구려로 통하는 길은 크게 남로와 북로 2갈래 길이 있었다. 북로는 평탄하고 넓었고, 남로로 좁고 험했다. 전연의 왕 모용황은 4만의 강한 군사를 남로로 향하게 하고, 남은 1만 5천의 군대로 북로로 향하게 했다. 그런데 고국원왕은 북로로 적의 대군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동생에게 정예군사 5만을 주고 막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남은 병사들로 남로에서 적을 방어하게 했다.
비록 북로에서는 고구려가 압도적인 병력 우세로 적을 격퇴했지만, 남로에서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못하고 크게 패했다. 모용황은 곧장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까지 쳐들어왔고, 고국원왕은 수도를 버리고 피신을 했다.
모용황은 북로에서 돌아올 고구려군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고국원왕을 추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대항하지 못하도록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과 생모인 주태후를 잡아갔다. 고국원왕은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진기한 보물을 조공품으로 전연에 바쳐야만 했다. 하지만 전연은 미천왕의 시신은 곧 돌려보냈으나, 주태후는 355년이 되어서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때까지 고구려는 전연에게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고구려의 약점을 움켜쥔 전연은 북중국으로 진출해 한때 인구 1천만 달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참 잘 나가던 전연이 370년 저족이 세운 전진에게 격파당해 멸망했다. 그러자 모용황의 형제인 모용평이 고구려로 도망쳐왔다. 그러자 고국원왕은 그를 붙잡아 전진에 보냈다. 고국원왕은 가슴에 맺힌 한을 조금은 푼 셈이다.
고국원왕은 비록 작전 실수로 전연에게 엄청난 수모를 겪은 임금이지만, 그렇다고 겁쟁이는 아니었다. 369년 그는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직접 백제의 치양 땅을 공격했다. 서쪽 국경이 안정되자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과 근구수태자라는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치양 싸움에서 고구려군은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5천명이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당했다. 그러자 2년 후 고국원왕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으나 패하 강변에 복병을 배치하고 기다리던 백제군에게 또 패배했다. 그해 10월 백제군 3만이 평양성을 공격해왔다. 고국원왕은 6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가 싸웠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복수의 의무를 가진 소수림왕
불운한 아버지를 둔 소수림왕은 부친과 고구려의 원수인 전연과 백제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 숙제를 갖고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연은 그가 왕위에 오르기 1년 전인 370년 북중국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른 저족이 세운 전진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에, 당장 원수를 갚을 수가 없었다. 우연치 않게도 소수림왕이 돌아간 384년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고 고구려와 또 다시 대립한다. 후연을 상대로 한 복수는 소수림왕의 뒤를 이은 동생 고국양왕과 그의 아들 광개토태왕에게 그 임무가 넘겨졌다.
하지만 백제는 부친을 죽인 원수로 복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소수림왕은 즉위한 다음해인 37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도입했고, 태학을 설립했다. 또 373년에는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했다. 그리고 375년에는 성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해 순도와 아도 스님을 머물게 하며 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백제 공격은 즉위한지 약 4년만인 375년 7월이 되어서야 수곡성 공격을 개시했다. 다음해 11월에도 백제 북쪽 변경을 공격했다. 377년 10월에는 백제 근수수왕이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오자 이를 막아냈고, 11월에는 반격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백제와 전쟁은 384년 그가 죽을 때까지 더 이상 없었다.
권근과 안정복의 소수림왕 비판
소수림왕의 백제 복수전에 대해 『동국사략』의 저자인 권근(1325~1409)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는 것이니, 진실로 원수를 갚지 못하면 거적자리를 깔고 창을 베개로 하여 잠자기를 어느 때이든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고국원왕을 공격하여 죽였으나 그 아들 구부는 왕위를 계승한 지 4, 5년 사이에 오직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사찰을 창건하는 것만으로 일삼고 일찍이 분발해 군사를 일으켜서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다가 이해 가을에 와서야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니, 대체로 원수를 갚을 데에 가까웠겠으나 애석하게도 반드시 보복하지 못하고 문득 그만두었으므로, 구부와 한때의 신하들은 모두 의지가 없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삼국사기>에 곧 구부가 웅대한 계략이 있다고 일컬은 것은 어찌된 것인가?”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1712~1791)은 소수림왕을 이렇게 평가했다.
“고국원왕이 백제의 침공을 받아서 죽었는데, 그의 두 아들(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못나서 서로 이어 왕이 되었지마는 복수할 의리를 알 지 못하였는데, 그의 손자 광개토태왕이 부왕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복수(를 하였으니, 이번의 일을 의롭다 할 만하다.”
권근과 안정복의 비판은 조선의 유학자의 가치관에서는 당연한 비판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개혁을 단행한 소수림왕
소수림왕 구부는 355년 태자로 책봉된 지 16년 후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태자가 되었겠지만, 태자 생활을 오래 한 탓에 고구려의 실상을 잘 아는 노련한 인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그가 당장의 복수를 못한 것은 의지가 없기 때문은 아니다. 소수림왕은 보다 원대한 계획을 갖고 고구려를 바꾼 인물이었다.
고구려가 백제에게 패배했던 것은 당시 백제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강국이었기 때문이다. 백제인 사기는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쳤다가,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하자 다시 백제로 돌아간 자다. 그는 고구려군은 붉은 깃발 군대만 쳐부수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는 고급정보를 백제군에 알렸다. 고구려는 왕실 직속의 군대와 귀족들이 거느린 부대 사이에 전투 의지가 달랐다. 반면 백제군은 황색 깃발 아래 단일한 지휘체제를 갖춘 일사불란한 군대였다. 백제에 비해 고구려는 확실한 약점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군의 약점은 왕이 바뀐다고 금방 달라질 수는 없다.
소수림왕은 당장의 복수보다 고구려의 문제를 해결할 원대한 계획을 실천했다. 그의 업적 가운데 율령 반포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실행하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5부족 연합체에서 출발한 고구려는 당시까지도 그 틀을 완전히 탈피한 상태가 아니었다. 따라서 부족마다 다른 법질서와 제도가 남아있었고, 군사 훈련이나 동원도 단일화 되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고구려의 제도를 정비하고, 국력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일원화된 법질서의 확립이 필요했다. 율령은 근대적 법체계가 성립하기 이전 동양사회의 법체계로 형법과 행정규정을 비롯해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을 통일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세금, 군사 동원, 형법, 민법, 도로의 폭이나 주택 크기 등 사회 운영 시스템이 율령이 반포되면서 하나로 정비된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각 부족마다 가진 법질서를 하나로 통일하고, 귀족들의 사법(私法) 집행을 제한하고 반발을 줄이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패전이란 위기를 기회로 삼아 귀족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의견을 통합하는 리더십을 가져 율령 반포에 성공할 수 있었다. 패전을 통해 고구려의 문제가 부각되지 않았다면, 율령 반포는 더 늦었을 것이다. 소수림왕은 당장의 복수보다 고구려 문제를 개선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임금이었다. 광개토태왕이 탄생하기 1년 전에 이루어진 율령 반포로 인해 고구려는 새로운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토대를 갖게 되었다. 제도와 법질서의 혁신은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었다.
미래를 본 소수림왕의 리더십
소수림왕의 또 하나의 업적인 불교 수용 역시 미래를 본 결정이었다. 372년 소수림왕이 불교를 공인한 것은 당장 고구려인들을 불교도로 개종시킨 것이 아니다. 불교는 왕즉불 사상을 통해 국왕중심의 정치체제 수립에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쉽게 전파되지는 못했다. 『해동고승전』에는 처음 고구려에 온 순도스님이 불교를 전파하기가 어려워 불법이 널리 퍼지지 못했다고 했다.
소수림왕의 불교 도입의 실질적인 효과는 고구려인의 사상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불교를 믿고 있던 외국인들을 실질적으로 포용하는 효과가 더 컸다. 특히 백제와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옛 낙랑, 대방지역 사람들을 고구려가 포획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불교 공인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소수림왕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확대하여 고구려의 힘을 키우기 위한 먼 미래를 본 정책이었다. 신라의 경우에서 보듯 새로운 종교의 도입은 많은 반발을 불러온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불교 수용에 특별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소수림왕의 미래를 내다보는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이 유학을 비롯한 학문을 가르치는 태학을 설립한 것 역시 당장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본 정책이었다. 신라 교육기관인 국학이나, 전연 등 의 사례로 볼 때 태학에 입학하는 이들은 하급 관리의 자제들에서부터 평민까지였고, 교육기간도 3년에서 최대 9년 정도였다. 귀족 명문가의 자제들은 굳이 태학을 나오지 않아도 되었다. 태학은 행정 실무에 능한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
태학에서 학문을 배워 관직에 등용된 자들이 제대로 행정실무를 처리할 수 있는 시점은 적어도 380년대 이후가 된다. 이들이 노련한 행정 관리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는 시점은 391년 광개토태왕이 등장한 이후라고 하겠다. 태학에서 성장한 인재들은 명문귀족의 자제가 아닌 만큼, 관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왕과 보다 친근한 친위관료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태학으로 소수림왕은 그의 조카인 광개토태왕에게 행정실무에 능한 인재들을 선물로 남겨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실무자들이 정복사업에 필요한 물자 수송, 행정 관리 등 뒤처리를 해주었기에, 광개토태왕이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뢰가 개혁의 바탕이다.
권근과 안정복은 소수림왕의 원대한 리더십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즉위한 시점은 고국원왕의 거듭된 패전으로 왕실의 권위가 추락한 상황이었다. 이때 반발을 가져올 수 있는 개혁정책을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소수림왕이 먼 미래를 내다본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바탕에는 그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 부여와의 전쟁에서 패전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기회로 삼아 고구려인의 단결을 이뤄내 더 큰 발전을 거둔 바 있다. 그는 자신을 낮춰 백성들의 신뢰를 얻은 임금이었다. 대무신왕의 다른 이름은 대해주류왕이다. 그런데 소수림왕의 다른 이름은 소해주류왕이다. 그것은 소수림왕이 대무신왕처럼 국가적 위기를 기회로 신뢰를 바탕으로 개혁을 단행해 더 큰 발전을 이뤄낸 임금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이 그를 그렇게 불러준 것이다.
소수림왕은 분노를 참고, 고구려의 미래를 위해 더 큰 준비를 한 진정 위대한 리더였다. 그가 있었기에 광개토태왕이 등장할 수 있었고, 강대국 고구려가 있었던 것이다.
천추묘 -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지역에 남아있는 초대형 무덤인 천추묘는 소수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 : 장천1호분의 예불도 - 소수림왕이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불교는 점점 고구려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5세기에 만들어진 장천1호 벽화무덤에는 불상에 묘주부부가 절을 올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소수림왕은 우리나라 종교사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첫댓글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오랜만에와서 잘보고 가네요.
김진명 고구려와는 사뭇다른
고국원왕이네요
김진명 작가의 고국원왕은 아무래도 왜곡과 과장이 많이 이루어졌다는 혐의를 벗기가 어렵습니다. 소설을 쓰더라도 우선은 역사적 인물의 개별 업적이나 그 성격을 충분히 파악하고 그 연후에야 소설을 씀이 마땅하겠지요. 자신의 설정이 우선하고 그 연후에 역사적 인물을 꿰어맞추는 짓은 아니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