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최초로 조선 선교를 위하여 온 선교사는 조셉 데이비스입니다. 데이비스는 누나 선교사와 함께 1889년 8월 22일 호주 멜번 항을 떠나 40일간의 향해 끝에 1889년 10월 2일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부모님으로부터 철저한 신앙 훈련을 받고 자랐습니다. 12명의 형제 중에 4명의 선교사로 1명은 목사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데이비스는 또한 인텔리였다고 합니다. 멜번 대학 졸업 때 자연과학과 특별상을 받았고 또한 고전어 학과에는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사로 오기 전에는 자신이 설립한 학교 교장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데이비스 선교사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님은 1889년 10월에 부산항으로 들어온 후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언어를 5개월 동안 배웁니다. 그는 언어 배움에 달란트가 있어서 5개월쯤 공부하니까 의사 소통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고 간단한 설교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데이비스는 선교사들이 이미 많이 있는 서울에 남아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의 선교 원리에 따라 복음이 전혀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기초 언어를 습득한 후 드디어 1890년 3월 14일 자신의 어학 선생과 그리고 도우미와 함께 자신의 선교지인 부산을 향하여 갑니다. 그는 선교지로 내려가면서도 쉴 새 없어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미 중국에서 번역된 마가복음을 작은 금액을 받고 팔기도 합니다. 그는 일기에 670리 (261 km)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의 걸음은 무리였습니다. 3월 이었지만 날씨가 제법 쌀쌀하였습니다. 이가 버글거리는 잠자리는 매우 불편하였습니다. 음식은 서양사람인 그에게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복음의 황무지인 부산에 불타는 뜨거운 마음으로 서울을 떠났지만 20일간 여행하면서 그의 몸은 극도로 허약해졌습니다. 결국 데이비스 선교사님은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이 되면서 생명이 위태롭게 됩니다. 그는 부산에 먼저 온 게일 선교사님의 도움을 받아 일본인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하룻밤을 지낸 후 미쳐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오후 1시에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가 조선에 온 지6개월 만에 그의 삶은 마감을 하였습니다. 이때 그이 나이 33살이었습니다. 그의 묘비는 이런 성경 말씀을 적었습니다, “To live is Christ, to die is gain”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그는 한국 복음을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의 소식을 전해 들은 호주 교계는 잠시 큰 충격에 빠졌지만 그들은 위축되지 않고 데이비스 선교사의 복음을 향한 헌신에 도전을 받아 그 뒤를 이어 많은 호주 선교사님들이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 파송 하였습니다. 지난 120년간 130여명 선교사님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합니다.
첫댓글죠셉 데이비드 선교사님! 생명도 아끼지 않고 한국의 복음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자입니다 선교사님의 순교의 피가 많은 열매로 한국교회가 복음으로 만발하였던 부흥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 마이너스 성장 21년째를 보며 다시 한번 복음으로 돌아가서 회복되며 주께서 한국 교회에게 주신 선교비젼과 지상 대명령을 향하여 땅끝까지 증인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성령님! 한국 교회에게 기름부어 주셔서 십자가의 능력과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첫댓글 죠셉 데이비드 선교사님! 생명도 아끼지 않고 한국의 복음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자입니다
선교사님의 순교의 피가 많은 열매로 한국교회가 복음으로 만발하였던 부흥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 마이너스 성장 21년째를 보며 다시 한번 복음으로 돌아가서 회복되며 주께서 한국 교회에게 주신 선교비젼과 지상 대명령을 향하여 땅끝까지 증인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성령님! 한국 교회에게 기름부어 주셔서 십자가의 능력과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