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남은 첫 한국 비행, 권기옥은 첫 여성 비행
최초의 비행사들
안창남, 한국인 중 처음 서울 날고 한국 최초 비행사는 한장호 등 6인
권기옥, 1925년 여성으로 첫 비행… 중국 공군에서 항일 투쟁하며 활약
여자 공사 생도 등장 20년 만에 이달 초 첫 여성 전투비행대장 탄생
우리 역사에서 첫 비행사와 첫 여성 비행사가 등장한 건 언제일까요? 약 100여년 전 일제강점기에도 강인한 의지와 열정으로 하늘을 나는 꿈을 이룬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1917년 5월의 어느 날, 서울 창공에 비행기 한 대가 날아오르더니 요리조리 속도와 방향을 자유롭게 조절하며 비행 묘기를 펼쳤어요. 아트 스미스라는 미국의 곡예비행사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곡예비행을 선보인 것이죠. 많은 한국인이 이 광경을 보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비행을 구경하는 무리 속에는 16세 소녀 권기옥도 껴있었어요. 소녀는 묘기를 부리는 비행기를 보며 "나도 꼭 비행사가 되어서 푸른 하늘을 멋지게 날아보겠어!"라고 다부진 다짐을 하였답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평양 숭의여학교를 다니던 권기옥은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기숙사에서 몰래 태극기를 만들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펼쳤어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비행사라는 자신의 꿈을 잠시 접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죠. 이후에도 권기옥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어쩔 수 없이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어요.
1923년 권기옥은 독립전쟁을 위해 군사장교 양성을 추진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고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답니다. 운명처럼 비행사라는 꿈을 이루는 동시에 독립운동을 할 길이 열린 것이죠. 권기옥은 "비행사가 되어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리라"고 다짐하며 열심히 이론과 실습을 익혔고, 1925년 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군 공군에서 비행사가 되었어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탄생한 것이죠.
이후 권기옥은 10여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며 항일 투쟁을 벌였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감옥살이를 치르는 시련을 겪기도 했어요. 결혼 후에도 독립운동가였던 남편 이상정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여러 활동을 펼쳤답니다.
◇ 한국 하늘을 처음 난 한국인 안창남
1922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 주변 벌판으로 5만여명 인파가 몰렸어요. 한국인 비행사 안창남이 조종하는 비행기를 구경하기 위해서였지요. 안창남은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8월에 오쿠리 비행학교에 입학해 3개월 만에 졸업을 한 뒤 1921년 5월 일본 민간 비행사 시험에서 공동 1등으로 합격했어요. 1922년 11월에는 일본 비행협회가 주최한 도쿄~오사카 왕복 우편비행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지요.
안창남이 탄 비행기 '금강호'가 여의도를 이륙해 묘기를 선보이자 그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댔어요. 한국인 비행사로서 처음 한국 상공을 날았던 안창남의 비행이 나라 잃은 우리 국민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워 준 것이죠. 그 뒤로 안창남은 국민적 영웅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비행사'로 널리 알려졌답니다.
그런데 1992년 공군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1920년 2월 미국에서 비행훈련을 마친 한장호, 이용선, 이초, 오림하, 장병훈, 이용근 등 6인"이라고 밝혔어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항일투쟁을 벌여온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이 미주교포들의 후원을 받아 1920년 2월 캘리포니아에 한인 전투비행사 양성 학교를 세웠어요. 한장호 등 6인의 비행사는 이 비행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답니다.
1920년 4월 27일 자 독립신문에는 '대한이 처음으로 가지는 비행가 6인'이라는 제목과 이들의 사진이 담긴 기사가 있어요. 기사에는 "이들이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의 비행학교를 1920년 2월에 마친 후 윌로스의 한인 비행학교에서 연구교수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이 자랑스러운 대한의 청년들이 장차 독립군의 공군을 이끌 예정"이라고 적혀있답니다.
☞ 첫 민간 여성 비행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는 박경원(1901~1933)입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간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해 왔던 박경원은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어요. 그 후 일본에 건너가 가마다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사 자격증을 받았지요. 1928년에 열린 도쿄 비행경기대회에 참가해 3등을 하기도 했답니다.
하늘을 날고 싶었지만 비행기가 없었던 박경원은 1933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할아버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 체신대신의 후원을 받아 도쿄에서 서울을 경유해 중국 창춘으로 가는 장거리 비행을 하게 되었어요. 그해 8월 7일 박경원은 2000㎞ 비행을 목표로 ‘푸른 제비’라는 뜻의 청연(靑燕)이라는 비행기를 몰고 이륙했지만 50분 만에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