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를 보고 돌아오며>
얼마 내려오지 않아 바로 청평사였다. “청평사(淸平寺)”는 명승 제70호로, 973년 "백암선원"으로 창건되어 1,000년 이상을 이어 온 선원이다. 고려시대에는 이자현, 원진국사 승형, 문화시중 이암, 나옹왕사 등이 머물렀고, 조선시대에는 김시습, 보우, 환적당 등이 있었다.
청평사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시문과 설화가 어우러진 곳이다. 구승폭포를 비롯한 많은 폭포들이 계곡을 수놓고, 자연 그대로 보존된 선동과 서천계곡 및 이들을 에워싼 부용봉의 바위들이 청평사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자현이 조성한 영지, 한국서예사에 빛나는 문수원기비, 고려 초기의 3층석탑 등이 있다.
청평사 기와지붕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사찰을 둘러싼 돌담장이 나타났다. 이 돌담장을 만든 지 50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된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담쟁이 넝쿨이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청평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를 지나니, 넓은 뜰에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가 적힌 비석이 깨끗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비석 옆에는 “진락공 중수 문수원비 요약”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청평사 담장 모습>
<진락공중수청평산원기 비석>
이 비석은 고려 인종 8년(1130)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풍화와 전란으로 파손되어 없어진 것을 일부 비편과 탁본, 문헌, 사진 등 단편적인 자료를 토대로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었다. 그 요약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고려 중기 귀족가문이자 세도가의 일원이었던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는 절 이름을 "백암선원"에서 "문수원(청평사 옛이름)"으로 바꾼 뒤, 37년 동안 수행하다 일생을 마쳤다. 비석의 앞면은 청평사 창건과 중창, 진락공 행적 등에 관한 내용으로 고려 중기 문장가 김부철(金富撤)이 지었다. 뒷면은 그를 추모하는 제문으로 대각국사 의천의 제자 혜소가 지었다. 글씨를 쓴 대감주사 탄연(坦然, 1070~1159)은 왕휘지 서체에 능통했다. 이 비로 탄연의 글씨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진락공 중수 문수원비 요약문>
청평사 구내매점 옆 사무실은 문화관광해설사의 방이었다. 그곳에는 여자 한 분이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청평사를 언제 복원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1977년부터 극락보전을 시작으로 대웅전 등을 지었다’고 했다. 내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가 1975년이었는데, 그 때는 회전문과 컨테이너 한 채가 유일했다. 그녀의 얘기를 들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으며, 그동안 청평사가 많은 불사를 했다고 생각되었다.
<청평사 구내매점 왼쪽 문화관광해설사 사무실>
<청평사 범종각 전경>
첫 건물은 전부터 있었던 회전문이다. “회전문(廻轉門)”은 보물 제164호이며 청평사의 대문으로, 1555년 보우대사가 건립했다. 가운데 칸은 출입문이고, 양쪽 한 칸씩은 사천왕상을 조각해 세우거나 그림으로 그려서 걸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회전문은 공주에게 붙였던 상사뱀이 윤회를 벗어나 해탈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회전문 본래의 뜻은 불교의 경전을 두었던 윤장대(輪藏臺)를 돌린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회전문 안에는 “경운루(慶雲樓)”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었다.
<청평사 회전문 전경>
<청평사 경운루(慶雲樓)>
그 안으로 들어가자 좌측에 “관음전(觀音殿)”이, 우쪽에 “나한전(羅漢殿)”이 있고, 중앙에는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대웅전에는 정면에 불상이 3개 있었다. 뒤로 돌아가자, 극락보전과 삼신각이 있었다. 극락보전 옆에는 830년 정도 된 주목이 보호수로 늠름하게 서서 사찰을 지키고 있었다. 이것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고 밖으로 나오니, 일행은 이미 아래로 내려가고 없었다. 열심히 걸어 일행을 따라잡으려 했다.
<청평사 관음전 전경>
<청평사 나한전 전경>
<청평사 대웅전 모습>
<대웅전 내 불상들>
<청평사 극락보전 전경>
<청평사 삼신각>
<극락보전 옆의 "주목" 보호수 전경>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이자현이 만든 영지가 있었으며, 그 앞에는 명문바위가 있었다. “영지 명문(影池銘文)바위”는 윗면에 한문으로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스님이 깨우침을 얻고나서 지은 것으로로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心生種種生(심생종종생)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일어나고
心滅種種滅(심멸종종멸)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네
如是俱滅己(여시구멸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處處安樂國(처처안란국) 곳곳이 모두가 극락세계로구나
<영지 명문바위>
영지 길 건너에는 청평사고려선원안내도가, 그 옆에는 이자현 부도가 있었다. 부도 주위에는 담으로 둘러쌓였고, 안에는 왼쪽에 각산당(覺山堂) 석진대화상비가, 오른쪽엔 진락공 이자현부도가 있었다.
“진락공 이자현 부도”는 만들어진 양식으로 볼 때, 1700년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여진단다.
“진락공(眞樂公)”은 이자현이 죽고 난 후, 임금이 내려준 시호이다. 이 부도는 청평사를 세 번째로 중창한 이자현의 부도로 불려지지만, 이자현의 생존시기와 600여 년의 시간 차가 나기 때문에 다른 스님의 부도라는 설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자현의 유골은 질그릇에 만든 함에 넣어서 청평사 북쪽의 청평식암 근처 바위틈에 안치했다고 한다.
<청평사 고려선원 안내도>
<각산당 석진 대화상 비>
<진락공 이자현 부도>
부지런히 걸어 내려오는데, 사람들이 몰려있는 구송폭포가 보였다. “구송폭포(九松瀑布)”는 주변에 소나무 아홉 그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폭포는 환경변화에 따라 9가지 폭포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구성폭포(九聲瀑布)”로 불리기도 한다. 이 폭포는 삼악산 등선폭포, 문배마을 구곡폭포와 함께 춘천의 3대폭포로 꼽힌단다. 구송폭포 아래에는 공주굴이 있었다.
<구송폭포 전경>
<구송폭포 옆의 공주굴>
구송폭포를 뒤로 하고 좀 걸어오자, 거북바위가 있었다. 이것마저 카메라에 담고 부지런히 걸어오는데, 청평사 계곡의 맑은 물이 마음을 즐겁게 했다. 여기는 계곡에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와서 그곳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거북바위>
<청평사 계곡 풍경>
소양강 뱃터를 채 가지 않아서 일행을 따라 잡았다. 뱃터로 내려가려는데, 소양강댐 주변에 늘어선 음식점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먼저 내려온 일행 중 4명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그리로 가서 막걸리, 소주 및 도토리묵과 파전을 먹었다. 일행이 탈 배 시간이 13시라, 등반대장은 시간을 맞추기 위해 막거리를 마셨다고 했다.
배 앞좌석에 타고 오면서 선장에게 ‘소양강댐 물이 적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평소보다 물이 조금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이곳은 배로 많이 건너다녔으나, 오래 전 일이라 새로운 느낌이었다. 배를 탄 지 10분이 조금 넘자, 목적지인 선착장에 도착다.
<배를 타고 오면서 본 풍경 1>
<배를 타고 오면서 본 풍경 2>
소양강다목적댐은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약 6년 6개월 간에 걸쳐 만든 사력댐이다. 이것은 한강유역종합개발계획에 의한 홍수조절, 용수공급, 수력발전을 위한 다목적댐으로, 저수용량은 29억톤이고, 발전용량은 20만Kw이다.
소양강댐 위에는 소양호 표지석과 다양한 조각들이 일행을 반겼다. 여기서부터 대형버스가 있는 주차장까지는 한참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일행이 올 시간을 어떻게 알았는지, 기사가 미니버스를 가지고 시내버스정류장 부근에 와 있었다. 일행은 빨리 미니버스를 타고 소양강댐을 뒤로했다.
<소양강 다목적 댐 표지>
<소양강댐 위의 소양강 처녀 상>
<소양강댐 위의 소양호 표지석과 조각>
<소양강댐 조감도>
<소양강댐을 상징하는 조형물>
모두 피곤한지 버스에서 눈을 감고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벗어나 평창 땅에 들어서자 언제 졸았느냐는 듯 모두 다른 모습이었다. 오늘은 조금 이르지만 사초거리에 있는 “슬기네 양념통닭”에 가서 삼계탕을 먹기로 했다.
음식점에 도착하자, 남자들은 대부분 쉬고 있었지만 여자들은 음식상준비에 바빴다. 배를 타기 전에 술을 먹었기 때문인지, 안주가 좋음에도 술을 조금만 마시고 삼계탕을 먹었다. 나는 모처럼 생맥주 2잔을 마시고 삼계탕도 모두 비웠다. 저녁을 먹고 집에 왔음에도 아직 5시밖에 되지 않았다.
<"슬기네 양념통닭" 간판>
첫댓글 청평사 구경도 잘 했습니다. 산행시의 휴식 시간과 간식 시간의 재미가 등산 행사의 중요한 과정일것 같습니다.
오랫만에 청평사를 갔다왔는데 모든 것이 새로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