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10타
<개회> 사회자
<법신불전 헌배> 일어서서 대례
[기도]
<입정>
<영주>
천지영기 아심정(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我與天地 同心正)
<기원문>
<심고>
<독경>
일원상서원문(一圓相誓願文)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인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 범부 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 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
<법어봉독>:100쪽
대종경(大宗經)
제1 서품(序品) 13장
서품(序品) 13장
대종사 구인 단원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물질 문명은 그 세력이 날로 융성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은 날로 쇠약하여, 개인·가정·사회·국가가 모두 안정을 얻지 못하고 창생의 도탄이 장차 한이 없게 될지니, 세상을 구할 뜻을 가진 우리로서 어찌 이를 범연히 생각하고 있으리요. 옛 성현들도 창생을 위하여 지성으로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天意)를 감동시킨 일이 없지 않나니, 그대들도 이 때를 당하여 전일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모든 사람의 정신이 물질에 끌리지 아니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에 감동이 있게 하여 볼지어다. 그대들의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라 마음이 한 번 전일하여 조금도 사가 없게 되면 곧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여 모든 일이 다 그 마음을 따라 성공이 될 것이니, 그대들은 각자의 마음에 능히 천의를 감동시킬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각자의 몸에 또한 창생을 제도할 책임이 있음을 항상 명심하라.] 하시고, 일자와 방위를 지정 하시어 일제히 기도를 계속하게 하시니라.
< 일상수행의 요법 대조> (p54)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6)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성가>
15장: 일월이 대명하고(宗法師讚歌)
<설법> 창산 김진성 교무
성현의 지견 / 이재철선진
이재철[李載喆, 1891~1943]
주요약력
본명은 재풍(載馮). 법호는 일산(一山). 법훈은 대봉도. 구인선진의 한 사람. 불법연구회 상조부장, 서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이재철은 1891년 2월 11일 전남 영광군 군서면 학정리에서 부친 관현(寬現)과 모친 김화옥(金華玉)의 4남매 중 독자로 출생했다. 일찍이 한문사숙에서 6~7년간을 수학하고 그 후 노모를 모시고 가사(家事)에 종사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문명에 관심이 많았고 가정생활을 하는데에도 이상을 가지고 진보적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이상에 맞지 않았으며 마음 가운데에는 항상 이 세상을 바로잡을 정법(正法)의 지도자와 의인(義人)이 없음을 개탄했다. 그러던 중 1916년(원기1) 4월 오창건의 인도로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즉석에서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었다.
소태산이 대각 후 비몽사몽간에 생각한 경전이 《금강경》이었는데, 소태산의 명을 받들고 불갑사(佛甲寺)에 가서 구해드린 것이 이재철이었다. 그 후로 이재철은 소태산의 대도(大道)를 봉대하는 마음이 날로 간절해지는 가운데 1917년(원기2) 7월 26일 교단의 최초 남자 수위단이 조직될 때 건방(乾方)단원으로 임명되었다. 이재철은 저축조합 경제관계 사무와 외무를 거의 도맡아 처리했다. 1918년(원기3) 28세시에는 간석지 방언공사와 구간도실 건축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 대업을 성취했다.
이재철은 주로 외무와 금전출납사무를 맡았고 동지들과 흙짐을 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발바닥이 부르트고 어깨와 등이 부어올라 사뭇 못 견딜 지경이었는데, ‘차라리 귀한 집 독자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흙짐 지는 연습이라도 해두었을 것을’이라는 후회도 생겼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라 불을 쬐다가 솜옷에 불이 붙어도 모르고 불을 쬔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일편단심 무아봉공이었다. 이재철은 1919년(원기4) 3월 26일부터 소태산의 지도를 받아 8인 동지와 함께 창생구원을 위해 혈심으로 기도했으며, 마침내 생명희생의 대서원을 올림으로써 천지의 감응을 얻어 백지혈인의 법인성사(法認聖事)를 이루었다.
혈인기도시 효성이 남달리 장했던 이재철은 창생을 위해 자신 한 몸 죽는 것은 여한이 없으나 홀로 계신 모친이 걱정이 되었다. 소태산이 이재철의 심중을 헤아리고는 ‘모친의 시봉은 내가 책임을 질 테니 안심하라’고 말했고,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명 희생의 결심을 굳게 했다. 기도 마지막 날에는 모친에게 한약을 지어 인편에 전하기도 했다. 이재철은 키가 크고 신상(身相)이 구족하며 위풍(威風)이 좋아 ‘영광(靈光)의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었다. 또한 천성이 온순ㆍ정직ㆍ현량(賢良)하여 누구를 대하나 항상 화기로웠고 인자했다.
그러나 중심은 철두철미하여 대의가 분명하고 강직했다. 좌담과 외교에 능했을 뿐 아니라 양보의 도가 강했던 관계로 누구든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영광에서는 이러한 이재철에 대해 ‘장님이 만져봐도 양반’이라며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성격을 지닌 이재철은 평소에는 말이 퍽 적은 편이었으나, 옳은 일에는 몸을 돌보지 않았다. 또한 아래 사람들의 세정을 일일이 살펴주었고 항상 용기와 희망을 넣어준 자비로운 선진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아래 사람이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여러 사람 앞에서 꾸중하는 일 없이 항상 조용히 타이르고 자상히 가르쳐 주었다.
이재철은 마음이 상통한 팔촌 동생 이동안을 소태산께 귀의시켰다. 이것이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함평(咸平) 이씨 일가문이 원불교에 귀의하는 계기가 되어 수십 명이 전무출신하여 교단의 창립과 발전에 공헌하는 계기가 되었다. 9인 선진의 한 사람으로서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 등을 마친 이재철은 그 후 영산에서 계속 교단 창립에 일하다가 1924년(원기9)부터 총부 건설에 합력했다. 1927년(원기12)에는 육영부 창립 단원으로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동년 총부 서무부장으로 1년간 봉직하기도 했다.
1928년(원기13)에는 영산 상조부장으로 전임되어 2년을 근무했고, 1928년(원기15)에는 영산지부장을 겸하여 2년간 일했다. 1933년(원기18)에는 총부 상조부 지점장 겸 공익 인재부장으로 일했고, 1934년(원기19)부터 5년간은 총부 서정원장으로 봉직했다. 1941년(원기26)에는 총부 이사겸 산업부장으로, 1942년(원기27)부터 열반 전까지 총부 산업부장으로 근무했다. 이재철은 언제나 소태산 앞에서는 손을 내려놓은 일이 없고 겸허한 태도로 공수(拱手)를 하며 물러날 때에도 그냥 되돌아서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재철은 좌담이 능하고 외교를 잘하여 방언공사 당시 ‘금융조합’에서 자금을 대출 받는 등 교단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상에 올라 설교는 거의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재풍(일산)은 본시 풍골이 늠름하고 세상 상식이 풍부하여 매양 대종사를 친견할 때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르신 점을 대종사의 체상(體相)에서 살피려 했다.…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시었다. ‘성현을 마음의 법으로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몸의 표적으로 찾으려 하는 것은 곧 하열한 근기인 것이다’ 재풍이 크게 깨달아 다시는 이적을 살피지 아니하고 평생토록 정법을 받들었다”(《대종경선외록》 초도이적장6).
이재철은 1943년(원기28) 11월 15일 영광군 백수읍 천마리 자택에서 숙환으로 53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특히 이재철은 스승인 소태산과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열반한 묘한 인연이기도 하다. 슬하의 손녀인 정무가 전무출신했다. 이재철은 출가 후 23년간을 영광 또는 총부에서 교단사업계의 중책을 맡아 초기 교단의 경제적 기초를 다지는 데 크게 공헌했다. 원기20년대에는 총부 서정(庶政) 전반에 걸쳐 그 역량을 드러내어 공헌했다. 이재철은 공사에 전력할 때 자신의 명예와 이욕은 일체 불고하고 오로지 교단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이재철이 열반하자 교회전체장으로 엄수했고 유해는 전남 영광군 백수읍 천마리에 안장했다가 1985년(원기70) 3월 ‘영모묘원’ 법훈묘역으로 이장했다. 1964년(원기49) 10월 제9회 수위단회에서는 이재철의 높은 공덕을 추모하면서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15
한 사람이 이재철(李載喆)에게 묻기를 [들은 즉 귀하의 선생님이 성인이시라 하니 사리간에 무엇이든지 다 알으시는가.] 재철이 말하기를 [다 알으시나니라.] 그 사람이 말하기를 [비행기나 기차 제조하는 법도 알으시는가.] 재철이 말하기를 [성인은 사리의 대체를 알으시는 것이요, 그러한 기술 부분은 거기에 전문하는 사람이 아나니라.]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사리간에 다 알으신다는 것이 모순된 말이 아닌가.] 재철이 말하기를 [대체라 하는 것은 그 근본을 이름이니 무엇이든지 그 근본을 알면 가지와 잎은 다 그 가운데 있나니라. 이에 한 예를 들어 말하자면 가령 한 지방의 장관이나 한 나라의 원수가 저 말단에 가서는 한 서기나 기사의 아는 것을 다 알지 못할 수가 있으나 그 행정의 대체를 잘 알아서 각 부분을 순서 있게 지도한다면 그가 그 일을 알았다고 하겠는가 몰랐다고 하겠는가. 성현의 지견도 또한 이와 같아서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의 대의를 통달하시므로 사리를 다 알으신다 하는 것이요, 말단의 기술 부분까지 알으신다는 것이 아니니, 그 대의에 통달하시므로 천만 지식이 모두 그 강령과 범위 안에 들어 있나니라.] 하고, 돌아와 대종사께 그대로 고하였더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산(一山)의 말이 대의에 옳다.] 하시니라.
<성가>
118장: 거룩하셔라 우리 대종사(大宗師永慕歌)
<공고>
<생활결의 구호>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성가>
102장 : 저희들이 이 불사로(回向의 노래)
<폐회>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삼대력을 얻어 성불제중(成佛濟衆)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