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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의 원찰 수락산 흥국사
한양 서울의 지세가 장자에 불리하여 왕통이 적장자에게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고
이어진다 하여도 그 자리를 오래 보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정도 당초부터 있어왔던 이야기 이다
북악산을 북주로 하였을때 내청룡에 해당하는 낙산과 외청룡에 해당하는 안암산이 모두 내 백호인
안산보다 낮고 그 줄기도 빈약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랬던가 태조 다음 대 부터 적장자가 계승해 가지 못하였고 문종이 적장자 이였으나
불과 재위 2년에 왕비도 결여된 처지로 요절하여 어린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았기며
비명 횡사하는 화근을 만들어 놓는다
이후 연산군이 장자였으나 그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인종도 재위 일년을 넘기지 못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후반 은 곁가지가 둥치가 되는 참언대로 선조에 이르러서는 후궁 소생 왕손이 압승대통하여
왕권을 계승해 가게 된다 명종(1534~1567)이 독자이던 순희세자(1551!1563)를 앞 세웠기 때문 이다
그래서 명종과 명종비 인순왕후 청송 심씨는 명종의 바로 위 형에 해당하는 중종 제8왕자 덕흥군 초(1530~1559)의 제3자 하성군 균(1552~1608)을 후사로 내정하여 교육시키다가 명종이 그 22년 (1567)6월 28일 승하하자 7월3일에 인순 왕후가 발표한 명종 유명에 따라 왕위에 오르게 한다 이분이 조선14대 임금 선조 이다
선조는 8세에 부친을 잃고 16세에에 모친을 여위 였으니 그 지통지한이 뼈에 사무치었을 터인데
미처 모친의 장례도 치르기전에 상복을 벗고 대통을 잇기위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 덕으로 모친은 대군부인례로 양주 수락산 부친 묘소 곁에 예장 되지만 초종지례를 다 하지 못한
선조의 한은 그대로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 생가 부모의 묘소를 수호하고 영가를 천도하는 원찰을 그 부근 길지를 택해 짓게 되니
그 것이 지금의 흥국사 이다
경산의화소 수락산 흥국사, 남방의 화소 공주 태화산 마곡사 금강산 유점사가 근대 조선의 3대화소로
이름을 날렸는데요 흥국사와 마곡사는 마음만먹으면 언제라도 달려갈수 있는 위치에 있으나 금강산
유점사는 분단의 부녘에 위치하여왕래가 쉽자않은터에 자료 취합 과정에서 지금은 전각이 살아지고 그
터와 문화재 몇점만 남아 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도서관을 찾아 다니며 북녘의 불교문화재를 살펴 보는게 내가 할수있는 전부 였다
금강산 유점사는 일단 머리에서 내려 놓기로 하고 오늘은 남양주 수락산자락에 있는 흥국사로 발 걸음을
돌 립니다
흥국사와 덕흥대원군 묘를 보려면 덕능을 넘어야 하는데 덕능은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에 있다
수락산 도솔봉에서 내려다 본 상계동에서 남양주 별내면으로 이어지는 덕릉 고개의 실사도 이다
덕능 고개를 넘어 덕능마을 200여m 전방에 있는 왼쪽 숲길로 난길을 따라가면 덕흥대원군 묘 가 있다
덕흥대원군의 묘
덕흥대원군의 추가 글
대원군이란 조선시대의 왕이 형제나 후사가 없이 죽고 종친중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새로 즉위한
왕의 생부에 대한 호칭으로 선조의 아버지 덛흥군을 중국의 송나라 영종 고사에 따라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를 통털어 4명이 대원군에 봉해 졌다고 하는군요
덕흥대원군 외에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
이 있었으며 홍선대원군만 생전에 대원군으로 추존 되었다고 합니다
덕흥대원군 묘 앞에 있는 신도비 이다
덕흥대원군 생애에 대한 사항들을 새긴 비로 선조6년(1573)에 세워 졌으며 비석에 새긴 글과
글씨는 영의정 인재 홍섬(1504~1585)이 지었고 조선 11대왕 중종의 사위인 당시의 글과 글씨에 능하여 왕문의 기록과
궁전의 편액으로 부터 사대부의 비갈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과 글씨를 남긴 여성위 송인이 썼다고 합니다
네! 뒤로 돌아가서 덕능 정상주변의 모습을 살펴 보겠읍니다
그리고 다시 덕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겠읍니다 상계동쪽에서 덕능을 향해 촬영 한 모습으로
앞에 보이는 교각은 수락산과 불암산의 야생동불이 다닐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보호 교각 인데요
지금은 등산인들이 훨 많이 다니는 곳이죠
그건 그렇고요 아까전에 본 덕흥대원군 묘와 이 고개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조선14대 임금인 선조는 덕흥대원군이 왕(중종)의 아들이고 왕(선조)의 아버지 인데 왕으로 불릴수 없는 일을
민망 스럽게 여겨 그의 묘소만이라도 능으로 불려 졌으면 하는 바램이 컸으나 선조가 후사없이 승하한 선대왕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는 절차를 거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덕흥대원군은 왕실법으로 볼때는 선조의 아버지가
아니어서 능 으로 격상시켜 부르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 민간에서 만이라도 능 으로 불려 지기위해 묘첵을
썼다고 합니다
동대문 밖에서 땔 나무 도매상을 하는 자를 은밀히 불러 땔나무를 팔러오는 사람중에 덕능에서 왔다고 하면
무조건 후한 값을 치르고 술과 밥을 먹여 보내되 덕흥군 묘에서 왔다고 하면 아에 흥정을 못 하도록 한 것이
었어요 이 소문은 빠르게 퍼져 서울 인근의 나무꾼 들은 하나갔이 덕능에서 왔다하여 나무를 팔게 되었고
흥선대원군 묘는 민간에서 덕능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고 오늘날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가 되어 있다
흥국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200여m 들어가면 왼쪽 골목 안에 덕흥대원군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덕흥사가 있다
일주문이 서있던 자리 인데요 중수하기 위해 해체하여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주문에서 절을 향하면 가까운 거리에 월명당 대선사 공덕비 한월선사 공적비 창신녀 신씨 혜월 공덕비 등이 있고 부도 (일명승탑)1기가 나란히서있읍니다
수락산 흥국사 대방 입니다
남양주 흥국사 대방은 극락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는 정토염불 사상이 성행하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건물임을 흥국사지 사료에서 기록 되어 있다
대웅보전을 불단삼아 큰 방을 염불방으로 사용하고 누, 승, 방, 부엌 등 부속 공간을 갖춭 복합공간을 갖춘
복합적인 법당이라고 할수 있다 전통사찰의 건축 원리에서 벗어난 복합적이고 기능적인 근대적 건축 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독특한 건축 양식 및 공간구성 및 시대의 정신을 갖춘 곳 으로 평가 받아 문화적 가치가 높은 근대 종교의 건축물로
인정 받았으며 2011년 4월29일에 등록문화재 제471호가 되었고 서울 근교의 여러 대방중에 첫 사례 였다
대방은 옛 사찰에는 없는 승려가 생활하는 요사채에 신도가 사용하는 누와 부엌을 붙여 부처를 생각하는 성스러운
공간과 인간의 속세의 공간을 혼합한 절 속에 속세 공간이라 할수있다
대방의 측면 인데요 대방은 가운데 커다란 대방이 놓이고 양 옆으로 2층의 루마루가 돌출되어 있는데
루가 있던 자리에 대방을 설치하여 루방 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합니다
주불전 전면에 위치한 루의 기능이 발전 했고 조선말 염불이 성행 하면서 생긴 공간으로 만세루 방이라
불리던 대방이 해당 된다
대방의 벽화1 입니다
대방의 벽화2 입니다
흥국사 큰 방채에 걸려있는 현판 인데요
흥선대원군이 해서체로 직접 쓴 글씨 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현판 말고도 영산전 현판과 주련 그리고 만월보전 주련 등에 그의 글씨를 남겼는데요
이는 흥국사가 자신 집안의 시조인 덕흥대원군 원찰이기도 하였지만 집안의 14대 맡 손자인 이하선(1842~1862)이 연종이 뒤를 이을 왕손으로 지목 되었다가 안동 김씨에의해 사사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로인해 자신의 아들 인 고종이 등극하게 되자 이를 미안하게 여겼고 이하선은 생가로 치면 처 외사촌에 해당 되었으므로
자신 집 안의 원찰인 흥국사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 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대방의 부엌문에 그려진 신장상 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 보살 이외에 범천과 제석천을 비롯하여 사천왕 팔부중 수많은 호법 신들이 있어 부처가 설법 할때
여러 성중들과 함께 불법을 친양하며 불법의 외호를 맹세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들을 일컬어 신중이라 하며 그 중에서 무력으로 적을 항복 시키며 불법을 옹호하는 여러 신들을 외호신중 또는 신중
이라 부른다 화엄경에 등장하는 화엄신중 법화경의 영산회상 수호신장 인왕호 국반 야경 대 반야경 등에 등장하는
신들이 있는데 우리나라 에서는 여러신장 가운데 범천 제석천 인왕 사천왕 등이 널리 신앙 되고 조성 되었 읍니다
정토 염불사상이 크게 성행하던 근대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대방의 부엌문에 신장상을 배치한 의미는 무엇 일까
궁굼 합니다
대방 안쪽 마덩에서 바라 본 1, 영산전 2, 대웅보전 3, 시왕전 입니다 정열을 하듯 나란히 서 있읍니다
흥국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냐면 덕송리 수락산 자락에 자리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
입니다 봉선사 말사지에 따르면 599년에 원광법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창건 하였으며 절 이름을
수락사로 불렀다고 한다 또한1941년 영호정호가 지은 수락산 흥국사 기적비에 의하면 흥국사는 수락사의 후신으로
원광법사에 의해 창건 된 것이며 일명 금곡사라 칭 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후이 연혁은 알수 없으나 서거정 등이 이 절을 유람하며 지은 시가 남아있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법등을
이어 왔음을 알수있다 그런데 정조와 순조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 되는 양주 읍지 에서는 지금은 폐사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수락사가 흥국사의 전신 이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고 하네요
이로 볼때 흥국사의 시작은 1568년 선조가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이곳에 건립하고 덕흥사라
사액한 이후로 추정 된다고 할수 있다 이후 선조의 손자인 인조가 반정에 성공하자 덕흥대원군이 화가위국의
중흥소라는 의미를 강조 하려는듯 1626년(인조4)에 절 이름을 흥국사로 바꾸게 하였다
영산전 정면 모습 입니다 영사전 현판도 흥선 대원군의 글씨 입니다
영산전은 대웅보전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전각으로 대웅보전보다 작지만 팔작 지붕에 정면3칸 측면 2칸규모로
비교적 짜임새 있는 건물이다 건축양식은 대웅보전과 같이 다포계 건물이며 각 기둥위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는것이 특징적 이다 내부의 천장은 정자형이 반복된 이른비 우물 천장이며 주악 비천도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뒷면 벽에문자형으로 설치한 탁자 위에는 흙으로 빚어서 만든 석가삼존불좌상과 16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남양주 시청에 보관중이고 석가모니 후불탱과 나힌탱 이 좌우로 나뉘어 진열되어 있다
이가운데 석가삼존불좌상과 16나한상은 조선시대에 불화들은 모두 1892년(고종29)에 봉안 된 것이다
영산전 서측면 벽화 입니다
영산전 뒷벽(북쪽)의 벽화 입니다
영산전 동 측면의 벽화 입니다
영산전 벽화는 건물 내 외부에 41점이 있다고 하고요 건물내부의 포벽 및 빗 반자에 남아 있으며
외부는 북측면 3점을 제외한 나머지 는 1976년 에 새롭게 단장한 것이라고 한다
외부 포벽에는 사면에 같은 도상의 여래도가 그려져 있고 동서측의 벽체에는 괸음보살 나한을 포함한 다양한 도상이
포함되어 있다 북측면에는 좌측부터 기룡나한도, 반야용선도, 기호나한도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부측에 있는 반야 용선도 벽화인데요 수많은 국내 사찰벽화중에 그 예가 희귀한 것 이어서 주목되는 벽화라고 합니다
남양주 흥국사영산전 소조석가여래삼존좌상과 및 16나한상 일괄은 보물 제1798호이며 조선전기 불상의
양식 계보를 계승 하면서도 아직 16세기 양식으로 이행되기 바로 전단계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상들의 초창시기를 알려주는 발원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1650년에 세 번째 중수한 기록과 중수시
참가한 참여한 화원의 이름이 발견되어, 적어도 이보다는 훨씬 앞선 시기에 조성 되었음을 알수 있다
석가여래삼존상과16 나한상은 이마가 넓고 턱이 좁은 역 삼각형의 얼굴 형상에 얼굴이 작고
늘씬한 신체 비례를 보인다 이러한 조형감은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82호, 1458년)이나 경주낙릉
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보물 제1615, 1466~1474) 그리고 경주기림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호, 1501년) 등
조선전기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에 조성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상통하면서 인물의 표현, 신체의비례,
양감, 선, 등에서 변화의 요소도 감지된다 따라서 이 상들은 조선전기 16세기불교 조각사 연구 및 나한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판단 되는데 지금은 님양주 시청에 보관 되어 있디
삼존불좌상과 후불탱 입니다
대웅보전 정면 모습 입니다
부처님의 불상을 모시고 있는 흥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지은시기는 알수가 없다고 하네요
단지 졍조17년 (1973)에 고쳐 지었고 순조때 화재로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읍니다
규모는 앞면3칸 지붕은 옆면에서 볼때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 지붕이다
지붕 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위와 기둥 사이에도 이루어져 조선후기 왕가에서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절 이었음을 알수있다
대웅보전의 계단 입니다 4개의 석고로 장식한 태극무늬가 있는 대웅보전 계단 인데
흥국사의 모든 건물은 왕가의 목수와 석수들이 파견되어 만들었다고 해서 그런지 간결하면서도 짜임새는 물론
궁궐의 한면을 보는듯한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보전 동쪽벽면 벽화인데요
상단의 벽화2점은 잘 모르 겠고요 신발장이 놓인 벽면에는 어떤 그림이 있을까 궁금하네요
하단 우측벽화 좌측에 망우존인이란 글씨 있는 것으로 보아 심우도의 한장면임을 알수 있읍니다
소를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소는 간곳 없고 사람은 한가롭다
해가 석자나 떴는데도 오희려 꿈이니
소용없는 고삐와 채찍은 초당간에 던져 두노라
망우존인은 집에 돌아와보니 애써 찾던 소는 오간데 없고 자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소는 마지막 종착역인 심원에 도착하는 방법 이므로 이제 고향집과 고향산천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방법을 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뗏목을 타고 피안에 도달하면 뗏목을 버려한다는
가르침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금은 광석에서 나오고 달은 구름에서 나온다
그러나 금을 얻은다음 폐광은 버려야 하고 달이 뜬 다음 구름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
깨달음의 한줄기 빛 위음왕불 밖 세계까지 밝게 비춘다
대웅보전 내부의 석가삼존불좌상 입니다
내부에 근래에 넣은 복장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성당시에 넣었던 복장물은 없어진 것으로 보이나
석조삼존불좌상의 제작 연대와 조각승을 추정 할수 있고 조선후기 목조 광배 중 최고의 작품성을 가저
가치가 인정 된다 합니다
약간의 추가 글을 올립니다 영조연간에 제작 되었을 것으로 추축 된다고하며 영조자신의 시조 이기도 한 덕흥대원군의 원찰인 것은 물론 덕흥대원군의 8대종선 이명좌가 경종1년(1721)에 일어난 신임사화 때 영조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 일가의 극락 왕생을 기원하기 위해서 불상조성을 후원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읍니다
대웅보전 내부의 감로탱 이다
대웅보전 안 왼쪽 벽면에걸려있는 불화 입니다 고종5년(1868)에 당시 불화를 그리는 스님으로 이름이 높았던
영한창엽 스님 등 흥국사 화승들이 그렸으며 감로탱화는 이승생활의 업보 윤회와 길곡 그리고 이를
벋어나기 위해서는 천도재 즉 죽은이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르는 불교 의식이 필요 하다는 것을 알리고 강조하기 위해서 그림으로 표현 것이라 하죠.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줄타는 광대와 춤추면서 구경하는 사람들, 의사나 환자,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사람들 모습 등 이외에도 여러가지 생활풍속 장면이 자세히 표현 되어 있읍니다
재미있게 감상 할수있는 작품 인데요 영정및 제수 용품이 그림의 일부를 가려 아쉬움이 있네요
칠성탱 입니다 경산호소로 알려진 수라산 흥국사사에 와서보니 대웅보전 영산전 시왕전에 빈틈멊이 그림들이 깍 들어 친것을보니
흥국사 중은 불을 피며서 불막대로 시왕초를 그리고 화계중은 불을 피면서 초갈량을 한다는 속담이 떠 오르네요
여기에 나오는 화계사는 서울 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삼각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본산조계종의
말사이다 화계사는 능침사찰은 아니지만 흥선대원군의 후원에 의해 경영된 원찰로서 수락산 흥국사와 인연이
깊은데 가까이에 이웃하고 있어 왕래가 빈번 하였고 광해군 10년 화계사가 화재로 인하여 전소 되었을때
흥국사 대중들의 권고에 따라 이듬해인 광해군 11년 흥선대원군 가문이 시주하여 중창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
그 이후에도 덕흥대원군의 원찰로서 수락산 흥국사와 삼각산 화계사는 왕실의 비호아래 발전해 나가게 되는데
흥국사는 불화 등을 그려서 사찰을 꾸미는 화승양성을 도 맡게 되고 화계사는 불교 의식을 전담하는
범패승 양성을 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덕절(흥국사) 중은 불을 피면서 불막대로 시왕초를 그리고 화계중은 불을 피면서 초 갈량을 한다는
속담이 생겨 나게 되었다는 것 이다
시왕초를 그리는 것이나 초갈량을 한다는 것은 불화를 그리거나 초 갈량을 한다는 것이 불화를 그리거나 불교의식을
진행 할때 필요한 기초를 쌓는 수련이라고 합니다
만월보전 입니다
일반 사찰에서는 유래가 드문 육각형으로 지어진 만월보전은 순조18년(1818) 큰 불이 났을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 되었을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흥덕사에서 흥국사로 절 이름을 바꾼 인조4년(1626)이후 정조 14년 (1790)까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늦어도 정조14년 또눈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 된다고 합니다
만월보전 현판인데요 결구가 단정하고 필획이 원만한 해서로 단청을 잘 못하여 신체를 벌어 뜨렸다고 하는군요
언제 어떤사람의 글씨 인지는 알수가 없다고 합니다
만월보전 내부의 약사여래 상이고요 내부에는 헌종13년(1847년)에 만들어진 불탁위에 선조(1567~1608)에 그려진 대형탱화가 걸려 있읍니다 그리고 이들중 약사여래는 태조 이성계와 승려로 출가한 그의 딸이 관련된 설화가 전해내려 옵니다
태조 이성계의 딸은 공주의 호사를 마다하교 출가한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를 했고 흣날 이 딸이 건강을 잃은
태조를 휘해 약사여래를 조성하여 정능에 있는 봉국사에 모시고 지성의 기도를 바친덕에 태조 이성계가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봉국사 약사여래 앞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되었고 사세역시 빠르게 성장 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약사여래가 홀연히 자취를 감쳐 버린 거예요
절에서는 일때 소동이 벌어졌고 수소문 끝에 어느 골짝이에 있는것을 알아내고 제자리로 옮기려 헸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궁리끝에 사람들은 부처에게 스스로 절을 택할수 있도록 나라안의 모든 절
이름을 열거 하는데 흥국사가 나오자 부처가 반쩍 들리더라는 거얘요 ㅋ~ㅋ~ㅋ
결론은 얘기하지 않아도 다 아시겠죠 더우기 더 재미난일은 설화에 등장하는 태조 이성계의 딸은 경순공주라고 주측이
된다고 하고요 그 이유는 경순공주의 생모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잠들어 있는 정능을 지키는 원찰이라는 것과 태조 1년
제1차 왕자의 난때 남편과 두 동생 (방번과 방석)이 방원에게 죽자 다음해에 경순공주가 태조의 권유로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만월보전의 주련 입니다
동방세계명만월, 동방세계 이름은 보름달이고
부호유라 광고결, 부처님 이름과 호는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네
두상선과 청이산, 부처님 머리카락은 푸른산 같고
마건호 상백여설, 눈섭사이 털모습은 하얀 눈 같네
만월 보전 주련에는 흥선대원군이 쓴 글씨가 있으며 마지막 네번째 주련에
대원군장 석파라는 인장이 있읍니다
대웅보전 만월보전 시왕전 지붕위에 잡상이 있는데요
건물에 피해를 입히는 잡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궁궐 건물이 아니면 장식 할수 없는
것 인데요 여러가지 짐승 모양이나 삼장법사 손오공 팔계 등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 들의 모양 으로
목조 건물에 쉽게 일어나는 화재를 예방하는 주술적 의미로 설치한 것 이라고 합니다
잡상2 입니다
단하각 입니다
단하각의 단하가 어떤 뜻인지 확실치 않다고 하는데요
사리를 얻기위해 목불을 지핀 중국 육조시대 단하 천연선사를 모신 곳으로 선종과 연관이 있는
추정 될뿐 이라고 합니다
단하각에는 치공여래 독성 산신 등이 봉안 되어 있다고 하는데 흥국사 단하각에는 산신이 봉인 되어 있읍니다
독성각 입니다
사방 한칸짜리 작으마한 건물로 댜웅보전과 영산전 뒷편에 있읍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남김없이 알고 있다는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다
나반존자는 님 인도의 천태산에서 태어나 홀로 선정을 닦고 있는 나반존자를 모신전각을
독성각 이라고 합니다
나반 존자의 모습 입니다
인적이 끊긴 흥국사 가람의 일부인데요
모든이가 떠나간 자리에 카메라 적업을 중단하고 홀로서서 사찰의 풍광을 바라 봅니다
인적이 끊긴 사찰은 더 이상 내려놓을것이 없는듯하여 평화 롭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분위기를 좋와 합니다 홀로 일때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 이죠
시왕전 측면과 당간지주 입니다
기도나 법회등의 의식이 있을떼 절의 문앞에 꼿는 깃발이 당인데보통 불화가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비단이나 천에 불보살 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리고 가장자리에 여러개의 가닥을 늘아뜨리기도 한 답니다
당간 아래에는 보통 연꽃 무늬를 새긴 버침돌이 있고 그 좌우에 지주가 있다 당간은 사사로운 도를 파괴해정법을 정현 함의 뜻을 가지며 때로는 불교 종파를 나타내는 기치로서 사찰의 문전에세워 지기도 했다
흥국사 시왕전은 조선국 22대왕 장조의 후원으로 지어 졌는데 1786년 장조나이35세때 외아들인 문효세자를 홍역으로 잃게되자 후사를 보기위해서 후궁 수빈박씨를 맞아 들이고 장조 13년 (1789)에는 아버지 사도세자묘를 서울 화양동 배봉산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윈찰인 용주사를 건립 했는데 이때 용주사 건립을 담당한 사일과 보경 두 스님이 그해 10월 공사를 마친 뒤 왕자 탄생을 빌기로 약속하고 수락산 흥국사와 삼각산 진관사로 나누어서 백일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듬해인 정조14년 (1790) 아버지 묘소를 이장한 발음 이었던지 왕자(순종)가 탄생하였고 이에 정조는 왕자 탄생에대한 보은으로 수락산 흥국사와 삼각산 진관사에 왕실 운영 경비인 내탕금을 내려 시왕전을 잣게 했고 정조16년(1792)에 흥국사
시왕전은 완공 되었다 시왕전 안에는 정조16년(1792)에 그려진 직부사 탱화를 배겅으로 같은해 만들어진 명부세계주인공인
지장보살(가운데)과 좌우 보처인 도명존자와 무독 귀왕이 법당 중앙에 위치해 있고 그 엎으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각 5명의 임금 복장을 한 저승대왕들 조각상이 배치 되어 있다
시앙전 지장보살의 측면 과 시왕상의 일부의 모습 입니다
반산암 있던 건물을 헐어내고 새로 건물을 지었는데요
정확한 정보는 아니나 나하전이 될거라는 귀뜸이 있었읍니다
이왕지사 그것이 사실이라면 남야주시청에 보관중인 소조석가 삼존상과 16나한상이
흥국사로 돌아 왔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일주문을 해채한 부재들을 경내에 임시 창고를 만들어 보관 중 입니다
상임당 탑 입니다
범종루 입니다
오래 전 부터 사찰에는 생명체를 고통에서 건져 극락으로 이끄어 주기 위하여 사물을 마련 했는데 그 것들은
나는 짐승을 제도하기 위한 운판 수중의 동물 들을 제도하기 위한 목어 네발로 걷는 동물을 제도하기 위한 대고(큰북)
그리고 지옥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범종으로 수락산 흥국사 범종각에는 이들 법구들이 한대 모여 있다
흥국사에서 수락산 정상을 향해가면 노변 약사불이 조성 되어 있는데요
통일 약사 대불 입니다
많은 자료를 취합하였는데 정리하는데도 퍽 많은 시간이 소모 되었읍니다
카폐에 글을 올릴때 마다 느끼는 건데요 늦게 배운
컴퓨터도 다루기가 서툴어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 하지만 제 글을 즐겨 본다는 고정
팬이 있어 행복 하고요 감사합니다
어느새 11월도 몆일 남지 않았고 올 한해도 저물어 갑니다
마무리 잘 하시고 희망이 있는 새해를 맞이하시기 기도 하겠읍니다
일일이 누구라 이름을 대지는 못하여도 사진을 편집하면서 낮 익은 모든 분들께 부처님의 가피가
넘쳐 나시길....개심 합장() () ()
자료/문화재청, 한국사찰의편액과주련, 한국의사찰벽화, 명찰순례전통사찰총서,
북한의사찰, 북한의전통사찰,다음지식백과 등에서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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